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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원할아버지의 遠孫이 남기는 글중 일부임
여우가 죽을 때엔 머리를 자기가 살던 굴 쪽으로 바르게 둔다는 뜻인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을 익히 들어봤을 것이다. 한갓 미물에 지나지 않은 들짐승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인간임에랴!
그런데 세상 돌아가는 형편이 무한경쟁체제 하에 다변화 핵가족화 추세이고 보니 우리나라 고유의 미풍양속인 조상을 공경하고 추모하며 조상의 음덕과 보살핌을 귀히 받들어오던 숭모崇慕사상이 퇴조 현상을 보이고 있다. 사정이 이쯤되고보니 기껏 한다는 말이,
"그런 구식 케케묵은 소리 말아요. 나 먹고 살기도 바쁜 판에 조상이 다 뭐다요! 조상과 일가친척이 나한테 뭐 해준 거 있어요?" 이거나, 아니면 "난 시방 이렇게 잘 나가는 사람이라서 오라는 데도 많고 가진 돈도 많아 다 쓰고 죽기에도 바쁜데 고리탑탑하게시리 뭐, 어째? 새삼스레 조상, 문중 타령이라니, 이 봐요, 당신, 넘 웃겨! 혹시 코메디언 아녀?" 하기도 한다.
일가친척 가운데 이런 무개념한 자들이 있다면 조상님들이 앞다퉈 나도 할 말이 있다며 이렇게 따끔하게 혼내시며 한 수 깨우쳐 주실 것이다.ㅎㅎ
"이 짐승만도 못한 놈! 뭐, 조상이 다 뭐다요? 그럼, 네가 하늘에서 떨어졌냐, 땅에서 솟았냐. 조상이 너한테 뭐 해준 거 있냐고? 온 세상보다 더 귀한 널 낳아 주었다. 또한 좋은 일에는 남이요, 궂은 일에는 일가라 했거늘...... 제 뿌리도 모르고 일가친척도 안중에 없는 이 싸가지 없는 놈!"
요즘 미국과 영국에서는 인터넷으로 자신의 뿌리와 선조의 흔적인 족보 찾기가 유행이라고 한다.
"왜 지금 와서 하필 족보냐구요? 내가 누구인지, 어디로부터 왔는지도 모르고 살 순 없지요. 더구나 온갖 인종의 이민자들이 뒤죽 박죽인 미국에서라면요." (수잔 모란)
"가족의 가치를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자신의 족보에 대해 관심을 가질 겁니다." (제임스 트러스콧 제퍼슨 종친회장)
"나 자신을 아는 일입니다." (미국 족보 전문가 협회 인터넷 사이트)
물질주의가 만연하고 거대경제로 발전한 이들 나라가 이제 정신적 가치에 촛점을 맞추고 있는 것이다. 물질이 많으면 많을수록 만족이 아닌 더 큰 욕망을 끌어 들인다. 물질로 인한 가족 붕괴와 고립에 환멸을 느낀 이들이 가족에게서 행복의 열쇠를 찾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과거를 아는 것이 미래를 바라보는 데 큰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요지경 속이나 다름없는 세상이 아무리 요상하게 돌아간다 해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결코 잊어선 안 될 일이 있다.
첫째, 조상님들을 공경 추모하고 그 분들의 얼을 본받아 세상에 기여하는 일이고,
두번째“형제란 어려울 때 도우려고 태어난 사람” 임을 명심하여 서로 돕는 일이다.
조상님을 공경 추모하는 것은 가문의 영광된 아름다운 일이며, 형제끼리 서로 돕는 것은 부모를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이다. 부모가 산전수전 다 치르고 나서 이 세상 하직할 때 딱 한 마디 당부하는 말씀이 뭘까? 이런 말씀 아닐까?
“형제끼리 우애하라!”
“서로 사랑하여라!”
“도와주어라!”
“한 핏줄임을 잊지 말라!”
“가문을 욕되게 하지 말라!”
그래서 우리는 뿌리를 찾을야고 몸부림친다..
우리가 우리의 뿌리를 제대로 알아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정체성을 찾고, 조상님들을 공경 추모하며, 한 핏줄끼리 서로 아끼고 상부상조하는 아름다운 가풍을 다시 세우고자 이 소책자를 엮게 되었다.
규정공糾正公 현鉉 선조님의 후손들이 지난 670여 년간 온몸으로 살아낸 삶의 흔적을 한눈에 살펴 볼 수 있게 되었으니 기쁘지 아니한가!
앞뒤 좌우 안 보고 오직 제갈길만 바쁘게 오가는 개미처럼 돈과 명예, 자식과 건강에만 골몰하지 말고 디지털 시대에 고독을 느끼는 만큼 가족과의 유대를 중시하고, 물질적인 풍요만큼 정신적 가치와 유산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기를 빈다.
나의 깨다름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 가운데 아무도 10대조 통덕랑(정5품 상上. 서기관급. 4급공무원) 존도存度(자字. 수오守吾. 1626~ 1704) 윗대 조상님들에 관한 정보를 자세히 모르고 있었다. 시조 혁거세의 45대손 규정공糾正公 현鉉 후손인 것만은 확실히 알고 있는지라 저마다 자신있게 "나는 규정공파다"하고 말할 뿐이었다.
조상님들의 내력에 관심 있는 아주 극소수 사람을 제외하곤 지금도 '규정공 이하 조상님들의 내력이야 뭐 별 거 있겠어?’ 하는 식이다. 나도 예전에 그랬었다. 조상님들에 관한 정보를 공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족보를 소장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설령 소장하고 있다 해도 족보 보는 법을 모르거나, 표시된 대목에서 아는 이름자만 겨우 더듬더듬 읽고는 곧 덮어버리기 일쑤이니 어떻게 조상님들의 내력을 자세하게 알아낼 수 있단 말인가.
규정공 26세손인 나는 규정공 이하 조상님들에 좀더 소상히 알고 싶었다. 그리고 여력이 된다면,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밀양박씨의 시조 언침 선조님을 넘어 박씨의 시조 혁거세까지도 다루고 싶다.
