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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2일 추가 개통된 지리산길 40㎞
함양 세동~산청 수철리 16㎞ & 남원 인월~주천 24㎞
지난 5월 13부터 2박3일간 나는 새로 개통된 지리산 길을 천천히 걸었다.
함양군 휴천면 세동리~산청군 금서면 수철리 구간, 남원시 인월면 구인월교~주천면 안솔치마을 구간 등
40km를 정식 개통하기(5월 22일) 전에 나 홀로 야영을 하며 먼저 걸어보았다
5월 신록이 한창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는 지리산의 풍경을 담았다.
말 그대로 감개무량했다.
그 동안 2만 리 이상을 걸었지만, 모처럼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천천히 걸어보는 길이었다.
지리산에 들어온 지 12년 만에 850리 둘레길을 세 번째 걷기 시작한 셈이니
낯익은 마을 마을이 어느새 고향처럼 정겨웠고,
강과 들녘과 고갯길과 당산나무 노거수들이 마치 나를 반기는 듯했다.
2001년에는 수경 스님과 함께 ‘지리산 댐 백지화’ 및
한국전쟁 전후에 희생된 좌우익의 모든 원혼들을 위한 ‘지리산 위령제’를 지내기 위해
20명으로 꾸린 도보순례단의 대장 역할을 맡아 걸었다.
그리고 자그마치 1년간 1만 리를 걸었던 2004년에는 실상사의 도법·수경 스님과 함께
“평화를 원한다면 내가 먼저 평화가 되자”는 슬로건을 내걸고
전국의 모든 마을을 걸으며 얻어 먹고 얻어 자며 공부하는
‘생명평화 탁발순례단’의 총괄팀장을 맡아 850리 둘레길을 1500리로 두 배 늘려 45일간 걸은 적이 있다.
바로 그때 처음 셋이서 제안한 ‘지리산 도보순례길’이 지금의 ‘지리산길’로 세상에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당시 순례단의 총괄을 맡은 나는 몇 번의 사전답사를 하며 최대한 비포장 길로 유도하려 했으나
제대로 선을 잇기 어려워 상당부분 고속질주의 아스팔트길을 걸을 수밖에 없었다.
직립보행의 인간이 길 위에서 차량들에 소외되고,
소외되는 정도가 아니라 걷는다는 것 자체가 실로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절감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섬진강변 꽃길 19번 국도는 또 얼마나 위험한가.
가장 아름다운 길이 오히려 가장 위험한 길이었던 것이다.
갓길이 좁은 길을 걷는다는 것은 먼저 목숨부터 내놓는 일이었으니,
마음 편히 풍광을 감상하며 사색과 성찰을 할 수 있는 길이 너무나 절실했던 것이다.
이번에 새로 개통된 100리 길을 걸으며 만난 사람은 불행인지 다행인지 ‘단 한 사람’뿐이었다.
물론 길 근처의 논밭에서 바쁘게 일하는 어르신들에겐 왠지 자꾸 미안해서
어쩌다 눈길이라도 마주치면 목례를 하고는 지나쳤으며,
산림청의 약속 불이행으로 상반기 예산마저 지급 중단되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개통구간의 막바지 작업에 혼신의 힘을 기울이는 사단법인 숲길의 여성 일꾼들을 만나기도 했다.
지난 5월 22일 개통된 지리산길 산청 구간 상사폭포에서 쌍재로 오르는 호젓한 옛길.
함양군 세동마을~ 산청군 수철리 구간
그러나 나는 아직 그 ‘단 한 사람’의 성도, 이름도 모른다.
다만 산청군 금서면의 방곡리에서 상사폭포를 지나 쌍재로 오르는 아름다운 숲길에서 그 사내와 아주 잠깐 마주쳤을 뿐이다.
인기척이 있을 리 만무한 깊은 산속 모퉁이를 돌자마자 부스럭하는 소리에 화들짝 놀랐지만
이내 서로의 눈빛이 마주치는 순간 경계심을 늦추었다.
얼핏 봐도 순한 초식동물의 눈빛이었다.
40대 중후반의 보통 체격으로 순박해 보이면서도 이목구비가 뚜렷한
그 사내 또한 이내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빈손이었다.
