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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증산도, 참 진리의 세계 원문보기 글쓴이: 토장
<노자>와 '무無'의 의미
無知, 무욕無欲, 무명無名 등 무론이 중점적으로 다루어 졌다. 22장에서는, ‘드러내지 않음(不自見) 옳다하지 않음 (不自是) 자랑하지 않음(不自伐) 뽐내지 않음(不自矜) 다투지 않음(不爭)’ 등 무의 덕성에 대해서 언급한다.
무와 유를, 음과 양으로 본다면, <노자>는 보다 음陰적이다. ‘현빈玄牝’이라는 단어를 등장시키는 것만 봐도 그렇 다. 공맹은 현실의 인문질서를 중시하는 보다 양陽적인 학풍이라고 할 수 있다. 암컷이라는 단어가 나온다고 해서 <노자>를 여성의 도로 보면 곤란하다. 여성성에 좀 더 중점을 뒀을 뿐이다. <우주의 무유의 순환운동>
<노자>는 무無의 도와 덕성만이 아니라, 무에 근거한 만물 생성론에 대해서도 짧게 언급하였다. ‘도생일道生一, 일 생이一生二, 이생삼二生三, 삼생만물三生萬物’, ‘복귀어무극復歸於無極’, ‘유생어무有生於無’ 같은 구절이다. ‘유생 어무有生於無’, 유는 무에서 나온다. 무가 유의 전제가 되어 있다. 무나 유는 혼자 독존할 수는 없이 서로 의존한 상 태이다.
무와 유는 음양론으로 환치될 수 있다. 무는 음이고, 유는 양이다. 무유에 관한 논의를 <하도>의 원리에 환원시켜 서 좀 더 깊게 논해보기로 하자. <하도> 이상의 뛰어난 음양론은 지구상에 없다.
우주는 ‘물과 불의 운동양식’ 이라고 한다. 이는 <하도>에서는 ‘1수水와 2화火’ 의 상징체계로 표현된다. 우주는 물 에서 나왔다고 한다. 태일생수太一生水, 하나(一)에서 물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이 물덩어리는 여행 중에 쪼개지 고 분열을 거듭하다 보면 불(二火)이 되고 만다. 물이 멀리 멀리 뻗어나가 불이 된 것이다.(逝曰遠) 그러나 너무 멀 리 간 것은 반드시 다시 돌아와야 한다.(遠曰反) 일원상一圓相은 돌고 도는 회귀의 상을 잘 표시하는 도형이다. 2화 火는 다시 1수水로 돌아간다. 물에서 불로 뻗쳤는데, 그 불은 다시 물로 복귀하고 만 셈이다. 이렇게 보면, 우주는 곧 물과 불의 운동양식에 불과하다는 말이 조금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이 물불(水火)의 운동을 본뜬 것이, 우리 인 체에서 신장(水)과 심장(火)의 교호交互작용이고, 시공에서 달(水)과 해(火)의 승부勝負작용이라고 할 수 있다.
<하도의 물과 불의 운동양식> <하도 '일원상'에서의 음양 분류>
<하도> 도상圖上에서 일어나는 물과 불의 분합작용에 대해 알아보았다. 불은 양陽을 대표하고, 물은 음陰을 대표 한다. 1수水, 음의 상징체계 속엔 정靜, 허虛, 무無, 후천後天이 포섭되고, 2화火, 양의 상징체계 속에는 동動, 실實, 유有, 선천先天이 배속된다. 이러한 양자의 대립적 개념은 서로 어울려 수화水火운동, 동정動靜운동, 허실虛實운 동, 선후천先後天운동 등의 음양운동을 일으킨다. <노자>서書는 무유 위주로 기술돼 있기 때문에, 사물을 무유 운 동으로 파악했다고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유는 음양운동 중의 하나로서, 어떤 변화 운동을 일으킬까? <하도> 상에서 무유는 어떤 분합작용, 어떤 승부작용을 펼칠까? <노자>에서는 무유 두 글자로서 사유를 전개하였기 때문에 그 논의가 매우 단편적이지만, <하 도>에 이르면 무유의 분합운동이 오운육기五運六氣, 즉 10간12지의 체계를 만나 그 논의가 매우 복잡다단 해진다. 그러나 여기서는 육기론六氣論의 12지支로서만 간단하게 살펴본다.
