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 태 욱 뉴스위크 한국판 기자
--------------------------------------------------------------------------------
이주일씨의 폐암판정으로 금연열풍이 한창이던 지난달 김대중 대통령은 보건복지부의 새해 업무를 보고받는 자리에서 폭탄주와 관련해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담배도 몸에 해롭지만 술도 그냥 마시는 것보다 섞어 마시는 것이 더 몸에 해롭다고 하더라.” 金대통령의 그 말에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이렇게 토를 달았다. “(정치권의) 폭탄주 문화의 문제점을 우회적으로 거론한 것이다.”
실제로 폭탄주로 인한 정치권의 각종 ‘사고’는 양주가 귀하던 시절의 국회국방위 회식사건(86년)을 시작으로 양주 보급이 급속히 증가한 90년대 들어 부쩍 늘었다. 노태우 前 대통령의 4천억원 비자금 사건(95년)에 이어 金대통령 재임 중에 발생한 조폐공사 파업유도 사건(99년), 대전 법조비리 사건(99년), 국회의원 광주 술자리 사건(2000년), 이정빈 前 외교통상부 장관의 올브라이트 美 국무장관에 대한 실언 사건(2000년), 추미애 의원의 폭언 사건(2001년) 등이 모두 폭탄주와 직·간접적인 관련이 있다.
폭탄주 폐해가 늘면서 폭탄주 문화의 대명사 격인 검찰에서도 요즘 폭탄주가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서울지검의 李모검사는 “이젠 검찰 내에서도 폭탄주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히는 검사들이 있다”고 전한다. 그러나 독특한 한국의 조직문화 속에서 그것이 쉽게 자취를 감출 것 같지는 않다. 우선 상급자 입장에서 볼 때 폭탄주엔 ‘분배의 정의’가 살아 있다.
대개 한국에선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한잔씩 권하게 돼 있어 조직의 우두머리로선 이를 다 받아 마실 수가 없다. “이때 폭탄주를 돌리면 모두 같은 양의 술을 마실 수 있는 ‘민주주의’가 구현된다.” 검사 출신으로 지금은 작고한 김경회 前 한국형사정책연구원장의 폭탄주 예찬론이다. 폭탄주의 두번째 효용은 상하급자를 불문하고 술자리 분위기를 최단 시간 내에 달아오르게 하는 ‘경제성’이다.
80년대 중반에 폭탄주를 배웠고 그후 수십가지의 폭탄주를 직접 개발한 심재혁(55) 인터콘티넨털호텔 사장은 “우리처럼 회식문화가 발달한 한국에선 폭탄주는 짧은 시간 내에 술을 끝내면서 단합을 과시하기에 적합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세가지 원칙을 지킨다. 절대 고급 위스키론 만들지 않고, 4명 이내는 하지 않으며, 술이 약한 사람에겐 강권하지 않는다.
폭탄주가 유난히 빨리 취하는 이유는 의외로 간단하다. 정통 폭탄주의 알콜 도수는 대개 10%선(청주 수준)으로 비교적 낮다. 그러나 폭탄주 한잔에 든 알콜 함량은 보통 소주 2잔 또는 양주 한잔 반 정도에 해당한다. 이렇게 볼 때 결국 단시간에 다량의 알콜을 속에 들이붓는 셈이다. 게다가 “맥주 등 탄산음료와 함께 술을 마시면 소화기 점막의 알콜 흡수를 촉진시켜 혈중 알콜 농도가 급상승한다”는 게 고려대 구로병원 홍명호 교수(가정의학과)의 설명이다.
