옛날 애인 / 유안진
봤을까? 날 알아봤을까?
무어라고 썼을까? / 유안진
간음 현장의 여인을 끌고 와 물었다 율법대로 돌로 치리이까? 말없이 손가락으로 땅바닥에 쓰고 일어선 예수는, 죄 없는 이부터 먼저 치라 고 하며, 다시 땅바닥에 썼다 1. 대단하지 않소, 혼자서도 간음할 수 있다니? 2. 같이 잔 남자는 왜 안 끌고 왔오? 3. 당신들은 재수 좋아 안 들켰을 거 아니요? 4. 당신들 딸이라면 어떻게 하겠오? 몇 번이 정답이었으면 좋겠습니까?' 서울살이 / 유안진
서울 천리를 와서 가랑잎 하나 줍다 가을 타고 싶어라 / 유안진
벤치에 낙엽 두 장 열이레 달처럼 삐뚜름 멀찍이 앉아 젖었다 말라 가는 마지막 향기를 나누고 있다.
가을 타는 남자와 그렇게 앉아 달빛에 젖은 옷이 별빛에 마를 때까지 사랑이나 행복과는 가당찮고 아득한 남북통일이나 세계평화 환경재앙이나 혤리혜성을 까닭 모를 기쁨으로 진지하게 들으며 대책 없이 만족하며 그것이 고백이라고 믿어 의심 없이 그렇게 오묘하게 그렇게 감미롭게.…
은발이 흑발에게 / 유안진
어제는 나 그대와 같았으나 내일은 그대가 나와 같으리라.
계란을 생각하며 / 유안진
밤중에 일어나 멍하니 앉아 있다
남이 나를 헤아리면 비판이 되지만 내가 나를 헤아리면 성찰이 되지
남이 터뜨려 주면 프라이감이 되지만 나 스스로 터트리면 병아리가 되지
환골탈태(換骨奪胎)는 그런 거겠지.
둥근 세모꼴 / 유안진
비트겐슈타인만큼 펄펄 끓는 정오 캔터키 프라이드 인간이 되는 중이다 메밀베개 베고 엎어졌다 일어났다 시원해질까 하고 메밀꽃 메밀꽃 하는데 이효석의 메밀밭이 제 발로 달려온다 까만 세모꼴 속에 시침떼고 들어앉은 동그랗고 하얀 알갱이까지 메밀국수 메밀묵 메밀나물까지 군침 돌더니 이마머리 자욱 핀 메밀꽃밭으로 비트겐슈타인의 ‘오리-토끼’가 뛰어온다 삼복 여름-메밀밭.
운명, 조롱당하다 / 유안진
콩 심은 콩 밭에서 팥을 더 추수한다 뱁새가 황새를 앞질러서 날고 있다 인삼 밭에는 민들레가 더 무성하다 통쾌한 21세기 팥으로 매주 쑤고, 황새보다 뱁새, 인삼보다 민들레래.
시간 / 유안진
현재現在는 가지 않고 항상 여기 있는데 나만 변해서 과거過去가 되어가네.
한국남편 / 유안진
에덴동산이 한국 땅에 있었다라면
안타깝다
아담이 한국 남자였더라면 절대로 아내 말을 듣지 않았을 텐데.
어머니의 아버지 손 / 유안진
늘 두 손에 나눠 쥐고 주셨지 “이건 아버지가 보낸 거, 이건 내가……” 정말로 그런 줄 알았다
램브란트의 ‘돌아온 탕자’에서 탕자를 껴안은 아버지의 두 손이 남자 손과 여자 손인 걸 알고서야 엄마의 한 손도 늘 아버지 손이었음을 엄마이자 아버지였던 내 어머니 하느님아버지도 어머니신 줄 비로소 알았다.
말 되게 말 안 되게 / 유안진
먹기 싫으면 밥이 코자고 싶어한다 하고 찾아도 없는 양말은 그네 타러 놀이터에 갔다는 세 살 손자의, 물활론적 생각과 전문식電文式 화법은 초문법적 탈문법적 거꾸로 어순에 과감한 생력이다 세 살 때가 시인 나이, 말도사다.
벌초, 하지 말 걸 / 유안진
떼풀 사이사이 패랭이 개밥풀 도깨비바늘들 방아깨비 풀여치 귀뚜라미 찌르레기 소리도 그치지 않았는데 살과 뼈를 녹여 키우셨을 텐데
다 쫓아버렸구나 어머니 혼자 적적하시겠구나
안경알만 바꿨는데 / 유안진
물속에는 물고기들이 날아다니고 허공 속에는 새들이 헤엄쳐 다닌다 나 또한 물과 허공 사이를 물구나무서서 다닌다
질겁하고 달려가 따졌더니 안경점 주인은 고래고래 삿대질이다 제대로 똑바로 잘 보이게 주문했지 않았느냐고.
미완에게 바치는 완성의 제물 / 유안진
까마귀 울음 두 점 떨구고 간 된서리 하늘아래 꽃필 가망 전혀 없는 구절초 봉오리 위에, 떡갈나무 잎 떨어졌다, 빗나갔다 또 한 잎 떨어졌다, 또 빗나갔다 다른 잎이 떨어져 반만 덮였다 또 다른 잎이 떨어져도 덜 덮였다 어디선가 한 잎 날아와 다 덮였다 도토리 빈 깍지, 저도 뛰어 내렸다 바람불어도 날아가지 않겠다.
업적 / 유안진
산으로 갔는데 강이었고 바다로 떠났는데 사막에 와 있었다 내가 가장 나다워질 수 있는 훗날 거기 찾아 거꾸로 로꾸거로 잘팡질팡 반세기 매미의, 귀뚜라미의, 알프래드 드 뮈세의 평생업적이 울음이었다 해서 헤매임도 업적이 되나요?
아직도 꿈꾼다 / 유안진
바다로 떠나는 새끼연어들을 새끼붕어들도 뒤따라간다
기러기 떼와 함께 까치 몇 마리도 시베리아로 떠난다 피서를 즐기려고
제비 한 마리가 참새들과 나란히 전깃줄에 앉아 가을볕을 쬔다 텃새가 되려고
서리 허연 가지 사이 개나리 철쭉꽃이 드문드문 피었다 겨울꽃이 되려고
가마우지 새는 물 속을 헤엄치고 싶어했고 날개를 꿈꾸던 다람쥐는 하늘다람쥐가 되었으니까.
내가 나의 감옥이다 / 유안진
한눈팔고 사는 줄은 진즉 알았지만 두 눈 다 팔고 살아온 줄은 까맣게 몰랐다 언제 어디에서 한눈을 팔았는지 무엇에다 두 눈 다 팔아먹었는지 나는 못 보고 타인들만 보였지 내 안은 안 보이고 내 바깥만 보였지
눈 없는 나를 바라보는 남의 눈들 피하느라 나를 내 속으로 가두곤 했지
가시 껍데기로 가두고도 떫은 속껍질에 또 갇힌 밤송이 마음이 바라면 피곤체질이 거절하고 몸이 갈망하면 바늘 편견이 시큰둥해져 겹겹으로 가두어져 여기까지 왔어라.
유안진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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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나브로 원문보기 글쓴이: Sim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