앞에서 말했지만, 유有의 시초는 물이다.(1子水) 이 1수는, 하나는, 이 태초의 물덩어리는 자체 분화를 하게 되는 데, 이는 3,8목木, 2,7화火으로 변이하며 유형화有形化의 리듬을 타며 생장한다. ‘道生一, 一生二, 二生三, 三生萬 物’, 이는 만물이 나오는 과정을 매우 단순화한 도식이다. ‘도생일道生一’은 술오공戌五空이 1자수一子水를 낳는 과정을 말한다. ‘일생이一生二’ 는 수가 화를 낳는 과정을 말한다. ‘이생삼二生三’은, 1과 2가 더하여 3목木을 낳는 과정을 말한다. 3목木에서 새싹이 트고 초목은 씩씩하게 자라난다. 말하자면 1수 물덩어리는 2화, 3목을 낳고, 연 이어 만물을 낳게 된다. 이렇게 유형有形의 세계가 형성되어 가는데, 그럼 이 유형화는 어디까지 뻗어 분화하는가? 이는 낙서洛書 남방의 9까지 뻗어 최종 분열한다.
유가 극한에 이르면 어찌될까? 반자도지동反者道之動, 무의 시초가 열린다. 유에서 무로 전환한다. 그런데 유에서 무로의 변전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 후천개벽이라 한다. 이때 자연은 유를 무로 전환시키는 사명을 완수하기 위 해 10수를 등장시킨다.(10未土) 10수의 사명은 ‘유에서 무로’ 천지의 기틀을 바꾸는 매우 막중한 일이다. 천지를 뒤 집는 일을 해내는 10수의 능력, 그 근원성과 무변광대한 공력을 찬송하여 이를 무극無極이라 이름 한다.(復歸於無 極) 이는 하느님의 역할이라 해서 10수는 하느님의 수라고도 불린다. 무극은, 곧 절대계絶對界인 것이다.
유에서 무로 전환한 뒤, 계속 진행돼 온 무화無化작용은(爲道日損 損之又損) 술戌의 텅빔(空)에 이르러서야 그 임 무를 완수한다. 마침내 텅빔(玄同)에 도달한 것이다. 술은 텅빔(絶對空)이다. 생명의, 유형의 영원한 고향. 그렇다 면 이곳은 영원히 편안하게 안식하여야 할 곳인가? 이곳은 이데아인가, 천국인가, 절대공絶對空의 자리인가? 아닐 것이다. 고이면 썩는 법. 그 무엇도 머물러서는 안 된다. 텅빔은 오히려 새로운 출발을 하는 곳이다. 텅빔은 창조의 모체라 불린다. 창조는 텅빔에서 이뤄진다. 우주는 이 텅빔에서 새로운 생명의 기틀을 작동시키는데, 텅빔이 내재 적 원리에 의해 바깥으로 뿜어낸 생의生意, 그 첫 걸음을 1수의 물덩어리라고 한다. 물이 여기서 만물의 근원이 된 것이다.
이상으로 <하도>의 일원상에서 일어나는 무유의 운동에 대해서 설명했다. 우주는 이렇듯 무유를 한없이 반복하며 돌고 있다. 유는 무를 낳고, 무는 유를 낳고. 우주는 한마디로 ‘무유의 분합운동’ 이다. 무와 유는 호근互根작용을 하므로, 등가等價이며, 동원同源이다. 따라서 유에 대하여 무가 특별난 존재인 것은 아니다. 무가, 공이 절대적인 그 무엇이 아닌 것이다. 이데아 같은 절대계는 없다. 창조주 또한 없다. ‘복귀어근復歸於根’<16장>, 뿌리에 돌아가 면 그곳이 유토피아인줄 알았는데, 뿌리에 복귀하면 얼른 다시 싹을 틔우라고 자연은 명령할 뿐이다. 상대적인 절 대계만 있을 뿐이다.
