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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엔들 생각했으랴?
119 구급차를 타고 거리를 달리게 될 줄을...
병상에서 깁스한 다리를 베개위에 올려 놓은 채 창밖에 떨어지는 함박눈을 하염없이 바라볼 줄을...
2010년 12월 11일 토요일 아침 8시경,
부엌으로 향하면서 놀토이니 잠을 더 자라고 권유하는 내자의 말을 귓전으로 흘리고 침대에서 나왔다. 중학교 동창회날이라는 가벼운 흥분이 눈을 말똥말똥하게 만들어 더 이상 잠이 올 것 같지가 않다. 갑자기 급한 요의(尿意)를 느끼며 신문을 가지러 서둘러 현관으로 갔다. 화장실에서 신문을 보려는 생각에서다. 그런데 아뿔싸~ 너무 서둘렀던 것일까? 가속도가 붙은 발이 현관에 있는 신발에 닿자마자 미끄러지면서 몸이 앞으로 쏠리다가 반사적으로 다시 뒤로 쓰러졌다. 정강이에 뜨거운 기운이 흐르면서 “앗”하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너무나 순간적이어서 어디에 부딪쳤는지조차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오른쪽 무릎 아래 정강이에 살갗을 뚫고 나오지는 않았지만 불거져 나온 뼈가 보였다. 나의 고통스런 신음 속에 “아이구 이를 어째” 울먹이는 내자의 소리와 “ 아빠가 다쳤어요. 어서 와 주세요.” 119 구급차를 부르는 딸의 다급한 소리가 교차되면서 꿈속인양 아련히 들려왔다. 모든 것이 무너지고 있었다. 학교에도 교육계획서 제작이라는 초미의 일이 쌓였거니와 연말이라 주말마다 예정되어 있는 행사들. 겨울 방학 중의 달콤한 여행 계획들. 모든 것이 비누방울 되어 하늘로 날아갔다.
가족과 함께 119 구급차를 타고 들어선 곳은 보라매병원 응급실. X-ray 촬영 결과 오른쪽 무릎 정강이와 무릎 바로 아래 부분, 그리고 발목 윗부분의 뼈가 부러졌는데 수술을 최소한 두 번은 해야 할 것 같다는 의사의 진단이 나왔다. 어떻게 현관에서 그렇게까지 다칠 수가 있을까? 모든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점이다. 기다리는 사이에 병실이 생겨서 본관 6502실로 들어섰다. 먼저 온 환자들이 다리에 붕대를 칭칭 동여 매고 카에 누워 들어서는 나를 무표정하게 맞아 주었고, 갈아입은 환자복은 보라매병원에서 환자생활이 시작되었음을 알려주었다. 3일 후인 다음 주 화요일이 수술날짜로 잡혔다. 아~ 얼마나 고통스럽고 지루한 날들이 될 것인가? 동창생들이 삼각지 국방회관에서 즐거운 파티를 하고 있을 시간에 나는 병상에 누워 고통과 싸워야 하다니... 동창회에 참여했던 몇몇 친구들로부터 왜 오지 않느냐는 전화가 왔지만 함께 어울리지 못하는 쓸쓸한 마음을 어찌하랴.
입원 다음날 오후에 중학교 동창회장과 멀리 울산에서 온 친구들이 문병을 했다. 생애 최초의 문병객을 맞이한 것이다. 이후에 초등과 중학교 카페에 입원 사실이 알려지면서 문병 오는 친구들이 줄을 이었으니 미안하고 감사할 따름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쾌유를 바라는 봉투와 더불어 아름다운 꽃과, 토마토와 귤, 치킨과 맥주, 아이스크림, 그리고 많은 음료수 박스 등 다양한 먹거리가 쌓여갔다. 간호하던 딸이 병원에서 살찌겠다고 걱정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일일이 열거하지는 못하더라도 직접 방문하거나 또는 멀리서나마 전화로 고통을 보듬어 준 친구들에게 마음을 담아 감사드린다. 동료 교사들과 친목회원들도 시시각각으로 문병을 왔다. 어떠한 고통이 다가올지라도 주위에 함께할 수 있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마음 든든하다.
