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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55코스 역방향 제1부
소호요트장 앞-소호 동동다리-항호마을-장성마을 앞-선소유적
20220223
1.소호 동동다리를 건너 거북선의 고향을 찾아서
남파랑길 56코스를 역방향으로 걸은 뒤 56코스 출발지점인 소호요트장 버스정류소에서 곧바로 55코스를 역방향으로 출발한다. 휴대폰 배터리를 충전할 겸 점심을 먹기 위해 고민하는데 일행의 한 분이 국밥집을 소개해 주었다. 이름이 멋지다. '내가 조선의 국밥이다'를 줄인 '내조국' 국밥집. 국밥집에서 9천원 가격의 머리국밥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해치우고 소호요트마리나 앞으로 되돌아와 55코스를 역방향으로 진행하였다.
해상보도교인 '소호 동동다리'를 걷는다. 이름이 왜 '동동다리'가 되었을까? 인근의 안산동 장성마을 앞 포구를 예전에 '장생포'라고 하였는데 고려말 왜구들이 이곳을 침입하였을 때 유탁 장군이 이들을 물리쳐 쫓아내자 군사들이 기뻐하여 '장생포곡'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그런데 '장생포곡'이 고려가요 '동동'과 동일하다는 설이 있어 해상보도교를 '동동다리'라고 명명했다고 설명안내판에 적혀 있다. '동동(動動)'은 북소리를 흉내낸 의성어이다. 고려가요 '동동(動動)'은 서사와 12달의 노래를 합쳐 모두 13연으로 된 월령체가(달거리노래)로 '동동'은 후렴구로 나타난다. "덕일랑은 뒷 잔에 바치옵고 복일랑은 앞 잔에 바치옵고 덕이며 복이라 하는 것을 바치러 오십시오. 아으, 동동다리"(서가) "정월달의 냇물은 아으 얼었다가 녹고 녹았다가 얼며 정다운데, 이 세상에 태어난 이 몸은 임도 없이 홀로 살아가는구나. 아으, 동동다리."(1월령) 이렇게 하여 12월령까지 이어진다.
둥둥둥~ 북소리를 들으며 동동다리를 건넌다. 고려말의 유탁 장군의 승전가는 진짜 어떠했을까? 또 이곳이 임진왜란 때 거북선을 만든 선소유적이 있는 곳, 거북선이 소호 앞 바다를 떠가는 모습도 상상해 본다. 그 앞 바다에는 가덕도와 장도, 그리고 주변의 산들, 아름다운 자연 풍경 속에 소호동의 아파트빌딩군들이 솟아 있다.
소호 동동다리를 벗어나 소호동의 중심지 상가들을 벗어나면 항호마을이 나온다. 이름에 호소력이 있다. 장도와 가덕도가 방패처럼 막아서 있는 가막만 장생포 입구 바다에 잘룩한 모가지처럼 좁은 바다를 목 項, 호수 湖, 항호라 이르는 듯하다. 그 이름에서 향기가 퍼져 흐르는 듯 아름다운 여인이 살며시 걸어나오는 듯 환상을 자아내는 이름이다. 항호를 가로질러 소호와 웅천을 잇는 해상교 건설공사가 한창이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은은한 향기와 꽃다운 여인이 바다로 깊숙히 들어가 사라져 버린다.
항호마을을 벗어나 소호동에서 안산동으로 넘어오니 해안도로에 후박나무 가로수가 푸른 잎을 자랑하며 줄지어 있다. 56코스 소호동 가로수는 먼나무들이 붉은 열매를 훈장처럼 빛내면서 즐비하였다. 그런데 안산동의 후박나무는, 남부 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먼나무들과 다르다는 듯 새로운 활력을 길손의 가슴에 쏟아붓는다. 후박나무의 후박한 덕을 쉽게 접하지 못한 길손은 발걸음을 자꾸 멈추고 후박나무 아래에 서서 나뭇잎과 부풀어오른 꽃망울을 살피며 가슴 뜨거워졌다. 후박나무 꽃들이 피는 시절에 다시 이곳을 찾을 수 있을까? 그렇게 되기를 소망하며 후박나무 가로수 해안도로를 따뜻한 가슴으로 걸었다.