폭탄주가 몸에 해로운 것은 단순히 알콜 흡수가 빠르기 때문만은 아니다. 문제는 서로 이질적인 두가지 술을 섞는 데 있다(참고로 몰로토프 칵테일이 칵테일이 아니듯 폭탄주도 ‘칵테일’이 아니다). 이 경우 두가지 술 속에 들어 있던 불순물이 서로 반응해 중추신경계를 교란하기 때문에 숙취를 더 심하게 만든다. 폭탄주를 여러잔 마시면 이튿날 몹시 괴로운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폭탄주는 약 1백년 전 영국 런던 지하철 공사장 인부들에게서 비롯됐다는 설도 있지만 19세기 말 미국의 부두 노동자들이 빨리 취하기 위해 싸구려 위스키와 맥주를 혼합해 마신 ‘보일러메이커’(boilermaker)가 원조란 게 정설이다. ‘보일러메이커’는 뜨거운 보일러처럼 몸을 확 달아오르게 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 폭탄주가 20세기 초 미국의 탄광 및 벌목장 노동자들에게 퍼진 것이다. 70년대 초 美 평화봉사단원으로 와 30여년을 한국에서 생활한 프레드 바우어(52) 前 인하공전 교수는 “어릴 적 내가 살던 펜실베이니아州의 탄광지역에서는 독일산 독주 슈납스를 가득 채운 양주잔을 맥주잔에 빠뜨려 단숨에 들이키는 보일러메어커가 큰 인기였다”고 말했다.
실제로 외국 영화에도 그런 폭탄주가 등장한다. 1920년대 미국 몬태나州를 배경으로 제작된 미국 영화 ‘흐르는 강물처럼’(A River Runs Through It·92년작)에선 바텐더가 큰 맥주잔에 위스키잔을 떨어뜨려 내주는 장면이 나온다. 하지만 한때 미국 서민을 중심으로 유행한 그같은 폭탄주도 지금은 미국에서 거의 사라졌다. 다만 뉴욕 등 미국 대도시의 驛안에 위치한 바에서 장거리 통근자들이 위스키 한잔을 마신 뒤 잇따라 맥주 한잔(chaser)을 들이키고 기차나 버스에 오르는 경우는 요즘도 종종 볼 수 있다.
한국 폭탄주의 원조는 한나라당의 박희태 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춘천지검장 시절인 1983년 가을 기관장회의에서 폭탄주가 처음 만들어졌다고 말한다. 흔히 알려진 군대 유래설과는 사뭇 다르며 현재 이것이 정설로 굳어져 있다. 그러나 뒤늦게 한국에서 부활한 이 폭탄주는 한국인 특유의 창의성을 바탕으로 꽃을 피운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사정주’(射精酒)다. 정통 폭탄주를 만든 뒤 윗부분을 랩으로 팽팽히 씌우고 그 랩에 작은 구멍을 낸 다음 잔을 휙 돌려 회오리주를 만든다. 그것을 세게 테이블 위로 내려치면 그로 인한 압력으로 술이 그 구멍을 통해 힘차게 솟구친다. 일명 ‘미사일주’ 또는 ‘물총주’로도 불린다.
한국 폭탄주에서 뗄 수 없는 요소는 바로 오락성이다. 먼 옛날 신라시대 왕과 신하들이 포석정에 둘러 앉아 술잔을 띄운 데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지 모를 일명 ‘타이태닉주’가 그렇다. 일단 맥주잔에 맥주를 70% 정도 채운 뒤 빈 소주잔을 띄우고 한 사람씩 돌아가며 그 소주잔에 양주를 조금씩 붓는다. 이때 잔을 가라앉히는 사람이 그 폭탄주를 벌주로 마신다. 동석자들은 짜릿한 스릴을 느낀다. 양주잔 대신 소주잔을 쓰는 것은 상대적으로 넓적한 소주잔이 길쭉한 양주잔에 비해 쉽게 ‘전복’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폭탄주라고 다 파괴력이 강한 것은 아니다. ‘티코주’는 아예 양주잔에 맥주를 붓고 양주는 한 방울만 떨어뜨린 앙증맞은 ‘변형 폭탄주’로 생리적으로 술에 과민 반응을 보이는 ‘약자’를 위한 시혜주다. 폭탄주와 골프를 동시에 사랑하는 주당들이 술마실 때 생기는 목젖의 움직임인들 놓칠 수 있을까. “폭탄주를 한입에 마시면 홀인원, 목젖을 한번 꼴깍 거리고 마시면 이글, 두번 꼴깍거리면 버디, 세번은 파다.” 폭탄주 애용자인 심재륜 前 부산고검장의 골프주 해설이다.
