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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채운님 원문보기 글쓴이: 채운뜰
8. 부여-고구려 예맥(濊貊), 숙신-읍루 퉁구스, 선비 연(燕) : 친밀한 역사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말갈-여진의 선조이며 숙신의 후예인 읍루가 한(漢)나라 때부터 220~226년경까지 부여에 예속(臣屬)돼왔다고 말한다 3세기 말경에 모용선비가 본격적으로 요하 유역으로 진출하면서, 몽골적인 선비족과 예맥 퉁구스와의 친밀한 관계(즉, 전쟁관계)가 재연된다. 예맥 쪽의 명칭은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바뀌었는데, 선비 쪽은 여전히 연(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서로 싸우는 것이다. 기원전 400년경에 고조선과 옛 연 나라간의 충돌을 통해서 철기제조 기술이 한반도에 전해졌고, 말등자의 사용법은 모용선비와 고구려가 끊임 없이 싸우는 와중에 전해진 것 같다. 본 연재는 영문과 국문번역을 동시에 제공한다. Text in PDF .../편집자 주 홍원탁 (서울대 교수)
▲ Koguryeo Tomb Paintings (top) Tomb of Wrestling, (middle) Duck-heung-ri, and (bottom) Ko-san-dong, Pyung-yang 단명했던 왕망의 신(新, AD 8-23) 왕조는 부여를, 흉노, 고구려와 함께, 위협적인 존재로 여겼던 것 같다. 부여 왕이 후한 조정에 사신을 보낸 최초의 기록은 AD 49년이다. 1 삼국지 위서 동이전 은, 3세기 말을 기준으로, 부여에 대해 930자 분량의 기록을 했다. 이는 중국 정사에 나타난 부여에 대한 최초의 체계적인 기록 이다. 다음은 그 주요부분의 요약이다.
부여의 서쪽에는 선비가 있고, 동쪽에는 읍루가 있으며, 남쪽에는 고구려가 있고, 북으로는 눈강(嫩江)이 있다. 동이(東夷)들 중에서 부여만이 광활한 평원을 차지하여 곡식을 심고 가축을 길렀다. 노인네들은 그들 선조가 오래 전에 (건국설화에 의하면 고리에서) 예맥 땅으로 피난을 왔다고 말한다.
부여의 왕실 창고에는 대대로 전해져 내려오는 옥으로 만든 보물들이 보관되어 있다. [홍산문화의 옥 전통을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관직의 명칭은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 가축의 이름들을 사용한다. 하위직은 몇 백의 호구를 거느리고, 고위직은 몇 천의 호구를 거느린다. 정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에는 매일같이 술을 마시고 노래하며 춤을 춘다. 마치 의식을 치르듯 술잔을 깨끗이 닦아 상대방에게 권한다. 길을 다닐 때는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노래 소리가 하루 종일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요즘의 가라오케-노래방을 분명히 즐겼을 것이다.]