해안로에 조성된 조형물에서 흘러오는 파도의 소리, 봄날의 왈츠를 환상하는 즐거움도 크다. 안산동 장성마을 앞이 장생포, 이곳에서 유래한 노래가 고려가요 '장생포곡'이라지만 노래가 전하지 않는다. 이 노래가 고려가요 '동동'과 동일하다는 가정 하에 소호동의 해상보도교를 '동동다리'로 탄생시켰다. 아으, 동동다리. 아, 둥두우둥둥~ 북소리가 들려오는 듯.
장성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돌아나가면 여수시의 중심지 학동으로 들어가게 된다. 호텔건물이 솟아 있다. 가막만의 북쪽 끝에 자리한 호텔 객실에서 가막만을 바라보는 풍경이 멋질 것임이 분명하다. 이런 호텔의 객실료는 비쌀 것이다. 길손은 경제적으로 풍요롭지 못하여 이런 호텔을 이용할 수 없다. 이런 호텔에 묵으면서 가막만의 해넘이 풍경을 감상할 때가 올까? 오지 않아도 후회하지 않는다.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즐길 수 있는 최선을 즐기면 되는 것. 학동 앞 바다에서 오리들이 유영하고 갈매기들은 오리의 유영 위로 날아다닌다. 그 건너편에 거북선을 건조(建造)한 선소유적이 숨겨져 있다.
청년회의소 선소체육공원 입구에는 학동 앞 바다에 낚시를 던지는 조형물이 길손을 반긴다. 그러나 이곳은 낚시질보다는 임진왜란 전승의 바탕이 되는 거북선이 만들어진 곳, 거북선과 관련되는 조형물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이런 생각을 품었다. 공원에 높직하게 솟아 있는 '선소유적 준설작업 현황' 그림판과 '충무공의 얼이 담긴 거북선의 고장 여수' 홍보판이 길손의 마음에는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공원 끝 선소유적 입구에는 선소유적을 복원하면서 마을을 떠나게 된 선소마을 이주민들의 망향비와 석장승 한 쌍이 세워져 있다. 장승이 세워진 공간은 민간인과 구별된 공간임을 경계로 표시하며, 각종 재앙을 막는 성역임을 표시하는데, 그 장승을 여수에서는 벅수라 한다고 한다. 돌장승(벅수) 한 쌍은 마멸과 파손이 심하여 구체적인 모습을 파악할 수 없었지만 새겨진 명문(銘文) ‘화정려(火正黎)’ 글자를 읽을 수는 있었다. ‘화정려(火正黎)’는 땅을 맡은 관직을 맡았던 신을 가르킨다고 한다.
선소유적 입구부터는 학동에서 시전동으로 들어간다. 물새들의 놀이터 학동 앞 바다와 걸어온 장생포 해안로를 바라보면서 남파랑길에서 잠시 벗어나 선소유적으로 들어갔다. 거북선을 만든 곳은 지금의 '시전동 선소'(조선 시대에는 순천부에 속했다고 함), 여수시 중앙동의 '전라좌수영 본영 선소', 여수시 돌산읍 '방답진 선소' 등 세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거북선 이름도 만들어진 곳의 이름을 따서 '본영귀선', '방답귀선', '순천귀선'이라 불렸다고 한다.
망마산 자락, 가막만 최북단의 후미진 곳에 깊숙하게 숨어 있는 이곳이 임진왜란의 선봉 거북선이 탄생한 곳이다. 그런데 그 유적이 요란하지 않다. 아니, 요란한 것이 아니라 단정하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을 내세워 관광화한 여느 지역의 유적에 비해 표나게 단아하다. 실망스러운가? 그 표나지 않은 것에 길손의 가슴이 멍멍해진다. 충무공의 얼이 깃든다는 것은 이러한 단정함과 자연스러움에 있다는 생각이 크다. 허장성세(虛張聲勢)나 외화내빈(外華內貧)은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가장 경계한 것이 아닐까?
선소유적 굴강 앞 노거수들이 그 허장성세를 비웃으며 더욱 겸허한 자태를 드러내고 있다. 굴강 앞 돌장승 한 쌍도 무덤덤하게 서 있다. 다만 오른쪽의 돌장승은 복원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깨끗하다. 그들이 지키고 있는 굴강은 거북선 두 채가 들어간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과연 그럴 수 있는지는 의문이 든다. 최근에 복원된 풀뭇간, 아마도 이순신 장군이 머물렀을 세검정과 무기고를 보고서 가막만 끝 해안의 계선주로 나갔다.
