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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마가복음 제6강
말씀: 마가복음 4:35-41
요절: 마가복음 4:39 “ 예수께서 깨어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되 잠잠하라 고요하라 하시니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지더라”
광풍을 잠잠케 하신 예수님
오늘부터 3주 동안 우리는 세 종류의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거라사 광인은 귀신의 세력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자해하며 무덤 사이를 뛰어다닙니다. 그는 귀신이 심는 미움과 낮은 자존감, 패배주의, 절망 등을 해결해 보려고 애를 썼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경우는 사랑하는 딸이 병에 걸려 죽어가는 고난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 도움을 청했지만 집으로 향하다가 딸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는 딸의 죽음 앞에서 두려움과 슬픔, 절망으로 침몰하고 있었습니다. 세 번째 고난은 오늘 우리가 다루게 될 고난입니다. 예수님의 최측근들이 탄 배가 갈릴리 호수에서 광풍을 만났습니다. 세 가지 고난 모두가 인간으로서는 감내하기 힘든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고난 속에 있던 사람들을 구원하사 당신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드러내십니다. 이 시간 삶속에서 만나는 고난을 어떻게 바로 보아야 하는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또한 예수님은 고난 속에서 어떤 믿음을 갖기를 원하시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35-37절을 보십시오. 그날 날이 저물어 갈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데리고 갈릴리 바다 저 편으로 가고자 하셨습니다. 항상 무리들을 섬기며 고단한 삶을 살던 예수님은 배에 타자마자 잠을 청하였습니다. 제자들도 오랜만에 휴식을 취하며 장난도 치고 물고기도 잡으며 노를 저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갈릴리 바다에 큰 광풍이 불기 시작했습니다. 갈릴리 바다는 사실은 호수입니다. 갈릴리 호수의 길이가 20㎞, 폭이 12km나 되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갈릴리 바다라고 부르곤 했습니다. 지형적인 이유 때문에 갈릴리 바다에는 때때로 갑작스럽게 폭풍이 불어 큰 놀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사람들은 이 바람을 미친바람,‘광풍’이라고 불렀습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섰던 제자들은 광풍에 급습을 당했습니다. 성난 파도는 예수님과 제자들이 탄 배를 삼킬 듯이 몰아쳤습니다. 제자들은 사색이 되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파도와 싸우며 배에 들어온 물을 퍼냈을 것입니다. 그들은 어부로서의 경험을 살려 살아남기 위해 애를 썼습니다. 삶을 살아가다가 고난을 당할 때 사람들은 다양한 반응을 보입니다. 불신자들도 이 땅에서 다양한 고난에 직면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고난 자체에 대해서는 그럴 수 있는 일이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왜 하필 나에게”하는 생각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은 또 다른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욥은 갑자기 자녀들을 잃고 재산을 잃고 건강까지 잃었습니다. 이때 욥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내가 모태에서 알몸이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욥1:21) 물론 욥도 너무 힘들어서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것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욥의 아내는 고난 앞에서 어떻게 반응했습니다. 그녀는 욥에게 말했습니다.“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어버리라!”아마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롭게 살아왔는데 고난을 만나자 마음이 많이 상했던 모양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다가 광풍을 만났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인데도 광풍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좇았는데도 광풍을 만났습니다. 이럴 수도 있는 것입니까? 물론입니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가 범죄하자 그들을 에덴동산에서 쫓아내셨습니다. 죄인이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고 영생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동시에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지었는데도 에덴동산에서 고난 없이 평탄하게 살게 하면 회개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사람들은 크고 작은 고난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재림을 통하여 이루어질 만유회복을 소망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고난이 없는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예수님이 재림하고 만유가 회복되기 전에는 이 땅에서 고난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로 죄 때문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난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앗수르와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가는 고난을 만났습니까? 그들의 죄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들의 죄를 지적하고 회개할 것을 촉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완악하여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다가 그들을 징계하셨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남편을 통하여, 아내를 통하여, 아이들을 통하여, 선배 목자를 통하여 우리에게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우리가 완악하여 회개하지 않을 때 고난을 허락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완악함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오래 참으시며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해야 합니다. 또한 내 죄가 아니라 타인의 부주의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기도 합니다. 요셉이 만났던 고난은 형들의 죄 때문에 생긴 고난입니다. 형들의 시기심과 미움이 요셉에게 큰 고난을 가져왔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모세는 결국 애굽의 총리가 되어 하나님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기근으로 죽어갈 수 밖에 없는 많은 생명을 살리는데 쓰임을 받게 되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허물과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실 하나님을 신뢰하며 살아갑시다. 다른 사람의 죄와 허물이 나에게 고난을 가져오듯이 우리의 죄와 허물이 다른 이에게 고난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용서하며 살아갑시다.