부여 사람들은 흰옷을 숭상하고, 금과 은으로 장식된 모자를 썼으며, 흰 베로 만든 큰소매의 위 저고리와 바지를 입고, 가죽신을 신는다. 흉노 모양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삼는다. 갑옷과 무기를 각자의 집에 보관을 하며, 귀족(諸加)들 자신이 전투에 나가는 반면, 하층민은 그들에게 먹을 것을 공급한다. 사람을 죽여서 순장을 하는데, 많을 때는 백 여명에 달한다. 후한 말기에 선비와 고구려가 강성해지자, 공손씨는 [부여와 동맹을 맺으려고] 자기 문중의 딸을 부여왕에게 시집 보냈다. 2 동이전은 읍루에 대해서 도 간략히 언급을 하고 있다. 읍루는 [말갈-여진의 선조인] 숙신의 후예로, 부여 동북방의 삼림이 우거진 산악지역에 위치하며, 동해안에 이른다. 생김새는 부여 사람과 흡사하나, 언어는 부여-고구려와 다르다. 곡식과 삼베를 재배하고 소와 말을 기른다. 사람들은 매우 용감하고 힘이 세다. 왕은 없지만, 각 마을마다 우두머리가 있다. 항상 삼림 속에 토굴을 지어 살면서 부여보다 훨씬 혹독하게 추운 기후를 견뎌낸다. 식용으로 돼지를 기르며,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는다. 겨울철에는 바람과 추위를 막기 위해 돼지기름을 몸에 두텁게 바른다. 그들 활의 위력은 쇠뇌(弩)와 같다. 청석(靑石)으로 만든 화살촉에 독을 발라 백발백중 정확하게 활을 쏜다. 읍루 사람들은 한(漢)나라 때부터 부여에 예속되어왔는데, 부여가 세금과 부역을 무겁게 물리자, 220-226년 기간 중 반란을 일으켰다. 부여는 읍루에 여러 번 원정군을 파견했으나, 끝내 굴복시키지 못했다. 비록 읍루 사람들이 그 수는 적지만, 아주 험준한 산 속에 살았기 때문에, 우거진 삼림을 뚫고 들어가 모두 무서워하는 독화살을 무릅쓰고 그들을 복속시킨다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3 위의 기록들은 고대 예맥계 퉁구스와 말갈-여진계 퉁구스가 어떠한 관계를 유지했는가를 아주 간단명료하게 보여준다 . 동이전은, 부여와 고구려의 언어는 동일하지만, 숙신-읍루의 언어와는 다르다고 말한다. 중국 사람들의 기록이 정확하다면, 중부 만주의 예맥 퉁구스 언어는 동부 만주의 말갈-여진 퉁구스 언어와 상당히 달랐을 것이다
285년에 모용외는 부여를 공격해 부여왕을 자살하게 만들었다. 346년에는 아들인 모용황이 또 부여를 공격하여, 부여왕을 비롯해 5만 여명을 포로로 잡아왔다. 선비의 전연(前燕)이 370년에 멸망한 후, 부여는 고구려의 보호를 받았으며, 이어 말갈의 강성해지자 부여 왕실은 그들의 본고장에서 밀려나, 결국 494년에 고구려에 의탁을 하고 역사에서 사라졌다.
송화강과 눈강이 합류하는 지역은 만주 최상의 농경지이며, 요하 지역과는 나지막한 구릉들을 사이에 두고 연결이 되어 광활한 동북평원을 이루고 있다. 기원전 9세기경의 유물로 측정되는 철제 칼, 단검, 갑옷 등이 흑룡강 유역에서 대량으로 발견되었고, 눈강-송화강-요하를 따라 남북으로 이어지는 물길과 만주의 삼림을 관통하는 고대 교통로를 이용해 바이칼 주변지역과 중국의 이 동북지역 사이에 옛날부터 통교(通交)가 있었다는 흔적을 볼 수 있다. 4 동이전은 고구려에 대해서 도 간단히 서술을 하고 있다. 고구려는 험준한 계곡에 위치하여 항상 식량이 부족하였다. 고구려 사람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급하며 노략질을 즐겼다. 고구려는 부여의 별종으로, 언어와 관습은 부여와 유사하였으나, 복장이나 기질은 약간 달랐다. 왕은 다섯 개의 씨족들 중에서 나왔으며, 왕비는 항상 특정한 씨족에서 택해졌다. 지배 씨족들은 결코 들에서 농사일을 하지 않았고 하층민이 그들에게 식량을 공급하였다. 매일 밤 남녀가 떼지어 모여서 노래와 춤을 즐겼으며, 10월에는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돌을 쌓아 무덤을 만드는데 막대한 재물을 소비한다.