“이 근처 마을에 사십니까?”
“예. 바로 저 아래 숲속에….”
말끝을 흐리며 그 사내는 손짓으로 층층나무 꽃이 환하게 핀 산속을 가리켰다.
도저히 민가가 있을 것 같지 않은 곳에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의 자그마한 집 한 채가 숨어 있었다.
얼핏 보아도 천하의 은둔지였다.
지리산 길을 오르내리면서도 임도에서 가까운 약초 재배 농가와 밭 말고는 그 집으로 가는 길을 본 적이 없었다.
“사진을 찍으시나 보지요?”
“예. 그냥 숲길이 너무 좋아서. 전 구례에 삽니다. 근데 얼마나 되셨는지요?”
“아하, 구례? 한 10년 정도 됐네요. 몸이 좀 안 좋아서.”
그러나 몸이 안 좋다는 그의 혈색은 너무나 생기가 돌았으며,
그리 크지 않은 체구에서 풍겨 나오는 기운이 신록의 푸른 산기운처럼 맑았다.
어림짐작에도 평범한 복장의 그가 속세에서 그리 공부를 많이 하거나 돈을 많이 벌거나 유명세를 탄 것 같지 않았다.
다만 12년 동안 나 또한 산중에 살면서 수많은 도인이나 스님을 만나 보았지만
대개는 눈빛이 너무 강하거나 눈동자가 흔들리거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뭔가 오히려 탁하다거나 불안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런데 꽁지머리를 기르거나 생활한복을 입는 등의 아무런 꾸밈도 없는 이 사내는 그저 평온하기만 했다.
단번에 직감할 수 있었다.
상대를 순간에 무장해제시킬 정도로 평온하다는 것은 곧 그만큼 내공이 만만치 않다는 것임을.
지금 농촌에서는 한창 모내기에 바쁘다.
슬쩍 눈길을 돌려 그의 집 쪽을 바라보는데, 무언가 흰빛의 기운이 언뜻 스치는 것 같았다.
“근데, 뭔가 흰빛이 보이는데요, 누가 있나요?”
“아, 예. 얼마 전에 공부하러 온 사람이…….”
“그렇군요, 공부라…….”
그는 씨익 웃으며 “한번 놀러 오세요” 한마디 던지고는 말문을 닫았다.
나도 “예, 조만간 따로 한 번 찾아뵙지요” 답하고 돌아섰다.
그리고 돌아보지 않았다. 그 사내 또한 그랬으리라.
스스슥 풀잎을 스치는 발자국 소리만 들렸다.
이렇게 그 사내와의 만남은 채 3분도 걸리지 않았다.
인연이라면 참으로 깊은 인연이지만 이렇게 산중의 사람들은 서로의 출처를 깊이 묻지 않는 법이다.
굳이 묻지 않아도, 오래 주절주절 얘기하지 않아도 그 향기와 눈빛만으로도 수많은 말을 나눌 수 있는 것이다.
도대체 서로를 꼭 더 알아야만 할 이유가 어디에 있는가.
산중에 아무리 오래 살아도 눈빛이 너무 강하다면
사실은 적개심이나 욕망이 아직도 살아 꿈틀거리는 육식동물의 그것과 비슷한 것이고,
눈빛이 너무 흐리면 속내를 너무나 잘 숨길 줄 아는 고수이되 음흉한 것이고,
눈알을 너무 자주 굴리면 심약하거나 불안한 것이라 했으니
행여 내가 잘못 보거나 착각했을 수도 있지만,
저 산중에 초식의 고라니처럼 눈망울이 맑은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얼마나 아름다운 일이며 크나큰 위안인가.
산청 구간에 있는 상사폭포.
강길·들길·숲길·계곡길·산길 등 아름다운 길 연속
언젠가 다시 산속에서 마주치거나 내가 먼저 불쑥 저 사내의 집을 방문할 날이 있으리라.
그 사내가 있든 없든 차 한 잔 하자며
혹은 술 한 잔 하자며 찾아갔다가 집에 없다면 툇마루에 멍하니 앉았다 오면 될 것이고,
때마침 그가 있어 다시 만난다면 그제서야 환하게 웃으며
마치 오래된 불알친구를 만난 것처럼 말문을 트고 맞절을 하며 비로소 통성명을 하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다.