꼭꼭 숨은 선소유적 앞에 세워진 계선주는 해안의 돌출된 곳에서 장생포 앞 바다 입구 장도와 가덕도를 바라보고 있다. 이 노출된 해안 돌기둥에 거북선과 판옥선을 매어 두었다고 하는 것에 의문이 들기는 한다. 그래서 이 계선주를 돌장승이라고 추정하는 전문가들도 있는가 보다. 계선주가 서 있는 곳에서 거북선과 판옥선이, 거제도 옥포를 향해, 진해 합포를 향해, 통영 한산도를 향해, 뜨거운 가슴의 군사들과 함께 가막만 장생포 앞 바다를 헤쳐 나가는 모습이 환상된다. 충무공의 얼이 여기에 있다.
가막만 깊숙한 선소유적을 살피고 굴거리나무 즐비한 대장간 앞을 걸어 남파랑길 55코스로 되돌아왔다. 거북선 정신은 유비무환(有備無患)의 정신이다. 이순신 장군이 전라좌수사로 전라좌수영 여수에 부임한 것이 1592년 2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2개월 전이다. 거북선 건조 기술이 뛰어난 나대용 장군을 기용하여 거북선을 건조하고 전쟁에 대비하여 군사들을 훈련시킨 그 정신이 조선을 일본과의 7년 전쟁에서 승리로 이끌었다. 그 얼을 가슴에 새기며 망마산 언덕을 돌아 55코스 길을 이어나간다.
2부로 이어짐
2.걸은 과정
소호동(蘇湖洞)은 일제강점기 소제리(蘇堤里)와 항호리(項湖里)를 합하여 소호리(蘇湖里)가 된 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수려한 가막만의 푸른 물결 위에/ 온 시민의 정성과 전라남도(지사 전석홍)의 지원을 받아/ 희망찬 젊음을 펼칠 요트장을 세우나니/ 우리 모두 마음과 뜻을 모아/ 힘찬 전진의 돛을 높이 올리자 - 1987년 9월 30일 여천시체육회장·여천시장 임정섭
전라남도 여수시 소호동에 있는 산책로. 고려 후기 '소호 동동다리' 인근 지역 장생포(전라남도 여수시 안산동 장성마을 앞 포구)에 왜구가 침입하자 장군 유탁(柳濯)이 왜구를 물리치려고 출전하니 왜구들이 놀라서 퇴각하였다. 이때 군사들이 기뻐하며 부른 노래가 「장생포곡」이라고 하는데, 「장생포곡」이 「동동」과 동일하다는 설이 있어 이곳의 이름을 '소호 동동다리'로 확정하였다.(출처 : 디지털여수문화대전)
왼쪽 앞에 망마산, 그 오른쪽 중앙에 고락산, 그 앞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웅천의 마천루아파트단지가 펼쳐져 있다.
중앙의 구봉산이 가막만과 웅천의 아파트숲을 내려보고 있고, 걸어갈 가막만의 히든베이호텔이 오른쪽 뒤에 보인다.
왼쪽에 고락산 그 아래 웅천의 마천루아파트단지들, 중앙 뒤에 구봉산, 앞 왼쪽에 장도, 오른쪽에 가덕도가 있다.
옛날에는 소호동 지역 일대를 장생포라 하였는데 고려 공민왕 원년에 왜구가 침입하였다. 이때 전라도만호였던 유탁 장군이 군사를 이끌고 나타나자 왜구가 혼비백산하여 도망쳤다. 이를 기념하여 군사들이 기뻐하며 노래를 지어 불렀는데 '동동'이라 하였다. 장생포대첩과 관련된 내용은 <고려사>나 <고려사절요>을 비롯해 <증보문헌비고> 등에서도 소상히 기록하고 있고, '동동(動動)'이 지어진 배경도 설명을 하고 있다. 조선 후기 기록된 <강남악부>에는 '장생곡'이라는 제목으로 장생포의 역사를 노래하였다. "장생포에 오랑캐 옷 입은 왜적들, 유장군이 갑옷을 입고 있으니 아무도 못 오네. 일만 대군 왜적이 패하여 돌아가고, 우리 군사들은 승리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네. 그대는 보지 못했는가? 전에는 시중 시중 유장군이 있었고, 후에는 충무공이 있었기 때문이라네."
