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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1:13-22
찬송가 366장 ‘어두운 내 눈 밝히사’
고난은 드라마나 소설 속 스토리를 박진감 넘치게 만드는 중요한 요소입니다. 고난을 통해 주인공이 성장하고 변화하는 과정은 흥미진진합니다. 그는 실패와 좌절 속에서도 배움을 얻고, 결국 어려움을 극복하여 목표를 이루고 승리합니다. 이런 전개는 정형화된 패턴이지만, 여전히 독자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하지만 이러한 이야기를 현실에 대입해 보면, 고난은 결코 반가운 손님이 아닙니다. 실제로 그런 역경에 처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이를 피하고 싶어 할 것입니다. 고난은 두렵고 불편하며, 때로는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 놓기 때문입니다. 현실에서의 고난은 그저 고통스럽게 느껴집니다.
네 가지 고난(13-19)
우스에 부유하고 덕망 높은 욥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7천 마리의 양과 3천 마리의 낙타, 5백 겨리의 소 그리고 5백 마리의 나귀가 있었고, 종도 많았습니다. 그는 유목뿐 아니라 농경일을 함께 하며 큰 부를 누렸습니다. 욥은 경제적 풍요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흠잡을 데 없었습니다. 종들을 공정하고 정당하게 대했고, 불행한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에게는 7명 아들과 3명의 딸이 있었는데, 각각 생일마다 잔치를 베풀었습니다. 남자가 중시되었던 시대를 감안하면 그의 가정은 우애가 깊었고, 화목하고 평등했습니다.
욥은 신앙적으로도 빠질 것 하나 없었습니다.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에서 떠난 자였습니다. 그가 가졌던 습관만 보아도 이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욥은 자녀의 생일 잔치가 끝난 후 혹시라도 흥에 겨워 하나님을 경홀히 말하거나 해이한 마음으로 무심코 죄를 범했을까, 하나님을 욕되게 할까 염려하여 번제를 드렸습니다. 이는 그가 하나님께 대하여 얼마나 철저한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와 하나님과의 내면적 교제를 중시했는지를 보여 줍니다. 욥의 신앙과 삶, 가정은 이상적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욥을 자랑했습니다. 땅을 두루 돌아 여기저기 다녀온 사탄에게 그를 자기 종으로 그와 같이 온전하고 정직하며,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없다고 소개합니다. 사탄은 이를 인정하지 못합니다.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겠습니까?" 사탄은 욥이 아무 이유 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아닐거라며, 이기적인 동기 곧 자기 풍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이 욥에게 복을 주고 소유를 울타리로 지켜서 그런 거라며, 소유물을 거두어가면 욥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향해 욕할 것이라 합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사탄에게 욥의 소유를 맡기며 쳐보라 합니다. 욥이 온전함을 지킬거라는 하나님의 확신입니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마냥 허락해주지는 않습니다. 그 가운데 그의 몸에 손 대지 못하게 하는 제한, 하나님이 정하신 울타리를 둡니다. 이렇게 욥의 고난은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을 받은 후, 사탄은 욥의 소유를 네 차례에 걸쳐 쳤습니다.
(13-15)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사환이 욥에게 와서 아뢰되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그 곁에서 풀을 먹는데 스바 사람이 갑자기 이르러 그것들을 빼앗고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재앙은 욥의 자녀들이 맏아들의 집에서 잔치를 벌이던 날에 닥쳤습니다. 평소와 다름 없이 소는 밭을 갈고, 나귀는 곁에서 풀을 뜯고 있는 평화로운 하루에 스바 사람이 쳐들어왔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손자 세바의 후손인 유목민으로(창 25:3), 아라비아 반도의 최남단에 정착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욥의 소와 나귀를 약탈하고, 종들을 죽였습니다. 첫 번째 재앙은 인간의 침략으로 발생했으며, 갑작스럽고 예상치 못한 것이었습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습니다.
사환의 이야기가 다 끝나기도 전에, 두 번째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16)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하나님의 불이 하늘에서 떨어져서 양과 종들을 살라 버렸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이번에는 하늘에서 하나님의 불이 내려 욥의 양과 종들을 모두 살라버렸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불'은 번개 혹은 그로 인한 화재, 엘리야 때에 갈멜산에 내렸던 것과 같은 불 등으로 봅니다. 뭐로 보든 크게 중요하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양과 종이 살라졌다는 겁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사건을 보고하는 자는 사탄이 소유물을 치고 있음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의 손길은 가려져 있고, 사탄의 손은 의심받지 않습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허락 아래, 하나님의 불로 재앙을 욥에게 안겨주었습니다.
