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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칼코마니 |
▪ | 나뭇잎 신발 |
▪ | 물푸레나무가 있는 풍경 |
▪ | 옹이 |
▪ | 물수제비꽃 |
▪ | 등심초 |
▪ | 채석강에서 |
▪ | 주남저수지 |
▪ | 보리 |
▪ | 쉰 살의 봄 |
▪ | 나팔꽃 1 |
▪ | 나팔꽃 2 |
▪ | 테미 벚꽃 |
▪ | 시월의 나무 |
▪ | 건기의 시 |
제2부 물빛 노래
▪ | 물고기와 수초 |
▪ | 물고기 구피 |
▪ | 납작한 미술 시간 |
▪ | 혼서지에서 나를 시작하다 |
▪ | 단풍 |
▪ | 납작 새우 |
▪ | 빨래 이야기 |
▪ | 맛조개 |
▪ | 순천만 갈대밭 |
▪ | 만어사의 물고기는 쇳소리를 낸다 |
▪ | 소금쟁이 |
▪ | 어화석 깨어나다 |
▪ | 맹장수술 |
▪ | 콜라주 |
▪ | 아내가 달빛에 젖었다 |
제3부 땅빛 노래
▪ | 기억의 힘 |
▪ | 자식 농사법 |
▪ | 아내를 못 말리는 여자라고 하는 까닭은 |
▪ | 가구 할인점 |
▪ | 압력 밥솥 |
▪ | 사바나 미용실 |
▪ | 주머니의 힘 |
▪ | 수목을 날아가는 풍뎅이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
▪ | 쌀밥, 그 힘으로 살아왔다 |
▪ | 철쭉 |
▪ | 대추나무 한 그루 심고 가신 까닭은 |
▪ | 청둥오리 식당 |
▪ | 테니스 이야기 1 |
▪ | 테니스 이야기 2 |
▪ | 겨울 산행 |
제4부 하늘빛 노래
▪ | 점자, 그녀가 환하다 |
▪ | 저 꽃자리 |
▪ | 너를 넘다 |
▪ | 풀의 제사 |
▪ | 내소사 가는 길 |
▪ | 수양버들 |
▪ | 숫자론 |
▪ | 감자꽃 |
▪ | 치자나무 이야기 |
▪ | 코뚜레 |
▪ | 풍장 |
▪ | 파란 고양이 |
▪ | 우묵함에 대하여 |
▪ | 산 1 |
▪ | 산 2 |
제1부 무채빛 노래
데칼코마니
경계란 가깝고도 먼 그리움인가
소금쟁이가 연못 위 미끄러지며
생의 균형 잡으며 간다
경계에 푸른 발 디디고 서 있는 수양버들도
수면에 닿을 듯 말 듯 삶의 촉수 내민다
물 위에 떠 있는 연잎에 나도 손바닥 대어 본다
노랗게 불 켠 손금 같은 잎맥들이 표면장력으로 달려 나오고
덩달아 셀 수 없는 물이랑이 자맥질하며 내 나이 자꾸 건져 올린다
그리움은 접어도 그리움인가
허리 숙여 연못 속 들여다본다
목덜미 물렸는지 하늘은 온통 노을빛이다
하늘은 흐르고 꽃그늘 머문 구름 속엔 우물거림으로도 잘 씹히지 않는
살아온 신발 자국 숨바꼭질처럼 숨어 있다
어둠과 빛살 가득 담긴 신발 펴 운동장에 활짝 펼쳐보면
내 나이는 신기하게 거꾸로 걷고 있고
몰린 피의 무게 견디지 못하는 나는 가끔 철봉에 발 얹기도 한다
하늘에 뿌리 둔 탯줄이 연잎을 둥글게 경계로 밀어 올리는 지금
소금쟁이보다 짠하게 물 위 걷고 있는
간간한 내 나이가 반으로 접히고 있다.
나뭇잎 신발
처음엔 지축이 기울어 신발 닳는 줄 알았네 푸른 비늘에 바람 들면 웃음도 그냥 가벼워지는 줄 알았네 허나 시간이 이울수록 숨 깊었던 달빛도 흐릿해지고 뻐꾸기 울음도 등뼈를 슬슬 빠져나가 물관이 시나브로 마르는 것이었네 증상은 점점 심해져 습했던 속눈썹도 어리둥절해지고 작은 바람에도 염기 없이 실실 웃는 것이었네 숨 가쁘게 살아도 자꾸 주눅 들어 옆으로 드러눕기도 하고 자신을 마셔버린 취객처럼 지그재그로 걸으며 가끔 구름 발자국이라도 찍어 보는 것이었네 자전과 공전의 징한 삼백예순 어느 날 로또 가게 지나다 물컹한 혜성이라도 만난다면 그 꼬리 덥석 잘라 닳아진 곳 깔창으로 괴어보고 싶은 생각도 왜 드는 것이었네 나 활엽수는 이름만 화려하지 걸음이 비정규직 팔자라 신발이 바깥쪽으로만 닳는 것이어서 열두 달을 채 버티지 못하고 겨울을 맨발로 견디어 가는 것이었네.
물푸레나무가 있는 풍경
내가 바라보는 풍경은
연두가 없어 보라도 없다
소실점 밖 나무들은 잎 하나 품지 못하고
염기 없는 생각들로 무채색 도배하고 있다
한때 나는 세상의 소실점에 태깔 나게 서고 싶었다
하지만 산발치에도 뿌리내리지 못하고 빛바랜 그림처럼 야위어 갔다
싱겁게 흐르는 구름에도 셀 수 없이 넘어졌고
움 하나 틔우지 못하는 얇은 귀도 바람 소리에 중이염 앓았다
물관은 점점 말라 생각 하나 퍼 올리지 못하고 쩍쩍 금이 갔다
빛깔 없는 무채색의 세상에서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이제는 터치 한 번으로도 색 도드라지는
그림 그리는 여자 만나고 싶다
서 있는 배경에서 짙고 옅음 말하지 않아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내가 물드는 여자 만나고 싶다
손끝에 화려한 독 묻어 있는 치명적인 여자라면 더욱 좋겠다
붓놀림 하나로도 열병 같은 꽃 피워낼 수 있다면
알몸으로 뭉개져도 좋겠다
원근법으로 다가오는 여자, 그녀의 농도 사랑하겠다
입술과 입술 포개지는 저 색들의 보색점에서
잎 하나 피워낼 수 있다면
눈썹과 눈썹 만나지는 저 색들의 소실점에서
열매 하나 달아낼 수 있다면
색 우려내는 물푸레나무와 한세상 맛깔나게 살겠다
내가 바라보는 풍경은
주황이 있어 파랑도 있었으면 좋겠다.
옹이
난다 냄새 난다 나는 내가 긁어 부스럼이라 냄새 난다 나는 나를 날린 셈인데 냄새 나는 나는 나는 새에게도 냄새 난다 냄새는 냄새를 전이시켜 새똥 싼 내 하늘도 냄새 난다 냄새는 자꾸 가려워 구름 비벼대는 것이어서 충혈된 내 먹구름도 냄새 난다 소나기 한 줄금 쏟아내면 냄새가 사라질 것이란 기대는 금물 사납게 짖어대는 내 번개가 아직도 그 속에 눈이 번쩍 도사리고 있어 크릉크릉 냄새 난다 아귀 맞추어 장미꽃 밀어 올리던 내 거미줄에도 말 달리며 방방 뛰던 꽃물 남아 있기는 마찬가지 옹헤야 냄새 난다 어절씨구 냄새 난다 소리 높여 노래 부르기는 시기상조 이제는 내가 나를 더불고 슬금슬금 거문고 타야 할 때 내가 나를 데리고 묵상에 들어야 할 시간 소리 없이 냄새 나고 냄새 없이 냄새 난다 내가 나를 산책한 냄새 한 무더기 내 안을 단단히 버티어 간다.