해안선 뒤쪽 여수시 돌산읍 산봉들과 여수시 남면의 섬들이 가막만 맞은편에서 손짓하고 있다.
왼쪽에 망마산과 고락산, 오른쪽에 구봉산이 보인다.
왼쪽에 웅천, 중앙에 구봉산, 가덕도 뒤쪽에 히든베이호텔이 보인다.
'노가리까는'에는 이중적 의미가 들어 있는 듯. 재미있는 가게 이름이다.
소호동(蘇湖洞)은 일제강점기 소제리(蘇堤里)와 항호리(項湖里)를 합하여 소호리(蘇湖里)가 되었다고 한다. 항호(項湖)마을 지명에서 옛 지역명을 알려 준다. 이 뒤쪽에 목처럼 가느다란 바다 모습이 항호마을 앞 바다에 그대로 나타난다.
소호-웅천 해상교가 항호마을 앞 목처럼 가느다란 바다 위에 세워지고 있다. 이 해상다리를 항호교라고 명명하면 좋을 듯싶다. 소호교, 선소교, 웅천교, 소웅교, 웅소교 등 여러 이름이 있겠지만 길손에게 맡긴다면 항호교(項湖橋)라고 명명하고 싶다. 다리가 완공된 뒤 다리 이름을 어떻게 지었는지 꼭 확인하고 싶다.
장성마을 앞 포구를 장생포라 하였다고 한다. 정면에 여수시 중심지 학동과 그 앞에 선소유적, 오른쪽에 망마산이 보인다.
여수시 소호동 항호마을을 지나서는 여수시 안산동(安山洞)으로 들어선다. 안산동은 서쪽에 있는 안심산(安心山)에서 유래된 지명이다. 1914년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현재의 장성마을, 여수마을, 심곡마을과 통합되어 여수군 쌍봉면 안산리가 되었다가, 1998년 여천시·여천군·여수시가 여수시로 통합됨에 따라 행정동인 여수시 쌍봉동으로 통합되었다. 쌍봉동(雙鳳洞)은 법정동인 여수시 학동·학용동·안산동·소호동을 관할하는 행정동이다. 쌍봉동은 1902년 여수면이 쌍봉면으로 개칭되면서 두 지역의 이름 있는 산인 전봉산(戰鳳山)과 비봉산(飛鳳山), 두 개의 봉(鳳)자를 따 쌍봉면이라 이름 붙인 것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출처 : 디지털여수문화대전)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가 소리를 보내온다.
수평선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잔잔하게 일렁이는 파도의 모양을 나선형으로 표현한 작품입니다. 잔잔한 파도소리와 함께 고기들의 이야기, 해초들이 파도에 춤추는 소리가 스프링관을 통해 우리의 귓전에 들려옵니다.
- 2009. 7 조각가 한리리
해안의 오동나무가 바다와 망마산을 배경하여 자라나고 있다.
장성마을 앞 포구를 장생포라 하였다고 한다. 왼쪽은 여수시 학동 거리이고, 여수시 시전동 선소유적은 오른쪽에 있다. 남파랑길은 가막만 최북단 장생포 해안로 '동동로'를 따라 이어진다. 뒤 오른쪽 산은 고락산이다.
왼쪽은 안산동의 소호로, 오른쪽은 학동의 동동로, 오른쪽 학동의 장생포 해안로 '동동로'를 따라 진행
자전거를 타고 해안을 달리는 친구와 리본돌리기를 하면 천진난만하게 노는 아이의 모습을 표현한 작품입니다. 봄날의 새싹처럼 경쾌하고 싱그러운 리듬을 느낄 수 있습니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을 맞으면서 신나게 달려 보세요.
- 2009.7 조각가 고혜월
안산동에서 학동으로 들어와 '동동로' 옆 장생포해안로를 따라가다가 오른쪽으로 꺾어 선소유적으로 진행한다.
장성삼거리에서 안산동과 헤어져 여수의 중심지 학동으로 들어왔다. 학동(鶴洞)은 마을 앞 바다에 많은 학들이 떼를 지어 물 위를 수놓고 뒷산 또한 학의 형국인데다가, 왜가리와 학이 둥지를 틀어 서식하므로 학동이라고 했다 한다. 또는 입향자의 호가 ‘학남’이어서 ‘학’ 자를 따서 ‘학동’이라 했다는 설도 있다.(출처 :디지털여수문화대전)
소호와 웅천을 이어주는 해상교가 건설 중이다. 왼쪽은 장도, 그 오른쪽은 가덕도이다.