65동 2호실은 5인실로 환자들이 2,3일 간격으로 수시로 입원하고 퇴원하며 들락날락했다. 축구를 하다가 다친 사람, 산에 올라갔다가 바위에서 떨어진 사람, 교통사고를 당한 사람, 갖가지 사연을 가진 환자들과 생활하는 사이에 점차 병실 생활에 익숙해져 갔다. 동병상련의 이 환자들은 서로 살가운 정을 나누며 하루하루를 이어 갔다. 퇴원한 환자들도 틈만 나면 병원에 들러 인사를 나누기도 했으니 고통을 함께 한 사람들의 정이 그런 것이다.
특기할만한 환자가 있다. 나의 맞은편 자리에 있는 63세의 김기철씨. 중앙선을 넘어 온 차와 정면충돌하여 고관절을 크게 다쳤다는데, 충돌하는 순간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키는 바람에 가슴이나 머리를 다치지 않아 살았다고 술회한다. 약장사로서 손색이 없는 언변을 지닌 그는 병실을 잔잔한 웃음이 돌게 하고, 틈만 나면 전화로 사업을 지휘한다. 녹용 같은 약재도 그에게서는 절반 값이면 구할 수 있다나? 한 달 넘게 병실을 지키고 있는 방장의 역할을 톡톡히 하며 그 병실에 있는 누구와도 끊임없이 대화를 나눈다. 위문 온 친구가 선물한 조정래씨의 장편소설 ‘허수아비춤’이라는 책에 파묻혀 지내는 나와는 대조적이라고나 할까? 그는 자기도 중증 환자이면서 휠체어를 타고 사경에 처한 처남을 위문하느라고 다른 병원까지 다녀 온 의리파이기도 하다.
병실에서 나는 가족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애였다. 뼈가 부러졌음에도 불구하고 뼈를 맞추고 붕대를 감아 놓은 후에 통증은 별로 없었지만, 다친 부위가 붓지 않도록 다리 부위를 높이 해야 하는 바람에 식사와 뒤처리를 모두 누워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식후에 배설의욕을 느끼고 앞뒤로 대소변기를 위치시킨 후에 “끄응” 힘을 주었다. 그런데 침대 여기저기서 동시에 “끄응” 소리가 들려오지 않는가? 환자들이 용변 보느라고 우연히 동시에 용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병실 생활에서 대소변 볼 때가 가장 힘들다. 자리에 누운 채 중력과 반대되는 방향으로 쏘아대는 오줌은 좀처럼 나오지 않아 안간힘을 써야 한다. 방광은 부풀어 오르는데 배설이 되지 않는 고통은 대단하다. 그래서 혹자는 성욕, 식욕, 수면욕과 더불어 배설욕을 인간의 4대 기본욕구에 포함하기도 했던 것이리라. 시중을 드느라고 낮에는 딸이 와서 당번을 서고 밤에는 퇴근한 내자가 와서 시중을 들면서 병실에서 함께 생활을 했다. 한 사람이 입원하니 가족 전체의 삶이 균형을 잃는다.
나의 병상은 창가에 있다. 아침이 되어 창을 가리고 있던 블라인드를 들어 올리면 통유리로 막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겨울의 서늘한 기운이 뺨에 와 닿으며 맞은편에 있는 신관 건물을 보여준다. 이때가 가장 좋다. 지루한 밤의 고통이 지나고 하루의 희망이 밝아오는 이 아침이 말이다. 비록 건물에 가려 진짜 태양은 보지 못하고 신관 유리에 반사된 햇빛을 쪼일 뿐이지만 그 따뜻한 햇빛이 비춰줄 때에 나는 새로운 에너지와 희망을 얻는다. 이 병실로 올라오기 위해 희망관 엘리베이터를 타듯이 나는 이 햇살을 타고 희망의 나라로 간다. 언젠가는 건강한 다리로 달릴 수 있는 그 날을 꿈꾸며 말이다. 병실에서는 낮보다 밤이 견디기 어렵다. 하루 내내 침대에 누워 지내면서 수시로 잠자기 때문에 밤에 잠이 잘 오지 않고, 밤에는 고통이 더 심하게 느껴져서 많은 시간을 눈을 뜬 채로 아침이 오기를 기다린다. 고통스러운 밤이 지나고 반사되는 햇빛이나마 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어느 날 블라인드를 걷어 올리니 눈앞에 나타나는 은빛세계. 동요에서처럼 하늘에서 선녀님들이 새하얀 함박눈을 뿌려주고 있다. 평소에도 휘날리는 눈을 보면 마음이 들뜨기도 했지만 병상에서 보는 눈은 또 다른 감회를 일으킨다. 티없이 맑고 깨끗한 눈이 내리는 모습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다. 모든 고통이 눈처럼 떨어져 내리고 희망이 시방세계를 감싸 안는다.