물수제비꽃
유성우에 강이 젖는 밤
둑에 서서 물수제비뜨는 당신은
내 마음속으로 들어오던
오묘한 만남의 각도 기억하면서
나를 떠나리라는
이별의 각도 생각했으리
납작하고 둥근 조약돌 골라
내 마음 여러 차례 튕기며
내 안으로 들어오던 만남의 속력
뇌리 속에 입력하면서
나를 스치고 지나가리라는
이별의 속력 예감했으리
당신은 이렇듯 오묘한 만남과 예감된 이별로
다가서고 떠나가지만
당신이 나에게 스치는 예리한 각도와 속력의 문신만큼
내 몸뚱이는 파헤쳐져
그리움의 살점꽃으로 피어나겠지만
강을 이륙하는 비행접시여
당신 또한 남겨진 자만큼의
아픈 몫 가지고 떠난다는 것 알기에
내 살점꽃, 강물 속에 그대로 묻어두리
당신 페르세우스여
오늘이 당신과 나의 예견된 이별의 날일지라도
내 살갗 스치며 떠나는 당신 또한
마음 온전하지 못할 것임을 눈치 채리니
떠나는 당신, 나를 떠나려거든
강물 위 튕겨 오르는
피라미 떼의 빛나는 활시위도 멈춘
사랑도 이별도 흐르다 멈춘, 저 강물
자정의 시간에 떠나오
유성우에 강이 젖는 밤
등심초
물고기가 하늘 날며 새의 속내 들여다본다 누군가 꿰뚫어 본다는 것 목숨 거는 일이라서 구름 날고 있는 새들도 끼룩끼룩 목멘다
내시경으로 읽어야 할 세상 청진기로 점자 두드리며 살았으니 그동안 나는 어둔 먹구름이었다 누군가의 속내 읽어낸다는 것 내가 먼저 환해져야 하는 까닭에 이마에 등불 켠다 불 켜고 파고들 때마다 무슨 꽃은 피어나겠지만 목멘 세상 국물은 김칫국물이 제격이라서 아가리 딱딱 벌려 한 수저씩 떠 넣는다
저 꽃은 찔레꽃 저 꽃은 장미꽃 저 꽃은 무슨 꽃 꽃들은 하나 둘 딸꾹질로 피어나 목구멍 역류하겠지만 나 또한 백 년쯤 숨 참아야 하리 뻐끔뻐끔 장호흡 할 때마다 몸뚱어리에 가시 돋아나 속 긁어놓겠지만 나 또한 천 년쯤 꿰는 아픔 견뎌야 하리
아가미에서 뿜어 나오는 거친 호흡에 속 탄다 꿴 자나 꿰인 자나 서로 아프기는 마찬가지 아픔도 지나치면 숨조차 사그라지는가 나 그대에게 다가가기까지 헛기침 한창인데 그대 심장엔 벌써 땅거미 밀려들고 있다 줄줄이 꿰어진 어둠 줄기줄기 흘러내리도록 심지 올려야겠다 그대 꿴 자리 나도 더 이상 녹갈색의 꽃만은 아니어서 두견새 붉게 운다.
채석강에서
소나무에 걸린 노을 아름다운
저 선캄브리아대에 서서 셔터 누르면
내 한순간 추억도
차곡차곡 쌓여 층리 이룰 수 있을까
하루 저물어 수평선이 말랑말랑하게 접히는
저 신생대에 나란히 누워보면
나도 몇 억년 후 누군가에게
평평한 자리 하나쯤 내어줄 수 있을까
바지락 죽 끓고 있는
해변가 식당 위로
후박나무 꽃향기 켜켜이 쌓여가는
해 저물녘
나도 노을처럼 바다와 하나 될 수 있을까
주남저수지
얼마나 가두어야
저 방렬한 연꽃처럼 필 수 있을까
못 중간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는 백로처럼
얼마나 고단해야
나무와 한 몸 되어
흰 꽃으로 걸릴 수 있을까
껴안으면 안을수록
더욱 아프게 돋아나는 가시연
나는 얼마나 떠돌아야
저 부레옥잠처럼 정화될 수 있을까.
보리
보리밭에 서서, 나는 보리
서릿발로 출가하여 마음 물길질하는 수도승, 밟힐수록 시퍼렇게 살아오르는 질경이, 풋사과에도 가슴 설레는 가시내, 깜부기로 속 타는 머슴애, 텅 빈 대공마다 무너져 내리는 풀피리, 까끄라기로 간지럼 태우는 강아지풀, 황금빛 낱알로 재잘대는 종다리, 눈시울 배어 있는 막내의 종아리, 구부정한 허리로도 투정 받아낸 어머니의 고무신, 노을에 생 매단 아버지의 관절염, 함지박에 고추장 비벼 먹던 여름밤의 꽁보리밥, 아 맥박으로 톡톡 영글어 가던 나의 유년아
보리밭에 서면, 나는 보리
쉰 살의 봄
간절한 평범함에 그리움 움돋을 때
가슴 젖는 가랑비에 내 나이가 봄 깨울 때
내 봄은 내 것만이 아니어서 춘장대로 간다
물이랑이 물이랑 넘으며 밀물이 썰물에게 접히듯
내 나이도 나이 넘으며 반으로 접히는 것이어서
파도 밀치며 떼 지어 달려오는 발정 난 말들은 꽃으로 부서진다
우리 집에 왜 왔니, 왜 왔니, 왜 왔니
말들이 호흡 곱씹으며 물음표 반복하는 순간에도
무슨 꽃 찾겠다, 찾겠다, 찾겠다
왜 나는 한 마디 말도 못하는 것이어서
무심한 달빛만 쉰 살의 입술에 먹먹하게 쌓인다
폭죽 터뜨리는 아이들 웃음이 허공 수놓는 밤
밀물져 다가와 부서지고 부서지는 것들은
눈으로 들어오면 눈물 나고, 귀로 들어오면 귓물 나는
시리고 시린 것들이어서 만리장성 쌓던 게집들도 속절없이 무너진다
무너진다는 것은 한 살점이 다른 살점 파고들어 서로 아픈 것
바다는 솔밭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가슴 시린 이야기 삼켰다 토해내는 것이어서
사람이 사람 담으며 서로에게 접혀지듯 추억 짙게 우려낸다
해피엔딩이 아니어도 좋을 연애 꿈꿨다면 모를까
바닷가에선 꽃잎에 입술 덧칠하지 말았어야 했다
자잘히 부서져도 좋을 사랑 꿈꿨다면 모를까
바닷가에선 꽃잎 잘게 썰어 마음에 날염하는 수고 말았어야 했다
쉰 살의 봄, 우묵하게 패인 발자국엔 아직도 꽃 그림자 서성이고 있어
맛조개가 남긴 허방, 소금 한 줌으로 메워보려 하지만
내 나이는 휑한 가슴 채우는 일 아직도 어설퍼 그림자가 꽃보다 짭쪼름하다
바다가 연지 빛 스카프 두르고 가는 목 흐느낄 때
사랑 끝나가도 자리 뜨지 못하는 내 나이 마흔이 마흔을 넘겨
나이 쉰으로 접어들 때, 춘장대 동백꽃
등불 지는 붉은 꽃잎 속에는 노란 달빛도 함께 지고 있어
내 봄은 내 것만이 아니다.
나팔꽃 1
꽃뱀은 신발 벗었으리
노랑일까 보라일까
여름의 복판에서 알싸한 이력들
확성기처럼 토해내고 있는데
까마귀는 눈알 쪼았으리
하양일까 까망일까
가을의 언덕에서 담장 넘던 이야기
토닥토닥 까발리고 있는데
어머니는 산고 겪었으리
분홍일까 파랑일까
뜨개질로 점점 차오르는 시간들 심호흡하며
무거워진 음표 토해냈으리
아침놀일까 저녁놀일까
어머니가 열리는 절정의 순간
닭은 홰치며 인고의 끝 알렸으리
우리는 가녀린 손바닥 흔들며
나팔나팔 세상 맞았으리
나팔꽃 2
음악실 옆 소나무 쾌지나칭칭 감고 오르던 나팔꽃 마른 줄기도 한때는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음계 따라 마디마디 궁상각치우 궁상각치우 이름표 달았으리 한낮에도 빨강 노랑 파랑 폭죽 터트리며 하늘 향해 목청 높일 때 불알 닮은 솔방울도 여름 한철 실해졌으리
따따따 따따따 나팔 불며 아이들 지나간 내 궁상맞은 등줄기에도 꽃 몇 송이 환하게 피어났으리
테미 벚꽃
하늘에선가 북소리 내리면
눈빛보다 먼저 저려오는 가슴 있어
벚꽃은 붐빈다
시린 가슴 수놓으며
다가오는 꽃의 나라여
꽃으로 스러지면
그림자도 꽃이 되는가
저 고개 저 꽃자리
하늘 시려 내린 자리
벚꽃은 분분하다
작두 위에 날 세운 역사여
실타래로 가는 목숨 이어온 나라여
꽃대가리 잘려나가도 잊지 않고 피어나
잘록한 허리로도 한 세상인 꽃이여
눈으로 들어오면 눈물 나고
귀로 들어오면 귓물 나는
벚꽃은 흐벅지게 진다
하루는 저물고 마음은 흩날려
이울고 또 이우는 저녁놀
두둥 둥둥 북소리 내리면
저 고개 저 꽃자리
테미 고개 벚꽃 진다
휘모리 붉게 진다.
시월의 나무
희끗희끗한 귀밑머리에도
이파리 달고 있는
저 나무들의 속삭임 들어보라
가지 끝에 매달린 시월의 이파리에서
단풍 같은 빗물 떨어진다
스며드는 물방울 따라
얼굴 디밀어 보면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뿌리 내리고 있는 나무들
나뭇가지의 넓이로도 생 지탱하고 있는
저 뿌리의 욕심
나도 내 팔의 넓이만큼 원 그린다
세상 넉넉하다.
