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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화선 촬영 동행기]제 4장 최민식 VS 장승업
정성일이 쓴 <취화선> 촬영 100일 동행기
최민식 인터뷰
2001년 10월9일 날씨 아침부터 흐림.
일기예보에 의하면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함. 아침에 일어나서 세트장을 처음으로
구석구석 걸어가 보았다. 양수리는 늦가을 아침에는 영락없이 안개가 쏟아져내렸다. 총 2765평(길이 160mx56m)에 한옥기와 26동과 한식초가 35동을 세웠다. 설명에 의하면 이 세트장에 세워진 집들의
자재와 가구들을 일일이 미술팀이 구해온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흙담장은 전라남도의 수몰지구에서 가져오고, 건축 목자재는 진부령 육송과 황태 덕장목을 사용하고, 한옥 기와들도 실제 기와를 복제한
우레탄으로 만들었다.
이 세트는 볼수록 신기한 느낌을 주는데
그 힘은 규모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길을 이쪽 편에서 보다가 걸어가서 맞은편에서 보면 풍경이 변해서 마치 다른 길처럼 보이게 지어져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집에서 방 안까지 세세하게 지어져 있어서,
방 안에서 집 바깥을 찍어도 되고 그 반대로 집 바깥에서 방 안을 찍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이 야외세트장은 껍데기만 지은 게 아니다. 마루와 툇마루가 실제로 있고, 길거리에는 하수로가 있어서 비가 오면 흘러내릴 수 있게 만들어놓았다.
그러니까 이 세트장은 정말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지어진
것이다. 게다가 그 모양새들이 대단한 게 집의 높낮이가 달라서 마치
집들이 서로 다른 연대에 세워져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인다. 그 들쭉날쭉함은 잘 계산되어 있는데, 무엇보다 이 집들은 서로 각도를 틀어서 세워져 있으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이날은 잘 준비되지 않았다. 무언가 감독님 자신이 느낌이 잘 와닿지 않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직 나 자신도 현장이 몸에 묻어나지 않았다. 그래서 맨 먼저 장승업을 연기하는 최민식씨부터 인터뷰를 하였다. 결과적으로 잘 선택한 것 같았다.
최민식씨의 다음 행보는 항상 사람들을 궁금하게 합니다. 그런 점에서 당신은 한석규씨와는 다른 것 같습니다. <취화선>을 선택한 이유가 있습니까.
첫째는 임권택 감독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우리나라에서 그 나이에
이른 감독님의 작품세계가 무엇보다도 궁금했습니다. 다른 또 하나의
이유는 한국적인 소재, 임권택 감독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소재, 그리고
거기에 장승업이라는 인물이 예술가이고, 걸어온 삶이나 여정을 담았는데, 제가 겪고, 앞으로의 삶이나 배우로서지만, 이 화가를 만들어내는 과정을 제 인생 안에 반추해볼 수 있는 과정이 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전에는 시나리오도 꼼꼼히 읽어보고 그랬는데, 이번에는 별일이야 있겠냐, 하는 (웃음) 전적인 신뢰였습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중에서 어떤 작품을 좋아합니까.
<만다라>가 좋았습니다.
장승업을 하면서 가장 힘든 부분은 어떤 대목입니까.
상투적인 대답이지만 그림 그리는 게 제일 힘이 듭니다. 사실 제가 정말 그리는 것과 그리는 척하는 것은 다르기 때문입니다. 나를 괴롭히는 것 중 하나입니다. 그러나 나를 가장 괴롭히는 것은 그런, 말하자면
무어라고 이야기해야 할까? 사람의 냄새와 무게를, 그게 소리를 지른다고 되는 것도 아니고, 그건 예술가의 체취입니다. 살아온 살 냄새 같은 거. 그것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가 가장 힘듭니다.
얼마만큼 안으로 들어와 있습니까.
감독님이 생각하는 스타일이 있습니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스타일과
내가 생각하는 스타일을 좁혀가는 부분이 요즘 내가 더 신경쓰고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장승업의 정서와 시대적인 정서. 욕조에 들어가서 목까지 찬 것 같습니다. 이제 들어가기만 하면 됩니다(그런데 이 말을 하면서 웃지 않았다).