끝으로 예수님 때문에 받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은 예수님께서 주신 소명을 이루기 위해서 일생 날마다 죽는 삶을 살았습니다. 때로는 살 소망이 끊어지는 고난에 직면하기도 했습니다(고후 1:8-10). 바울 사도뿐만 아니라 수많은 크리스천들이 예수님 때문에 다양한 고난에 직면해야 했습니다. 우리 가운데도 예수님 때문에 다양한 고난을 받고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 때문에 고난 받는 성도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받고 있는 분들은 즐거워하십시오. 하늘에서 상이 클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까이서 섬기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의의 면류관, 생명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왜 사람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하나님이 선하신 분이라면 왜 고난을 허락하시는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 왜 고난을 막아서지 않는가?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인 C.S.루이스에게 한 청년이 찾아와 고난의 의미를 물었습니다.“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왜 고난을 주시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그러자 C.S.루이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고난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확성기와 같은 같습니다. 교만하고 타락한 인간이 고난마저 없다면 얼마나 더 교만하겠습니까?”그렇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만듭니다. 의지가 강하고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일수록 하나님 앞에서 거만하게 행동합니다. 그러나 고난을 당하면 겸손해집니다. 얼마나 연약한 자인가를 알게 됩니다. 물론 고난을 당하면 거꾸로 하나님을 더 대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체로 고난을 통과하며 우리는 겸손해집니다. 우리의 밑바닥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의지하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김창홍 목자님을 통해서 은혜를 받습니다. 두가지면에서입니다. 한 가지는 처음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제대할 때는 군부대에 남으라는 제안을 받을 만큼 건강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는 말에 은혜를 받았습니다.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작년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신 하용조 목사는‘걸어 다니는 종합병동’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습니다. 그는 건국대 시절 폐결핵을 앓았습니다. 나은 줄 알고 군대를 갔는데 그곳에 재발했습니다. 신학대를 졸업하고 연예인교회 목회를 시작하면서 간 질환과 당뇨를 앓았습니다. 그리고 간암에 걸려 여섯 번이 넘는 수술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오히려 건강이 나빠서 저의 한계와 분수를 깨닫고 하나님 앞에서 까불지 않게 됐습니다.”그는 건강이 좋지 않았기에 사람을 세워 함께 논의하며 사역을 섬기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없어도 원활하게 움직여질 수 있는 교회 시스템을 구축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고난이 이렇게 유익을 줍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이 세상에서의 삶에 끝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합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눈을 하나님 나라를 소망하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고난은 우리를 순수하게 만듭니다. 김진솔 목자님 가정은 15년 동안 열매를 맺지 못했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을 묵상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 체면 정도는 세워주어야 하지 않는가?’하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열매 없는 고난을 통하여‘열매가 없더라도 순수하게 하나님을 섬기자!’는 생각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가정에 생명의 열매를 맺는 즐거움을 주셨습니다. 예수 전도단의 총재의 경우도 고난을 통하여 더 순수하게 하나님만을 사랑하며 섬기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아내와 함께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그는 아내가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서 잠을 자다가 교통사고를 당했습니다. 차가 고속도로 아래로 굴러 떨어졌습니다. 그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아내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아내를 찾았는데 이미 호흡은 멎어 있었고 눈은 동공이 확장된 채로 고정되어 있었습니다.‘아, 이미 죽었구나!'라고 생각 하자 눈물이 쏟아졌습니다. 그때 그의 이름을 크게 부르는 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로렌!” 그것은 하나님의 음성임이었습니다. "네, 주님." 하고 감정이 북받쳐 갈라진 목소리로 대답했습니다. "로렌, 이래도 여전히 나를 섬기겠니?" 그는 눈물이 고인채로 하늘을 바라보며 대답했습니다. "예, 주님. 그래도 당신을 섬기겠습니다. 이제 제 인생의 남은 것이라곤 이 목숨밖에 없습니다. 이것도 역시 당신께서 원하신다면 취하실 수 있습니다." 잠시 후 주님은 다시 내게 말씀하셨습니다.“달린을 위해 기도해라.” 그는 있는 힘을 다해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아내는 기적처럼 회복되었습니다. 병원에 옮겨진 그와 그의 아내는 회복되었고 순수하게 주님을 사랑하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습니다. 고난은 우리를 순수하게 만듭니다.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더욱 하늘을 바라보며 하나님께 헌신된 삶을 살게 합니다.
그뿐입니까? 고난은 우리로 하여금 주의 율례를 배우고 주의 말씀을 지키는 삶을 살도록 합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시편119장71절). “고난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시편119장67절). C.S루이스는‘고통의 문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사람은 무서운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지 않는 습성이 있다. 그러므로 고통이란 것은 귀머거리에게 알아듣도록 하는 하나님의 확성기이다.”그렇습니다. 많은 분들이 평소에 성경을 공부하고 예배를 드리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난에 처할 때 영적인 귀머거리와 같은 우리들이 귀를 열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고난 자체는 결코 즐거운 것도 정상적인 것도 아닙니다. 하지만 하나님 안에서 고난을 바라보는 자는 고난 뒤에 오는 유익들을 만나게 됩니다.