제막식 행사가 있고나서 마침 3개월간의 한가함을 얻었기에 밤낮으로 인터넷을 검색하고, 문헌을 찾고, 족보를 뒤졌다. 기왕 내친김에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다가 아침이 밝은 줄도 모르고 책상에 앉아 작업을 하는 날들이 많고 보니 치질이 도져 지독한 고통을 체험하기도 했지만, 조상님들의 영원한 안식과 후손들의 전도양양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희생 제물 삼아 하늘에 바쳤다.
나는 이 작업의 아웃풋 Output 을 책으로 엮을 생각이다. 2천여 년 전 조상님으로부터 현재의 나에 이르기까지 실로 방대한 내용이지만 소책자에 압축될 것이다. 호박 넝쿨 한 줄기를 제대로 잡아 당겨 크고 작은 호박을 모조리 손에 넣게 되듯이, 우리가 이것만은 꼭 알아둬야겠다고 생각되는 부분을 찾아내어 잘 편집한다면 읽는 사람이 단숨에 조상님들에 관한 정보를 충분히 공유하리라고 본다.
또한 나는 이 어렵고 딱딱한 내용을 아주 쉽게 써내려 갈 것이다. 가령, 도시 사람이라면 지하철 몇 정거장을 가는 시간에, 시골 사람이라면 농한기를 맞아 흥미롭게 읽고 조상님들의 내력을 훤히 꿰뚫어 볼 수 있게 말이다. 우리가 조상님들의 빛나는 위업을 알고 그분들의 얼을 본받아 옳고 바르게 잘 처신한다면 우리 후손들의 인생길을 올바르게 인도하는 좋은 이정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엿바꿔 먹은 족보
족보族譜는 성씨와 관련하여 빼놓을 수 없는 자료의 하나로 시조始祖에서 부터 역대 조상의 얼과 우리나라의 역사가 담겨져 있으며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람이 족보에 실려있어 나와 집안의 뿌리를 알 수 있는 한 집안의 역사서이다.
족보 편찬 및 간행의 절차는 이렇다. 특정 인물의 발의에 의해 족보의 간행이 제안되면, 통문通文을 돌려 문중의 대표자들이 시조始祖의 재실齋室 등 일정한 장소에서 종회宗會를 개최하고 이를 협의한다. 종회에서 족보를 편찬·간행할 보소譜所와 업무를 담당할 도유사都有司 및 유사有司가 결정되고 유사들의 업무분장이 확정되면, 유사는 맡은 임무에 따라 각 파派 내 가족의 대표자들에게 족보의 간행 사실을 알리고 족보에 수록될 해당 내용을 기재한 보단(자)譜單(子)를 제출토록 요구한다. 이렇게 해서 보단이 수집되면 이를 기존 족보 등 관련 자료와 대조하여 사실 여부와 변경 내용을 확인한 후, 서·발문을 청탁 수합하고 조판 방식을 확정하는 등 본격적인 족보의 편찬과 간행에 들어간다. 족보는 30년 단위로 수정·증보하는 것이 보통인데, 발간시 소요되는 경비는 대개 예전禮錢(보단譜單을 제출하는 가족별로 수록된 인원수를 감안하여 납부하도록 책정된 금액) 에서 충당하게 된다. 족보 책판의 판각板刻, 보지譜紙의 조달 등은 보소譜所 부근의 사찰을 이용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며, 몇몇 유력 가문의 경우 주변 고을의 수령, 친분과 재력이 있는 인물들로부터 예전禮錢을 지원받기도 한다. 족보의 편찬을 주도하는 사람이 고을 수령인 경우가 많은 것도 족보의 발간에 많은 재원이 필요한 사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족보의 간행이 완료되면 만들어진 족보를 배포하고 간행을 마무리한다.
이렇게 해서 간행된 족보는 옛날부터 집안의 보물처럼 소중히 간직하고 이를 대할 때는 상위에 모셔놓고 정한수를 떠서 절을 두 번 한 후에 경건한 마음으로 살아 계신 조상을 대하듯 하였으며 자신의 목숨보다 중요하게 여겼다. 이처럼 소중하게 여겨 온 '피의 기록이며 혈연의 역사'인 족보가 해방 이후 서양문물의 유입으로 가치관과 행동양식이 바뀌고, 핵가족화가 되면서 봉건사상의 유물로만 생각하고 도외시하는 경향이 일고 있다.
어떤 골동상한테 내가 들은 얘기로는 어느 집 어른이 죽자, 며느리가 기다렸단듯이, "어휴~ 구질구질해, 아저씨, 이것 몽땅 가져가세요," 하고 마당으로 냅다던진 고서들 속에서 족보도 나오더란다.
어려서 학교 다닐 때 국어책을 달달 외워 선생님들의 이쁨을 한몸에 받았다는 나의 모친의 증언에 의하면, 고초(고추) 당초唐椒 보다 매운 시집살이하면서 분명히 봤던 족보가 어느 날 갑자기 없어져 한바탕 난리가 났었는데 알고보니 철딱서니 없는 시댁 도련님이 엿바꿔 먹어버렸더란다.
또 내가 태어나자 보성 임찬판댁(증손자 임진영이 살고 있는 그 가옥이 전라남도 문화재 152호이다) 외하네가 거금을 들여 사주장이로부터 받아 온 나의 평생 사주팔자를 나의 모친께서 오동나무 앞다지에 고이고이 간직했었드랬는데, 세상에, 속창아리 없이 그 한지 문서까지 또 돌라다가(훔쳐) 빳지(딱지)를 만들어 땅에 치고 놀았더란다.
"니 손자뻘 주선柱宣이도 사시 수석 합격하고 지금 국회의원 두번 하고 있는디, 얼굴 네모 반듯하고 총명한 니가 판검사를 못한 건 그 때 그렇게 부정을 타서 그런지도 모르제."
하여튼 나의 모친처럼 순진한 시골 사람들은 판검사 자식 두는 게 지상 최대의 꿈이라니까. 엄니, 시방 나처럼 달랑 볼펜 한 자루로 이렇게 가문을 몽땅 왕창 빛내주고 있는 판검사 있으면 당장 나와보라 해요. ㅎㅎ...
