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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행 |
土 |
金 |
水 |
木 |
火 |
강약 |
육친 |
일주 |
식상 |
재성 |
관살 |
인수 |
510 / 390 |
수리 |
260 |
130 |
80 |
80 |
350 |
▪ 이 사주의 특성
1. 인수 태왕하여 일주가 허왕하다
2. 戊戌 대운에 비겁이 강하여 가정곤궁
3. 일지 식신 문창이 임하여 총명영리
4. 인수 공망으로 대학입학 포기
5. 일지에 寅木 편관이 록을 놓아 관인상생
6. 효인탈식 寅申 충 말이 시비가 된다.
▪ 격국용신: 식신생재격 金,水,木 희신, 火,土 기신
戊土 일주가 申월에 출생하여 실령하였으나, 연지 戌과 시지 辰에 통근하고 연주와 월주 시주에 丙火 인수가 투출하여 일지 寅에 장생을 놓고 연지 戌 묘고에 통근하여 일주를 생부하여 일주가 510 득력하여 신왕하다.
일주가 수리 510으로 강하여 월주에 임한 申金 식신으로 수기를 유행하여 식신생재격이다. 월지 申에 식신 문창성을 놓고 강한 일주의 수기를 유행하여 총명하고 영리하며 언변이 뛰어나다.
3개의 인수 丙火가 투출하여 식신 申金을 극하여 효인탈식이 되고 寅申 충으로 내가 계획하는 것과 말하는 것이 모두 시비가 되어, 내가 한마디 말을 하면 파란을 몰고 오고 충돌이 발생한다.
丁酉(3세~12세)대운에 가정 곤궁
丁火 인수가 酉에 장생으로 강한 인수가 효인탈식하여 가정이 곤궁하였다.
酉 대운에 申酉戌 방합 金국을 이루어 상관의 세력이 너무 강하여 공부는 잘하나 반역성이 강하여 기존세력의 반발이 심하다.
월지 申에 水 재가 장생이 되었으나 공망이 임하여 어린 시절이 곤궁하다.
▪ 노무현의 유년기
1946년 경상남도 김해시 진영읍에서 태어나 아버지 노 판석과 어머니 이 순례의 3남 2녀 중 막내아들로 출생하였다. 1953년 대창초등학교에 입학하여 학업 성적은 우수했으나, 가난으로 결석이 잦았다고 한다.
5학년 때에는 담임선생님의 권유로 전교 학생회장을 맡기도 하였다.
그 뒤 경남 김해의 진영중학교에 진학하였으나 입학금이 없어 중학교 1학년을 외상으로 다니기도 하였다. 1학년 말에, 제4대 정·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자인 이승만의 생일을 기념하는 교내글짓기대회가 열리자 노무현은 백지동맹을 선동하다가 정학(停學)을 당하기도 했다.
戊戌(13세~22세)대운에 가정 곤궁
비겁이 왕하여 가정이 곤궁하여 부산상고를 졸업하고 군대에 임대하여 상병으로 제대한다.
▪ 노무현의 청소년기
집안 형편이 어려워져 중학교를 1년 휴학한 뒤 장학금을 얻어 가까스로 중학교를 다니다가 1963년에 진영중학교를 졸업했고, 1966년에는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이후 농업협동조합의 입사시험에 응시했으나 낙방하고, 한 어망 제조업체에 취직하였으나 최저생계비에도 못 미치는 저임금과 발등을 다쳐도 치료비조차 주지 않는 고용주의 비정함에 실망하여 그만두었다. 그 뒤 막노동판을 전전하며 사법고시에 매달리게 된다.
己亥(23세~32세)대운에 천월덕귀인이 寅亥 합하여 대길하다.
亥 대운에 천월덕 귀인이 임하고 甲木 관이 장생이 되고, 寅중 甲木 칠살이 寅亥 합木으로 일지 寅木 관이 왕하여 관인상생이 되어 대길하다.