건기의 시
말이 건기의 낮 뜯어 삼킨다
풍경도 블랙홀처럼 함께 빨려드는 것이어서 색들은 긴장한다
기나긴 창자 지나며 더욱 짙어지는 색의 허기
더욱 농축되어 밀도 높인다
삼투압 견디지 못한 무채색들은
피부 뚫고 나와 말의 배경 된다
사바나는 얼룩말 뒤집어쓰고
건기 달리며 자신의 꼬리 물고 도는
발정 난 팽이처럼 서로를 섞어댄다
색들이 서로의 경계 넘나들 때
넘는다는 것은 자신을 내어주는 일이어서
사바나의 건기는 흐르는 노을이다
마른벼락이 마른 꽃 피워 내듯
색의 살점이 색의 살점 곱씹으며 붉게 타오르는 사바나
삶도 죽음도 하나인 복판에 내가 선다
남의 눈에 띈다는 것은 목숨 담보하는 것이기에
선명하게 도드라진 것들은
모두가 눈에 망원경 달고 있다
색의 경계 모호해질 때까지
신발 끈 단단히 묶고 광활한 사바나 달리며
건기의 시간 견뎌야 하는 나도
상징과 은유의 색이어서
은밀한 구멍으로 나오기까지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달리며 스스로를 섞어댄다
얼룩말의 화이트홀로 흘러나오는 나의 시는
그래 그래서, 눈 비벼대는 똥이다
회색 똥이다.
제2부 물빛 노래
물고기와 수초
물고기가 헤엄칠 때마다 지느러미는 펜이다
옆줄의 미세한 구멍 지나온 물고기의 물짓
만년필 잉크처럼
고만고만한 기포 이뤄 수면 위에 풀린다
시퍼렇게 배 뒤집고 있는 언어들
먹먹하게 살았던 물고기의 멍이다
어항 속 유리에 뿌리 둔 수초들도
마음 미끄러지며 원고지 채워왔을 것이다
굽은 빛살에 단어가 흔들려 세상 어지러울 때도
숨 막히는 자갈에 문장이 짓눌려 온몸 옥죌 때도
부르튼 글 보듬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물고기가 수초 지나며 안부 토닥인다
수초가 지나는 물고기의 등 어루만진다
서로의 날숨이 서로의 들숨 된다
함께 견딘다는 것
서로에게 팬 되어 주는 일이다
함께 산다는 것
서로에게 숨 되어 주는 일이다.
물고기 구피
벽걸이 텔레비전 앞에 놓인 네모난 어항에 구피 살고 있다 주부처럼 드라마에 푹 빠져 한 주의 프로그램 모두 꿰고 있다 수초에 기대거나 비스듬히 누워 여자 기다리며 TV 볼 때면 조바심에 자꾸 제 지느러미 물어뜯는다
가끔은 영화 속 주인공 되기도 하고 아파트 베란다 창밖 보며 멋진 유영 꿈꾼다 오늘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캐릭터와 샐러리맨의 으쓱한 출근, 공기 방울로 떠올린다
기우뚱, 굽 높은 초인종 울린다 밥 던져주는 여자에게 눈 맞추고 꼬리 흔들며 수초 속으로 사라진다 꺾긴 어항의 빛처럼 스스로를 굽힌 구피는 오늘도 어제다.
납작한 미술 시간
납작한 바람 미술실 훑고 지나간다
풍경은 노랑이 없어 빨강도 없다
소실점 밖의 아이들 색 하나 품지 못하고
염기 없이 유리창에 다닥다닥 붙어 있다
코도 납작, 입도 납작
납작한 것들은 기울기가 같아서 피카소 닮지 못한다
동그라미가 없어 서글픈 몬드리안은 검은 창살 서성인다
점점 납작해지는 미술 시간
서 있는 배경에서 짙고 옅음 말하지 않아도
아이들의 캔버스엔 원근법이 사라진 지 오래다
염소 울음소리 파랗지 않아 샤갈도 없다
코도 삐쭉, 입도 빼뚤 아니어서
교복에 목매고 있는 아이들
싱거운 구름에도 셀 수 없이 넘어져
납작할 대로 납작해지고 있다
빨강이 없어 파랑도 없는 미술 시간
한쪽으로 눈 몰린 가자미 닮은 아이들이
바닥으로 침전하고 있다.
혼서지에서 나를 시작하다
장롱 깊숙이 숨겨둔 어머니 유품 꺼내 쪽빛 보자기 편다 구겨지지 않게 싸리나무 막대 반으로 잘라 청실홍실 동심결로 엮어 보낸 아홉 번 접은 편지 한 통 해서체로 알 품고 있다
유품의 시간 일으켜 앞장세운다 함진아비 바가지 깨치는 소리 우지끈 나는 문턱 저편이다 말발굽이 파평 윤씨 가마 더불고 개울 건너도 버들개지는 물오르지 않는다 사주 싼 보자기에 철쭉 서너 번 피었다 진다 미명의 별자리 중 어디쯤이다 마른 젖 빨고 있는 형 보채어도 아직은 동생 아니다
별자리가 또렷한 그믐밤 반딧불이 눈짓이 청사초롱이라서 꽃에 내려앉은 나비 옷고름 풀기에 좋은 시각이다 숨의 각도 가파른지 꽃씨 하나 빗금으로 내린다 씨줄과 날줄 교차하는 오늘의 성좌가 물고기자리라면 망망대해 헤엄치는 미물은 분명 나의 사유이다 착상 되어 비늘 돋고 지느러미 힘살아 올라도 치어는 치어라서 아직은 뼈대 없는 문장이다
누가 먼동을 데리고 오는가 귀한 딸을 아들의 배필로 허락함에 선인의 예 따라 납폐의 예 올린다는 조부의 혼서지가 단아하여 닭은 홰치지 않는다 꽃도 피지 않는 이월의 바닷가 허물 벗은 내가 알몸으로 환하다 시가 오는 아침이다.
단풍
다홍치마
흘
러
내
린
다
시월 밟는다
바삭,
사랑 저리다.
납작 새우
새우 한 마리 하얀 시트에 납작하게 누워 있다
성모병원 예수님 아래 두 손 모으고
머리카락 서너 개 흩날리며
파닥임도 없이 웅크린 채 누워 있다
한 세월 고래 싸움에 등 터지면서도
마디마디 가는 삶 보듬으며 살아왔을 그녀
아들 다섯 낳으며 더욱
납작해진 자궁과 뱃가죽이
굽은 등 하얗게 쓰다듬는다
이제는 가죽만 남은 야윈 킬로그램
한때는 은빛 물결 헤치며 대양도 꿈꾸었을
까만 눈이 오늘은 퀭하니 초점 잃는다
안쓰러워 주무르는 내 손보다 가늘어진 다리가
맥박 절룩이며 한줌 생으로 잡힌다
한생 넘기가 그렇게도 힘든지
골다공증보다 더 숭숭해진 뼈마디도
한 번의 호흡에 기우뚱 휘청인다
내 우려의 눈빛 위에
예측할 수 없는 첫 키스처럼
그녀의 마지막 눈빛 포개지는 순간
새어나오려는 부르튼 눈물
주사기 안으로 납작하게 되짚어 들어간다
하얀 시트에 태아처럼 웅크리고 누워 있는
새우 한 마리, 벚꽃처럼
계절 참 고운 사월 시나브로 접고 있다.
빨래 이야기
얼룩진 채 구겨져 들어온 하루가 엄마 없이도 잘만 쌓이는 집
열심히 살았던 하루의 흔적이
범벅된 말 양념으로 찍으며 시간 발효시키는 사이
치킨 냄새 밴 황갈색 블라우스가
잘게 쪼갠 아르바이트의 시간 내려놓는다
종일 의자에 짓눌렸던 재수생의 콧수염 녹녹한 방귀도
갑갑한 말 쏟아내며 노랗게 뜬 하루 마감한다
자정 되어서야 모아진 하루의 시간들
푸른 촉수 내밀며 짙은 코인사 하면서도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은 아예 코끼리의 눈꺼풀이다
무거웠던 하루의 스위치 내려지자
진득했던 시간들 세탁기로 향한다
오늘은 단오 날
엄마도 둠벙에서 몸 불려 때 밀었을 것이다
창포에 머리 헹구고
강강술래 강강술래 젖은 하루 가장자리로 밀어냈을 것이다
밀어내면 낼수록 태풍의 눈처럼 글썽이는 고요
엄마는 간암처럼 피곤하고 주름진 살점 탁탁 털어
허공에 널며 머리숱 없이도 꽃내음 날렸을 것이다
빨랫줄 감치는 햇살 따라 우리도 노 저어간다
하루의 시간 점점 빠져나간 자리
도회의 하늘 가볍게 접히고 있다.