학동 앞 바다이면서 장생포 앞 바다이기도 하다. 가막만의 최북단으로 바다가 내륙으로 깊숙하게 들어와 있는 맞은편에 거북선을 건조한 선소유적이 있다. 왼쪽 뒤 망마산에 군사훈련장이 있었다고 한다.
물새들이 한가롭게 노니는 학동 앞 바다 건너편에 거북선을 만든 선소유적이 보인다. 선소유적이 있는 곳은 여수시 시전동(枾田洞)이다.
가막만의 끝자락 장생포·학동 앞 바다가 깊숙하게 육지로 파고들었다. 안심산이 우뚝하다.
JC(국제청년회의소) 신조
신앙은 인간생활에 의의와 목적을 부여하며, 인류는 국경을 초월하여 형제가 될 수 있으며, 경제적 정의는 자유기업을 통해서 자유인에 의하여 최선으로 달성되며, 정치는 법률에 기반을 두며 인간의 자의로 행해질 수 없으며, 이 지구상의 가장 위대한 보배가 인간의 개성 속에 있으며, 인류에의 봉사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사업임을 우리는 믿는다.
취지문
충무공의 충절과 젊음의 웅지와 정열이 담긴 이곳에 여천 시민의 높은 의식을 받들어 푸른 도시 가꾸기 범시민 운동을 전개(초대 회장 박병열) 헌수모금하여 여천시가 기반을 조성하고 여천 청년회의소에서 그 뜻을 여기 담으니 그 기상이 하늘을 찌르고 바다에 흘러 세계 만방에 고하고 이 광장의 푸르름이 자손만대 번영될 우리 여천을 늘 찬양하리라.
1991.12.17 여천 청녀회의소 회장 황순옥
여수시 학동 '동동로'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여수시 시전동 선소로를 따라 진행
시전동(枾田洞)은 시목(枾木)과 기전(基前), 선소(船所)마을을 합쳐 만들어진 동(洞)이다. 시목마을은 마을에 감나무가 많아서 감나무골이라고 부르던 이름을 감 시(柿)와 나무 목(木)으로 훈차(訓借)하여 지은 이름으로 고려시대부터 소금을 만들던 조해소가 있던 곳으로 알려졌다. 기전(基前)마을은 터 앞이라고 부르던 마을 이름을 한자로 고쳐놓은 이름이며, 다른 이름으로 들몰이라 불렸다. 마을 동쪽 고락산(鼓樂山) 아래의 골짜기를 둥둥골이라 하였는데, 골짜기에 들어서면 둥둥둥 하는 땅 울림이 있어서 이런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고락산의 이름도 살펴보면 북을 치고 논다는 뜻이니 둥둥골이란 이름을 의역한 땅이름이란 것을 알 수 있다. 선소(船所)마을은 이름에 나타나듯이 배를 만든 마을이란 뜻으로 임진왜란 당시 순천부 지역으로 거북선이 만들어진 곳으로 알려졌다.(출처 : 디지털여수문화대전)
이곳 선소(船所)는 선조들이 터잡고 씨를 뿌려 곡식을 거두며 생계를 유지하고 대대로 이아온 인심 좋고 살기 좋은 마을로써 1995년 4월 20일 국가사적 제392호로 지정되었다. 선소유적은 옛부터 ‘선소마을’로 불려지는데 고려시대부터 배를 만드는 조선소가 있던 자리이다. 특히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의하면 뛰어난 조선 기술을 가진 나대용 장군과 함께 거북선을 만든 곳으로 임진왜란 때 왜군을 물리치고 위태로운 나라를 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선소는 가막만의 가장 끝자락에 위치해 있으며 바다 입구에는 가덕도와 장도가 방패 구실을 하고 있고 먼 바다에서 볼 때 잘 노출되지 않으며, 심한 파도가 닿지 않아 중요한 해군 군사 방어 지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이곳에는 거북선을 만들고 수리하며 대피시키던 굴강(掘江), 칼과 창을 만들던 풀뭇간, 세검정(洗劍亭), 거북선을 매어 두었던 계선주(繫船柱), 무기를 보관하던 군기고(軍器庫), 일반인의 통행금지를 표시했던 벅수(석인) 등 다양한 관련 유물들이 남아 있다.