그들은 힘이 세고 전투에 능하며, 좋은 활을 만들어 주변의 예맥족들을 모두 정복했다. 말들은 작지만 산악을 오르는데 적합하였다. 왕망이 고구려의 군사를 동원해 흉노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고구려의 병사들은 그저 주변지역을 약탈했을 뿐이었다. 2세기(AD 125-67)에 들어와 고구려는 자주 요동을 침범 했다. 동이전은 정확한 연대를 기록하지 않고, 고구려군이 서안평(西安平)을 공격하러 가는 길에 대방군의 태수를 죽이고 낙랑군의 처자들을 생포 해 왔다고 말한다. 242년에 동천왕(東川王, 227-48)은 서안평을 노략질하였다. 서안평은 요나라가 상경(上京)을 세웠던 곳의 이름이기도 하다 . 5
요동에서 세력을 공고히 한 공손씨는 204년에 낙랑군을 손에 넣었으며, 204-220년 기간 중에 낙랑군 남쪽에 대방군을 설치했다. 6 고구려는 독립한 공손씨와 싸움을 계속했다. 공손씨는 237년에 스스로 연왕(燕王)이라 칭했다. 동이전에 의하면, 조조의 위 나라가 238년에 공손씨를 공격했을 때, 고구려 왕은 수 천명의 군대를 보내 위군(魏軍)을 도왔다. 낙랑군과 대방군은 위(魏, 220-265)와 서진(西晋, 265-316)에 의해 계속 점령되었다. 부여와 고구려는 선비족 모양, 주요 부족들 가운데서 돌아가면서 선출형식으로 왕을 뽑았었다 (신라에서도 유사한 관행을 볼 수 있었다.) 특정 씨족에 왕위 승계권이 정착된 후에도 종종 형제계승 현상이 나타났다. 고국천왕(故國川王)이 137년에 죽자 그의 동생은 형수와 결혼을 하고 산상왕(山上王, 197-227)이 되었다. 형수와의 결혼은 부여와 흉노의 관습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여에서 부자승계로 바뀌는 것은, 의려왕(依慮王, ?-285 AD)이 6살의 나이로 왕위를 이어받은 때부터 인 것 같다. 고구려는 산상왕 때부터 부자승계 기록이 나타난다. 하지만 왕비는 항상 왕족이 아닌 중요 씨족에서 나왔다. 흔히, 왕실의 장로들이나 왕비를 배출한 귀족씨족이 정치적 권위를 누렸다. 부여, 고구려 사람들은 유목민은 아니었지만 유목민처럼 전투적인 사회조직을 존속시켰고, 전쟁을 주 업으로 하는 귀족계급을 유지했다. 7 3세기에 들어와서도 고구려는 계속 훈강-압록강 계곡에 진을 치고 있었는데 , 3세기 말경에 선비족 모용외가 요하 유역으로 내려와 낙랑군을 서진으로부터 분리시켰다 .( 낙랑군의 위치가 요하 중심의 서쪽<요서>에 위치할 때 가능한 구도 ; 재편집자 주)
삼국사기는 293-296년 기간 중 고구려와 모용선비 간의 잦은 충돌을 기록한다. 진서(晉書) 는, 모용외(慕容廆)의 조상 이 여러 세대에 걸쳐 북방 야만인들 사이에서 살았으며, 동호라 불리었다고 말한다 . 위 왕조(220-65) 초기에 모용외의 증조부는 휘하 부족민들을 거느리고 요서로 이주해 정착을 했다. 그 후, 모용외의 부친이 왜 요서를 떠나 요동 북부로 이주하기로 결정을 했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가 283년에 죽자, 동생이 모용 선비족의 지도자가 되었으나, 285년에 부하에게 살해 되었고, 모용외가 부족장으로 추대되었다. 8 모용외는 바로 그 해에 부여를 공격해 부여 왕이 자살하도록 만들었다. 311년에 흉노가 서진의 수도인 낙양을 약탈하자, 고구려는 313년에 낙랑군을 차지하고, 319년에는 2개의 선비부족(宇文, 段)과 연합하여 모용외(285-333)를 공격하였으나 모용외와 그의 아들 모용황(慕容皝, 333-349)이 이끄는 군대에 패하였다. 모용황은 모용외의 둘째 아들이며, (段부족장의 딸인) 정실 부인의 첫째 아들이다. 9 모용외는 다른 아들에게 요동의 방어를 맡겼다. 고구려 군은 320년에도 요동을 공격했으나, 패하고 돌아왔다. 모용선비 연나라와 고구려간의 전쟁은 339-343년 기간에 이르기까지 계속된다. 