폭탄주는 시류와 역사적 사건도 예리하게 반영한다. 전통주와 양주를 섞은 ‘벤처주’와 테러를 당한 뉴욕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빌딩처럼 폭탄주 2잔을 나란히 놓고 그 위에 또다른 폭탄주 1잔을 올려 놓는 ‘테러주’(일명 ‘빈 라덴주’)는 골수 팬들 간에 인기다. 한국의 폭탄주 애호가들이 월드컵이란 호재를 그냥 흘려버릴 수 있을까. 맥주잔 위에 놓인 젓가락 두개를 발로 걷어차 양주잔을 떨어뜨리는 이 폭탄주는 그러나 마시는 것에 발을 동원하는 과격성 때문에 거부감을 갖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한 폭탄주 전문가의 설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폭탄주에 대한 한국인의 애정은 여전히 각별하다. 삼성서울병원 소화기센터의 백승운 교수팀이 얼마전 20∼50대 직장인 1천6백2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폭탄주의 필요성에 대한 질문에 ‘분위기를 좋게 한다’(5.2%), ‘가끔 필요하다’(45.3%) 등 응답자의 과반수가 폭탄주를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
이같은 우호적 분위기는 언론의 장·차관 프로필에도 그대로 투영돼 이젠 주량도 ‘폭탄주 몇잔’ 하는 식으로 소개된다. 영국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은 “음주는 일시적 자살”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관대한 술문화의 천국’ 한국에서 이 말이 통할 수 있을까. 오죽하면 ‘술에 의한 경영’(MBA·Management By Alcohol)이란 우스갯소리까지 생겼을까.
일본 마이니치(每日)신문은 몇년 전 폭탄주를 한국의 독특한 음주문화로 소개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한국에선 맥주에 위스키를 섞어 단숨에 마시는 폭탄주가 유명하다. 간암 사망률이 세계 1위인 나라에서 사람을 사귈 때는 단단한 각오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로부터 5년 뒤 폭탄주는 마침내 일본 정치권에도 진출했다.
얼마전 모 신문사가 도쿄(東京)에서 주최한 한·일 신세대 정치인 토론에서 일본측 의원 중 한명이 2차를 간 자리에서 보아란듯이 ‘충성주’를 제조해 돌린 것. 그 소장파 의원은 이제 일본 정계 최고의 폭탄주 제조자임을 자처한다. 평소 회오리주를 즐기는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61) 산케이(産經)신문 서울지국장은 “폭탄주는 한국이 일본에 수출한 대단한 문화상품”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그 너스레의 뒷맛은 왠지 개운치 않다.
한국인의 폭탄주 베스트 10
1 원자폭탄주: 맥주컵에 양주잔을 넣고 만드는 정통 폭탄주.
2 수소폭탄주: 원폭주의 맥주와 양주 비율을 바꾼 것. 맥주잔과 양주잔을 모두 양주로 채우면 가공할 파괴력의 중성자탄이 된다.
3 회오리주: 폭탄주 잔 윗부분을 냅킨으로 막고 휙 돌릴 때 생기는 회오리가 묘한 신비감을 더해준다.
4 충성주(일명 헤딩주): 맥주잔 위에 젓가락 두개를 걸치고
양주잔을 올려놓은 뒤 ‘충성’을 외치며 테이블에 머리를 ‘쾅’ 부딪히면 양주잔이 맥주잔 속에 빠진다.
5 타이태닉주: 맥주잔에 맥주를 70% 정도 따르고 빈 소주잔을 띄운 뒤 그 소주잔에 한 사람씩 돌아가며 양주를 조금씩 붓는다.
소주잔을 가라앉히는 사람이 벌주로 마신다.
6 골프주: 목젖이 움직이는 횟수를 골프 타수로 계산해 벌주로 마신다. 단번에 마시면 홀인원, 목젖을 한번 움직이면 이글, 두번 움직이면 버디, 세번 움직이면 파로 간주된다.
7 뽕가리주(일명 금테주): 양주에 이온음료를 섞으면 잔 가장자리에 신비한 금테가 생긴다.
8 쌍끌이주: 두 잔의 폭탄주를 연달아 마시는 것.
9 흡혈귀주(일명 드라큘라주): 포도주에 위스키를 섞은 폭탄주.
위스키 대신 배갈을 쓰기도 하며 엄청 독하다.
10 황제주: 드링크류에 위스키를 섞은 폭탄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