맛조개
지하 단칸방에 여자 산다
죽피처럼 단단한 외로움
한두 겹 껴입은 여자
실지렁이 같은 작은 숨통 하나로
세상 입술 부르트게 산다
누군가 문 두드리며
빛 없는 세상
소금 한 줌이라도 건네주는 자 있다면
삶의 촉수 내밀어
짠하게 그리웠다 정말 그리웠다고
그 그리움 짙고 옅음은
팅팅 불은 달빛 아니라
마디마디 서걱대는 대숲소리였다고
세파에 입술 부르트도록
농도 맞추며 살던 여자
농게 같은 포크레인이 무허가라며
삶의 터전 철거할 때도
도너츠 담배 연기처럼 삶의 시름
허방으로 하나둘 날려 보내며
제 숨통 스스로 끌어안고
두문불출하던 여자
몸 하나 겨우 눕힐 수 있는
단수된 지 오래된 방안에 홀로 틀어박혀
전화도 없이, 텔레비전도 없이
하루 종일 웅크리고 앉아
스스로 간 맞추며 살던 여자가
오늘은, 가랑이 쫙 벌리고 앉아
세상 젓가락질하는 사람들 향해
이판사판 대쪽 같은 옷 벗는다.
순천만 갈대밭
거시기로 살던 사람들
흐르고 흘러 순천만 갈대밭에 모여
누구는 농게로 살고
누구는 짱뚱어로 살고 있다
여기는 지구 공원
물길 따라 눈길 더듬다 보면
새들이 빠뜨린 습한 속눈썹들
싹 틔워 뿌리내려 살고 있다
무디무디 둥글게 마을 이루어
물 들면 물 드는 대로
물 나면 물 나는 대로
서로 껴안으며 살고 있다
누군가 집 지은 곳에서
누군가는 짝짓기 하고
누군가 노을 훌쩍이던 곳에서
누군가는 봄갈결로 흐르며
수 천 년의 생명
키우며 살고 있다
갈대밭 보이는
순천만 맛집에서 꼬막비빔밥 먹으며
농게 닮은 자식이랑, 짱뚱어 닮은 아내랑
한 백 년쯤 살고 싶다.
만어사의 물고기는 쇳소리를 낸다
만어사에 가보면
까마득한 세월 동안
한 계단씩 지층 밟고 올라온 물줄기가
석회암 녹여 마른 강물 이룬 자리
금방 그물 푼 어판의 물고기처럼
돌들 내는 소리 뜨끈하다
생긴 것들이 꼭 엑스레이에 찍힌
검게 굳은 간 같기도 하고
한 세월 풍화 작용으로 너덜해진 폐 같기도 하여
잠시 아버지의 품 어디쯤 생각하고 있는데
지게 진 아버지가 먼저
관절염으로 강물 건너오시더니
한 바수게 쏟아낸다
평생 검은 담즙 온몸으로 흘려보내며
석회질 뼈마디 담금질하여 벼려냈을
담석 한 무더기 쏟아낸다
한세상 지고 온 지게 벗어놓고
호흡 고르는 아버지의 등을
산사의 풍경소리 훑고 지나간다
어느덧 만 마리 물고기
일제히 공중 부양하며
무어라, 무어라
쇳소리 내고 있다.
소금쟁이
아버지가 물 위 걷는다
물수제비뜨며 사뿐 강 건넌다
가벼운 몸무게와 젖지 않는 몸
얼마를 비워야 저렇게 가벼워질 수 있나
얼마를 젖어야 저렇게 젖지 않을 수 있나
정강이 물 위에 내리고
수면에 온몸 맡기며 가고 있다
얼마나
간간한 표면장력이기에
저렇게 가뿐히 생 건널 수 있는 걸까.
어화석 깨어나다
물고기 화석 걸려있는 을지병원 아마존 병동
수술 마친 여자가 앙상한 뼈마디 새기며 침대에 누워 있다
허공으로 숨결 날리는 여자에게 산소마스크 씌우듯
병실 수족관에 플러그 꽂는다
물고기가 서서히 깨어나 수초에 붙어있는 공기방울
톡톡 터트리며 아가미 움직이는 사이
여자는 두어 번 입술 떤다
물고기가 지느러미 파닥이며 수초 끌어올리자
형광빛에 젖어 있는 여자의 새파란 몸뚱이도 꿈틀린다
점점 온기 회복하는 여자의 손금 따라가 보면
물줄기 가늘어지며 물짓 멈춘 자리
가슴지느러미 벌목한 물고기 한 마리
하얀 배 뒤집고 누워 있다
병실 창문 열자
프리지어 향 달빛으로 쏟아진다
점점 화색 돌기 시작하는 여자 손에 힘 실린다
여자는 이미 도려낸 젖가슴으로 달빛 뿜어대며
전사 되어 강둑 달리고 있으리라
숨결의 시작과 끝 공존하는 아마존
여자는 물침대 위 하얀 배 뒤집고
숨 헐떡이고 있는 물고기 겨냥하고 있으리라
저, 푸, 른, 심, 장, 저, 푸, 른, 심, 장,
달빛 향해 활시위 당기는 여전사의 손 떨리는 순간
휑한 가슴 하나 부레처럼 물 위에 떠오른다
수억 년 전 달빛 도식한 물고기의 뼈마디 쓰다듬는다
화석의 휑한 가슴에 아마존의 바람과 나무와 꽃이 채워진다
물고기 한 마리 마취주사에서 깨어나고 있다.
맹장수술
곪을 대로 곪은 사랑
겉만 봐서는 모르지
아프면 얼마나 아프겠냐며
생살 그대로 배 째라는 배짱으로
메스보다 당당하게
수술대 위에 가슴 풀고 누웠다
하나, 두울, 세엣 세기도 전
의식은 여뀌 뒤에 눈뜨는 절망처럼
주사 한 방에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노릇노릇 잘도 익은 맹한 사랑
맹장을 마흔이 넘은 나이에
떼어내고서야
사랑이라는 걸 알게 되나 보다
병실 창밖에는
때 아닌 장대비 내리고 있다
이제, 가슴에 우산처럼 달려 있는
아파도 아프지 않은
무통 주사기 떼어내고
비 흠뻑 맞고 싶다.
콜라주
새들의 부리도 멈춘 자리
미친 듯이 온몸 찍어 붙이는
저 담쟁이의
표현 중독
시멘트벽도 희망이다.
아내가 달빛에 젖었다
투명한 유리병 속에 담아두었던
말린 감국 한 송이 찻잔에 띄우며
여자가 베란다로 향한다
얕고 깊은 도회의 발자국 내다뵈는 창밖에는
달빛 고인 자리마다
부르튼 발들 파랗게 누워 있다
불 견디어낸 빗살무늬처럼
소금물에 데쳐지고 채반에 얹혀온 세월
오늘은 저 도회의 모퉁이에
한 움큼 비켜 세워두고, 여자는
달빛 드는 베란다에서 잠시 우아하고 싶은 게다
그리움으로 노 저어가는 파문처럼
감국 한 송이 찻잔에 띄워두고
숨겨두었던 노란 꿈 베어 물고 싶은 게다
찻잔 위로 파랗게 솟아오르는 꽃잎의 숨결
한 모금 폐부 깊숙이 들이 마시는
여자 입술에 부르튼 달빛 쌓인다
달빛 쓸어내며 베란다 창문에 비친
낯익은 얼굴 쳐다보는
여자의 염기 빠진 하얀 눈웃음이
마른 꽃잎처럼 살갑게 저려온다
달빛 마시며 달빛으로 서걱대는 여자
살아온 날들 물기 머금고 무게 더해갈수록
삶의 중심 아래로 가라앉히며
달빛 짙게 우려내고 있는 저 여자가
오늘은 투명한 유리병 뚜껑 열듯
베란다 창문 활짝 열고는
달빛 속으로 환하게 걸어가고 있다.