3년 전 항일애국지사유묵전시회 끝나고 검사를 20여 명씩이나 거느린 순천지청장이 내게 이런 부탁을 했다닌까요.
"박찬 선생님, 언제 시간 좀 내서 우리 검사들 교육 좀 시켜주세요. 아까 애국지사님들 유묵 설명하신 그대로요! 요즘 검사들 가운데 역사 의식도 없고 제 조상도 모르고 ... 암튼 한심하기 짝이 없는 검사들도 더러 있어요. "
내가 ‘취도’ 윗대 조상님들에 관한 정보를 수집한 데에 세 가지 사실이 크게 기여했다. 첫째, <밀양박씨규정공파세보>요, 둘째, 인터넷 웹 사이트 종박닷컴JongBhak.com 이며, 셋째, 숙민공 묘 둘레석에 새겨진 글씨다.
<밀양박씨규정공파세보>는 총16권으로 1956년 규정공25세손 상규商圭가 발행한 것으로 되어 있다. 크기는 반곽 35.5×24cm이고, 앞뒤 표지는 분홍색 물감을 들인 한지로 장책粧冊되어 있으며, 표제는 흰색 제첨題簽을 붙이고 그 위에 <밀양박씨규정공파세보>라고 묵서墨書되어 있다. 한지韓紙에 연활자鉛活字 인쇄본으로 보도譜圖는 16층 횡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2권부터 15권까지 규정파 소파들의 계보가 기재되어 있다.
제2권 : 간성공파, 영호군공파, 절도사공파, 기백공파
제3권~제5권 : 숙민공파
제6권 : 숙민공파, 연안공파
제7권 : 김제공파, 부정공파, 월봉공파, 부사공파
제8권 : 별좌공파, 참군공파, 화록공파, 경력공파
제9권 : 전한공파, 충정공파
제10권 : 도사공파, 송월당공파, 문도공파
제11권 : 문도공파
제12권 : 문도공파, 주부공파, 해백공파, 승지공파
제13권 : 공간공파
제14권 : 공간공파, 청제공파
제15권 : 참판공파, 송당공파, 충헌공파
이상 27개 소파 가운데 숙민공파 보성 유사有司는 병주炳注, 갑규甲圭, 종옥鍾玉이고, 단주單主는 병원炳元, 막동莫同, 갑규甲圭, 재순在淳, 영규永圭, 종문鍾玟 등이다.
밀양박씨규정공파세보
이 족보는 10여 년 전 내가 한 골동상한테 구입하여 소장하고 있다. 내가 속한 규정공파 세보世譜(어느 한 파속派屬만의 계보系譜를 모아 엮은 족보)여서 혹시 이거 그 철딱서니 없었다던 숙부님이 엿바꿔 먹은 그 족보 아녀? 하고선 행여 아는 이름이 나올까 해서 몇 권 뒤적거리다 찾지 못하고 서가에 방치해 두었다. 그 당시엔 족보엔 '까막눈'이라서 '찾는' 법을 몰랐던 것이다. 족보에서 나를 찾으려면 먼저 파명派名과 누구의 자손(후손)인지 알아야 하고, 또한 시조로부터 몇 세손世孫인지 알아야 하며, 집에서 부르는 이름(호적명)과 족보명은 다르므로 자신의 항렬자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걸 나중에 깨우치게 되었다.
현존하는 밀양박씨 족보 가운데 가장 오래된 족보는 1621년(광해13) 박안성이 충청감사 박계현의 도움으로 간행한 신유보辛酉譜이다. 그 이전의 족보는 임진왜란 와중에 멸실되었다. 그 뒤 1662년(현종 3) 박승건이 편집한 족보 1책이 호남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후손들이 풍산되어 은거하던 중에는 족보 제작이 없다가 숙민공의 신원을 보게 되자 1857년(정사년)에 낙촌공파 정사보가 발행되었다. 그 이후 한말과 일제강점기에 2~3회 정도 족보 간행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며, 나의 소장본인 1956년 판 족보 이후 1988년 판, 2000년 판이 간행되었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듯이, 묘역 조성 사업 이후 나의 관심과 열정은 오로지 나의 뿌리인 조상 찾기에 쏠려 있었다. 이 일은 사업에 투자하여 대박을 터뜨린 것보다 즐거웠고, 날이 갈수록 보물지도를 손에 쥔 것처럼 흥미진진했다.
여러분도 한번 시도해보라. '나의 뿌리 찾기'가 아주 보람있고 (rewarding), 빠져들게 하는(addictive) 취미를 넘어서는 실로 의미있는 작업이란 걸 곧 알게 될 것이다.
'알면 곧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은 아니다' (유한준兪漢雋 1732~1811). 이 말마따나 내가 이제야 조상님들을 알았으니 그분들을 곧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조상님들을 참되게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조상님들의 자료를 모으는 게 되니 이는 한갓 모으는 것이 아니라 이렇게 후세에 전해 줄 보감寶監으로 엮게 되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 인터넷 검색을 하다가 박종화 박사(영국 케임브리지大 박사. 국가생물자원정보관리센터장 )가 자신의 홈페이지 종박닷컴 JongBhak.com에 올린 ‘밀양박씨 규정공파’를 살펴보니 ‘취도’라는 이름이 눈에 띄었다. 우리나라의 바이오(Bio)계 수장首長이자, 세계적 석학인 그가 나와 세世가 동일한 숙민공 13세손이라 서로 반가운 마음으로 메일까지 주고받은 적이 있다.
나보다 6살 아래인 이분 역시 우리 규정공 문중을 팍팍 빛내주고 있으니 넘넘 존경스럽죠!. 근데, 난 뭐냐구요~ 이제 와서 다시 머리 싸매고 공부할 수도 없고...... 그러나 실망하지 말자. 각자 주어진 달란트가 따로 있는 법. 우리 엄니 한 맺힌 말씀마따나 여직(여태)까지 출세도 못한 나는 이게 달란튼가 봐. 여러분, 제 말 맞죠? ...... 그런디 어째 반응이 영 시원찮네잉~ . 그러거나말거나 언젠가는 쪼~께(조금) 알아줄 날이 오겄제, 스스로 이렇게 자위함시롱 눈치코치 봐감서 진도는 빼야제.
