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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훈론
-상록수의 꿈-
김우종
심훈은 1901년 (광무 5년)에 태어나서 1936년에 작고했다. 그리고 지금 거의 반세기의 세월이 흘렀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의 문학은 지금도 이 나라 독자들의 가슴속에서 푸른 잎을 너울거리며 싱싱하게 살아있다. 앞으로도 두고두고 우리들의 가슴속에 그렇게 살아있을 것이다. 그의 대표작 「상록수」라는 그 이름처럼.
그런데 그는 이 나라 독자들에게 상록수같은 이상의 나무를 심어 주고 있으면서도 그의 문학은 이 나라 문학 사상에서 크게 각광을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을 우선 밝히는 것이 그의 문학의 본질을 이해하고 그 인간을 이해하고 그의 공적을 참되게 평가하는 길이 될 것이다. 심훈은 1901년 9월 12일 지금의 영등포구 노량진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청송, 본명은 대섭인데 1926년 동아일보에 영화소설 「탈춤」이 연재될 때부터 <훈>이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삼남일녀 중 맨 끝으로 태어난 심훈은 교동보통학교를 거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들어갔다가 3‧1운동 당시 이에 가담하여 투옥되고, 출옥 후엔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퇴학처분을 받았다. 그 후 그는 중국 항주의 ‘지강대학’을 거치고 곧 귀국하여 신극 연구단체인 (극문학회)를 조직했는데 이때가 1923년, 심훈이 한국의 근대사에 선구적인 공적을 남기기 시작한 것은 이때부터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로부터 그는 초창기의 한국 영화계에 배우로 등장 「장한몽」을 하고, 영화소설을 쓰고, 영화감독이 되고, 영화평론을 쓰고 또 문학으로 크게 활약해 나갔다. 그런데 1936년에 너무나 젊은 나이로 병사할 때까지의 이같은 다양한 활동들은 다 같이 유일한 어느 목표만을 지향한 것이었다. 46쪽이 메마른 땅에 이 한 많은 조국에 기쁨을 심어보자는 것이었다.
말하자면 우리가 다 같이 잘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보자는 민족주의적 이상실현이 그의 유일한 목표였다. 학생의 신분으로 이미 3‧1운동의 거창한 물결에 앞을 다투어 나섰다가 감옥살이를 했던 것부터가 심훈의 이 같은 사상과 그 같은 이상과 그 같은 정열과 의지를 이미 증명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가 최초로 신극 단체로서 조직한 “극문회”의 회원들은 최승일, 이경손, 안석주, 이승만, 김영팔, 임남산 등이었다. 여기서 한국 근대 연극사에 그 이름을 남길 첫 작업을 시작한 그는 2년 후에 조일재의 번안소설 「장한몽」이 영화화 될 때 그 후반부에서 주연 이수일 역을 맡아 영화계에 첫발을 내딛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 해 1923년에 동아일보에 「탈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프로문학이거나 또는 그 같은 영양하에 있었던 것처럼 이 작품 역시 방법은 같은 것이었다.
아주 불우한 환경에 놓인 “일영”과 그와는 반대인 “임준상” 이란 인물이 있다. “일영”과 공을 차면서 “혜경”을 봤던 그는 “일영”에게서 “혜경”을 빼앗으려 한다. “혜경”은 공교롭게도 “임준상”네 소작인의 딸이다. 여기서 작자는 우리 인간사회를 계급적인 대립관계에서 파악하려는 프로문학적 의도를 나타내게 된다. “임준상”은 혜경의 아버지로 하여금 “혜경”을 자기에게 주도록 꾀하여 어느 날은 “혜경”을 속여 자기 집으로 끌어들이고 강간하려다 실패한다. 가면을 쓰고 나타난 괴한 “강홍렬” 때문이었다. 작자는 여기서 낡은 신파극 형태의 수법을 쓴 셈이다. 그 후 “혜경”이 병들어 쇠약해지기 시작하자 “준상”은 자기만이 그녀의 몸을 돌볼 실력이 있지 않느냐는 구실로 “일영”을 설득시키고 “혜경”과 드디어 육체적 관계까지 맺게 된다. 그리고 본부인을 내쫓고 드디어 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다. 그런데 이 자리에 “준상”의 처남이 뛰어들고, 또 돈으로 매수되어 희롱당하던 “난심”이 뛰어들어 어수선 해진 사이에 또 가면을 쓴 괴한이 뛰어들어 “혜경”을 메고 바람처럼 사라져버린다.
