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
박양근
여름은 물과 물이 만나는 계절이다. 물이 애두르고 감돌고 몰려 있다가 다시 흘러내리는 곳이 바다의 포구이다. 그곳은 마치 사람들이 모여 사는 조그만 사회처럼 쉬지 않고 볼락 거린다. 비라도 며칠 동안 흠씬 내리면 포구의 바닷물은 푸른빛을 반사시키다 못해 푸른 해초 향을 뿜어낸다. 여름철엔 더욱 푸른 숲속으로 들어간 기분이 든다. 바람이 말갈기처럼 수면을 채우는 때를 맞추어 바다로 나서는 이유들이다.
요즈음 짬이 생기면 수시로 바닷길로 나서는 버릇이 생겼다. 바다를 쭉 가로지른 광안대교의 덕을 톡톡히 보고 있다. 해운대 신시가지를 우회하는 울산행 고속도로를 따라가다 보면 지금까지 시내에서 벌어졌던 일 따위는 단숨에 잊는다. 집안 일이든, 직장 일이든, 자잘한 개인적인 일이든 달맞이고개를 넘기면 다 잊는다. 이쪽에서는 세상살이가 분초를 다투는데, 고개 저편에서는 어촌이 수굿하게 둘러앉아 있다. 내겐 망중한忙中閑으로 들어가는 고갯길과 다름없으니 왜 해송 그늘에 드러누운 바위를 찾지 않겠는가. 덩ㄱ 그곳으로 ㄷ라려가고 싶은 거다.
바다보다 산이 좋다는 사람도 많다. 그런 말은 유흥업소가 난립한 광안리나 해운대를 두고 하는 말이겠다. 정말이지 그런 바다에서는 번쩍이는 네온과 피서객의 역겨운 함성 외에는 다른 소리가 들릴 수 없다.
그런데 조그만 포구로 가면 진정한 바다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철썩이는 파도가 쉴 사이 없이 들려오는대도 귀가 쉰다. 바다 바위에 앉은 갈매기를 보는데도 눈이 쉰다. 덩달아 마음도 쉬어보자 한다. 그 조화에 참여하기 위해 일부러 해변 길을 골라 더듬는 것이다.
부산에서 동해로 올라가는 길이 서너 갈래다. 그 중에서 송정 마을을 끼고 뻗은 해변길이 가장 마음에 든다. 눈요기가 도처에 자리해 심심하지가 않다. 가슴 아픈 산성이 반쯤 허물어져 있는가 하면, 왜적의 침입을 알려주던 봉수대의 반이 잡초에 묻혔다. 해신을 모신 사당에서는 풍어를 빌던 어부들의 축원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비가 추적거리는 저녁 무렵, 오랑대로 가면 해신당에서 들려오는 굿 소리가 섬뜩하게 온 몸을 휘감는다. 저려지는 몸, 그러고 보니 대변으로 가는 길은 바다를 안기는 길이지 싶다.
포구는 생명을 잉태하는 자궁. 옴팡져서 조갑지나 둔부처럼 에로틱한 곳. 불가사리의 원초적 욕망이 꿈틀거리는 곳. 골목으로 잇대어진 하수구도, 흐르는 산골 바람도, 하다못해 구경군의 발길도 포구의 술집에서 멈춘다. 심지어 시간조차 이곳으로 모여든다.
송정을 지나면 첫 번째 닿는 포구가 대변이다. 이름은 제법 크지만 단출한 항구에 불과하다. 길가에 진열된 생선 좌판도 광안리 횟집에 비하면 촌스럽기 이를 데 없다. 어느 포구와 달리 색다른 오감이 배어있다. 색색의 깃발을 펄럭이는 멸치잡이 어선이 들어오면 힘줄 돋은 어부들은 그물을 털며 칼칼하면서도 우렁찬 노래를 부른다. 쫙 펼쳐진 바다를 앞마당으로 삼고 있는 피부 거슬린 그들이 밤낮으로 생명력을 일구어내는 끈기도 가상하다. 다른 어항들과 달리 여전히 대변의 이름을 지켜가는 인내심이겠다.
포구가 가까워지니 냄새가 달라진다. 비릿하고 짠 냄새가 내 몸을 껴안는다. 생선더미를 고르는 아낙의 재빠른 손놀림이 멸치 그물을 거두어들이는 남정네들의 힘 오른 몸짓에 호응한다. 한쪽에서 이른 장작불이 활활 타오르고, 갈매기는 집어등의 환한 불빛을 기다리며 날갯짓을 쉬지 않는다. 밤 포구는 누구나 잠 못 이루는 곳. 그 곳 골목 입구 다방에서는 립스틱 짙게 바른 아가씨가 밤 갈매기가 되는 꿈을 꿀지도 모른다. 그들의 생명력, 나도 모르게 울대가 울먹인다. 멸치잡이 포구는 그렇게 하루를 보내면서 맞이한다.
대변항을 조금 지난 노을이 붉어지는 방파제에 차를 세웠다. 내 마지막 쉼터다. 그곳에 서면 까닭없이 고향 풍경이 떠오른다. 바다가 없는 시골이지만 푸른 들판은 바다의 물결처럼 바람에 일렁거렸다. 상상의 바다를 생각하며 시냇가에 고무신 통통배를 띄웠다. 갈매기가 울면 숲속 산새처럼 울까 궁금하게도 여겼다. 바다에 부는 바람이나, 들판에 부는 바람이나, 모두 그리움을 안고 울거야 하는 생각도 빼지 않았다. 결국 바다바람이 불면 이곳으로 달려오는 것이다.
포구는 해안에 찍혀진 작은 점. 그 점이 바닷길을 잇는다. 대변 포구를 지나 산모퉁이를 돌면 솔밭을 곁에 둔 다른 포구가 있을 것이다. 그곳에도 사람이 살고, 배가 잠들고, 갈매기가 쉴 것이다.
차창으로 소금이 배인 해초 냄새가 밀려온다. 포구에 정박한 멸치잡이 배를 밝히는 집어등이 이곳에서도 환하다. 밤은 다가오는데 포구는 잠들 줄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