임권택 감독님과의 해석상의 차이가 있습니까.
근본적인 차이는 없죠. 그러면 큰일나게요. (웃음) 다만 지금 초상화냐, 풍경화냐, 라는 점은 같습니다. 그런데 그걸 전 굵은 붓으로 죽죽
그리고 싶은데, 그럴 때 감독님이 아니다, 굵은 붓으로 그리다가 가는
붓으로 바꿔라, 하시면 내가 성이 안 차는 부분이 생깁니다. (웃음) 자꾸만 내것이 나오니까 괴롭죠. 내 것을 버리고 감독님 것을 취해야 하는데, 나를 죽여야 하는데, 자꾸만 내 분석대로, 내 방식대로 몸이 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같은 목표를 가는 거니까요.
한국화를 좋아하십니까.
좋아하게 되었다는 말이 정확하겠지요. 형님이 그림을 그리지만, 서양화였습니다.
장승업은 조선말 개화기 시대를 살아간 조선화 마지막 화가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간 화가 장승업을 어떻게 해석할 참입니까.
그 사람은 태평성대 속에서도 부대끼며 살아갔을 것입니다. 그런 외세와 격변기 속에서 살았다 하더라도 그 사람을 세월이 더 그렇게 만든 것은 없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런 시대 속에서 그림 그리면서 잘
먹고 잘산 사람 아닙니까? 주변에서 인정도 받았겠다, 밥도 먹고, 오입도 하고 싶으면 하고, 그는 고흐와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는 뜻입니까.
살아 있는 사람들의 땀 냄새나는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번민이 없는 장승업은 왜 결국 세상을 등진
것입니까.
나는 생각을 달리합니다. 세속의 때를 등지고 떠난 것이다? 나는 배우이기 때문에 관념적으로 보지 않으려고 합니다. 추상적이거나 그걸
주제로 보지 않아야 합니다. 나는 이 사람을 실체적으로 다가가려고
합니다. 아직 대본이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런 것이 중요한 것
같지 않습니다. 결론을 상상해보자면, 결국은 자기 안으로 들어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칭송과 찬사를 분명히 즐긴 부분도 있었겠지요.
괴롭기도 했겠지요. 양반이 아니라는 데서 오는 열등감과 사회와 제도에서 오는 인간적인 괴로움. 먹고살아야 하지만 술도 마시고 싶고,
하지만 인정도 받고 싶고, 즐기고 싶기도 하고, 건방도 떨었을 것입니다.
내가 최고야! 자식들아, 까불지 마, 하는. 그러다가
어느 정도 경지에 오르자 그게 다 부질없어진 겁니다. 그러나 예술가들은 원래 이기적이지 않습니까?
자기 안으로 들어간 겁니다. 자기만의 철옹성, 박대성 화백이 현장에 오셨을 때 어떻게 하면 장승업을
표현할 수 있을까요, 라고 물어보았습니다. 그러자
내 맘대로 보는 게 화가다, 하고 싶은 대로 해라, 라고 말하셨습니다. 구심점은 나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으스대고 뻐기고 했던 것들이 정리되는 순간인 거죠.
그러나 장승업이 세상과 만나는 순간, 세상이 변하고 있었습니다.
그 작품이 주는 주제나 관념적인 메시지는 내게 그 순서는 세 번째, 아니 네 번째 정도입니다. 나는 그 안에 들어가 인물로 살아야 합니다.
배 고프면 먹고, 오입하고 싶으면 하고, 그러면 의미가 보이기 시작할
겁니다. 추석 때 에베레스트 산정을 오르는 다큐를 보았습니다. 그때
질문을 했습니다. 왜 산에 올라가십니까? 대답은 간단했습니다. 나이
들면 알겠죠. 그러니 그냥 올라갈 뿐입니다. 내가 관념적으로 말하면
뭐합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인물 안에서 살아야 합니다. 내가
연출의 고민을 하고 있으면 안 될 겁니다.