제3부 땅빛 노래
기억의 힘
옛집 사랑채 갈라진 벽 틈으로
새어나오는 기침소리 요란하다
지붕 들썩이며 서까래 사이로 햇살 한줌 쏟아진다
아버지 등 기대던 허리 굽은 방 안에는
질경이 참비름 나팔꽃
이름 낮은 식물들 지팡이 더듬듯 뿌리박고 있다
식물의 뿌리 캐어본다
기억이란 참으로 길고도 잔잔한 것일까
희미한 시절도 실마리가 땅 냄새 맡으면
어느 새 무게 중심 아래로 내린다
천식 앓으시던 아버지는
계절 저물어 입 바싹 마르기 시작하면
질경이 뿌리 캐어 기침 다스렸다
들기름에 참비름 달달 볶아 쓰린 속 쓸어내렸다
마실 다녀와 아랫목에 손 집어넣듯
식물들 하나둘 이불 속으로 발 들이민다
물관 끊어버리고 구들장 밑으로 내려앉는다
아버지 새끼 꼬며 뒤틀리던 심사
화롯불에 톡톡 털어내던 자리
나팔꽃은 잊지 않고 피어날 것이다
초겨울, 뒤란 굴뚝 위에는
작년인 듯 모과가 후각처럼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자식 농사법
화분에 심어 키웠던 붉은 고추 따
아파트 베란다에 비닐 깔고 말렸다
희나리고추로 점점 윤기 없이 변해가는
고추 바라보고 있으려니 왠지 속이 상해
풋고추 안주 삼아 막걸리 한 모금 들이키는데
탱탱하게 약 오른 붉은 생고추
광주리에 담아 지붕 위에 너시던 어렸을 적
아버지가 고추 속에서 나오시며 한 말씀하신다
찬이슬 맞혀야 윤기 흐르는 벱여
고양이 발 같은 검정 고무신 신고
초가지붕 위에서 고추 말리시던 어렸을 적
아버지가 꼿꼿하게 뒷짐 지고 또 한 말씀하신다
바람 쐬어야 매운 내 나는 벱여
법은 모르시더라도, 농사짓는 법 터득하고 계셨던
아버지는 고추 농사지으면서도
이슬과 바람을 햇빛과 함께 섞어
신발 문수에 맞게 자식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셨다
어렸을 적 아버지의 나이가 된 지금
시골집 처마 밑에 곱게 매달아 놓은
종자 고추를 지퍼 내리듯 열어보고 나서야
거기에 자식 키워내던 아버지의 농사법이
노오란 고추씨로 맵게 숨어 있음을 알았다.
아내를 못 말리는 여자라고 하는 까닭은
시골길 가다 문득 차 세워 놓고
가느다란 목 코스모스에 기대고는
가을 적시기 때문이다
묻혀갈 한 평 남짓 땅, 저 구름 위에 자리 깔아놓고
시시각각으로 변해가는 양떼며, 꽃이며, 새털 보며
하늘 적시기 때문이다, 맑은 개울
은빛 피라미보다도 속살거리는
미루나무 이파리 배꼽 뒤집히는 이야기에도
웃음 적시기 때문이다
아내를 못 말리는 여자라고 하는 까닭은
아파트 뒤편 산비탈, 예닐곱 평 남짓 뿌려놓은
쑥갓, 시금치, 상추, 열무 이름대로 고개 드는 모습에도
텃밭 적시기 때문이다, 비 내리는 날
아이들 자고 있는 도회지의 밤 일으켜
홍등 켜져 있는 동네 생맥주집에 앉아
궁둥이보다도 더 질펀하게
술잔 적시기 때문이다, 달빛 드는 베란다 무릎 사이로
민달팽이 한 마리 지나면 난초 촉 같은 곰삭은 첫사랑에
시동 걸다가도 이내 싱크대로 돌아와
손등 적시기 때문이다.
가구 할인점
가구 할인합니다
쇼윈도우 안에는 봄맞이 행사 때도 보았던
사내가 큰 숫자로 서 있다
옹이처럼 제 눈 속에 가을 구겨 넣은 몸뚱이가
나이테 결대로 자존심 문신하고는
점심 때 먹은 추어탕이
식도 따라 역류하듯 목 따갑도록 외쳐댄다
점점 가격 토해내는 가을맞이 할인 쇼 보며
은근히 미꾸라지처럼 꼼지락 심술보 발동한다
대 바겐세일, 가구 할인합니다
사내의 호흡 더욱 거칠어진다
럭키 세븐, 칠십은 되어야지
흥정에 에누리 없자
사내는 쇼윈도우에서 걸어 나와
내게 어깨띠 건넨다
가구 할인합니다
가을 하늘에는 퀭하니 내가 걸려 있다
소리가 침묵보다 허전하다.
압력 밥솥
몸살 난 어머니 대신하여
아침밥 지으며 문득 쳐다본 밖의 풍경
세찬 바람 뚫고 까치가
미루나무 위에 집 짓고 있다
흔들리면서도 세상 틈새 메우며 다독이는
저 놀라운 몸짓
바람 부는 날 골라 집 짓고 있는
까치와 눈 마주친다
밥 짓는 일 또한 집 짓는 일 아니던가
쌀 박박 문질러 밥솥에 안치고는
손등으로 물 높이 조절해 본다
하나둘 손가락 사이로 떠오르는 하얀 가슴들
쌀뜨물 다독여 가라앉히고는
흔들리며 더욱 또렷해지는 까치의 초점으로
밥솥 뚜껑 맞추어 본다
틈새 없이 밀착되는 고무패킹처럼
한 세월 그렇게 살아왔을 어머니
불 당겨놓고 이마 짚어 본다
발바닥부터 점점 달아오르는 몸
한 호흡 두 호흡 점점 거칠어지는
모세 혈관의 살 뜨거운 소리
가슴으로 세상 끌어안으며 부글부글 속으로 끓다
제살 뚫으며 새어나오는 뜨거운 숨결
홀로 삭이며 살아온 세월들 피식피식 깨어나는 위에
먹물 같은 집 한 채 올려진다
열두 발 상모의 춤사위로 돌아가는
저 타는 듯한
몸짓
사바나 미용실
우리 미용실에서는
한 치의 오차 없이 건기와 우기의 가르마 가르지요
뷰티, 뷰티, 뷰티풀 사바나
단골손님 머리에는 도회의 질긴 풍경 묻어 있어
목덜미까지 축축하게 빗어 내려야 하는데요
염기 없어서 그런지 고슴도치처럼 돌돌 말리네요
스트레이트파마 추천해 드릴까요?
서비스로 동맥과 정맥도 황홀하게 커트해 드리고 싶은데요
염려하지 마세요
우리 헤어샵 싸인볼 보세요, 하얀 붕대 감고 있잖아요?
거울 속에선 마른번개 컹컹 짖네요
목선 건조하지요? 촉촉한 웨이브로 연출해 드릴까요?
그래도 허기 가시지 않는다면 짙은 매니큐어 어떠세요?
건기의 얼룩말이 풀 뜯는 시간에는 염색에 주의해야 해요
색과 색이 경계 이룰 때
색들은 은밀하게 손 집어넣어 서로 파고들어
색의 살점이 색의 살점 곱씹는 것이어서
사바나는 자꾸 시야가 흐려지거든요
우기 오면 코팅한 머릿결처럼
도심 마른 꽃에도 윤기 있게 생기 돌라나요?
뷰티, 뷰티, 뷰티풀 사바나
주머니의 힘
주머니 만드는 일하는
그녀의 웃음소리 도회지의 아침 여네
새떼들의 빛나는 날갯짓이네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저 어린 날 여치와 방아깨비의
푸른 날갯짓 주머니 속에 한데 비벼 넣어
웃음 빛깔 토해낼 줄을
가을 들녘 콩깍지 터지듯 웃음보 터트릴 줄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아스팔트 기어가는 초록 애벌레의
투명한 속살 쳐다보며 벌거벗은 웃음 웃을 줄을
공장 지붕으로 이륙하는 비행기 엔진소리 같은
재봉틀 돌리며 꿈처럼 훨훨 웃음 날릴 줄을
어떻게 알고 있었을까 아동복 만드는 공장에서
재봉 일하는 열아홉 그녀가 주머니 달 때마다
반 지하 유리창으로 비집고 들어오는 햇빛을
단칸방에 간간히 들려오는 풀벌레소리를
주머니 속 가득 집어넣어 삶 박음질하며 웃을 줄을
주머니 만드는 일하는
그녀의 웃음소리 도회지의 하루 마감하네
새떼들의 차분한 귀향이네.