그 후 “혜경”은 병원에서 죽어 공동묘지로 실려가고 “일영”은 행방불명이 된다는 것이 탈춤의 줄거리다. 이런 줄거리로 보아 이 작품은 프로문학적인 방법에서 한국의 초창기 연극 또는 영화의 수법을 도입한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작자 자신이 이 작품을 가리켜 미완성이라고 한 것처럼 구성상 매우 석연치 않은 47쪽점이 많지만, 이것이 작자가 생각했던 대로 영화화를 전제로 한 작품이었다면 이것은 한국 최초의 영화소설이란 점에서도 잊을 수 없는 작품이 될 것이다. 그런데 그 후 1933년에 발표된 장편 『영원의 미소』에서는 수법이 달라졌다. 「탈춤」과 너무 흡사한 스토리이기 때문에 그것을 개작 완성시킨 것이라고도 짐작되지만 이 작품의 불우한 주인공 앞엔 가면을 쓴 초인적 인간의 도움은 나타나지 않는다. “병식”이란 인물은 절망 끝에 자살해 버리지만 서로 사랑하는 “수영”과 “계숙”은 모든 현실적인 절망의 극한지대에 밀려나갔으면서도 그 자리에서 감연(敢然)히 두주먹을 쥐고 일어선다. 더러운 지주계급의 유감과 모욕적인 협박에 굴하지 않고 이와 결별하여 빈손이 된 이들은 단 한자리 갯벌을 일군 보리밭에 서서 영원히 굴하지 않고 힘차게 살아나가기 위하여 희망과 결심의 미소를 짓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들은 농촌운동에 이바지하려 한다.
그리고 이 같은 테마는 1935년의 『상록수』에서 더욱 구체화되었다. 『상록수』는 『동아일보』 창간 50주년 기념 현상모집에 당선된 상금 5백 원의 장편 소설이다. 그가 『영원의 미소』 등을 집필하며 지냈던 충남 당진군 부곡리, 거기서 그의 조카가 주동하고 있던 “공동작회”의 회원들과 어울렸을 때의 일들이 작품의 소재가 되었던 것이다.
주인공인 “채영신”과 “박동혁”은 농촌계몽운동에 참여하고 돌아와 어느 날 ㅇㅇ일보사에서 베푼 그 보고연설 석상에서 서로 만나 알게 된 사이. 그들은 학교를 졸업하자 각각 자기 고향에 돌아가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가 된다. 그러나 난관은 한 두가지가 아니다. 오랫동안 농촌에 뿌리박아온 고리대금업자의 방해 무지와 빈곤 속에서 헤어나려는 의지를 잃고 생활의 변화를 거부하며 농촌운동의 의의를 이해하지 못하는 딱한 농민들, 여기에 또 가장 악독한 방해자로 등장하는 일제 경찰, 여기서 나약한 여자의 몸으로 목도질까지 하며 혼자서 열 사람 몫의 일을 하던 “채영신”은 과로에 지쳐 쓰러지게 되자 “박동혁”이 있는 한곡리에 가서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하기로 한다. 거기서 서로 3년 후에 결혼할 약속도 하게 된다. 그리고 “채영신”은 다시 청석골에 돌아와 청석학원을 짓지만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졌던 그녀는 학원의 낙성식날 맹장염으로 졸도한 후 수술을 받고 그대로 “동혁”의 이름을 부르며 죽어 버린다. 이와 같은 이야기를 통해서 작자가 표현한 것은 극도로 피폐한 한국의 농촌상, 그 원인으로서의 악질적인 고리대금업자 및 침략자 일제에 대한 고발,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48쪽 그가 이 나라의 청년들에게 슬픔을 극복해 나갈 용기와 의지를 길러주고 그들이 지향해 나갈 이상적인 목표를 제시해 주었다는 것이다.
주인공 채영신은 비록 젊은 나이에 그의 꽃을 다 피워 보지 못하고 그의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채 아깝게 죽어 갔지만 그것이 비록 그 당시 우리 민족의 어쩔 수 없는 현실이었다고 하더라도 이 나라의 많은 남녀 청춘들은 이 인간상을 보고 눈을 뜨기 시작했던 것이다. 공부는 했지만 취직은 안 되고 출세의 길은 막히고, 또는 그나마의 공부도 못해보고,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은 가망도 없는 일이고 그리하여 이 시대의 방황하는 세대, 길잃은 세대들에게 그 이상적 목표, 그들이 걸어가야 할 도표를 세워주었다는 것은 얼마나 반가운 일이었으랴!