두번째 보고가 끝나기도 전에 세번째 재앙의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17)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갑자기 낙타에게 달려들어 그것을 빼앗으며 칼로 종들을 죽였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이번에는 갈대아 사람이 세 무리를 지어 와서 낙타를 빼앗고 종들을 죽였습니다. 그들은 바벨론에 정착했던 반(半)유목민 집단으로 보입니다. 낙타는 인도에서 서쪽으로 상품을 운반하는데 큰 수요가 있는 비싼 가축이었습니다. 욥의 재산 중 점점 값진 것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공격도 빠르고 갑작스러웠습니다.
세번째 소식이 전달되는 중 네 번째 재앙 소식을 든 자가 왔습니다.
(18-19) 그가 아직 말하는 동안에 또 한 사람이 와서 아뢰되 주인의 자녀들이 그들의 맏아들의 집에서 음식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시는데 거친 들에서 큰 바람이 와서 집 네 모퉁이를 치매 그 청년들 위에 무너지므로 그들이 죽었나이다 나만 홀로 피하였으므로 주인께 아뢰러 왔나이다 한지라
네번째는 욥에게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거친 들에서 폭풍과 같은 큰 바람이 와서 맏아들의 집 네 모퉁이를 쳤고, 집이 무너져 욥의 자녀들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수많은 가축을 잃어버린 아픔과 자녀를 잃은 슬픔을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를 들은 욥의 마음은 무너졌습니다. 그는 충격을 받았을 겁니다.
욥의 마음을 더 아프게 만드는 것은 그와 자녀들의 삶이었을 겁니다. 욥은 하나님 앞에 의롭게 살았고, 자녀들 또한 그렇게 살도록 했습니다. 혹여나 실수를 할까 늘 조심하게 했고, 혹시 모를 죄를 위해 매번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재앙을 당했습니다. 그의 자녀들은 결코 방탕해서 재앙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그렇기에 욥에게 이를 쉬이 받아들이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일은 맏아들의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던 단 하루에 일어났습니다. 사탄은 조금의 여유라도 주면 욥이 고난을 견딜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지, 추스릴 여지조차 주지 않고 몰아쳤습니다. 재앙 순서를 보면 가장 작은 것부터 큰 것으로 커집니다. 그에 따라 욥의 정신적 고뇌와 압박도 점점 가중되었을 것입니다. 원인을 보면 인재 곧 사람으로 인한 침략과 하늘의 하나님, 자연으로 인한 재앙입니다. 땅과 하늘이 욥의 소유를 앗아갔습니다. 마치 사방으로 적에게 에워싸임을 당하고 있는 형국입니다. 하늘과 땅 모두가 그를 점점 옥죄어오고, 숨이 막이게 합니다. 더 이상 그가 설 곳이 없게 만듭니다. 단 하루만에 욥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욥의 반응(20-22)
(20-22) 욥이 일어나 겉옷을 찢고 머리털을 밀고 땅에 엎드려 예배하며 이르되 내가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가올지라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 모든 일에 욥이 범죄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원망하지 아니하니라
이에 대한 욥의 반응은 일어나 옷을 찢고 머리를 깎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고대 근동에서 비통함과 슬픔의 표현이었습니다. 욥은 가슴을 찢었습니다. 자식이 죽었는데 어떻게 아무 일 없듯이 살아갈 수는 있겠습니까? 그렇다고 고통 때문에 하나님 없다라며 저주하거나 저항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통 가운데 하나님 앞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는 땅에 엎드려 예배(하바, חוה)했습니다. 엎드림은 하나님 앞에 내려놓고, 기다리며, 모든 것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겠다는 의미입니다. 가혹한 시련을 속에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밖에 없다는 고백이기도 했습니다. 욥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빼앗은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나아가 욥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했고 그분의 이름을 찬송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에서 찬송하다는 히브리어로 '바라크'(ברך)입니다. 이 단어는 욥기 1장11절에서 사탄이 "그리하시면 틀림없이 주를 향하여 욕하지 않겠나이까?"에서 사용된 '욕하다'와 동일한 단어입니다. 뜻은 '축복하다, 찬송하다'인데, 이 단어가 하나님에 대해 사용될 때 '욕하다. 저주하다'란 정반대의 의미를 가집니다. 그러니 욥은 지금 사탄이 사용했던 그 단어를 그대로 고백을 하는 겁니다. 나는 여호와를 욕하지 않고 여호와의 이름에 오히려 복이 있다고 말입니다.