선소유적 문화재 복원사업에 따라 이주하여 이제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없어 꿈을 그리는 우리의 텃자리 어디로 간들 잊으리요, 기억과 추억 속에 남은 내 고향 선소마을의 그 터와 떠나간 고향민을 그리며 여기 이곳에 기념비를 세워 후세대에 길이길이 전하고자 한다.
선소마을은 고려 성종대왕조 1470년쯤 고지도에 나타난 이곳 선소가 순천부 산하 직속 선소로 명기되어 있으며 조해소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기술을 가진 나대용 군관으로 하여금 이곳에서 거북선을 건조케 하여 1592.3.27 시전 앞바다에서 진수식을 하였으며 이때 벽지도에서 해물이나 어포류를 싣고 와서 곡물류, 의류 등과 교환하는 장터로서 운영되어 왔으니 1593년 삼도통제영이 설치되면서 여수에 속하게 되었으며 1580년 영산 신씨 신증광씨가 입향한 이래 김해 김씨 강릉 유씨 등이 살고 있으며 굴강, 계선주, 벅수 등의 문화유적이 있어 1978. 4. 8 지방문화재 14호로 지정 연차적으로 그 유적을 복원하고 있읍니다.
1988
*'고려 성종대왕조 1470년쯤'에서 '고려'는 '조선'을 잘못 적은 것이다.
선소에는 일반적으로 장승을 세워 민간인과 구별된 공간임을 경계로 표시하며, 각종 재앙을 막는 성역임을 표시한다. 그 장승을 여수에서는 벅수라 하였다. 마을 입구에 있는 2기의 벅수는 모두 화강암에 조각되었다. 왼쪽의 벅수는 문관들이 관복을 입을 때 쓰던 관을 쓴 모습이다. 눈은 나뭇잎 모양으로 위로 치켜 올라갔으며, 두드러진 코 위로는 굵은 코 주름이 볼록하게 새겨졌다. 입술은 꼭 다문 모습이며, 양쪽 귀는 매우 사실적이다. 턱의 아랫선은 각이 졌으며, 턱수염은 아래로 좁아지는 수직형으로 양각되었다. 측면에서 보면 머리보다 가슴이 앞으로 많이 튀어 나와 있다. 코의 밑과 어깨가 많이 파손되어 주민들이 시멘트로 붙여 놓은 상태다.
오른쪽의 벅수는 마멸이 심해 눈·코·입의 형태를 전혀 알 수 없다. 머리에는 모자를 쓰고 있으나 파손이 심하며, 더욱이 파손된 부분을 시멘트로 붙여 놓아 모양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턱선은 갸름하며, 유일하게 잘 남아 있는 귀는 맞은 편 벅수와 마찬가지로 조각 솜씨가 돋보인다. 이 마을의 벅수 중에 유일하게 명문이 새겨져 있어 ‘화정려(火正黎)’는 글자가 확인된다.(출처 :디지털여수문화대전)
*‘화정려(火正黎)’에서 '화정(火正)'은 땅을 맡은 관직이고, '려(黎)'는 관직을 맡았던 신을 가르킨다고 한다.
사적 제392호. 지정면적 18,541㎡. 여수 선소는 여수 앞바다에 접한 선소마을에 위치하며 임진왜란 이전에 설치되었다가 임진왜란 당시에는 전라좌수영 관하 순천도호부의 수군 기지로 이용되었다. 조선 헌종 13년(1847년)에 편찬된『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에 그 위치가 분명하게 나타나 있고 18세기 초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호남읍지』의 지도에 표시되어 있지만 그 흔적이 거의 남아있지 않다가 몇차례의 조사를 통해 그 전모가 하나하나 밝혀져 나가고 있다.
1980년해군사관학교팀에 의해 1차 조사가 이루어진 이후, 1985년명지대학교 한국건축문화연구소팀에 의해 2차 조사가 이루어졌고, 1994년 순천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3차 조사가 이루어졌다. 1980년에 이루어진 1차 발굴조사를 통해서 선소유적이 순천도호부 산하의 선소이며 임진왜란 당시 전라좌수영 본영 선소, 방답진 선소와 함께 거북선이 건조되었던 3개 선소 가운데 하나인 것으로 파악되었다.