여보세요들, 이약(이야기)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옛말이 있는디 그래도 괜찮아요?...... ㅇㅎㅎㅎ 괜찮댄다. 그럼, 얼른 진도 나가야 쓰것네.
규정공 박 현
나는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수많은 책과 인터넷을 뒤져 조상님들에 관한 정보를 하나라도 더 수집하려고 애썼다. 이렇게 수집된 자료를 검증 편집하여 후세에 전함으로써 조상님들께서 영적으로 우리 후손들의 마음속에 사시면서 음덕을 베풀어 주시고, 또 우리 후손들은 조상님들의 영원한 안식을 기원하며 그 은혜와 공덕을 기릴 수 있다면 오죽 좋으랴!
혁거세의 45세손이자, 언침의 16세손인 현鉉(1253~1340) 선조님은 규정공파의 파조派祖로 고려高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규정司憲府糾正고려(高麗) 때 사헌부(司憲府)의 종3품 벼슬) 벼슬을 지내시고 태사太師(고려 때 정1품 관직)에 이르셨다. 청백리淸白吏로서 세간世間의 칭송을 받으셨으며 도학道學과 문장文章이 뛰어나셨다. 시호는 무열武烈이시다.
1367년(공민왕16)에 대사성大司成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1328~1396)과 대사간大司諫 박상충朴尙衷(1332~1375)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박현朴鉉은 청백리淸白吏로 인의仁義를 베풀고 충효忠孝의 사상을 널리 보급한 사람으로 가위可謂 동방도학東方道學의 조종祖宗이라 일컬을 만 합니다. 공의 높고 밝은 큰 덕과 가르침으로 말하면 그 업적이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1243~1306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도입한 고려 후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순흥(順興). 초명은 유(裕). '향'(珦)자가 조선 왕조 문종의 이름자와 같았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모두 초명으로 불렀다.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와 문헌공文憲公 최충崔沖(984년~1068년 고려의 문신 겸 학자이다)과 같이 높고 어지니 이들과 함께 숭의전崇義殿(고려 태조 및 공신들의 위?를 모신 사당으로 경기도 연천 임진강변에 있다)과 공자묘孔子廟에 배향配享하여 제사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 글을 읽으면서 나는 지증대사智證大師(824~882)가 입적했을 때 최치원崔致遠 (857년 ~ ?)이 한 말을 떠올렸다.
오호라; 별들은 하늘로 되돌아가고 달은 큰 바다로 빠졌도다
嗚呼 星廻上天 月落大海
그 높은 덕으로 세상을 밝게 비춰주시던 규정공 선조님께서 세상을 뜨시니 세상이 캄캄한 암흑 같았기에 '뜻있는' 사람들이 나서서 국가적으로 현양 추모하여 규정공의 정신을 이어가자고 건의했던 것이다.
공公의 묘는 잠주부岑州府 남쪽 40리 두매산杜梅山 아래 자좌子坐로, 지금의 장단군 장도면 두매리 성주동長端郡 長道面 杜梅里 聖主洞이나 실전失傳 하였다.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두응촌 선영과 전북 완주군 용진면 간중리 봉서동에 제단을祭壇을 설치하고 매년 3월 7일 제사를 올리고 있다. 또한 옥천 원덕사遠德祠, 고흥 숭양사崇陽祠, 장흥 세덕사世德祠(전남 장흥군 장흥읍 사안리 34번지. 규정공 이하 후손 23위 위패를 봉안한 사우祀宇이다. 061-433-0786) 경산 율산서원栗山書院에 위패를 모시고 향사를 받들고 있다. 배위는 미상이며, 독자 문유文有를 낳으셨다.(1956년 판 족보와 연안공파 카페엔 배위가 동래정씨 함지涵之의 따님으로 기재되어 있다.)
봉황이 알을 품다
앞에서 현鉉 선조님의 제단이 완주군에 있다고 했는데, 공의 4세손 침침(1342~1399)의 배위配位인 정경부인밀산박씨
(1343~1381)의 묘역을 말한다.
밀산박씨로 말하자면, 당신 생전에 몸소 보여주신 효성과 자애가 여성의 본보기요, 맑은 덕을 모두 행하셨으나 애석하게도 39세에 소천하셨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묘역은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형국, 즉 비봉포란형飛鳳抱卵形 대길지大吉地라서 호남 8대 명당 가운데 하나로 여겨져 왔다고 한다. 멀리서는 웅장한 3개의 산이, 가까이서는 봉황의 꼬리깃털처럼 생긴 산이 좌우로 각각 6개씩 뻗어내려 오다가 마지막 한 쌍이 둥그렇게 명당을 감싸고 있는데, 명당의 혈반穴盤이 넓고 평평하며 높으면서도 높지 않게 보인다. 옛 묘의 산도山圖가 규정공파 세보와 청제공파 세보(淸齊公: 심문審問 1408~1456 세종때 집현전 박사와 부제학을 지낸 강생의 셋째아들로 진도에서 태어났다. 성삼문, 하위지 등과 단종복위를 도모하였다. 1456년(세조2) 질정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오다가 의주에 이르러 성삼문 등 육신이 참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자살하였다.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에 게재되어 있는데, 실경 묘사에 더 충실한 청제공파세보 산도가 옛 그림에 보이는 봉황의 모습과 거의 일치한다는 점이다. 자세히 보면 정말 봉황이 알을 품고 있는 것처럼 보여 아름답기까지 하다.
밀산박씨의 묘역이 이처럼 아름답고 보기 드문 명당이라 과거에 이 자리를 몰래 차지하려는 자들이 나타났다. 우리 문중에서는 한동안 이 묘를 실전하여 애를 태웠었는데, 1838년 종호, 종효 등 후손 30여명이 이 일대를 샅샅이 뒤져 마침내 옛 지석誌石(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은 판석이나 도판. 조상의 계보, 생몰연대, 행적, 가족관계, 무덤의 소재와 방향 등이 기록되어 있다. 무덤 앞이나 옆에 묻혀있다.)과 옛 묘광墓壙(무덤 구덩이)을 찾아내고는 즉시 모두가 거기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면서 오랫동안 불효를 눈물로 씻었다.