1968년 23세 戊申년에 군 입대
23세 戊申년에 비견이 역마에 임하여, 육군에 입대하여 육군 제12사단(을지 부대)에서 군복무를 마치고 1971년 육군 상병으로 만기 제대했다.
1971년 26세 辛亥년에 사법시험 준비
26세 辛亥년에 세지 亥에 甲木 관이 장생이 되고, 寅亥 합木하여 관의 기가 火로 흘러 관인상생이 되어 火가 강해지는 5월부터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같은 고향에서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권 오석의 둘째 딸 권 양숙과 연애를 시작하여 혼담이 오고갔다.
1973년 28세 癸丑년에 결혼
28세 癸丑년에 결혼하여 1973년에 아들 노 건호, 1975년에 딸 노 정연을 낳았다. 그러나 신세한탄을 하며 허송세월을 보내던 중, 아내 권 양숙의 극진한 사랑과 내조로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사법시험에 도전해 세 번 실패한 후, 네 번째 도전하여 유신시절인 1975년 30세에 사법시험 합격하였다.
1975. 乙卯 30세에 사법고시 합격
乙卯년에 乙木 정관이 亥卯 합木, 寅亥 합木하여 관이 왕하고 관인상생이 되어 사법고시에 합격한다.
30세 乙卯년에 판사임용
1975년 30세 乙卯년에 정관 乙木이 간여지동으로 강하고 일시 지지와 寅,卯,辰 방합 木국으로 왕한 木 정관이 寅,午,戌 삼합 火국을 이루어 관인상생이 되어 身登公門(신등공문)으로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대전지방 판사로 임용됐다.
庚子(32세~41세)대운에 변호사 개업
庚金 식신이 월지 申金에 통근하여 식상의 세력이 강하여 寅申 충하여 관을 충하고 申辰 합 水 재가 삼합이 되어, 판사로서의 직장생활을 생활을 구만 두고 자유업으로 변호사로 개업한다.
1978년 33세 戊午년 5월에 판사 사직 변호사 개업
33세 戊午년에 寅午戌 삼합 火국이 塡實(전실)되고, 주작이 왕성하고, 甲木 관이 戊午년의 午에 사궁되어 관이 죽어 현직에서 물러나고, 불 火가 득세하여 火는 주작이며 인수로 법으로부터 고통 받는 사람을 위하여 주작 말과 서류 문서로 변호하는 변호사로 활약한다.
판사를 그만두고 부산에서 변호사로 개업하였고, 세무·회계 전문 변호사로 명성을 쌓았다. 이후 주로 조세 및 회계사건 등을 통해 높은 수임료를 받았다. 당시 평범한 동료 변호사들처럼 지역의 경제인들과 어울리며 요트를 즐기는 등 자유롭고 풍요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나 민청학련 사건 변론으로 이름이 높았던 김광일 변호사가 1981년 부림 사건 변호에 참여하라고 권유했고, 이를 수락함으로써 본격적인 인권변호사 활동을 시작하는 계기가 되었다.
1982년 37세 壬戌년에 미 문화원 방화사건 변론
1982년 37세 壬戌년에는 庚子 대운에 庚金이 金생水하고 申子辰 삼합 水 국으로 水극火하여 火는 찬란히 빛나는 문화를 水극火하여 기존의 보수적인 세력에 반항하는 세력을 위하여 변론한다.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의 변론에 참여하였고 1984년에는 부산공해문제연구소 이사를 거쳐 1985년에는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장을 맡게 되면서 시민운동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다. 그해 자신의 사무실에 노동법률상담소를 열기도 했다. 또 1987년에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부산본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아 6월 민주항쟁에 앞장섰다. 그 해 8월 22일의 거제도 대우조선 사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대우조선 노동자 이 석규가 사망하자 이상수 등과 함께 사인 규명 작업을 하다가 9월에 제3자 개입, 장식(葬式)방해 혐의로 경찰에 구속되었다.