욥이 그렇게 할 수 있는 이유는 모태에서 알몸으로 나왔사온즉 또한 알몸이 그리로 돌아갈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인간의 출생과 죽음의 법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을 갈망하는 것도, 세속적 허무주의를 나타낸 것도 아닙니다. 인간은 철저히 하나님의 섭리에 순복할 수밖에 없는 유약한 존재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또한 욥은 주신 이도 여호와시요 거두신 이도 여호와라고 고백하는데, 인간의 본래적 무소유와 근원적 한계성을 의미합니다. 자신의 것은 원래 하나도 없었다는 겁니다. 궁극적으로 모두 하나님의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욥은 인간의 생사화복과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믿고 있었습니다. 욥은 자신에게 닥친 재난이 우연이나 혹은 운이 나빠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님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모든 문제를 하나님을 통해 보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하나님이 행하셨다는 의미보다 어떤 일이든 하나님 손 안에서 일어난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이 정해 놓은 틀, 주권 안에 모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욥은 모든 일에 범죄하지 않았고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욥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관하고 계시다는 걸 고백했습니다. 혼돈조차 하나님의 지배권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사탄은 그의 머리털 하나라도 해할 수 없습니다.
우리 인생 속에도 고난은 찾아옵니다. 인간관계, 직장, 가정 또는 재물 등에서 예기치 못한 일이 다가와 화평을 깨뜨립니다. 걔 중에는 가슴이 무너지는 청천벽력 같은 사건도 있습니다. 이런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는 갈피를 못잡기도 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는가? 왜 하필이면 나인가? 내가 이 고난을 받을 만한 무슨 잘못을 했단 말인가? 하나님은 왜 이런 일을 허락하셨을까? 하나님은 지금 어디 계신가?" 주어진 상황은 이해되지 않고, 답답합니다. 그러한 때 우리는 엎드려야 합니다. 엎드림은 우리가 할 수 없다는 고백입니다. 사방에서 막혔을 때,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고통스러울 때 이 고백이 필요합니다. 감당할 수 없을 상심을 하나님께 가져가면 길을 잃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으로 해결해야 합니다. 회복은 바로 이 고백으로부터 일어납니다.
고난의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와 주권을 기억해야 합니다.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이루어 집니다. 제 아무리 힘과 능력이 있다 하여도, 하나님이 정해놓은 울타리 안에 있습니다. 믿는 자의 삶은 아무리 극심한 환난과 고통 중에 있어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저는 우리교회 헌금 찬송 좋아합니다. 첫 소절이 '모든 것이 주께로부터 왔으니'인데, 이 가사가 늘 제 가슴을 울립니다. 왜냐하면 모든 소유가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롬 11:36)을 일깨워주기 떄문입니다. 살면서 인생을 내것이라, 당연한 것이라 여긴 적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진정 우리 인생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면, 하나님을 어찌 찾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때 행동하는 자신이 진짜 자기 모습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마치 "아무 것도 없을 때, 다 잃었을 때 우리가 어떻게 하는지를 보면 진짜 믿음이었는지 안다"고 말하는 듯합니다. 살 집이 없어 길 바닥에 나앉게 되어도 예수를 놓지 않을 것인가? 아니면 돈이 전부다. 건강이 최고다 하며, 자신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놓지 못할 것인가? 만약 그렇다면 우리의 찬양과 경배는 이제껏 누굴 위한 것인가? 참된 경배는 우리 상황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무너진 심령조차 하나님께 가져오는 것, 아프고 슬퍼도, 그 문제를 하나님 안에서 해결하려는 것입니니다. 사심 없는 신앙이 진짜 신앙입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웃을 수 없고, 차마 힘을 낼 수 없을 때에 주님이 치신 울타리를 기억하며, 주님께 삶을 던집니다. 폭풍우와 같은 인생 속에 우리로 주를 보게 하옵소서. 우리의 힘과 의지가 아닌, 주 앞에 엎드림으로 나아가오니 저희를 받아주옵소서. 하나님의 모양과 형상으로 지음 받았음과 주께서 예수를 십자가에 내어주기까지 사랑하셨음을 기억하게 하시고, 세상에 시선 두지 않고, 하늘의 가치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묵상을 돕는 질문
1. 욥은 고난이 찾아왔을 때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했습니다. 우리에게 찾아온 고난이 무엇이었는지와 그때마다 어떻게 대처했는지 적어 봅시다.
2. 욥은 고난이 찾아왔을 때 엎드리고 예배했습니다. 하나님을 앞에 기다리고 엎드려야 할 일들을 정리해 봅시다.
3. 욥은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고 고백했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는 고백을 할 때 우리의 무엇이 변화될지에 대해 적어 봅시다.
4. 욥은 고난 속에서 범죄하지 않고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신앙의 길을 잃지 않고, 마음을 굳건히 하기 위해 무엇을 하면 좋을지 적어 봅시다.
(작성: 김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