이때 뜻밖에도 김씨 성을 가진 자가 나타나 시비가 붙어 멱살잡이와 고성이 오가던 중 밀산박씨 묘 전후 좌우에 투장偸葬(남의 산이나 묏자리에 몰래 자기 집안의 묘를 쓰는 일.)무덤이 무려 6~7총이나 있음을 밝혀냈다. 이 사실을 전국 제종諸宗들에게 고하자, 종중宗中의 의론이 크게 일어나 종인宗人들인 승지承旨 효묵, 도정都正 응신, 군수郡守 정진, 부사府使 홍진 등 80여 명이 관청에 청원하여 부동산 등기를 인정하는 증명을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1840년 규정공 18세손 준성準晟이 종인들의 협조를 얻어 옛 무덤을 일신하고 석물을 새로 갖춰 선문羨門(무덤의 문)을 지키게 한 뒤 제각을 세우고 묘위토墓位土(묘에서 지내는 제사 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경작하던 논밭.)를 장만하여 대대로 수호할 수 있게 했다. 그런데 앞서 얘기한 김총金塚의 후손이 처음에는 관청의 명령대로 평분平墳으로 두었다가 십수년만에 다시 소송을 걸어왔다. 관청에선 어찌 된 일인지 김씨의 손을 들어주었고, 봉호鳳鎬는 관청에 끌려가 곤장을 맞고 죽었다. 이에 박씨 제종들이 발끈 들고일어나자 부사府使 경진景鎭이 이 사건을 원점에서 다시 다루게 되었고 결국 김총을 예전처럼 평분으로 만들게 했다. 그 뒤 수십년이 지나 김씨 후손들이 김총의 유골을 수습하여 다른 곳에 이장함으로써 비로소 산송山訟 건이 일단락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밀산박씨의 묘소를 둘러싼 주산은 20만평, 안산은 5만평, 묘위토 및 봉서제 대지는 약 7천평에 이른다.
예로부터 우리 나라는 산천이 수려하여 슬기롭고 용감한 인재가 많이 나고, 명당이 많은 땅이라고 알려져왔다. 따라서 이웃 나라인 중국과 일본국의 질투도 심했다.
고려 초, 중국 지관인 호종단胡宗旦(고려 중기의 귀화인(? ~ ?). 원래 송나라 사람으로 태학에 들어가 상사생上舍生이 되었다가 상선을 타고 고려에 들어와 예종의 총애를 받고 벼슬이 기거사인에 이르렀다.)
이 동해를 다니면서 화랑 유적을 파괴했고, 조선시대에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지관地官인 두사충(杜思忠. 임진왜란 때 원군援軍으로 왔다가 귀화한 명나라 무장(? ~ ?). 호는 연재(蓮齋))을 시켜 인물이 나올만한 마을의 진산鎭山에 쇠말뚝을 박고 혈맥을 끊게 하였다.
일제강점기에는 또 일본인들이 조선팔도에 쇠말뚝을 박고 다녔다. 밀산박씨의 묘가 있는 서방산에도 쇠말뚝을 박았는데, 1995년 5월 31일에 2개를 뽑아냈다. 남한에서 쇠말뚝이 발견된 지역은 128 곳(1992. 8. 15. 서울신문) 내지는 154 곳(1991. 8. 15. 한국경제)이다.
밀양박씨 규정공파 누대 선조님들의 유택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주교동 두응촌 선영에 있다. 6백여년 전 고려 때 상장군(무관 최고 관직) 사경思敬 선조님을 처음 모신 이후 조선 광해조에 이르기까지 3백년간 53위의 묘소와 11위의 제단과 함께 배위配位까지 합쳐 90여 위가 모셔진 유서 깊은 곳으로 박재궁朴齋宮이라고도 한다. 이분들 가운데는 영의정, 판서, 대제학을 지내신 분들을 비롯하여 석학碩學과 거경巨卿을 지낸 분들이 많다.
추원재(追遠齋) 규정공 이하 선조님들을 모신 재실이다(1, 대화문大化門. 2.본재本齋. 3. 신의당愼義堂. 4. 양덕당養德堂.) 좌측에 규정공파 선조님들의 제1묘역이 보인다.
재실齋室 이름인 '추원'은 <논어論語> '학이편學而篇'의 한 구절인 '신종추원愼終追遠 민덕귀후民德歸厚'(초상에 그 예를 다하고 제사에 그 정성을 다한다면 백성들의 덕이 두터워질 것이다.)에서 따온 글귀이다.
옛부터,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600년 전부터 이곳에 재실을 두어 향화를 받들어 오다가 임진왜란, 병자호란, 한말의 병술국치 등 크고 작은 변란으로 훼철 및 복설이 반복되었다. 1934년에 추원재를 복설했으나 6.25 때 강당이 폭격으로 없어져 1957년에 중건했다. 1987년에 전국 후손들의 성금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복설했다.
공公의 성품은 온후 인자仁慈 하셨으나 불의에 물러서시지 않는 강정剛正 함이 있었고 옳은 일은 용기를 내어 실천하셨다. 공公의 손자 부제학공 강생剛生께서 유서에 쓰시기를, "조부께서는 모친을 일찍 여윈 나의 외로움을 생각하시어 친히 학문을 권하셨다. 자손들을 사랑으로 교육하시고 비복卑僕(계집종과 사내종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예로써 대우하시어 비록 천한 하인이라 해도 거친말로 함부로 꾸짖는 일이 없으셨다. 비록 크게 등용되시지는 못했다 해도 덕화德化가 생민生民(살아있는 백성)에 미쳤고 자손들의 법 받을 만한 분이셨다." 고 하셨다.