그러나 우리의 현대사는 누구인지 모르면 곧 적이 되는 시절이었다.
그 이전의 역사는 차치하더라도 일제강점기와 아비규환의 한국전쟁을 치르며
입장이 분명치 않거나 의심이 되는 자는 곧 적이었으니 쫓겨나거나 신고당하거나 처형을 당했다.
더구나 함양군 휴천면과 산청군 금서면 일대의 이 구간은 비극의 극지인 셈이다.
새로 열린 이 지리산길은 강길과 고갯길, 들길, 숲길, 계곡길, 산길 등 참으로 아름다운 길의 연속이지만
방곡리에 세워진 ‘산청·함양 사건 추모공원’을 그냥 지나칠 수 없듯이 이 지역이 바로 민간인 학살 사건의 역사적 현장이다.
한국전쟁 당시인 1951년 2월 7일, 지리산 동부 왕산 인근의 빨치산 토벌 책임을 맡은 부대는
육군 11사단(사단장 최덕신) 9연대(연대장 오익경)였다.
산청군 수철리 쪽에서 왕산을 넘어 가현마을로 진입한 3대대장 한동석 부대는
주민들이 빨치산과 모두 한통속이라고 판단해 사람·집·가축·식량 모두를 제거하는
‘견벽청야’ 작전으로 가현·방곡·점촌마을 주민들을 학살하는 사건을 일으켰다.
양민을 모두 통비 분자로 간주한 것이다.
이 사건을 일으킨 부대는 나아가 함양군 유림면 서주마을 사람들을 죽이고
이틀 후 거창군 신원면의 주민들까지 죽이는 ‘거창사건’을 일으킨 바로 그 부대였다.
당시 마을 사람들의 증언과 기록 문서에 따르면,
한동석 부대의 한 소대 병력이 지시대로 임천강 주변의 문정·한남·동강·남호리 주민 모두를 학살하려 했으나
휴천면장이 이를 극구 반대하는 바람에 다행히도 임천강 주변의 주민들은 모두 살아남게 되었다고 한다.
(좌)임천강변의 보리밭이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하고 있다.
(우)쌍재 오르는 길엔 야생화도 길손을 반긴다.
한편 방곡마을 아래인 기암터 마을에서 빨치산과 한동석 부대가 마주쳤는데,
피아 구분이 어렵자 머뭇거리며
“그쪽은 누구네 부대요?” “거긴 어느 부대 어느 소속이오?” “동무 뭐라 했소?”
하는 순간 뒤늦게 총격전이 벌어졌다는 일화는 이미 영화의 한 장면으로 재연될 정도로 유명하다.
웅장해 보이는 방곡마을 추모공원 앞 왼쪽으로 아름다운 마을숲이 있는데,
그곳을 지나 작은 개울을 건너면 상사폭포와 쌍재로 오르는 참으로 멋진 오솔길이 나온다.
이번에 새로 개통된 길 중에서
운봉의 회덕리~안솔치마을 구간과 쌍벽을 이루는 숲길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계곡길을 따라 아주 천천히 한 시간 정도 오르면
그리 웅장하지는 않지만 아담하면서도 가슴 아린 전설이 서려 있는 상사폭포가 나온다.
요약하자면 이렇다. 아주 옛날 한 사내가 여인을 짝사랑하다 못해 상사병으로 죽고 말았다.
그 사내는 죽어서도 여인을 잊지 못해 뱀으로 환생해 그녀의 몸속으로 꼬리를 감추며 들어가려 했는데,
너무나 놀란 그녀가 뱀의 꼬리를 잡고 뿌리치는 바람에 즉사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그러자 그 자리에 뱀의 형상으로 계곡이 생겨났으며,
그 여인은 뒤늦게 상사폭포가 되어 지금까지 더불어 울부짖듯 흐르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전설이 다 그렇지만 이 또한 은근한 성적 상징체계로 이루어져 있다.