더구나 심훈 자신은 이 작품의 현상금을 나누어 그것으로 상록학원을 세웠으며 그것이 모체가 되어 현존하는 상록국민학교가 생겼다. 그런데 이 같은 감동적인 작품을 남기고 또 그같은 영화 활동을 하고서도 그가 한국의 근대문학사나 영화사에 그 공적만큼의 당연한 평가를 받아오지 못한 이유는 어디 있을까? 그것을 우리는 다음 몇 가지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첫째, 그는 단위분야의 전공자가 아니면서도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버렸다. 1936년에 작고했으니까 『탈춤』을 발표하던 시대부터 따지면 그의 문학 활동 기간은 약 10년, 그리고 <극문회> 조직이나 그 이전의 작품 습작기부터 따지면 약 15년간이 그의 활동 기간에 속한다. 그러니까 비록 요절하긴 했지만 10년 내지 15년이면 짧은 기간이 아닌데 그의 경우에만은 그것이 짧은 기간이었다. 왜냐면 그는 연극, 영화, 소설, 시론 등 다방면으로 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느 한 가지 방면에서도 지속적 장기적인 업적 축적을 만족할 만큼은 이룩하지 못했다. 장편 서넛만으로는 우선 양적으로 보아 적은 활동에 속했다. 영화에 무척 힘을 기울였지만 그가 만든 작품은 단 한편뿐이었다. 시 몇 편이 있었지만 많이 알려지지 못했으며 평론도 우수한 것이었지만 양이 적었다. 따라서 종합적 결과는 컸지만, 분야별로 따지면 그는 어느 면에서나 제일인자는 되지 못했다.
둘째 이유, 그런데 이렇게 단기간의 활동만으로도 문단에서 높이 평가받은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이상 ‧ 김유정 ‧ 최학송 ‧ 이효석 등이 모두 단기활동으로 끝났던 사람이다. 그러면서도 이들은 모두 높이 평가되었다. 49쪽
그 이유는 그들 대부분의 문학이 아주 우수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떤 호기심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상이나 최학송이 그에 속한다. 최학송은 남들이 겪어 보지 못한 빈궁과 고독의 유랑아였다. 그것은 소설적인 구성 이전에 다만 르뽀르따아쥬적인 기록만으로도 큰 인기를 얻을 수 있었다. 그와 달리 이상은 과거의 모든 문학형태를 또는 모랄을 거부한 돈키오테였다. 그리고 주된 소재는 섹스였으며, 특히 아무리 읽어봐도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이 특징이었다. 심훈은 이들에 비하자면 그 같은 기발한 소재, 물의의 대상이 될 만한 내용이나 표현양식의 문제성이 없었다. 다만 건전한 양식에 의해서 고급독자보다는 일반 대중의 넓은 저변에 더 많이 읽혀나가는 작품을 썼다. 따라서 한국 문단에선 대개 요절한 작가들에게 천재라는 이름을 붙여주는 습성이 많았지만 이 작가에겐 그런 평가는 별로 없었으며 그 작품수집 자체만으로 평가받게 했던 것이 아닐까? 이것은 어느 모로 보나 부당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문인들이 오직 한 가지 분야에만 전념해야 비로소 순수하고 거룩하고 진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한국 문단만이 지녀온 그릇된 편견이다. 작가는 오히려 좀 더 넓은 분야에 관여함으로써 자신의 체험의 세계를 넓히고 자기 작품세계에서 좀 더 넓은 안목을 길러나가게 되는 것 아닐까? 더구나 영화 ‧ 연극 ‧ 시 ‧ 비평 같은 분야라고 한다면 그것은 자기 창작생활에서 표현양식의 연구와 기술향상에도 필요한 작업이며 사상적 밑받침을 닦아나가는 데에는 크게 플러스되는 것이겠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심훈은 연극이나 영화에 관여했다는 점, 또는 비평활동까지 했다는 점이 그에 대한 채점 과정에서 마이너스가 되어야 할 하등 아무런 이유도 성립되지 않는 것이다. 오히려 그 같은 모든 공적을 합산해서 우리는 심훈으로 하여금 보다 재능있는, 보다 폭이 넓은, 보다 개척적 공로가 큰 인물로 재평가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셋째, 그의 영화나 문학 활동은 일제하에서는 성공시키기 어려운 것이었다. 시집 『그날이 오면』도 검열에 걸려 미간. 「동방의 애인」 연재가 조선일보 연재 중 검열에 걸려 중단. 「상록수」도 영화화되려다가 그들의 방해로 중단되었다. 그리고 또 「불사조」가 역시 조선일보에서 연재 도중에 같은 이유로 중단되고 말았다. 이렇게 걸리는 것이 많았으니 심훈은 남겨 놓은 작품이 많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50쪽 심훈이 민족주의적 이상을 버리고 현실에서 외면한 채 달콤한 순수문학만 했더라면 작품도 많았고 또 그렇게 점은 나이로 병사하지도 않았을지 모를 일 아닌가?