아울러 그 동안 구전되어 오던 세검정과 군기고의 규모를 확인하였으며 이에 따라 1985년에는 세검정과 군기고가 복원되었다. 1994년에 이루어진 발굴조사에서는 풀뭇간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노벽 하부만 남은 단야로 2기가 확인됨으로써 조선시대 철기 제작기술을 알 수 있는 새로운 자료가 되었다.(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충무공 이순신이 배 만드는 기술이 뛰어났던 군관 나대용과 함께 거북선을 만든 곳으로 알려져 있다. 가막만의 최북단 후미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입구에 가덕도와 장도가 방패 역할을 하고 뒤로는 망마산을 등지고 있었으므로 그야말로 천연의 요새였다. 원래 명칭은 순천부 선소이다. 거북선은 이곳과 함께 인근의 중앙동 '본영 선소', 돌산읍 '방답진 선소' 등 세 곳에서 건조한 것으로 추정된다.
순천부 선소는 임진왜란 전에 생겨 임진왜란 중 잔라좌수영 산하 순천부 수군 기지였던 것이 확실하나 만들어진 연대 알 수 없다. 주변의 마을은 예로부터 선소 마을로 불리었고 고려시대부터 배를 만드는 곳이었다고 한다. 현재 일종의 항만 시설인 굴강이 남아 있으나 주변의 유적과 유물들이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이 훼손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대장간 터를 찾았으며, 세검정과 군기고는 최근에 복원하였다.(출처 : 디지털여수문화대전)
선소는 군선(軍船)을 만들거나 수리한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이다. 따라서 선소에는 일반적으로 장승을 세워 민간인과 구별된 공간임을 경계로 표시하며, 각종 재앙을 막는 성역임을 표시한다. 그 장승을 여수에서는 벅수라 하였다.
굴강 옆에 있는 2기의 벅수는 지금은 나란히 서 있으나 과거에는 50m 간격을 두고 마을쪽을 바라보고 있었다고 한다. 이 벅수들은 그 형태나 조각 기법이, 다른 2쌍의 벅수와 전혀 다르다. 오른쪽의 벅수는 형태가 독특하다. 약간 푸른색이 도는 타원형의 화강석을 전면만 다듬은 얼굴과 띠를 두른 듯한 모자를 부조로 조각하였다. 볼륨 있는 둥근 턱, 타원형의 눈동자, 동그란 코, 꼭 다문 입, 살이 오른 뺨의 조각 솜씨가 돋보인다. 전체적인 인상은 무서우면서도 관용이 느껴진다. 왼쪽의 벅수는 훼손이 심하며, 무사형(武士形)이다. 투구 같은 모자를 쓰고 있으며, 눈은 쌍꺼풀에 타원형으로 눈 끝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코와 입은 파손되어 없으나 2개의 콧구멍만 보인다. 귀는 형태가 뚜렷하게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몸통은 오각형이다. 전면의 배 부분에 직사각형의 명판을 만든 후 글자를 새긴 흔적이 보이나 내용을 전혀 읽을 수가 없다. 선소 벅수는 그 모습과 명문 등으로 미루어 볼 때, 배를 매어 놓는 계선주가 아니라 민간인과 구별되는 공간으로서 각종 재앙을 물리치는 신체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출처 : 디지털여수문화대전)
*왼쪽 벅수의 목 이하는 땅 속에 들어가 있는가? 오른쪽 벅수는 새로이 복원한 것인지 너무 깨끗해 보인다. 그에 대한 설명이 전혀 없어서 궁금하다.