연기자로서 한판 승부해야 할 대목은 어디라고 생각합니까.
(생각하다가) 말년 때일 겁니다. 특정장면이라기보다. 50살 이후의 장면들. 그 전에는 뚝뚝 부러지고, 좋아할 때는 애 같지만, 이제 모든 힘이 빠지고, 그러나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런 노예술가의 힘을 담고 싶습니다.
결국 장승업은 어떤 사람입니까.
면역성이 없는 애기 같은 인간입니다. 즐거우면 웃고, 화가 나면 불호령을 내리고, 가식이 없는 사람이죠.”
현장에서의 인터뷰란 항상 눈치가 보이는 일이다. 계속 최민식씨를
찾으러 분장팀과 연출부에서 번갈아 왔다. 이미 최민식씨는 장승업
안에 깊이 들어와 있었고, 그는 쉬는 시간이면 나이 어린 스탭들과도
쉽사리 농담을 하며 즐겁게 웃고 놀면서 그 자체를 즐기고 있었다(사실 현장에서 아무도 그를 어려워하지 않았다. 나는 이것이 매우 드문
현장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심지어 시간이 나면 친해지기 위해 구석에서 막내 스탭들과 동전치기까지 마다않는다. 영화에서 인물의 친화성이란 문제에 대해서 그는 거의 본능적인 감을 지니고 있었다. 사실
그는 너무 센 배우이다.
그 자신에게도 한 이야기지만, <파이란>은 그의 연기가 너무 강하기
때문에 결국 최민식에게 질질 끌려다니면서 영화는 정작 자기가 할말을 못하고 말았다. 최민식에게는 행복한 영화이지만, 감독에게는 홀린 영화가 된 셈이다. 결과는 둘 다에게 비극이다. 영화에서 최민식은
마지막 장면까지 강재민인 척하는 최민식으로 그냥 남아 있었다. 연기자가 너무 강하면 그를 끌고 갈 만한 감독을 만나기 힘들어진다. 그에게는 <취화선> 자체가 아마도 한판 승부일 것이다. 그가 여기서도
여전히 최민식으로 남는다면 정말 큰일이다.
보충촬영을 한 다음 밤장면으로 이어졌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면 현장은 힘들어진다. 배우들이야 방 안에서 장면을
찍으면 되지만 스탭들은 카메라의 프레임을 피하기 위하여 처마 밑에
서 있거나 아니면 바깥에 서서 고스란히 비를 맞아야 한다. 이 장면은
김병문의 집에서 이제 장성한 장승업이 김병문과 그림에 관한 자기의
소신을 말하는 대목이다. 말하자면 장승업과 김병문의 그림에 관한
화론논쟁 대목이다.
장면 # 130 김병문 집(방 안)
김병문 (병석에 누워) “오원 장승업은 인물, 화조, 산수, 사군자, 뭐
못 그리는 게 없는 신필이라고 하더구먼. 인기에 사로잡혀 생동하는
기운을 잃어버린 것은 아닌가?” 장승업 “일일신 우일신이라는 옛
성현의 말씀처럼 저도 매일매일 새로워지고 싶습니다. 제가 만든 그물에 제 스스로 걸리는 짓이야 하겠습니까?”
김병문 “알고 있으니 다행이구먼. 근대 조선 산수의 대맥은 실경일세, 그런데 자네 산수는 실경이 아닌 선경이요, 소박한 현실이 아닌 과장이요, 진정의 발로가 아닌 치기일세. 우리 발붙이고 사는 이 땅의 고통스러운 삶을 있는 그대로 그릴 수는 없는가?”
장승업 “지금 우리 조선의 현실은 너무 각박합니다. 뭇 백성이 기댈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습니다. 실경 아닌 선경으로라도 그들을 위안할
수 있다면, 그 또한 환쟁이의 천명이 아니겠습니까? 그림은 그림일 뿐입니다. 개화당이 이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일과는 다릅니다.”