수목을 날아가는 풍뎅이는 뒤돌아보지 않는다
살 발라 허연 뼈로 남은 자리
상수리나무는 가슴 문질러 기억하리니
하루 가로질러 날아가는
풍뎅이여
한 번쯤 뒤돌아볼 일이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날들을
수액 빨듯 살아왔던가
저녁 무렵 숲 걷다보면
찰박이는 수목의 그림자들
서로에게 차오르며 안부 토닥이고 있다
광합성이 둔해지고
묵 굳듯 하루 저물 즈음
수목 등떼기 들추어 보면
쓸개 근처 지나온 생채기 하나
참숯처럼 새까맣게 타고 있으리니
하루 가로질러 날아가는
풍뎅이여
잠시 돌아서서
수목 다독여 볼 일이다
그대 눈짓 없이 등지고 떠나면
상수리나무는 밤새껏
흐물진 가슴, 뭉개지고 있으리니
쌀밥, 그 힘으로 살아왔다
호박잎 죽보다 옥수수 꽁보리밥보다
꺼끌꺼끌한 생
내 몸뚱이 작살나는 줄 모르고 하루하루 숨차게 살아왔어
벼 수매 가마니 푸른 도장 찍어 놓은 듯
파랗게 엎드려 숨죽여 있으라는 말씀은
나 두 번 죽이는 일인 거여
세상 일이 새참 먹듯
간간히 건너뛸 수 있는 거라면 몰라도, 그렇지 않다면
목숨 같은 쌀 가지고 농하지는 말어
우리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가 오줌줄기처럼
노랗게 이어온 목숨이여
농사짓는다고 생각 없이 살아온 거 아녀
땅 소중한 줄 내 다 알고, 쌀 소중한 줄 내 다 알어
조상님들 뜻 따라
봄이면 자식 같은 종자 볍씨 내어
소금물에 숨 참아내고, 잿물에도 눈 발갛게 뜨는
튼실한 놈만 골라 생의 못자리에 발목 심으며 살아왔어
그 놈들 커가며 어디 재미만 있었겠어
푹푹 빠지는 물 수렁논
발목 관절염으로 쟁기질하고
속상한 갈비뼈 몇 개 꺼내 써레질도 하며
그렇게 삶 다독거리며
농투성이 이름 헛되지 않게 꾸역꾸역 살아온 거여
아, 그런데 이 짓 그만두라니
이 짓 하지 않더라도 보상은 해 준다니
자식 잃고 그 코딱지만 한 돈 몇 푼으로
해결이 되는 그런 경우는 아닌 거여
내 한평생 배운 게 이 짓여
더욱이 지금까지 수렁논에 뼈 빠진 게 얼만데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아버지
그리고 아버지의 아버지 뼈까지 합치면
헤아릴 수 없는 뼈가 이 논에 퍼렇게 숨 쉬고 있는데
여름이면 뻐꾹새 울음처럼 볏대가 쑥쑥 자라고
가을이면 자식 불알처럼 축축 늘어진 씨알이
흐뭇하게 한 논 가득한데
임자 없는 무덤처럼 덥수룩 묵정논 만들라 하면
그게 될성부른 소리여
어림없어, 생각 없이 그런 말은 말어
요새 신문 널찍하게 차지하고 있는
윤기 잘잘 흐르는 캘리포니아 평원이나
인더스강 유역과는 비교도 안 되는
텃논 몇 마지기 가지고
땅땅거리고 싶어 어깃장 놓는 거 절대 아닌 거여
조상님네들이 그리 한 것처럼
그냥 내 땅에서 내 손으로 생 가꾸고 싶은 거여
무슨 욕심 있어서가 아닌 거여
쌀밥 한 사발 고봉으로 얹어 먹고
내 땅에 발 디디고 있으면 등뼈가 슬금슬금 일어서고
소싯적 배운 신석기 시대 그 힘센 황소처럼
손아귀에 불끈불끈 힘이 솟아올라 그런 거여
너무 옥죄지는 마, 꽃차례도 마디 돋을 만큼 여유로워야
목 내밀고 꽃 피우는 법인 거여
우루구아인지, 우라질인지 나 몰러
쌀시장 개방인지, 견방인지 나 그런 거 잘 몰러
들꽃묶음처럼 볏단 하나 세워두면
그냥 자식새끼 세워둔 것처럼 뿌듯해서 그런 거여
다른 뜻 없어, 정말 다른 뜻은 없어
쌀밥, 그 힘으로 나 지금까지 살아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렇게 살고 싶어 그런 거여
정말, 그런 거여
철쭉
목울대
철 모르는 여인네 살고 있다
철 쭉, 철 쭉쭉
꽃대
노을 한 접시 피어난다.
대추나무 한 그루 심고 가신 까닭은
할아버지 뒤란 텃밭에
대추나무 한 그루 심고 가신 까닭을
봄은 어떻게 알겠습니까마는
움 하나 틔워주면 잎사귀는 윤기 있게 자라나고
손자들 귀는 순하게 커가는 것임을
할아버지 잎겨드랑이에 감추어 둔 가시로
손자들 옆구리 쿡쿡 찌르신 까닭을
여름은 어떻게 알겠습니까마는
아프고 힘겨울수록 꽃은 터지고
손자들 눈은 환하게 밝아지는 것임을
할아버지 장자처럼 생긴 청개구리 한 마리
푸른 잎사귀에 불뚝 얹어 놓으신 까닭을
가을은 어떻게 알겠습니까마는
개구진 자리일수록 빛깔은 짙어지고
손자들 웃음소리는 발갛게 익어가는 것임을
대추나무 한 그루 손자들 마음속에
삼백예순날 열병으로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까닭을
겨울은 어떻게 알겠습니까마는
따뜻한 찻물 우려내듯
대추나무엔 연 하나 걸려 있는 것임을
청둥오리 식당
레미콘 공장 지탱하는 냇둑으로
뿌리내린 살얼음이 밤 서서히 키운다
끈적한 길 달려온 레미콘 트럭
열나게 비빈 하루 일렬로 세우는 사이
불 켜기 시작한 식당은 자맥질하기 시작한다
깃 접고 있으면 먹물 한 점 찍어 놓은 듯 희미한 간판이지만
처자 어투 그렇게 물결처럼 간지러워
식당은 밤이 되어서야 낮보다 환하다
북방의 찬바람에 꿈 싣고 날아와
이곳 청둥오리 집에 둥지 튼 지도 어느덧 한 삼 년
살 바르는 시퍼런 칼날 온몸 바르르 떨어도
여자는 오히려 꿈쩍도 없이 기억의 칼날 꼬느었다
소쿠리에 푸른 쌈 희망처럼 담아내다가도
구들장에 뿌리 깊이 누워 있는 사내
일흔 훌쩍 넘긴 허리 굽은 시어머니
마른 버즘 핀 아이, 생각하면
가장자리보다 심장부터 파랗게 얼어붙는 여자
살짝 건드리면 날갯죽지에 머리 묻으며
주물럭 주물럭, 가슴 한 켠 통째로 내놓는 여자와
맑을 린 한 잔 기울여
세상 이리 섞고 저리 섞으면
세상은 왜 이리도 두루마리 휴지 쏟아지듯 울컥한지
서둘러 밖으로 나온다
청둥오리 떼 지나갔는지
하늘에는 도로가 환하게 포장되어 있다.
테니스 이야기 1
-노부부
통통, 세상 환해지네요
스커트 자락 휘날리며 여자가 탱글탱글 끗발 날리자
테니스장 옆 풀과 나무도 덩달아 물오르네요
오후 두 시 괘종시계도 나른한 불알 달구고 있고요
네트 넘나드는 공의 예리한 각도와 예측할 수 없는 속도로
구력 얕은 종아리가 패싱샷 당해도
햇살 뭉쳐 웃음꽃 푸르게 날리고 있네요
테니스 치며 우리도 눈부시게 가볍던 때가 있었지요
손과 손 마주치며 신혼의 꿈 밀어 올릴 때
마음의 사기그릇 반짝반짝 빛났고
강한 드라이브 뽐내며 한여름 훨훨 날려 보낼 때는
스스로 끓어오르는 절정에 가슴 뭉클하기도 했지요
어찌 빛나고 훤한 때만 있었겠어요
숨통 끊어진 낙엽처럼 드롭샷 당하여
우리들 연서가 겨울 문턱 서성일 때는
사그라지는 문장과 문장 엮어 햄릿의 독백 이야기했고요
계절이 스핀으로 굴절되어 사정없이 휘청일 때는
슬라이딩으로도 잡을 수 없는 엎질러진 시간 아쉬워했지요
테니스 친다는 것 네트 넘기는 일만은 아니었어요
서녘으로 흐르는 노을처럼 달구고 달궈지는 일이었지요
이제는, 튕겨 오르던 햇살도 구부정해지고 바람도 부르트네요
살아온 날로 살아갈 날이 점점 여물어가요
씨줄과 날줄로 서로를 달궜던 심지 내릴 때가 되었어요
퉁퉁, 세상 저무네요.
테니스 이야기 2
-진노인
구부정한 폼으로 테니스 치는 진노인은 구두 꿰매는 바늘처럼 오가는 공 죽어라 받아 넘긴다 절룩이는 허벅지가 가끔은 구릿빛 사내들 생에 스핀도 걸고 패싱샷도 한다 구력은 무시할 수 없는 게야 일흔 살 노인답지 않게 어깨 으쓱댄다
짧은 스커트 입고 알맹이 나폴거리는 여자 바라보는 진노인의 동공 점점 발기되며 테니스장 위 지나는 비행운에 얹힌다 씨줄과 날줄의 양탄자 타고 아라비아해 지나는 신밧드의 모험담이 정점에 닿는 순간 스매시 한 방에 프랑크푸르트 탄광의 막장 무너져내린다 다리에 철심 박으면서도 애국가 4절은 끄떡없이 불렀어야
하와이로 이민 간 딸 내외가 보내온 꽃무늬 남방셔츠 입고 테니스 치는 진노인은 오늘도 화려한 헛손질이다.