자치통감 을 보면, 모용한이 모용황에게 다음과 같이 권고를 한다 : “우리의 가장 가까운 이웃인 고구려는 항상 우리를 엿보고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우문부족을 섬멸하고 나면, 자신들을 공격할 것 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우문 무리를 공격하러 떠나면, 그 빈 틈을 타서 틀림없이 우리나라를 공격 할 것입니다. 우리가 소수의 군대 만을 남겨 놓고 원정을 떠나면, 고구려군을 막아내지 못할 것 입니다. 그렇다고 너무 많은 군대를 남겨놓고 가면, 우문부족을 정복하기에 원정군의 수가 너무나 부족해 질 것입니다. 그러니 고구려를 우선적으로 정복해야 합니다.” 모용황은 342-3년 기간 중, 4만명의 정예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 수도 환도성을 점령했다. 당시 모용황은 또 다른 장수로부터 충고를 받았다. “고구려 땅이란 우리가 계속 점령해 지킬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이제 그 왕은 달아 났고, 백성들은 흩어져 산속에 숨어있습니다. 우리 군대가 떠나면 다시 나타나 뭉칠 것입니다. 그러니 이제 고구려 왕의 모친을 포로로 잡고, 애비의 시신을 파가지고 가는 것이 좋습니다. 이렇게 되면 고구려 왕은 자신의 부모를 돌려달라고 우리에게 간청을 할 것입니다. 그때 가서 그 애비의 시신을 돌려주면서, 고구려 왕을 따듯하게 대해주고 믿어 주는 것이 고구려를 다루는 최상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모용황은 그의 말을 따랐다. 10 우리는 몽골적인 선비족과 예맥 퉁구스와의 친밀한 관계(즉, 전쟁관계)가 다시 재연되는 것을 보고 있는 것이다. 11 예맥 쪽의 명칭은 고조선에서 고구려로 바뀌었는데 선비 쪽은 여전히 연(燕)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서로 싸우고 있는 것이다 Farris (1998: 77)는, 선비족이 말등자의 사용법(처음에는 왼쪽만을 사용)을 배운 것은 대략 300년경이었는데, “최초로 말을 타고 전투에 임했던 한국 사람은, 바로 선비족과 싸운 고구려 병사들 이었다”라고 말한다 . 등자의 사용기술이 한반도에 전해진 것은 선비족과 고구려가 끊임 없이 싸운 덕분일 것 같다. 기원전 400년경에 고조선과 옛 연 나라간의 충돌을 통해서 철기제조 기술이 한반도에 전해졌던 사실을 상기하면 흥미가 배가될 것이다
▲ Koguryeo Tomb Painting Duck-heung-ri, Kang-seo 몽골적인 선비와 예맥 퉁구스간의 끊임없는 전쟁은, 급기야 요사(遼史) 에서 (선비의 후손인 거란족의) “요 나라가 고조선 땅에서 유래했으며, 고조선 모양 기자의 팔조금법(八條禁法) 관습과 전통을 보존하고 있다”는 기록을 볼 수 있을 정도로 두 민족 사이에 강한 문화적 동화 현상을 야기했던 것 같다. 12 동아시아 역사 강의: 1-12 (2005. 3. 12.) 정리: 강현사 박사 ⓒ 2005 by Wontack Hong [각주] 1. Lee (1984: 21-22) 참조 2.「부여」는 부리아트 방언의 수컷 수달을 뜻하는 「부이르」와 유사하다. 부여 사람들 조상이 고리에서 왔다고 말하는데, 고리는 부리아트 방언의 순록과 유사하며, 바이칼, 후룬, 부이르 호수들 사이에서 고리라는 지명을 발견할 수 있다 夫餘傳 …於東夷地域最平敞… 連日飮食歌舞…衣尙白…兄死妻嫂 與匈奴同俗…家家自有鎧仗… 行道晝夜無老幼皆歌… 諸加自戰 下戶俱擔糧飮食之… 今夫餘庫有玉 壁珪瓚數代物…蓋本濊貊之地 3.