辛丑(42세~51세)대운에 변호사 면허정지
辛金 상관이 丑 묘고에 통근유력하고, 丙辛 합 水하여 水극火하여 인수 면허증이 회두극을 받아 변호사 면허가 정지된다.
辛丑 대운에 상관이 유력하고 연주 일주 운한에 寅午戌 火 인수의 기를 가지고 살았다면, 庚子 대운에 申子辰 水극火하여 어려운자의 편에 살았다. 辛丑 대운에 巳酉丑 삼합 金국으로 식신 상관으로 자기를 따르는 유권자의 민의를 대변하는 정치에 눈을 돌려 정치에 입문하게 된다.
1987년 42세 丁卯년에 상관견관하여 변호사 업무정지
42세 丁卯년에 11월에는 상관견관하여 변호사 업무정지 처분을 받았다.
▪ 노무현의 정치 입문
1988년 43세 戊辰년에 김영삼에 의하여 정치참여
43세 戊辰년에 비견이 나를 도와 나의 뜻을 따르는 유권자의 마음을 사고 대운에서 상관이 유력하여 많은 지지자들의 힘을 받아 정치에 뛰어든다.
재야 활동을 하던 그는 당시 통일민주당 총재이던 김영삼에게 발탁되어 1988년 4월 그는 김영삼 통일민주당 총재의 부탁을 받고 제13대 총선에 출마하여 정치에 입문하였다.
1988년 43세 戊辰년에 13대 국회의원 당선, 청문회 스타 부상
1988년 戊辰년에 월주 申과 세지 辰이 부산에서 출마하여 부산을 水가 많은 바닷가로 申子辰 삼합 水국을 이루어 월지 申金이 申子辰 삼합 水국으로 寅申 충을 하지 않고 水생木하여 강한 木이 절처봉생이 되어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부산 동구에서 통일민주당 후보로 제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국회 노동위원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여 이해찬, 이상수 의원과 함께‘노동위원회의 3총사’로 불렸으며, 제5공화국이 끝난 직후, 그해 11월 제5공화국 비리 특별조사위원회 청문회에서 전 국가안전 기획부장 장세동, 전 청와대 경호실장 안 현태, 전 법무부장관 이 종원, 현대그룹 회장 정주영 등을 상대로 한 증인신문에서 차분하고 논리적인 질의와 치밀한 추궁으로 청문회 스타가 되었다. 이어 최초로 텔레비전으로 중계된 5공 청문회에서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 명패를 던지는 등의 언동으로 국민의 관심을 받았다.
1987년 12월 현대중공업 파업 현장에서 강연 중 '사람을 위해 법이 있는 것이지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이 아니다'는 구절이 문제되어 언론의 공세를 받기도 했고 1989년 초 국회 5공 비리·광주 사태 특별위원회의 증인 출석 여부를 둘러싼 정부·여당의 집요한 방해 책동에 항의해 의원직 사퇴서를 냈다가 번복, 이를 다시 거둬들이기도 했다. 한편 이 무렵 김영삼은 그를 상도동 자택으로 수시로 불러서 면담도 하고 용돈도 넉넉히 지원해 주었다.
▪ 노무현의 정치 활동
1990년 45세 庚午년에 김영삼과 결별
庚金 식신이 월지 申에 통근하여 寅申 충하고 대운 辛金에 丙辛 합으로 인수를 회두극하여 자신을 이끌어주는 세력과 결별한다.
1990년 1월 12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 민주정의당 총재인 대통령 노태우, 신민주공화당 총재 김종필이 민자당을 창당하기로 하는 삼당합당 선언을 하였다. 그러나 노무현은 이를 부도덕한 야합이라는 이유로 강력히 반대하며 민자당에 합류하지 않았다.