겨울 산행
달에 내린 우주인처럼
지축 흔들며 하나둘 시동 건다
각자의 무게 등짐으로 지고 한 발 두 발 옮길 때마다
마음 추스르며 부스럭부스럭 경을 외는 지구의 잎사귀들
아코디언처럼 오르고 내리는 산행의 발길에
음표 같은 푸른 돛 하나 마음에 품고 있다
운무 뚫고 햇살 한 줌 퍼지기 시작한다
화면 조정 끝난 모니터에는 흑백 지구 선명하다
가르마 가르며 쏟아져 내리는 낭떠러지는 언제 보아도 아찔하다
동안거에 들며 마른 잎사귀 합장하던 저 나목의 몸짓
목관악기처럼 가늘게 들려오는 연하디 연한
겨울 숲의 숨결 노을보다 울컥하다
솔개 한 마리 시린 하늘에 레이더로 떠 있는 아래로
삶의 가지 하늘로 곧추 세운 자잘한 나목들
힘차게 비탈 버티어 내고 있다
달에 앉아 겨울산 바라본다
점점이 줄지어 등짐 나르는
지구인 발자국에 푸른빛 묻어난다
으쓱, 봄 어깨에 물오른다.
제4부 하늘빛 노래
점자, 그녀가 환하다
봐라, 점자 그녀가 환하게 피어나고 있잖니
흑점이 툭툭 부호 교란하며 농간 부릴 때만 해도
점자, 저렇게 환하게 피어날 줄 몰랐잖니
열다섯 달덩이 점자, 이울고 환해지기까지
볼우물 깊숙이 수많은 월계수 심어 가꾸는 수고 왜 없었겠니
디딜방아 같은 우묵한 어둠들 통째로 찧어 손끝에 날염도 하고
부르튼 입술에 흐드러지게 꽃씨도 뿌려보며
살아도 그믐이었을 어둠 몰아내기까지
캄캄한 세상과 왜 창창히 마주하지 않았겠니
점자, 그녀 지문에 노란 달맞이꽃 묻어나기까지
새들이 찍어대는 모호함의 발자국에 주파수도 맞춰 보며
두려움과 설렘의 안테나 잘게 썰어 마중 나가던 수고 왜 없었겠니
이제는 그믐도 보름이고 보름도 보름인 점자
문워크로 환하게 꽃길 걷고 있잖니
봐라, 점자 머리핀에도 둥글게 꽃은 피어나고 있잖니
저 꽃자리
-철탑농성
저 자리 저 꽃자리
시큰하니 시린 꽃, 피다만 저 자리
철탑에 둥지 틀고 살다 보면
바람꽃처럼 깃털 없이 새들도 알몸인 저 자리
저 자리 등 굽은 저 자리
살붙이 아닌 쇠붙이에 살 부비며 둥글게 산다는 건
낮달 부르트고 허리 굽는 일인 줄 알면서도
그래도 살아야지 않겠냐며
빈 껍질인 희망이 오히려 다독이는 저 자리
절망의 무늬 닦아내려, 평등한 세상 꿈꾸려
하늘로 난 길, 저 자리 오를 때
살아 있다는 건 죄처럼 긴 겨울밤 지나는 일이라며
절망처럼 온몸 감전될 줄 알면서도
피복도 없이, 목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마음 졸이며 오르는 저 자리
저 자리 새들도 마음 추스르는 저 자리
하늘 말씀 살얼음으로 쪼아내 새끼들 키워가며
글썽이는 가슴들, 쌀뜨물 가라앉히듯 다독이는 저 자리
그래도 아침이 오지 않을 만큼 긴 밤은 없지 않겠냐며
빛살 하나 머금고 함께 살자 발목 시리게 건너는 저 자리
철탑 송전선처럼 오른손 하는 일 왼 손도 알게
손에 손 잡고 산등성 지나 냇물도 함께 건너며
폭설 내려 새 날지 못하는 매운 계절에도
전깃불처럼 환하게 꽃은 피어나야 할
저 자리 저 꽃자리
시큰하니 시린 꽃, 피다만 저 자리
너를 넘다
잎사귀들이 기억의 눈과 귀 열어놓을 때
하늘이 원고지 펼쳐 살갗 시린 홍시 채워 넣을 때
미처 건네지 못한 사연 긷기 위해
내가 너를 넘는 샘티재
아직도 담배 꽃 향에 진득하게 취한 눈동자
후미진 골목에 붙여놓고 있을
허기 가득한 둑길 따라 마른버짐 핀 얘기
네댓 마지기 무논에 펼쳐놓고 있을
너의 제비꽃 방천 달리기 위해
내가 너를 넘는 말티재
풀벌레 푸른 날갯짓 주머니 속 비벼 넣는다
가을 들녘 콩깍지 터지듯 웃음 버무려 본다
신작로 기어가는 초록 애벌레 투명한 속살 쳐다보며
벌거벗은 고백해 본다
그리하여 내가 너를 넘는 진양조 고개
마음 손금 주고받을 때 싸리 꽃 손 내보이던 이유와
맥주 한 잔에도 시린 얘기 거품으로 감싸던 이유와
단풍들 나이에 낙엽 애태우던 이유를
내 무딘 귀청에 허물 벗겨 담기 위해
내가 너를 넘는 뱀티재
넘다 보면 하루도 가고 열흘도 가고 네 봉분처럼 둥근 달도 뜨겠지
계수나무에는 낙엽도 지고 눈송이도 날리고 나이테도 여물겠지
넘자 넘자 어화 넘자, 기억할 게 없게 너를 넘자
사무친 기억 없으면 잊을 것도 없겠지
풀의 제사
풀이 죽은 자들의 영혼을 풀의 뿌리라고 하자 세상 향해 빳빳하게 고개 들지 못할 때 썩어 문드러져 진물 나는 것들은 스스로를 바람 부는 반대 방향으로 버틸 힘도 없는 것이어서 거듭제곱으로 숨이 팍팍하다
누런 잎맥 따라 묵묘 속으로 들어가 본다 생의 수렁은 질펀하게 가라앉아 있고 해 뜰일 없는 숨일수록 고요하다
풀이 죽은 밤 속 달래는 맑은 이슬을 먹물이라고 하자 시커멓게 타들어가는 숨 가쁜 세상 이리 섞고 저리 섞다 보면 원고지엔 시린 별들 하나둘 채워져 오늘의 축문은 물관보다 촉촉하다
누대를 이어온 숨이 누대를 이을 숨으로 전이되는 순간 새순들은 바람 없이도 엎디어져 일어날 줄 모른다 별들이 잔 돌리다 운행도 멈춘 자정의 시각 열린 창밖으로 향불이 푸르게 새어나간다.
내소사 가는 길
내소사 가는 길
곰소항 짜운 바람이 앞장 선다
일주문 지나 경내로 들어서는 길목에는
해풍으로 군데군데 쓰러져 있는 나무들
갈치의 은빛 지느러미보다
빛나는 생채기 하나씩 머금고
소금기 짙은 염전 건너고 있다
산사 내려온 바람이 침엽수보다 더 뾰족하게
경전 내려놓고 간 자리
물이 증발하며 돋아나는 소금기처럼
마른 잎사귀에는 숙성된 말씀 하얗게 묻어 있다
물관을 수차로 퍼 올리며 점점 절여지는 하안거의 시간
나무들은 산사에서 들려오는 경을 외며
소금기 짙은 말씀 꾹꾹 눌러 앉혔을 것이다
시간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점점 우묵해지는 나무들
누군가에게 자리 내어준다는 것
그것 참 생의 절정에 서는 일이다 말하지 않아도
내어주면서 소생하는 나무들로
세상은 윤기 있게 고요하다
해풍에 쓰러진 나무 와락 껴안아 보는
내소사 가는 길
짜운 바람에 쓰러진 나무들
와불 하나씩 품고 있다.
수양버들
윤기 있는 머리카락 길게 늘어뜨리고
족히 칠십 년은 허리둘레 키우며 살았을 당신이
오늘은 연두빛 줄기 툭툭 밀어 올리는
연못의 수련 보고도
초승달 같은 속눈썹 뜬금없이 뒤집는다
인생사 어긋난 잎 달고도
미상 한 번 찌푸리지 않던 그대가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만큼만 그렇게 흔들리던 당신이
오늘 따라 잎 가장자리 톱니보다 까칠하게
버들솜 이리저리 날리며 눈병처럼 핏줄 굵은 투정이다
큰바람 불어와도 자리 한 번 눕지 않던 그대가
오늘은 이상하다, 참 이상하다
가는 바람에도 머리 길게 풀어헤치고 자꾸 눕는다
누우면 누울수록 가벼워지는 사람아
복사꽃 지천인 사월에 눈 내린다.