임권택 감독은 두 사람의 대사를 들어보았다. 안성기씨가 몇몇 대목에서 대사가 걸리자 그냥 하고 싶은
대로 바꿔보라고 이르더니, 그대로 바꾸라고 지시했다. “만들려고 하면 더 안 되지요. 그러니까 이 장면을 진짜로 일어나는 일라고 생각해야 하는 거요. 그
다음에 이 장면이 진짜로 어땠을까, 라고 자꾸만 물어보는 겁니다. 그때 가서야 연기자들도 인물 안으로
깊숙이 들어오고, 카메라도 자연스럽게 그들의 동작을 따라갈 수 있는 겁니다.
그게 진짜 같지 않으면 대번에 누군가 이상하다고 알아채고는 무언가
잘 따라붙지 않게 됩니다.”(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 역시 안성기씨는 그저 병석에 누운 채 베개에 기대어서도 단 한번에 모든 연기를 오케이냈다. 다만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때 장승업이 걷어찬 교자상 위의 잔이 마음대로 떨어지지 않아 몇 차례 엔지가 났다. 내일은
오픈세트장에 관한 기자회견이 있다고 해서 마무리지었다. 빗줄기가
굵어지고 있어서 더이상 촬영하는 일도 쉽지 않을 것 같았다. 젖은 옷
사이로 스며드는 비오는 날 산바람이 꽤 매섭다. 방에 돌아가서 파스칼 보니체가 쓴 <데카드라쥬: 영화와 회화>를 읽다가 새벽에 멈춘 비를 보고 잠들었다.
하이고 몇몇 기자 아가씨들 옷좀 보소!
2001년 10월10일 굵은 비
잠시 새벽에 멈추는 듯싶다가 아침부터 비가 내리기
시작하더니 마치 소낙비처럼 빗발이 굵어지기 시작함. 우르릉 탕탕, 이게 어인 일인가? 하늘이 화를 내더니 비가 쏟아져내리는구나. 오늘은 양수리 세트장을 세상에 처음 공개하는 날. 기자들이 몰려온다는데, 어이한단 말이더냐. 하늘도 무심하시지. 빗발이
부슬부슬 날리더니 기자들 도착하자 쏟아지는구나.
낭패한 홍보실 소녀들 얼굴을 보자. 기자들 이리 화들짝, 저리 두리번, 빗발을 피해 보아도 저 옷맵시로는 어림도 없구나.
저리도 잘 지은 세트장 견학은 언감생심. 땅바닥은 온통 진흙밭인 것을.
점점 빗발 거세지자 한숨 쉬는 송혜선 실장, 기자 무리들을 이끌고 세트장 저 위편에 자리잡은 운당여관 세트로 기자회견장 옮기는데, 얼씨구 절씨구 몇몇 기자 아가씨들 옷 좀 보소, 이 추운 세트장에 무슨
배짱으로 샌들에 맨발로 오셨단 말인감. 참, 내! 운당여관에 마련한 기자회견장 마루에 올라서니 바닥이 얼음장이라 발을 동동 굴러봐야,
그런 꼴로 현장 찾은 무례함에는 그게 제격이라, 그 자리에 안성기 선배, 최민식, 유호정, 손예진씨 자리하였는데, 슬그머니 감독님과 정일성 촬영감독 자리를 피하시더니, 아니나 다를까, 이날 기자회견 첫 번째 질문이라더니, 하이고, 내 그 질문을 차마 잊지를 못하겠구나, 그
예쁜 입술로 나온 첫 번째 질문이 “유호정씨, 힘들게 임신하신 걸로
아는데 이 힘든 영화에 캐스팅된 걸 남편 이재룡씨가 허락하셨나요?”란다.
기자 아가씨, 그 순간 한숨 내쉬는 안성기 선배 얼굴이랑 최민식씨 얼굴 보셨소? 그 자리에 내 한 시간을 더 서 있었는데, 장승업 그림에 대해서 질문 한마디 없고, 아무도 감독님을 찾지 않으니, 지금 여기 쇼프로 취재들 오셨소? 차마 민망하여 그 자리를 피해 운당여관 쪽방에 갔더니 정일성 촬영감독과 김동호 조명기사 술을 드시고 계시더라, 아무 말씀 안 하시지만 그 속내 쓰려 하심은 내 미루어 알 수 있으니, 이
부끄럼움을 어찌 할지, 이 사람들아 예까지 오면서 장승업 그림 한장
안 보고 무어가 그리 궁금하여 빗속에 덜덜 떨고 서 계신가? 그날 양수리 세트장에는 종일 비가 왔습니다요, 그려.