화요일로 예정되었던 수술이 목요일로 연기되었고, 수술을 하기 전날인 수요일 나의 병상 앞에 있는 링겔 걸이대에 ‘금식’이라는 표지가 걸렸다. 수술 전날 밤부터 일체 금식이다. 물도 마시지 못한다. 그런데 ‘금식’이라는 글자를 보니 평소보다 더 시장기를 느끼는 것은 왜일까? 필기구로 ‘ㅁ’을 ‘ㅂ’으로 바꾸어 버릴까 생각하다가 유치한 것 같아서 그만 두었다.
드디어 수술하는 12월 16일, 목요일이 밝았다. 기다려지던 수술 날짜가 막상 다가오니 슬금슬금 일어나는 두려움. 의사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다. 병원 용인들이 끌고 온 카 위에 누워 수술환자에게만 제공되는 새하얀 시트천을 덮은 채 수술실로 향했다. TV에서만 보았던 모습이 나에게 실제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가족들을 수술실 밖에 남겨둔 채 나는 카를 타고 수술실 안으로 운반되었다. 집도의인 부원장 강승백 교수님과 보조의 세 명 등 4명의 의사가 나를 맞았다. 그들과 나 사이에 볼 수 없게 막이 쳐지고 척추에 마취 주사를 놓아 반신 마취가 되었다. 하반신은 마취가 되었지만 상반신은 움직일 수 있었고 의식도 명료했다. 마취효과로 고통은 느끼지 못했지만 다리에서 망치질하는 소리와 나사못 박는 소리가 들려오자 공포가 밀려들어 나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을 찾았다. 뭇 중생들의 소리를 관찰하고 고통을 구제해 준다는 대자대비한 보살님 말이다. 눈을 감았다. 하늘에 광명이 햇살처럼 번지더니 신비로운 멜로디와 함께 내가 가끔 찾곤 했던 약수사 미타전의 관세음보살님이 용을 타고 강림을 했다. 그리고 백의를 걸친 네 사람의 몸으로 분신을 하고 나를 둘러싼다. 의사의 몸으로 나툰 것이다. 여러 사람의 손과 눈이 생명을 살리기 위해 노력하니 바로 천수천안이 아닌가? 관세음보살은 제도하고자 하는 대상에 따라 여러 가지로 몸을 나툰다고 한다. 때로는 부처로, 때로는 아내로, 때로는 친구로, 여러 모습으로 나타난다니 우리 주위의 모든 사람들이 구고구난(求苦求難) 관세음보살일 수가 있는 것이다. 거의 2시간에 걸친 수술이 끝나고 마취가 풀리기 시작했다. 한 여의사가 오른쪽 고관절에서부터 허벅지를 거쳐 무릎쪽으로 내려가며 손가락으로 눌러댄다. 감각이 느껴진다. 시간이 흐르면서 드디어 발끝까지 감각이 살아났다. 그런데 하반신의 마취가 풀린 후에도 여전히 마취가 풀리지 않은 한 곳이 있었으니 바로 보물1호인 남성 심볼이다. 손을 뻗어 만져 보았지만 풀 먹인 솜처럼 늘어진 채 감각이 살아나지 않는다. 위치상으로 볼 때는 하반신의 어느 부위보다도 먼저 마취가 풀려야 하건만...