우리가 한 작가의 업적을 논할 때 오직 발표된 작품, 완성된 작품만을 대상으로 삼는 것은 물론 상식적인 얘기다. 그렇지만 일제하의 한국문단은 아주 특수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런 특수상황 속의 작품활동은 또 그 같은 상황에 견주어 약간의 새로운 평가방법을 선택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선 그처럼 검열에 걸려 중단되면서도 자기 소신껏 일제의 탄압에 저항하고 그 같은 활동을 지속해 나간다는 것은 일제하 한국문단의 자랑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조금도 일제관리들의 비위를 거슬리지 않고 써 나갔던 현실도피적인 순수문학보다는 이 같은 문학이, 비록 미완성이었다고는 하더라도 더욱 독자들에게 이상을 길러 주고 좌절감 속에서 그들을 고무해 주고 그 당시 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더 크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것 아니었을까? 깨어진 고려자기에서도 옛 문화의 아름다움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이 예술이라고 한다면 그의 미완성 작품들도 당연히 그의 업적 평가에 가산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 그의 문학이 별로 비평가들에 의해서 언급되지 못한 것은 그의 작품들이 주로 신문 연재의 장편이었기 때문이다. 신문 연재소설은 본격적인 예술의 형태로서 살려나가기 힘든 것이다. 작자는 독자들의 다양한 취미나 그들의 상하 지식수준에 모두 영합해 나가지 않으면 연재가 중단되기 쉽기 때문이다. 또 신문소설의 일부 독자는 부동적이다. 신문 연재소설은 도중에 뛰어들어 읽기 시작한 독자들, 또는 하루만 읽고 내던지는 독자에서도 관심을 끌게 해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신문 연재소설은 본격적인 문학형태로 간주되기 어렵다. 그런데 신문 연재소설도 모두 같은 것만은 아니다. 이광수나 심훈의 문학은 다수대중 독자에 대한 계몽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신문에 연재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점에 있어서 독자들의 취미에 무조건 영합해 나간 연애소설류와는 구분되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 연재소설 대부분이 예술적 표현방법에 있어서는 단편들 보다 낮은 수준이었기 때문에 심훈도 그렇게 평가되고 만 셈이다.
다섯째, 그의 문학은 계몽문학이요, 사회적 공리만을 추구한 앙가주망의 문학이었다. 그런데 이광수의 문학과 그 뒤의 프로문학도 모두 그런 것이었지만 심훈의 경우는 문학사적 각광을 받기에는 불리한 조건하에 있었다. 51쪽 왜냐하면 그가 「영원의 미소」와 「상록수」를 발표하던 무렵은 프로문학의 문학사적 생명도 끝났던 시기요, 또 그 같은 프로문학도 아닌 말하자면 그 당시의 문학사조면에선 심훈 혼자만이 이끌던 계몽문학이었다는 것, 그뿐이 아니라 이때는 프로문학의 앙가주망을 예술적 본질에 입각해서 비판하고 그런 문학이 거의 붕괴해버린 시기였기 때문에 심훈의 문학도 그처럼 비난을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묵살될 운명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이 같은 몇 가지 이유를 두고 본다면 심훈은 그 같은 역량과 또 그만한 노력 그만한 업적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찬양의 대가를 받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그중에서 특히 우리가 무시해서 안 되는 것은 그의 문학하는 자세였다. 그는 사회적 공리성을 추구하는 앙가주망의 문학활동을 해나갔다. 프로문학이 문학자체를 정치적 이데올로기 속에 완전히 예속시켜 버림으로 말미암아 대개는 실패했지만 같은 앙가주망이면서도 심훈의 그것은 그처럼 어느 무엇에 예속시킨 문학은 아니었다. 그는 문학의 예술적인 표현 양식을 살려 가면서 그 자리에 그의 사상과 신념을 살려 나갔다. 그리하여 딴 순수문학이 사상의 빈곤, 현실도피적인 허약성을 드러낸 데 반해서 그의 문학은 항상 독자의 어두운 현실 속에 뛰어 들어 이상의 횃불을 밝혀주었다. 말하자면 항상 그 사회 또는 나아가 인류의 행복을 위하여 기도하고 길잡이가 되는 <도표의 문학>이 되어 주었던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1930년대 순수작단의 몇몇 소수 작가가 보여준 것과 같은 세련된 언어미학의 성립 과정이 부족했던 것, 그리고 작품을 많이 쓰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요절해 버렸다는 점일 것이다.
그의 작품은 1966년에 『심훈문학전집』으로서 국판 대형의 전3권 속에 전부 수록되었다.
*이 작품은 김우종 『작가론』에 수록된 1973년에 발간된 작품집에서 발췌된 것이다. 당시에 쓰였던 언어 상용과 띄어쓰기 등 일부분을 수정했다. 일테면 “동키호테, 앙가쥬망”이 원문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