이를 비유적으로 재미있게 설명해보자. 가령 6조 혜능이 견성 성불하여 이데아에 도달했다고 치자. 역사적인 혜능 은 분명 무일물無一物, 그 뭔가 보편자에 도달한 것 같은데,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혜능은 남새밭에서 한가롭게 채 소만 뜯고 있다. 도통한 뒤 할 일이 없다. 생명을 기르는 것 외에는. 뭐란 말인가? 금강경에 ‘불법을 불법이라 이름 하는 순간 그것은 불법이 아니다.’라고 나온다. 혜능이 무일물에 도착한 순간 그곳은 무일물의 세계가 아닌 것이다. 텅빔에 도착하는 순간 생의가 드러나야 한다. 정지하면, 이름에 갇힌다. 중생으로 떨어진다. 따라서 혜능은 막 도 착한 이데아에 항구적으로 머물 수가 없다. 도착한 즉시 떠나야 하는 것이다. 혜능이 채마밭에서 풀이나 뜯고 있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이다. <육조단경>에도 사사무애를 시사하는 대목이 나온다.
텅빔에서 유형화의 길이 시작되고(有生於無), 물화物華에서 무화無化의 길이 시작된다.(無生於有) 무는 유를 낳고 유는 무를 낳는다. 무유는 양가적兩價的이다. 따라서 피안, 이데아가 종교의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 무를 함축한 유형의 세계, 현실의 상식보편의 세계(常道)야말로 우리가 살아가야할 진실한 공간인 것이다. 그런데 노자는 왜 ‘유생어무有生於無’ 만 말하고 ‘무생어유無生於有’에 대해선 말하지 않았을까. <우주는 무유의 순환운동이다. 무유는 하나도 아니고 둘인 것도 아니다.(不一而不二)>
무와 유에 관한 논의를 좀더 진전시키면, 양가적인 무유는 본래 하나인 걸까, 둘인 걸까? 앞에서 동원同源이라고 말했으니 분명 하나로 봐야할 것이다.(一). 그러나 수화水火는 현실세계에서 따로 엄존하므로 둘이라고도 봐야 할 것이다.(二) 그렇다면 뭔가? 우주의 본체는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인 것인가.(一而二 二而一) 불교에서는 불不 자를 붙여서 설명하는 걸 좋아한다. 불不 자를 붙여 설명해보면, 무유가 본래 어찌 둘이 될 수 있는가.(不二) 그렇다고 무유가 하나라고도 할 수도 없다.(不一) 따라서 무와 유는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것이다.(不一而不二) 이를 원효 의 <금강삼매경론>에선 ‘불일이융이不一而融二’ 라고 표현돼 있다. 골똘히 생각해보면 이 또한 별다른 논의가 아니 다. 수사학의 찬연함이다. 거기서 거기다.
불교에서는 무유와 공색空色에 불不 자까지 덧붙여 매우 현란한 논리를 구사한다. 그러나 <하도>의 일원상에 갖다 대면 그 현란함은 거두어져 모두 음양론으로 귀속될 수 있다. <노자>도 마찬가지이다. 사실 노자의 모든 논의는 < 하도>의 음양론에 일점 남김없이 포섭되지 않는 바가 없다. <노자>는 <하도>의 무유가 분합하는 관계의 일부를 포 착하여 지혜서로서 정리한 도서에 불과하다. <노자>는 <하도>의 부분에 불과하다고 단언되는 것이다.
<하도>는 노자와 불교의 무유론을 포섭하고도, 거기에다 무유의 분합작용을 12단계에 걸쳐 나눠 설명하는 육기론 까지 갖추고 있다. ‘하나一’의 철학, 우주 생성론, ‘일이이一而二 이이일二而一’의 원융회통에 관한 이러한 심대한 이론들, <하도>를 버려두고, 도대체 어디 가서 무엇을 구하고 있는가? 화엄이 가진 회통의 논리? 소가 웃을 일이 다. 봄을 찾으러 떠났더니 내 집에 봄이 이미 와있네. 한민족에 두고 어디 가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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