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挹婁傳 在夫餘東北千餘里 濱大海 南與北沃沮接 未知其北所極 …其人形似夫餘 言語不與夫餘句麗同 人多勇力 無大君長 邑落各有大人 處山林之間 其俗好養豬 …其弓長四尺 力如弩 …古之肅愼氏之國也 …善射 射人皆入目…自漢以來 臣屬夫餘 夫餘責其租賦重 以黃初中叛之[220-26] 夫餘數伐之 其人衆雖少 所在山險 鄰國人畏其弓矢 卒不能服也 4. Di Cosmo (2002: 72) 참조 5. 고구려에서는 전쟁을 전담하는 세습적인 귀족계급이 있었는데, 이들은 들에 나가 농사일을 하지 않고 전투 훈련에만 전념했다. 산악지역에 위치한 자국 내에서 얻을 수 있는 한정된 자원을 보충하기 위하여 주기적으로 이웃을 침략하고 공물을 빼앗아 왔다. 고구려는 정복한 부족 지배자들의 지위를 그대로 유지시켜 주면서 그들을 통해 공물을 거두었다. 정복된 옥저 사람들은 옷감과 물고기, 소금, 지방 특산물을 등에 지고 천여리에 달하는 길을 걸어가 고구려에 바쳤다 한다. Lee (1984: 24) 참조 高句麗在遼東之東千里 南與朝鮮濊貊 東與沃沮 北與夫餘接…其人性凶急喜寇鈔…言語諸事 多與夫餘同…本有五族…本涓奴部爲王…今桂婁部代之…絶奴部世與王婚…坐食 者萬餘口…其民喜歌舞…金銀財幣 盡於送死 積石爲封 …其馬皆小 便登山 國人有氣力 習戰鬪 沃沮東濊皆屬焉 …出好弓 所謂貊弓是也 王莽初發 高句麗兵以伐胡[匈奴] …爲寇盜 …王莽…布告天下 更名 高句麗爲下句麗…順桓之間 復犯遼東…又攻西安平 于道上殺帶方令 略得 樂浪太守妻子 …景初二年…司馬宣…討公孫淵 宮遣..將數千人助軍 正始三年 宮寇西安平 遼史 地理志一 上京 臨潢府 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 … 又有 … 黑河 … 天險足 以爲固 地沃宜耕植 水草便畜牧 6. AD 106년에 고구려 왕은 중국 관리들과 시설들을 공격을 해, 한족을 요동군 부근의 서쪽 지역으로 후퇴하게 만들었다. 175년에 공손도(公孫度)가 독자적 지방정권을 세웠는데, 그 세력과 독립의 정도가 고구려 왕뿐 아니라 부여의 지배자들로부터도 공인을 요구할 정도에 달했다. Twitchett and Loewe (1986: 450)에서 인용. 7. Di Cosmo (2002: 43) 참조. 8. Schreiber (1949-55: 393-5) 참조. 9. Schreiber (1949-55: 425) 참조. 10. See Schreiber (1949-55: 466-8). 資治通鑑 卷第九十七 晉紀十九 成帝 ..翰言於皝曰 宇文彊盛日久 ..今若擊之 百擧百克 然高句麗 去國密邇常有闚覦之志 彼知宇文亡禍將及己 必乘虛深入 掩吾不備 若少留兵則不足 以守多留兵 則不足以行 此心腹之患也 宜先除之 ..高句麗之地 不可戍守 今其主亡民散潛伏山谷 大軍旣去必復鳩聚 收其餘燼... 請載其父尸 囚其生母而歸 俟其束身自歸 然後返之 撫以恩信 策之上也 皩從之 11. 모용황 생전 최후의 정벌활동은 부여를 향한 것이었다. 록산 지역에 위치했던 부여는 「백제」의 침공을 받고 서쪽 모용황 영역으로 흩어져 갔는데, 346년에 모용황은 태자 준(儁), 모용군(軍), 모용각 (恪), 모여근(慕輿根) 등에 1만7천명의 기병을 주어 자위력을 상실한 부여를 공격 하도록 했다. 부여는 패했고, 왕과 5만여명의 백성들이 포로로 잡혀 왔다. Schreiber (1949-55: 473-4) 참조. 12. 동이전의 예전(濊傳)을 보면, 조선의 기자는 팔조금법을 만들어 백성들을 교화했다 한다. 예전은 연의 지배자가 [BC 323년에] 왕이라 칭할 때에, “기자(箕子)의 40대 손인” 준(准)도 스스로 조선의 왕이라 칭했다고 말한다 遼史 卷四十九 志第十八 禮志一 遼本朝鮮故壤 箕子八條之敎 流風遺俗 蓋有存者 三國志 魏書 烏丸鮮卑東夷傳 濊傳 昔箕子旣適朝鮮 作八條之敎 以敎之 無門戶之閉而 民不爲盜 其後四十餘世 朝鮮候准僭號稱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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