숫자론
성체대회 열리는 하느님 나라
뒷문 열려 있는 간이 여자 화장실에는
뽀얀 복숭아꽃 수 천 수 만 피어나고 있다
숫자 세지 마라, 간혹 세다 보면
별안간 왈칵 쏟아져 내리는 꽃잎들
얕은 상상력에 의하면 억과 조 그리고 경 다음에는
하얀 사막이리라
반짝이는 모래알에 닿기도 전 모두는 무너져 내리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안개는 피어오르리라
숫자 세지 마라, 간혹 세다 보면
감정도 없이 부풀어 오르는 숫자에
꽃들은 하나둘 윤간 당하리라
숫자 닿기만 하면
핏기 사라져 버리는 꽃나무들
그리하여 떨어진 꽃잎에는 감정이 없으리라
예쁜 꽃잎도 하나이고 미운 꽃잎도 하나다
숫자 세지 마라, 간혹 세다보면
꽃의 개성과 감상 허락해 주는 일 없이
숫자만 잉태할 뿐이다
숫자만 낳을 뿐이다
누구든 하느님 나라에선 숫자 세는 게 아니다.
감자꽃
감자 깎다보면 시간 우묵하게 파인 자리, 꽃 밀어 올린 흔적 있다
봄 되면 스스로 뭉개지는 힘으로 흰 자리는 흰 꽃으로, 자주 자리는 자주 꽃으로 별 닮은 꽃 피워낸다
흰 자리를 자주 꽃으로, 자주 자리를 흰 꽃으로 성형하는 세상과는 달리 딴청 피우는 감자는 참 별일이다.
치자나무 이야기
무명 적삼 사이로 비치는
연한 젖가슴처럼
치자나무에 올망졸망 꽃 필 무렵이면
직녀는 언제나 베틀 앞에 앉았다
베틀에는 끝없는 바다 출렁이고
초경처럼 수줍게 꽃잎 떨어졌다
가슴에 새겨진 연흔은
숨 쉬고 숨 끊어지는
단 한 번의 호흡으로는 지워지지 않나 보다
솜털이 잔잔한 나이에
지아비 잡아먹었다는 누명 쓰고서도
자궁에 사내 꺾꽂이 한 여자는
잔뿌리 같은 여린 발 톡톡 치는 신호 따라
둥글게 꿈 키워냈을 것이다
불면증으로 견디어 온 세월
황홍색 실타래 양수처럼 터지기 시작하면
그리움의 탯줄 잘라
빨랫줄에 촉촉하게 널었을 것이다
평생, 만장 푯대 끝에 매달려
노을로 나부꼈을 여인이여
코뚜레
쇠죽솥에 삶아지고 불에 구워진 것이
살 터지는 아픔으로 손 묶네
뼈마디들 휘어져 내리며 땅에 코 박는 순간에도
근성 잃지 않고 있네, 저 뾰족한
달이 파르르 떨며 소의 코청 꿰네
낚시 바늘도 아가미 파고드는 순간에는 부르르 떨고
코바늘도 한 올 한 올 뜨는 순간에는 재채기 한다네
누군가 꿴다는 것
누군가에게 꿰어지는 것임을
소의 코청 꿰며 아네
소의 시간이 흰 거품으로 피어나고 있네
꿰려고, 꿰이지 않으려고 바동거리며
서로에게 가해지는 힘의 절정
순간, 툭 터지며
뭉게구름은 음-머 음-머 피어나고
코청 꿰고 있는 달빛도
살점들 연신 되새김질 하네
아픔도 서로 부비고 부비면 생살 돋는가
저 둥글게 커가는 뾰족한 달빛은
풍장
낮달 같은 사내가
바람 부는 산 오르고 있다
진득한 뿌리로 생 지탱하며
거센 바람 견디어 온 산 위의 풀
황홀한 독 있음을 사내는 알고 있었을까
생을 씹듯 풀 씹으며
씹을수록 파랗게 물드는 몸
사내 입에서는 들꽃 냄새 난다
손 내밀면 민달팽이처럼
푸른 촉수 진득하게 자라나고
맨살로 한 발 두 발 생 더듬다 보면
어느덧 산은 한창 여름이다
간지럼 태우는 바람에도
떼구르르 구르는 푸른 햇살처럼
소낙비 내리는 교성에도
파르르르 키 자라는 음모처럼
거짓 없이 풀은 자라고
자랄수록 사내는 작아진다
손을 아래로 뻗으면 뻗을수록
짙어지는 풀의 그림자
질펀하게 가라앉은 한 평 남짓 생의 수렁
낮아지는 숨일수록 빛나게 풀들은 자라는가
풀이 숨을 관통하여 자라나
산과 지평선 이룰 때
생의 그림자는 비로소 가늘어지고
가는 만큼 영혼은 가벼워지나 보다
낮달 진 산 너머로
별 낮게 뜨고 있다.
파란 고양이
어둠 가로질러 도로 위 질주하는 눈빛 쭈뼛하다
순간, 반사 신경의 정수리
발가락 지문이 회오리 일으키며 힘 모으는 사이
씨줄과 날줄의 속력은 한 치 오차도 없이 성호 긋듯 생의 눈금 겨냥한다
절정의 한복판, 헐떡일 사이도 없이 타이밍 벨트 숨 멎는다
생의 하중 둥글게 견디며 살리라 수없이 되뇌던 살점 머금은 타이어도
스키드 마크에 곱씹힌 눈깔 보며 바르르 떨고 있다
판화처럼 찍어대며 굴러가는 바퀴에
사뿐사뿐 올라타 진득이 달라붙은 고양이가
도로 파랗게 밝히며 가고 있다
지구는 삼백예순날 근조
우묵함에 대하여
콩 위에 넘어져 달빛만 스쳐도 얼굴에 분화구 돋는 민자 고모, 낯빛은 상감마마 아니라서 어둑하여 중력 이기지 못하고 자꾸 아래로 흘러내렸다 사내 둘이나 들였어도 이력만 화려할 뿐 움 돋을 기미 없이 둥지 늘 허전했다
손 넣으면 더욱 깊어지는 주머니, 우묵한 것은 눈물 담기에 안성맞춤이라고 유두가 살 파고들어 더욱 몰락한 젖가슴, 절구통에 찧어 봐도 젖은 가슴만 물컹하게 우러나왔다
지구 저쪽으로 이민 간 곰보 고모, 분화구 뒷면 어루만졌을까 우편으로 보내온 사진 속 옹기 우묵해서 불룩하다 글썽여서 반짝이는 민낯도 우무묵처럼 투명하다
분화구의 시간 우려낸 고모, 고국의 공항 들어서고 있다 민짜 얼굴 환하다.
산 1
-백두산
옥수숫대 스치는 벌판의 바람이 밀어주는 수고 없었던들
원시 자작나무 숲 지저귀는 산새들의 응원 없었던들
산은 스스로 높아지는 법 없었을 것이다
구름 한 점 품는 일 더더욱 생각도 못했을 것이다
오를수록 점점 자세 낮추고 있는 나무들
이파리 떨구는 맨살의 아픔 없었던들
가는 햇살로도 눈부신 저 여린 싹 하나
비탈 어디에도 틔워낼 수 없었을 것이다
오르면 오를수록 숨 차오르는 세상
스스로 다독이는 심호흡 없었던들
풀 한 포기 햇살 한 줌으로도 순수함 퇴색되는
저 고고의 자리 마련하지 못했을 것이다
나를 비워야 내가 채워진다는 걸 몰랐던들
하늘이 물인 듯, 물이 하늘인 듯
연못 하나 품을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혼자서 나 아니듯
산도 혼자서 산 아니다.
산 2
-제주도 오름
물허벅에 흐벅진 바람은 한 사흘쯤이나 불어서 느영나영 젖가슴으로 일렁이나 물길질에 낭창한 바람은 한 나흘쯤이나 불어서 황소 불알로 출렁이나
살암시라 살당보믄 살아진다 살당보믄 살아진다
이녁의 연한 젖가슴에 하얀 귤꽃 내려앉아도 저녁의 실룩한 엉덩이에 노란 유채꽃 남실거려도 서방은 한 석삼년 바람 불어서 이어도 이어도 사나
젖꼭지보다 불고롱한 그리움으로 봉긋해지나
◧ 박주용
◾ 충북 옥천 청산 출생
◾ 충남대 국어국문학과, 건양대 교육대학원 졸업
◾ 2014 매일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
◾ 게룡문인협회 회원, 화요문학 동인, 시산맥 회원
◾ 건양대학교병설건양고등학교 교사 퇴임
◾ 이메일 : pjy841@hanmail.net
◾ 저서 : 최승호 시에 나타난 생태학적 상상력 연구, 『금강 천리 길』에 나타난 원형 상징과 흐름의 미학 외 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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