뱀은 남근(양물)을, 폭포는 여근(여궁)을 의미하므로
이 전설을 곱씹어보면 현실적으로 흔히 있을 법한 얘기이니 저절로 묘한 미소를 띠지 않을 수 없다.
때마침 검은등뻐꾸기가 ‘홀딱벗-고, 홀딱벗-고’ 놀리듯 울며 따라오니
조금은 부끄러운 듯 야한 상사폭포의 전설과 더불어 한결 생기가 도는 산행이 아닐 수 없다.
여전히 빈 방이 너무도 많은 층층나무 꽃들과 더불어 온갖 꽃들이 만화방창 환하되 푸른 오솔길,
그리고 약초 생산지로 유명한 산청답게 곳곳에 약초밭이 보이고
아주 가까이 왕산과 필봉산이 아우르고 있는 쌍재와 고동재를 잊을 수 없다.
경남 함양과 도경계를 이루는 전북 남원은 한국 고전소설과 판소리의 무대로 유명한 곳이다.
<춘향전> <흥부전>,
그리고 마천사람이라는 설이 있는 ‘삼남의 잡놈’ 변강쇠와 ‘평안도의 음녀’옹녀를 노래한
<변강쇠타령><가루지기타령> 등이 모두 지리산길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흥부전>의 무대인 인월면 일대와 동편제 판소리의 가왕 송흥록·국창 박초월의 생가 및
이성계의 황산대첩비가 있는 운봉읍 화수리,
그리고 춘향이 가묘가 있는 주천면 등을 지나는 길이 바로 이번에 새로 개통된 길이다.
구인월교~주천 안솔치마을 구간
(사)숲길 지리산 안내센터가 있는 인월면의 구인월교에서 시작되는 새 구간은
흥부골자연휴양림을 지나는 임도를 따라 내려가 운봉의 농로로 진입한다.
왼쪽의 지리산 태극종주 시발점인 바래봉 철쪽꽃들이 절정을 치달으며 내려다보고 있는
해발 400m의 고원분지형 운봉 평야를 람천따라 횡단하는 길은 판소리처럼 더없이 유장하다.
하지만 길이란 게 늘 이렇게 유명하고 역사적으로 멋진 일들로만 연결되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감추고 싶은 부끄러운 일들과 죄까지 내장하고 있으며,
선남선녀들의 남모르는 사연까지 모두 안고 있는 것이다.
운봉 덕치리와 주천면 안솔치마을 사이의 지리산 옛길.
최근 열린 지리산학교의 그림반 선생을 맡은 화가 오치근이 바로 지리산길의 신기리 출신이다.
지금도 부모님은 그곳에서 농사를 짓고 있다.
언젠가 산사내들끼리 술 한잔 마시다 불콰해지자 저마다 첫 경험 얘기를 한 적이 있는데,
후배 오치근이 “사춘기인 중학교 2학년 때인가 보름달이 뜨는 봄밤, 람천의 둑방길 풀밭에 홀로 누웠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춘정이 돌았는지 슬슬 아랫도리를 만졌는데,
그러다 그만 사정을 하고 말았어.
그때는 그게 뭔지도 몰랐지만 참으로 황홀하기만 했지”라며
첫 자위의 기억을 쑥스럽게 고백한 적이 있다.
바로 그 둑방길 현장이 다시 지리산길로 태어난 것이다.
언젠가는 화가 오치근이 그날의 아련한 봄밤의 정취를 명작의 그림으로 그릴 날도 있으리라.
이렇듯 어쩌면 역사에 남지 않을 일들도 소소하게 이 길은 그 모두를 기억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길뿐만이 아니라 아무리 헙수룩한 집이라도 세상의 모든 집은 누군가의 첫사랑인 ‘옛 애인의 집’이요,
그 모든 마을 숲이나 다리 아래나 둑방길은 그 첫사랑들의 밀회 장소가 아니었겠는가.
그리하여 따지고 보면 마침내 세상 도처가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는 것이다.
운봉 구간 덕치리 논길.
더군다나 행정리 서어나무숲에는 수많은 사연들이 그 고목들의 나이테 속에 무슨 보물처럼 깊이 내장돼 있지 않겠는가.