임권택 감독 인터뷰1
2001년 10월11일 맑음.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활짝 갠 맑은 아침. 어제 기자회견 덕분에 하루
촬영을 쉴 수 있었던 스탭들이 한결 몸이 가벼운 표정들이다. 언제나처럼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사람은 임권택 감독이다. 텅 빈 야외 세트장을 이리저리 걸으면서 보기도 하고, 때로는 의자에 앉아 그냥 무한정 세트장을 보기도 하신다. 그럴 때면 그 모습이 이상하게 외로워
보인다. 이 모든 것을 혼자 결정해야 하는 사람의 모습이 저 무거워 보이는 등에 걸려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다가도 정일성 촬영감독과 옆에 앉아 아침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 그 느낌이 더없이 두분이 다정다감해 보이기도 한다. 사실 이 영화의 현장에 오기 전에 마음이 무거운
부분이 있었다. <춘향뎐> 인터뷰가 있던 자리에서 다음 작품은 어떤
작품을 구상중이십니까, 라는 질문에 김홍도를 생각해보고 있다고 하셔서 그냥 무심코 차라리 장승업이 어떨까요, 라고 말씀드린 적이 있기 때문이다. 내 말 때문에 이 작품을 선택하신 건 절대 아니겠지만,
갑자기 겁이 덜컥 난 것이다.
“맞아요. 기억이 나요. 정성일씨가 그런 이야기를 한 적이 있지. 사실
내가 장승업에 처음 관심을 가진 건 78년경이었어요. 그때야 장승업에 대해서 아는 게 없었지. 다만 이 사람이 나라의 임금이 그림을 그리라는 데도 그게 싫어서 뛰쳐나갔다는 게 내 마음에 들었어요. 그때는
그런 게 속 시원한 시절이었으니까. (웃음) 그런데 그때 누가 그런 이야기에 돈을 대겠어요? 화가로 원래 관심이 있었던 것은 김홍도였어요. 그 대가가 춘화를 그렸다는 게 관심이 있었지요. 학자들 사이에서도 논란이 많은 부분이에요. 절대 그렸을 리가 없다는 거요.
그걸 현대에서 거슬러올라가면서 그 시비를 가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볼 생각이 있었지요. 그냥 그건 생각만 하고 있었던 거요. (웃음) 그러다가 <춘향뎐>을 찍은 다음에는 원래 탈북자 이야기를 하려고 했지요. 그런데 인연이 되어서 영화인들과 북한에 다녀오면서 여기서는
영화를 못하겠구나, 하고 단념을 했어요. 체제가 너무 다른거요, 이건.
속으로 안길 정말 잘했구나, 라는 생각을 했어요. 무엇보다 너무나 풍경이 망가져 있어서 여기서는 사람이 사는 느낌을 담을 도리가 없겠구나, 라는 인상을 받았어요. 아마 북한 사람이 여기를 보면 같은 생각을 했을 거요. 자료도 많이 모으고 인터뷰도 했는데, 돌아와서 포기했지요. 언젠가 통일이 되면 그때에야 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지난해
12월에 서울대 박물관에서 장승업에 관한 세미나를 들었어요.
그때 비로소 영화로 만들어야겠구나, 라고 결심했어요. 장승업을 선택한 첫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 생애가 영화로 다루기에 매력이 있다는 거지요. 그 다음 이유는 지금도 장승업 선생의 평가가 갈리고 있다는 대목이에요. 중국 그림의 아류라는 평가도 있고, 그 당시의 그림들을 넘어선 프로의 세계라는 평가도 있고. 사실 장승업 선생이 그 시대의 중국풍 그림으로부터 크게 벗어나지 못한 한계는 실경, 그러니까 진경산수의 수요가 사라진 시대였기 때문이죠. 그림이란 것은 수요가 있을 때 그려지는 것인데, 장승업은 그 시대를 놓친 사람인 거죠.