수술이 끝나고 다리를 붕대로 칭칭 동여 맨 상태로 회복실로 나와 여전히 카 위에 누운 채로 훈훈한 열기가 계속 뿜어져 나오는 연통을 허리에 끼었다. 더운 기운이 몸 곳곳으로 퍼져 나가며 나른한 기운이 전신을 감싼다. 수술 후 몸이 회복되며 방귀가 흘러나온다. 대부분의 환자들은 회복실로 옮겨진 후에 4,50분이 지나면 병실로 돌아가지만, 나는 담당의사가 너무나 바쁜 나머지 병실로 옮기라는 오더를 내리지 못한 탓에 거의 3시간 반이나 회복실에 머물러 있어야 했다. 덕분에 나는 따뜻하게 충분한 휴식을 취했으나, 회복실 전광판에 나타난 내 이름을 보고 기다리던 내자가 결국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회복실 밖으로 나온 간호원에게 내가 회복실에 있는지 물어 보았단다. 그 간호원이 회복실 안에 남자는 없고 할머니 한 사람만 있다고 말하니 내자가 얼마나 놀랐을까? 내자가 확인을 요청했고 나를 발견한 간호원이 담담의사의 오더를 받아 나를 병실로 보내 주었으니 수술실에 들어간 지 거의 6시간 만에 회복실에서 나온 것이다. 병실에 돌아오니 간호원이 가스가 나올때까지는 어떠한 음식도 먹거나 마시면 안된다고 주의를 준다. 그러나 회복실에서 이미 가스가 나왔다고 했더니 간호원과 주위 환자들이 놀라면서 축하를 건넸다. 방귀끼고 축하받는 것은 아마 처음이리라. 수술 후 보통 7,8시간은 지나야 가스가 나온다는데 회복실에서 한시간 만에 가스가 나왔다니 놀랄일인가 보다. 그런데 가족들이 놀라지 않고 웃는 것은 나의 방귀 실력을 인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수술한 날 밤은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마취가 풀리면서 수술한 오른쪽 다리의 고통은 참기 어려웠고, 붓지 않도록 베갯잇에 넣어 다친 정강이 부위에 올려놓은 차가운 얼음 때문에 무릎이 끊어지는 느낌이다. 악마구니들이 떼지어 덤벼들고 수많은 불개미들이 온몸을 물어뜯었다. 한숨도 눈을 붙이지 못하고 끙끙대며 밤을 세웠다. 견디다 못해 링겔병을 통해 진통제를 투여 받았지만 그 순간 뿐 뜬눈으로 밤을 고스란히 세웠다. 여태까지는 다른 사람의 문병을 가더라도 환자의 고통을 실감하지 못했지만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그 고통을 이해할 수가 있었으니 ‘백문이 불여일견’이라는 말이 이래서 나온 것 같다. 수술 다음 날 석고실에 가서 깁스를 했고, 그 다음날은 깁스를 한 의사에게 다시 가서 발목 부분과 무릎 부분에 전자톱으로 깁스를 약간씩 잘라냈다. 소독을 하기 위해 뚫는 구멍이란다. 그런데 전자톱으로 깁스를 잘라내는 순간이 그렇게 오싹할 수가... 혹시 실수하여 전자톱을 조금 더 깊이 눌러대면 발목이나 무릎이 절단될 것만 같다. 휠체어 뒤에 서있던 딸이 두 손으로 내 눈을 가려주었다.
23일(목) 퇴원을 했다. 11일날 입원했으니 13일간 병원 생활을 한 것이다. 그동안 정성스럽게 돌봐준 의사, 간호원들과, 바쁜 일과에도 불구하고 차를 가지고 와서 집까지 편안하게 퇴원시켜준 친구에게 감사드린다. 이제 퇴원한지 나흘째로 접어든다. 크리스마스와 연말이 되어 문자들이 날아오고 있지만 예년과 달리 나와는 관계 없는 크리스마스이고 연말이다. 그러나 희망을 가진다. 다른 병과 달리 시간이 가면 해결이 되는 것이다. 한 동안 목발을 짚는 불편을 감수해야겠지만, 내년 3월 경이면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과 더불어 대지에 힘껏 발을 딛게 될 것이다.
나에게 닥친 이 시련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마도 사고가 없었더라면 등한시하기 쉬웠을 건강에 더 신경을 써서 건강한 삶을 유지하라는 경책이 아니었을까?
금강경 제16분 능정업장분(能淨業障分)에서 시련은 무수한 과거 세월에 지은 업장이 해소되는 것이라고 하니 생각 여하에 따라 이번 사고가 나쁜 일만은 아닌 것 같다. 언젠가는 나에게 다가올 일이 해소되는 것이다. 옛날 어느 노스님은 숙세의 업장을 해소하기 위해 전생의 원수를 찾아가 그의 칼날에 스스로 목숨을 바치지 않았던가?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나는 것처럼, 선을 행하면 좋은 과보를 받고 악을 행하면 나쁜 결과가 따르는 인과(因果)의 법칙이 변함없는 진리일진데, 사고를 방지하고 행복한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악을 멀리하고 선을 행해야 하리라. 제악막작 중선봉행(諸惡莫作 衆善奉行)은 우리가 나아갈 길임에 분명한 것 같다.
첫댓글 고생했다는 위문 말보다
너무 웃어가꼬 턱이 다아 아푸다
본인이야 오죽 하겠나마는 글을 보는 나는 재미 있는
소설 한권 봤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미안타 너무 웃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