이 한 구절로 미뤄보건대, 명당도 무시할 순 없으나 사경 선조님께서 생전에 충효, 자애, 이웃사랑 등 덕을 실천하셨기에 후손들이 대대로 하늘로부터 복록을 받으셨음을 알 수 있다. 우리도 기회되는 대로 그렇게 널리 덕을 베풀며 살아 후손들의 복록의 근원이 되어야 할 것이다. 93세에 세상을 뜨신 사경 선조님은 배위이신 정경부인貞敬夫人 전주이씨에게서 아들 3형제를 낳으셨다.
침침 선조님은 사경의 장남(2000년 판 족보엔 '독자'인 것으로 되어 있다)이시다. 여말선초 이군불사二君不事의 충절로 유명한 두문동杜門洞 72현賢 가운데 한 분이시다. 고려 공민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전의판사典儀判事를 지내셨다. 고려의 국운이 기울자 "백이숙제(백이(伯夷)와 숙제(叔齊)는 <사기> 열전에 나온 상나라 말기의 형제로 끝까지 군주에 대한 충성을 지킨 의인으로 알려져 있다.)의 맑은 절개를 스승으로 삼으리"하시며 부조현不朝峴에 올라 관을 벗어 나무에 걸어놓고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셨다. 거기서 다시 장단長湍 숲속으로 옮겨 자취를 감추고 신하로서의 의리를 끝까지 지키시다가 58세로 세상을 등지셨다. 뒤에 호조 판서에 추증되셨다. 묘는 장단군 장도면 사시리長湍郡長道面沙是里에 있다. 정경부인 밀산박씨에게서 3남1녀를, 그리고 함종곽씨(1363~ ?)에게서 1남 2녀를 낳으셨다.
다음은 공께서 서보徐輔, 채귀하蔡貴河와 함께 두문동에서 나와 다시 벽란진을 건너 곡령산으로 퇴둔退遯(물러나서 은거함)하실 때 지어 읊으신 시다. 6백년이 흐른 오늘에 읊조려봐도 가슴 뭉클하다.
공출북문벽란도........共出北門碧瀾渡
북문을 함께 나와 벽란진을 건넜으니
손분삼우군차오........損盆三友君且吾
지조를 지킨 이들이야 나와 그대들 둘 뿐이네
곡령산하미귀로........鵠嶺山下迷歸路
곡령산 아래에서 돌아가는 길 찾아 헤매며
서지수양문횡도........西指首陽問橫島
서쪽 수양산 가리키며 횡도가 어디냐고 묻는도다.
강생剛生(1369~1422 부제학공. 향년54세) 선조님은 침의 차남이시다. 세종 때 집현전 박사와 부제학을 지내셨다. 문장이 아름다워 문명을 떨치셨는데, 특히 명문거족 부녀자들의 음행을 단속하라는 상소문을 지어 태조를 압박할만큼 요즘말로 지도급 인사들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Noblesse oblige(프랑스어로 '귀족의 의무'를 의미한다. 보통 부와 권력 명성은 사회에 대한 책임과 함께 해야한다는 의미로 쓰인다.)를 매우 중시하셨다. 배위 정경부인 파평윤씨에게서 3남5녀를 낳으셨다. 1424년 막내따님이 세종의 후궁 장의궁주莊懿宮主(나중에 종1품 귀인貴人이 되었다)가 되자 사후에 1품에 추증되셨다. 규정공파 조상님들 가운데 이분이 명나라 사절 1호이시다. 1408년(태종8) 진위사陳慰使(중국 황실의 상고喪故나 화재 등 변고가 발생했을 때 보낸 사신)의 서장관書狀官(외국에 보내는 사신 가운데 기록을 맡아보던 임시 벼슬)에 임명되어 다녀오셨다.
절문切問(1390~1411 정자공. 향년 22세) 선조님은 강생의 차남이시다. 행실이 진실하고 점잖으셨으며 문장에 능하셔서 크게 영달하리라 기대했었는데 문과에 급제한 해에 그만 일찍 세상을 뜨시고 말았다. 운명하시기 바로 직전에 "꿈에 집채만한 소를 보았다"는 아내의 태몽 이야기를 듣고는, "장차 집안이 창성하려면 반드시 징조가 먼저 보이는 법인데, 만일 지금 당신의 태중에 아이가 생겼다면 그 아이가 커서 우리 집안을 중흥시킬 것이요. 부디 잘 길러 주오." 하고 당부하셨다. 정경부인 고려왕씨에게서 2형제를 낳으셨다. 조선조에서 좌찬성에 추증되시고 밀산군에 피봉되셨다.
중손仲孫(1412~1466 공효공. 향년55세) 선조님은 절문의 차남인데 앞서 말한 꿈의 주인공이시다. 어려서부터 행실이 점잖으시고 손에서 책이 떠나지 않았다. 타고난 자질이 온아溫雅하시고 용의容疑가 단정端正하셨다. 효도와 우애가 순수하고 지극하셨으며, 무릇 사람을 접대하고 일을 처리함에 있어 겸손, 공손, 청렴하셨다. 성질이 간소簡素하고 고요함을 좋아하여 두드러지게 정사를 건의하여 밝히신 적은 없었다. 일찍이 모친 개성왕씨의 상주(喪主)가 되어 여막慮幕에 계실 적에 고금古今의 사치와 검소의 득실得失을 논한 글을 지어 아드님들을 가르치셨다. 또 계주명戒酒銘을 지어 당신 자신自身을 경계하시고 근신하셨다. 단종조에서 도승지를 지내시고 정난공신의 칭호를 받으셨다. 그 후로 공조, 형조, 이조, 예조판서를 역임하셨고, 능천군(나중에 밀산군)에 봉해지셨다. 상기를 마쳤을 때 몸이 바짝 마르고 여위어 뼈만 남으셨다고 한다. 다시 관직에 나가 승록대부 의정부참찬, 좌찬성, 독권관讀券官(조선 시대에, 전시(殿試)를 맡아보던 상석 시험관.)을 세번이나 지내셨다. 1466년 (성화 2년) 5월에 돌아가셨다. 부고를 들은 임금은 크게 상심해하며 곧 정사보는 일을 정지하고 관원을 보내 조문하게 하였으며, 사제賜祭하고 부의賻儀를 내려 주었다. 시호諡號는 공효恭孝이시다. 시호의 뜻은, 공경하고 온순하여 웃사람을 섬기는 것을 공(恭)이라 하고, 자애롭고 어질어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을 효(孝)라 한다. 정경부인 남평문씨에게서 3형제를 낳으셨다. 돌아가시고 난 뒤에 부조지전不조之典(국가에 큰 공적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영구히 사당에 모시게 하던 특전)의 특전을 누리셨다. 절문 선조님의 해몽解夢이 과연 잘 맞아떨어져서 이분을 밀양박씨 규정공파의 중흥조中興祖라 일컫고 있다.