산림청과 생명의 숲이 주최한 ‘제1회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 마을숲 대상을 받은 이곳은
임권택 감독의 <춘향뎐>에서 춘향 아씨와 이 도령이 노닐던 바로 그 숲이다.
200여 년 된 서어나무 64그루가 하나같이 훤칠한 키에 몸매도 미끈한데다 울룩불룩 근육질이다.
그래서인지 서어나무는 곧잘 ‘보디빌더’로 비유되며 ‘근육나무’라고 불리기도 한다.
‘향단아 그넷줄을 밀어라./머언 바다로/배를 내어 밀듯이/향단아.’
서정주의 시 ‘추천사’처럼 숲 한쪽에 그네가 매달려 있는 이 숲은
최근 긴 나무 의자와 평상 등을 곳곳에 설치해놓아 운봉평야를
그늘도 없이 가로질러온 나그네들이 꿀맛 같은 낮잠을 자기에 참 좋은 곳이다.
운봉읍 행정리의 서어나무마을 숲.
안솔치마을 가는 길은 환상적인 소나무 숲길
그리고 또 한 곳 꼭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바로 주촌면 덕치리 회덕마을의 샛집이다.
샛집은 억새풀로 이엉을 이어 두텁게 지붕을 올린 집을 말한다.
예전에는 샛집이 부잣집이었고, 초가집은 가난한 집이었다.
고원지대인 운봉에는 폭설이 자주 내리니 용마루를 높이고 지붕을 경사지게(물매) 만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일설에 의하면 임진왜란 당시 숨어든 왜군 패잔병들이 처음 샛집을 짓고 살았다고 하는데,
그래서인 일본의 전통 가옥(합장집) 같은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옛날 것을 싹 없애불고 낭게 대접을 받네” 한 할머니의 말씀이 귓전을 맴돈다.
드디어 마지막 구간이다.
회덕마을 샛집을 둘러보고 마을 앞 느티나무 쉼터에서 좀 쉬었다가 작은 돌다리를 건너 산길로 접어들면
거기서부터 주천면 안솔치마을까지 주욱 이어지는 환상적인 소나무 숲길이 나온다.
(사)숲길에서 새 개통구간 중 가장 자랑하고픈 곳이라고 힘주어 말하는 이유를 금방 알 수 있었다.
내심 구룡폭포에서 구룡계곡을 따라 육모정으로 내려가는 멋진 길을 두고
왜 이 산길을 고집했을까 의아하기도 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내 동의하고 말았다.
솔정자를 지나 오르락내리락 이어지는 소나무 숲길은 끝끝내 감추어두고픈 길이었다.
솔잎 갈비가 푹신한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이내 보랏빛 붓꽃 군락지 등 온갖 야생화들이 피어 있고,
꾀꼬리 울고 춘정을 못 이기는 수꿩들이 “꿔엉 꿩” 제 이름을 부르며 푸드득 날아올랐다.
그런데 문득 이 무슨 낭패인가.
이토록 아름다운 길 위에서 주책없이 똥이 마려웠다.
아무도 없는 산길이지만 슬금슬금 주변을 살피고는 길에서 벗어나 움푹 꺼진 숲속으로 스며들어
나뭇가지로 낙엽과 흙을 파내고 그 자리에 일을 보고는 얼른 덮어두었다.
주천면 안솔치마을 숲.
머지않아 거름이 되겠지만 자꾸 뒷골이 당겼다.
언젠가 ‘지리산길 홈페이지’에서 일어난 소위 ‘똥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창원마을에 귀농 10년차라는 명문대 출신 강모씨가 지리산길의 폐해를 지적하며 똥사진을 올렸던 것이다.
그러니까 그동안 산길을 걸었던 사람들은 모두가 혐의자가 되고 만 것이다.
지리산길 개설에 사사건건 비판적인 강씨의 말도 일리야 없지 않지만,
그래도 마을 안팎으로 탄원·고발·진정 등을 일삼는다는 소식을 들으며 뒷맛이 개운치 않은 것도 사실이다.
자연을 보전하는 것 못지않게
우선 주민들과 화합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공동체의 일원이 되려고 노력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진정한 생태적 삶에 대해 많은 고민거리를 안겨준 것만은 사실이다.