저는 부활절에 한 리더를 심방 갔다 돌아오다가 차량 사고라는 고난에 직면했습니다. 제가 탄 차량은 붕 떠서 여러 번 뒹굴었습니다. 저는 그 짧은 순간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때 차를 폐차해야 하는 큰 사고를 당했지만 하나님의 보호하심으로 인해 큰 상처 없이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 사고는 일어날 수 있는 사고였습니다. 우선 비가 오는 날에 속도를 낸 저의 불찰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도로에 물이 많이 고여 있어서 큰 사고가 났습니다. 그런데 이 고난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저의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셨습니다. 고난 중에서도 지키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맛보게 하셨습니다.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공동체의 소중함을 알게 하셨습니다. 주님 안에서 살아가는 삶 자체가 은혜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로 기억하고 있는 고난은 두 번째 동생이 전신에 화상을 당하는 사건입니다. 그는 저를 대신하여 가정을 책임져왔습니다. 그런데 일을 하다가 전신 화상을 당하였습니다. 물론 이 사고는 일어날 수 있는 사고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시지만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찾아왔습니다. 저는 하나님 앞에 나아가 이렇게 고백했습니다.“하나님! 이러실 수 있습니까? 저 대신에 가정을 책임을 지던 동생이 화상을 당하여 죽음 수도 있다니요” 그러나 저는 회개하고 하나님께 나아가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으로 바꾸어 주시길 간구했습니다. 그때 동생은 살아났습니다. 하나님은 이 사고를 부모님들로 하여금 기독교로 개종하는 계기로 삼아주셨습니다. 세 번째로 기억하고 있는 고난은 공동체의 아픔입니다. 이 고난은 저로 하여금 건강한 자부심만 남기고 헛된 자부심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소홀히 했던 것을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사람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외하기에 영적인 질서를 지키고자 하게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공동체에 불어 닥친 광풍도 잔잔케 하여 주셨습니다. 고난이나 고통 자체가 좋다는 것은 아닙니다. 고난이나 고통은 우리에게 고통을 가져다 줍니다. 이 땅에 일어나는 고난을 정상적인 것으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있는 자들은 고난이나 고통을 통해서 축복을 받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광풍에 배가 금방이라도 침몰할 위기 속에서도 조금도 요동하지 않고 주무시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광풍 속에서 눈을 감고 평안하게 잠을 청하는 모습을 통해서 제자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시길 원하셨던 것 같습니다. 도대체 무엇을 가르쳐 주시길 원하셨을까요? 38절을 다시 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을 깨우며 무엇이라고 말했습니까?“스승님! 일어나세요. 함께 물을 퍼야 하지 않을까요?”“스승님! 하나님께 기도해 주세요.”하고 말했습니까? 아닙니다.“선생님이여 우리가 죽게 된 것을 돌보지 아니하시나이까?”표준 새번역에서는 이렇게 번역했습니다.“우리가 죽게 되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습니까?”제자들은 예수님을 따르는데도 어찌해 볼 수 없는 고난에 직면했습니다. 이것을 생각하면 힘든 생각이 몰려왔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힘든 것은 예수님께 주무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고난에 처한 나를 돌아보지 않는 것 같을 때 힘든 생각이 몰려옵니다.
39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깨어나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를 향해 말씀하셨습니다.“잠잠하라 고요하라”그러자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하여 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제자들을 책망하셨습니다.“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예수님이 원하시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요? 바람과 파도까지 잔잔하게 하시는 예수님을 믿음일까요? 예수님은 왜 잠을 주무셨을까요? 정말 제자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을 보며 아무렇지 않았을까요? 예수님이 잠을 자는 것을 보며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저렇게 평온하게 잠을 주무시는 것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신뢰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좋지 않을까요? 예수님은 광풍이라는 상황보다는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광풍 속에서도 보호하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잠을 청하셨습니다. 사명을 완수하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기에 어떤 누구도, 어떤 세력도 그를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할 때 우리는 광풍이 대작하는 상황 속에서 예수님은 평안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기에 광풍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최선을 다해 행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믿음을 원했지 않을까요?
물론 예수님은 바람과 파도까지 잔잔하게 하시는 분으로서 자신을 계시하고자 하셨습니다. 지금까지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대한 랍비나 선지자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선지자보다 더 크신 분이십니다. 바람과 파도를 잔잔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질병의 광풍을 만날 수 있습니다. 자녀문제는 부모님의 마음에 광풍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게임중독에 걸린 자녀가 엄마에게 쌍욕을 하기도 합니다. 사업실패로 인해 부도의 광풍이 몰아치기도 합니다. 부부관계의 위기라는 광풍이 몰아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다양한 광풍 속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말합니다.“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광풍을 평정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광풍을 고요하게 하사 물결도 잔잔하게 하시는도다"(시편 107:27-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