굴강(掘江)은 조선 시대 해안 요새에 만든 조그만 군사 항만 시설로 선착장이자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여기에 배가 머물며 고장 난 곳을 손 보거나 군사 물자를 싣고 내렸다. ‘굴강’이라는 이름은 대피한 배를 보호하기 위해 방파제를 작은 만처럼 만든데서 유래한 듯하다. 면적 1,338㎡, 직경 42m안팎의 타원형으로서 거북선 두 채가 들어갈 만한 규모이다. 길이는 돌벽 위에서부터 바닥까지 5~6m 정도로 추정된다. 북쪽으로 9m정도 되는 입구가 있다. 크기가 일정하지 않으나 대체로 40~50cm정도 되는 자연석과 깬돌로 막쌓기를 하였고 남은 돌과 흙으로 뒤를 채운 것으로 보인다. 1980년과 1985년에 한 발굴조사에서 나온 쇠로 된 화살촉, 못, 쇠붙이 같은 유물 565점을 국립광주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출처 : 디지털여수문화대전)
거북선 두 채가 들어갈 만한 규모일까? 거북선이 저 출입구를 이용해 드나들 수 있었을까? 궁금증이 일어난다. 혹시 규모를 잘못 측정하여 복원이 질못된 것은 아닐까? 이런 의문이 들었다.
물을 모으는 집수구와 쇠를 불에 달구어 벼리는 단야로가 있는 것으로 보아 군기를 만들고, 수리하던 대장간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집수구의 남쪽 면은 자연 암반층이지만 북쪽 면은 인위적으로 만든 흔적이 있다. 암반의 중심 부분에 직경 10~20cm의 자갈들이 있는데 여기서 물이 계속 솟아 나와 지속적으로 물이 공급되어야 하는 단야로를 설치하기에 적합했던 것으로 보인다.
세검정은 집무 및 지휘소 기능을 담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검정 터에 남아 있던 주춧돌의 간격으로 보아 정면의 크기는 작아도 7칸에 길이 15.8m이었을 것으로 짐작되는데, 옆면의 크기는 알 수 없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1986년에 맞배지붕의 앞면은 7칸, 옆면은 1칸 규모로 세검정을 복원하였다.
군기고는 세검정과 같이 선소의 1차 발굴 조사 뒤에 복원한 건물이다. 발굴 조사 결과 외부의 침입을 막을 수 있도록 주춧돌과 주춧돌 사이 벽체를 토담으로 튼튼하게 쌓았는데, 건물 터 앞에서 쇠로 된 화살촉, 배 못들이 나온 것에서 군사 무기를 보관하던 창고로 추정하고 있다. 복원한 건물은 앞면 4칸, 옆면 1칸 의 맞배지붕으로 서향이다.
계선주(繫船柱)는 배를 만들던 조선소가 있던 자리인 여수 선소유적(船所遺蹟)에 남아 있는 높이 1.4m의 돌기중이다. 계선주는 배를 매어둘 때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 때 이 기둥에 거북선과 판옥선을 매어 두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계선주가 있는 곳이 해안선이 돌출된 곳이기 때문에 계선주를 선소(船所)를 지키던 해안 벅수로 추정하기도 한다.
가막만 최북단을 바라보는 남쪽 해안에 계선주가 세워져 있다. 벅수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장생포 건너편 해안선에 세워져 가막만 입구 장도와 가덕도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벅수'로 추정한다고도 한다.
가막만의 최북단 해안 남쪽에 세워져 있다. 높이 1.4m의 돌기둥이다.
망마산은 이순신 장군이 망도 보고 훈련도 시켰던 곳으로, 명칭 유래도 기마병의 훈련과 관련 있다. 즉 훈련하는 말을 바라볼 수 있어 붙여진 명칭이다.
망마산에는 임진왜란 당시 선소를 수비하기 위한 기마병 훈련장이 산허리를 돌며 흔적이 남아 있다. 병사들이 훈련을 할 때는 처음 홍의(紅衣)를 입고 몇 바퀴 산정을 돌고난 후 청의(靑衣)로 갈아입고 다시 한차례 돌고 백의(白衣)로 갈아입었다고 전해진다. 산정에는 충무공 이순신이 말채를 심으면서 ‘이 말채가 죽으면 나의 영혼이 죽은 줄 알라’ 하였다던 동백나무가 있으며, 이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면 선소 경내의 동정은 물론 사방을 관망할 수 있었다.(출처 : 디지털여수문화대전)
남파랑길 55코스에서 선소유적을 돌아본 뒤 55코스로 되돌아와 진행하면서 되돌아본 선소유적지 주변 풍경
소호와 웅천을 잇는 해상교가 건설 중이고 뒤에 안심산이 의젓하다.
장도와 가덕도가 가막만 끝자락의 선소 입구에서 방패 역할을 하고 있다.
오른쪽 길을 따라 웅천친수공원으로 내려간다.
2부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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