웬 보물?
여기서 잠시 장명등長明燈에 대해 짚고 넘어가자. 왜 뜬금없이 장명등 얘기냐고요? 일단 제 설명을 한번 들어보시랑께요.
장명등은 묘역 앞에 세워 사악한 기운을 물리치는 기능을 하는 석등으로서 조선시대에는 일품(一品) 이상의 관직을 지낸 사람들의 묘역에만 세울 수 있었으므로 매장된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는 상징물이 되기도 하였다. 초기에는 화창火窓에 기름 등잔을 놓아 실제로 불을 밝히기도 하였으나 점차 형식적인 장식물이 되었다. 전국의 장명등 중 유일하게 문화재로 지정된 장명등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오금리 산 19번지 중손 선조님 부부 묘 앞에 있다.
이 장명등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중손 선조님의 세 분 아드님들의 효성스런 마음이 엿보인다. 천문을 관찰하는 데 남달리 조예가 깊으셨던 중손 선조님께서 살아 생전에 하늘과 땅과 별들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대해 주셨으니 만큼 "일월성신日月星辰이여, 이제 너희가 우리 아버님의 유택을 잘 지켜다오." 하는 소망을 담아 이 장명등을 특수 제작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 박씨는 지금으로부터 약 2천 년 전에 시조왕 혁거세께서 대신라의 창업주가 되시어 신라 천년의 찬란한 역사를 이룩하신 이래 려조 천년을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그 후예가 천지만엽千枝萬葉으로 뻗어 일원만파一源萬派를 이뤄 우리나라의 대성大姓으로서 그 수가 수백만 명에 달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대로 내려온 발자취가 선명하고 확연하게 기록되어 그 발자취가 정연하게 밝혀져 있다.
미楣(1433~1491 존성제공. 향년59세) 선조님은 중손의 차남이시다. 외모가 아주 우아하고 마음이 올바르셨다. 들어와서는 효도하시고 나가서는 공손하셨으며, 남과 더불어 사귀실 적에는 허심탄회하여 숨기는 일이 없으셨다. 성격이 차분하시고 묵중하셔서 평생동안 말을 빨리하거나 얼굴빛을 경솔히 한 적이 없으셨다. 집에 '존성재存誠齋'라는 편액을 달고 온종일 독서하실 때의 모습은 속세 떠난 신선이나 다름 없으셨다. 이런 분이 벼슬은 예조참의에 그치고 수명 또한 59세로 짧으셨으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대제학 홍귀달). 시문이 '동문선東文選'(신라 때부터 조선 숙종 때까지의 시문(詩文)을 모아 엮은 책. 조선 성종 9년(1478)에 서거정이 왕명에 따라 편찬한 정편(正編) 130권과 중종 때 신용개, 숙종 때 송상기 등이 편찬한 속편(續編) 21권이 있다. 우리나라 한문학의 총결산이라 할 만하다. 154권 45책.)에 실려 전하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조선 성종의 명(命)에 따라 노사신 박미 등이 편찬한 우리나라의 지리서)을 편찬하셨다. 정부인 진상강씨에게서 6형제를 낳으셨는데 아들 4명이 문과에 급제했다.
광영光榮(1463~1537 밀성군. 향년75세)은 미의 차남이시다. 성격이 방정하고 청신淸愼하셨다. 일거일동에 법도가 있으셨고 오만하지 않으셨다. 사람들을 대하실 때 진심으로 대하셨다(대제학 정사룡). 마지막 벼슬이 형조참판에 이르렀고 자손이 없는 형의 훈작을 습봉하襲封하여 밀성군에 피봉되셨다. 정부인 중화양씨中和楊氏에게서 4형제를 낳으셨다. 명나라 사절 2호이시다. 1518년 관압사管押使, (조선시대 중국에 주로 말을 조공할 때 파견되었던 사행使行. 4년에 한 번 파견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예외인 경우도 많았다), 1529년 정조사正朝使(조선시대 원단元旦에 명나라나 청나라에 보내던 정례 사절 또는 그 사신. 동지사冬至使·성절사聖節使와 더불어 삼절사(三節使)의 하나이다.)로 다녀오셨다. 3호는 충원 선조님, 4호는 계현 선조님, 5호는 승종 선조님이시다. 이걸 보면 명나라에 다녀온 것도 우리 가문의 '내림'인가 보다.
조藻(1482~1521 별제공. 향년41세) 선조님은 광영의 장남이시다. 타고난 바탕이 단정 우아하셨다. 나가서 취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으셨다. 경서와 현인전 읽기를 좋아하셨다. 친족 아끼시기를 집안 사람 대하듯이 하셨다. 가문의 공훈으로 귀후서별제歸厚署別提(예조 소속으로 관을 만들고 장례를 맡은 기관의 종6품)를 지내셨다. 향년 41세로 돌아가시니 많은 사람들이 수가 덕에 미치지 못했다며 너무 안타까워했다. 행주기씨에게서 형제를 낳으셨다.
충원忠元(문경공) 선조님은 조의 장남이시다. 이분이 장남 계현啓賢(문장공)을 낳고, 계현은 장남 안세安世(응원군)를 , 안세는 장남 승종承宗(숙민공) 계현의 차남 안민安民[부정공]이고 계현의 삼남 안명安命[월봉공]이며 장자 승안承顔[양성공]이다 계현의 사남 안도安道[출계] 계현의 오남 안국安國[영해공]이다
충원 선조님이 암매장된 단종의 묘를 찾아서 수축하시고 제를 지내드린 이야기가 <장릉사 실기>(윤순거尹舜擧가 1663년에 편찬한 <노릉지駑陵誌>2권에 들어있는 실기實記)에 나온다.