하지만 그 시대의 한계 안에서도 무언가를 해보려고 그렇게 치열하게
노력한다는 것.
여기에 또 하나의 매력은 장승업 선생의 그림은 뭐랄까, 바로크적이라고 할까, 과장된 그림들인데, 장승업 선생이 원래 그런 의도로 그렸는지는 우리가 알 수 없지만, 후대의 사람들이 들여다보면 그런 과장된 신선들이나 살 거 같은 마치 선계와도 같은 세상을 그렸지요. 나라는 기울어가고, 백성들은 살기가 피곤하고, 외세는 들어오고, 관리들은 수탈이 심하고, 그 속에서 그림을 통하여 무언가 위로를 주고자 했던 의도가 담겨져 있지 않나, 라는 생각을 그의 그림에서 본 거지요.
김홍도나 정선 같은 분들은 진경산수도 그렸고, 풍속화도 그렸고, 확실하게 자기의 장르를 일궈낸 분들이지만, 장승업은 그런 독자적인
세계를 만들어냈다고 말하기는 어렵지요.
그러나 난 그게 좋은 것이, 한 작가가 프로로서 끊임없이 거듭나고자
정말 거듭나고자 평생을 노력하는 그런 것이 소중하다고 보는 거요.
물론 무언가를 이루어내는 것, 그것을 정말 이룬 자는 몇 되지 않는 거요. 하지만 무언가를 이루고자 평생을 늘 치열하게 살면서 거듭나고자 살아낸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은 거요. 확실하게 이룬 자보다는 미완이면서 완성에로 향하면서 이뤄내고자 치열하게 살아간 사람들이 매력이 있고, 우리 사람과도 가깝게 가 닿았다는 생각이오.”(임권택
감독과의 인터뷰)
오늘 장면은 대사가 없지만, 간단치 않은 장면들이었다. 오전에는 장승업이 방랑 끝에 화초장 장롱 하나
사들고 돌아와 보니 하필이면 그날 살붙이고 살던 기생 진홍이가 자기도 알고 있던 화가 평산과 대낮에
질펀하게 정사를 벌이고 있어서 분에 겨워 사들고 간
장롱을 두들겨 부수는 장면이었다. 오후에는 방 안에서 기생 진홍이가 평산과 벌이는 정사장면 촬영이 있었다.
문제는 이 장롱이 단 하나뿐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엔지가 나면 다시 장롱을 사들고 오는 수밖에 없다. 이 장롱은 진품이다! 최민식씨가
어떻게 부술까요, 라고 묻자 임권택 감독은 한번 웃더니 알아서 화나는 대로 그냥 부숴, 라고만 짧게 대답했다(나중에 다시 물어보니 “그거 부술 때는 장승업이 되지 말고 최민식이 되어야지, 그거 부술 정신머리에 무슨 계산이 필요하겠어, 그거 계산하면 뭣도 아닌 게 될 텐데”라고 설명하셨다). 최민식씨는 계속 뜸을 들였다. 마당을 왔다갔다
하면서 중얼거리기도 하고, 진홍이 이년저년 하면서 두리번거리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절구통에 있는 절구를 보았다. 크게 심호흡하고 호기롭게
가겠습니다, 를 외치더니 방문 열고 진홍과 평산의 정사를 확인하는
더블액션에 뒤이어 바로 달려 내려와 절구를 들더니 냅다 화초장 장롱을 내리쳤다. 장승업의 분을 못 이긴 절구는 단번에 부러져나갔고(그건 그걸 내려친 최민식씨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 나머지 부러진 절구를 부서진 장롱에 집어 던졌다. 흐뭇한 얼굴로 임권택 감독은 오케이를 불렀고, 일제히 스탭들의 박수소리가 터져나왔다. 이런 순간들이 영화현장에서는 이상하게 감동을 불러일으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