“생활한복 입고 면사무소에 들어서는 귀농자를 보는 순간 직원들은 또 무슨 민원을 들고 왔을지 긴장한다”는
어느 면직원의 얘기가 떠오른다.
그건 그렇고 나 또한 이제 똥사건의 혐의자가 아니라 그 범법자가 된 것이다.
문득 상사폭포 위에서 만났던 초식동물처럼 눈빛이 맑은 그 사내가 생각났다.
그리고 안솔치마을로 내려가는 길에 육모정의 춘향이 가묘 쪽에서 검은등뻐꾸기가 울었다.
어찌 들으면 ‘홀딱 벗~고 홀딱 벗~고’ 나를 놀리는 듯했고,
또 어찌 들으면 지나는 길손에 따라 ‘쪽박 차~고 쪽박 차~고’
‘빡빡 깍~어 빡빡 깎~어’ ‘술값 갚~어 술값 갚~어’ ‘너 똑똑~해 너 똑똑~해’
마치 다 안다는 듯 울고 있었다.
2박3일간 지리산 둘레길을 걸으며 내게 잠깐 모습을 보여준 산토끼와 고라니,
그리고 이름을 다 알 수조차 없을 정도로 화사한 얼굴들을 보여준
5월의 온갖 야생화며 나무며 돌들에게 다시금 안부의 인사를 묻는다.
휴천면 지리산길을 지나는 마을에 있는 팽나무.
지리산 둘레길
이원규
5월의 푸른 눈빛으로 그대에게 갑니다.
함부로 가면 오히려 병이 더 깊어질 것만 같아
생의 마지막 사랑마저 자꾸 더 얕아질 것만 같아
빠르고 높고 넓고 편한 길을 버리고
일부러 숲길 고갯길 강길 들길 옛길을 에둘러
아주 천천히 걷고 또 걸어서 그대에게 갑니다.
잠시라도 산정의 바벨탑 같은 욕망을 내려놓고
백두대간 종주 지리산 종주의 헉헉
앞사람 발뒤꿈치만 보이는 길 잠시 버리고
어머니 시집 올 때 울며 넘던 시오리 고갯길
장보러 간 아버지 술에 취해 휘청거리던 숲길
애빨치 여빨치 찔레꽃 피는 돌무덤을 지나
밤이면 마실 처녀총각들 물레방앗간 드나들고
당산 팽나무 달 그늘에 목을 맨 사촌 누이가
하루 종일 먼 산을 바라보던 옛길
그 잊혀진 길들을 걷고 걸어 그대에게 갑니다.
찔레순 꺾어 먹으며 층층나무 환한 용서의 꽃길
내내 몸을 숨긴 채 따라오던 검은등뻐꾸기가
홀딱벗-고, 홀딱벗-고! 욕망을 비웃는 반성의 숲길
3도 5군 12면 100여 마을을 지나는
성찰과 상생의 지리산 둘레길
어머니의 ○, 용서의 ○, 사랑의 ○, 오옴의 ○
비로소 발자국으로 850리 거대한 동그라미 하나 그리며
날마다 보랏빛 붓꽃으로 신록의 편지를 쓰는
5월의 푸른 눈빛으로 그대에게 갑니다.
그리하여 돌아올 때는 그대와 더불어
섬진강변을 걸어 이팝나무 꽃그늘 속으로 왔으면 좋겠습니다
검은등뻐꾸기가 어허허-허 어허허-허! 놀리는 소리에
괜스레 얼굴 붉히며 슬쩍 손이라도 잡으며
상사폭포 수락폭포를 지나 그렇게 돌아왔으면 좋겠습니다.
글·사진 이원규 시인
이원규(李元圭) 약력
1962년 경북 문경 출생, 1984년 <월간문학>, 1989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강물도 목이 마르다> <옛 애인의 집><돌아보면 그가 있다> <빨치산 편지>
산문집 <지리산 편지> <길을 지우며 길을 걷다> 등을 펴냈다.
신동엽창작상, 평화인권문학상 수상. 순천대 문창과, 지리산학교, 실상사 작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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