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평양 류 장 우
세상이 어수선 하다.북한의 김정일이 죽고난 후 철부지나 다름 없는 정은이의 3 대 세습이 있었고
맏아들 정남이는 중국 땅을 떠돌며 세습의 온당치 못 함을 토로하며 다니고 있다.
이념을 떠나 이 또한 이산의 아픔의 연속이다. 동정을 금할 수가 없다.
친구의 부름을 받고 오랜만에 영화를 보았다. 요즘의 영화는 5 - 60 년대 보아왔던 헐리웃, 이태리
영화처럼 아름다운 사랑과 사회성을 그린 영화는 드물다.
오늘 본 다큐 영화 ' 굿바이 평양'은 시대적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영화였다.
' 굿바이 평양 '은 제목으로 보아서 헐리웃 영화 ' 애수(哀愁)'에서처럼 사랑하는 사람과의 로맨스를 담은
' 워털루 다리'에서의 애틋한 이별의 아픔을 그린 영화였으면 좋으련만 북한에서 살아가고 있는 가족의
이산의 아픔을 담은 다큐멘터리 영화였다.
그의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금 더 나은 삶을 위해 일본으로 이주해야 했다.
남북 분단 후 남한에 비교하여 민족교육을 위하여 많은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북한을 선택하여 조총련의
중견 간부가 된다. 진정으로 지상 낙원으로 믿고 작가의 두 오빠를 니카타항에서 북한으로 보내게 된다.
나이가 어려 만경봉호를 함께 타지 못 했던 여동생 양영희가 성장하여 북한을 오가며 13년간 북의 가족들을
영상에 담아왔다고 한다.
출입국 시 감시와 검열이 심한 북한이었지만 그의 아버지가 김일성 주석과 사진을 찍을 정도로 신임을 가
지고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두 아들을 보내 놓은 북한의 실상은 달랐다.
북에 있는 가족들은 일본 방문을 허락 하지도 않았다. 그곳에서 테어난 오빠의 딸 선화에게 학용품을, 북의
가족들의 생활비와 생필품을 소포로 보내는 것이 일상이 되어 있었다.
어른이 된 두 아들과 손녀 선화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으로 찾은 기약할 수 없는 마지막 만남에서 부모가 흘
렸을 남모르는 눈물, 그러나 밝고 웃음을 잃지 않았던 모습은 자식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지 않으려는
부모의 마음을 읽을 수가 있었다.
영상에 비추어진 평양의 모습, 대표적인 건물 앞의 보도블록은 깨어져 누덕누덕 기워져 있었고 화단의 초목도
생기를 잃고 있었다.
노쇠한 모습으로 평양 길을 걷는 아버지를 뒤따라가며 카메라에 담았던 제작자 양영희는 지금 무었을 생각하고
있을까 ? 30년 전에 어린 오빠를 북으로 보낸 아버지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다큐 '굿바이 평양'을 내놓기 전 평양 사랑과 가족애를 담은 ' 디어 평양'을 내놓아 베를린 영화제 등 각종 국제
영화제에서 다큐 부문 최우수 영화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북한을 우호적으로 그린 기록영화이나 세계에 실상을
알리기를 꺼려한 북한은 작가 양영희의 입국을 허락지 않고 있다고 한다.
입국 금지령은 떨어졌으나 그동안 13년간 촬영해 놓았던 기록을 모아 ' 굿바이 평양' 세상에 내놓기를 포기치
않았던 양영희에게 찬사를 보낸다.
이 영화로 인해 북의 오빠와 사랑하는 조카 선화에게 정치적 짐이 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언젠가 평양의 가족과 함께 이 영화를 보고 정한(情恨 )를 풀 수 있는 날은 정녕 오려나,,,,,,
여려진 나의 마음을 울려 주었던 작가에게 ' 영원한 평양이여'안녕'이 아니 되길 손 모아 빌어 본다.
첫댓글 가슴아픈 이야기네요
양영희씨 가족이 아마도 불이익을 당하고 있을겁니다
그렇습니다.이야기해 쓰지 않았지만 조카 선화는 잘 자라 대학생이
되어 양영희에게 英文으로 된 편지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민족의 이산의 恨 을 쓰셨기에 올린 글입니다.
많이 배우고 있습니다.선생님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