단종 임금이 17세에 영월에서 사약을 받고 죽은 후 조선 조정에서는 인종 때부터 내려오는 근심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수년 동안 자리를 비어두고 있는 영월 군수직을 제수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예부터 영월 군수직은 지방 수령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알짜 자리였는데 전직군수들이 3명이나 부임하자마자 급사하여 아무도 부임하려 하지 않았다.
1541년 박충원은 임백령林百齡(?~1546. 본관은 선산(善山). 자는 인순(仁順), 호는 괴마(槐馬). 을사사화에서 중상과 모략으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공으로 정난위사공신(定難衛社功臣) 1등에 책록되고 숭선군(崇善君)에 봉해졌으며 우찬성으로 승진되었다. 그해 우의정을 차함(借銜)하여 사은사로 명나라에 갔다가 베이징(北京)에서 병을 얻어 이듬해 돌아오던 중 영평부(永平府)에서 죽었다. 1570년(선조 3) 훈작이 삭탈되었다.)
에게 미움을 받아 영월군수로 나가게 되었다. 임백령이 박충원을 영월에 보낸 것은 무릇 죽음의 땅에서 죽게 하려는 계책이었다. 박충원이 취임하자 영월 관리들도 그가 반드시 죽을 것이라 생각하고 두려워하였다. 그러나 박충원은 "생사는 하늘의 뜻이다." 하고 편안하게 잠을 청했다.
얼마쯤 지났을까. 홀연히 심부름꾼 같은 사람이 나타나 젊은 임금의 명이라 하고 박충원을 끌고 갔다. 한곳에 당도하니 젊은 임금은 거친 풀속에 앉아 있고 좌우에는 신하들이 대궐에서 모시고 있는 형상으로 앉아 있었다.
젊은 임금은 박충원을 대면하고는 조정을 몇번 책망하고 나서 박충원을 "죽이라" 고 명했다. 그러자 세번 째 앉은 이가 일어나 말하기를 "이 사람은 죽여선 안 됩니다."하고 박충원을 부축하여 보내주었다.
박충원이 정신을 차려보니 꿈 같기도 하고 꿈이 아닌 것 같기도 하였다. 아침에 관리들이 와서 박충원이 죽지 아니한 것을 보고 모두들 이상하게 여겼다. 박충원은 관속들과 엄흥도의 손자를 앞세우고 단종의 암매장지를 찾았다. 그런데 그 장소는 간밤의 꿈에 본 곳과 똑같은 곳이었다. 나무와 풀이 어지럽게 덮혀 있고 사람의 발자국도 있었다. 박충원은 그 자리에 꿇어 앉아 오랫동안 슬피 울고나서 챙겨갔던 향기로운 과일과 술을 놓고 제문을 지어 정성껏 제사를 지내주었다.
"왕실의 맏이요, 유충幼沖(나이 어린)하신 임금으로 마침 비색否塞한(운수가 꽉 막힌) 운수를 당하시어 궁벽한 고을로 손위遜位(임금자리를 내어 놓음)하시었네. 한 조각 청산靑山의 만고 고혼孤魂(외로운 혼)이시여. 바라건대 강림降臨하시어 향기로운 제전에 흠향하소서"
그날 밤 꿈에 한 사람이 나타나 박충원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전날 세번 째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곧 나인데, 나는 성근보成謹甫(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자字.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 죽은 사육신사육신 가운데 한 사람으로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 꼽힌다. 본관은 창녕. 호는 매죽헌(梅竹軒). 저서에 <<성근보집>>이 있다.)
)요. 공의 충성으로 능히 이 일이 있을 것을 미리 알았기에 공의 죽음을 면하도록 청했던 것인데 과연 그렇게 되었소이다." 하였다.
며칠 뒤 박충원은 암매장된 단종의 묘를 봉축하고 관리인으로 하여금 4시에 향화를 드리도록 조치했다. 그 뒤로는 영월군에 재앙이 없어졌다.
이 일이 있고나서 충원 선조님은 승승장구 승진하여 1550년 동부승지, 대사성을 거쳐 1553년 성절사聖節使(중국 황제, 황후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한 사신)로 명나라에 다녀오셨다. 1566년 홍문관 예문관 대제학, 우찬성, 형조판서, 병조판사, 정승급인 좌찬성(종1품. 부총리급) 정승의 벼슬까지 하시고 밀원군密原君에 피봉되셨다. 정경부인 성산이씨에게서 4형제를 낳으셨고 75세에 세상을 뜨셨다.
시호는 문경공文景公이시다. 저서는 병화兵火로 거의 없어지고 현존하는 저서는<낙촌유고駱村遺稿>와<영해창수록嶺海唱酬錄>이다.
<낙촌유고>에 시 80수가 실려 있다. 그 중 한 수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次快哉亭韻
차쾌재정운..... 쾌재정을 읊다(남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華構平臨浿水頭
화구평임패수두..... 찬란한 좋은 정자 대동강이 둘렀는데
曾隨仙侶極방遊
증수선려극방유......한 때 신선 따라 흥겨웁게 놀아봤다네봉
庭槐迎夏陰堂戶
정괴영하음당호......괴목이 여름 만나 문을 가려 그늘지고
壟麥宜秋浪沒丘
롱맥의추랑몰구....... 보리는 가을이라 물결 일어 언덕 덮네
驚座談봉비玉屑
경좌담봉비옥설........(좌담이 옥가루를 날린다는 뜻은, 옥처럼 깨끗한 좌담이 벌어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좌담 솜씨는 옥가루를 날리우고
絶倫書法照銀鉤
절륜서법조은구.......(은구 : 휘장 따위를 거는, 은으로 만든 고리인데, 아름답게 잘 쓴 글씨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빼어나게 잘 쓴 글씨 은구를 비추네
眼前風物猶淸快
안전풍물유청쾌.......... 눈 앞에 좋은 풍경 이 얼마나 청쾌한가
笙鶴茫茫隔十州
생학망망격십주........학 소리 아득하게 십주에 가득 차 있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