이후 그는 김영삼의 3당 합당 참여를 민주화운동에 대한 배신으로 규정해 자신의 후원자였던 김영삼과 결별하였다.
1992년에 47세 壬申년에 국회의원 출마 낙방
47세 壬申년에 壬水 재가 丙壬 상충하여 나의 후원자를 배신하고 민주당후보로 부산 동구에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1993년 민주당 최연소 최고위원이 되었다.
1995년 50세 乙亥년에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낙선
乙木 정관이 亥에 사궁이 되고 寅亥 합木하였으나, 대운 辛金의 극을 받아 낙선되었다.
1995년 50세 乙亥년에는 부산광역시장 선거에 출마하여 36.7%의 득표율을 얻었으나 결국 낙선했다.
14대 대선에서 패한 후 정계 은퇴를 선언한 김대중 아태재단 이사장이 1995년에 전격적으로 복귀하면서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했고, 노무현은 이를 '전근대적 정치행태'라고 비난하면서 참여하지 않았다.
1996년 51세 丙子년에 국회의원 낙선
대운 辛金 상관이 인수 丙火를 丙辛 합극하여 낙선하였다.
4월 11일 실시된 대한민국 15대 총선에서는 서울 종로구에 통합민주당 후보로 출마했으나 신한국당의 이명박 후보, 새정치국민회의의 이종찬 후보에 밀려 3위로 낙선했다.
이후 그는 이부영, 박계동, 김원기, 이철 등과 함께 국민통합추진회의 일명 '통추'를 결성하여 활동하게 되는데, 15대 대선을 앞두고 당시 통합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였던 조순 전 서울특별시장이 신한국당의 이회창과 연대 및 합당을 결정하였고, 이로 인해 통추 내에서는 격론이 벌어졌다. 이부영과 이철 등은 "3김 정치를 청산해야 한다."며 신한국당을 선택하자고 주장하였고, 노무현과 김원기, 김 정길 등은 "군사정권과 그 후예들을 심판하여 50년만의 정권교체를 이룩해야 한다."며 국민회의 입당을 주장하였다.
결국 1997년 11월 노무현은 김 정길, 김 원기 등의 집행위원들과 함께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하여 김대중을 지지하였다. 입당 후 김대중은 노무현을 비롯한 통추 집행위원들을 독대한 자리에서 1995년 야권 분열에 대해 "오늘은 매우 기쁜 날이다. 여러분과 다시 일하게 된데 대한 기쁨뿐만이 아니라, 그 동안 여러분에게 지고 있었던 마음의 짐을 풀었다는 것이 가장 기쁘다."는 말로 사과를 대신하였다. 그리고 1997년 12월 18일, 김대중이 15대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노무현은 사상 처음으로 여당에 몸담게 되었다.
壬寅(52세~61세)대운에 관인상생 신등공문
壬水 편재가 丙壬 상충으로 사주에 강한 기신을 충하나 허상에 불과하고, 운지 寅에 丙火 인수가 장생을 놓고 甲木 편관이 록을 놓아 관인상생으로 身登公門(신등공문)하여 대길하여 대권을 손에 쥔다.
1998년 53세 戊寅년에 국회의원 당선
戊土가 대운 壬水 재를 극하여 괴인작용을 막고 일주를 도와주어 일주에 힘을 실어주고 운지와 세지 寅에 관인상생이 되어 국회의원에 당선된다.
1998년 2월, 한나라당 의원 이명박이 서울시장 경선 출마를 선언하며 의원직을 사퇴하였고 이에 따라 치러진 7월 21일 국회의원 재선거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소속으로 서울 종로구에 출마하여 한나라당의 정인봉 후보를 물리치고 6년 만에 국회에 복귀하게 되었다.
2000년 55세 庚辰년에 선거에 낙방
庚金 식신이 월지 申에 통극하여 金생水하여 대운 壬水가 실세로 유력하여 丙壬 상충으로 인수를 충하여 당선증이 무력하여, 부산 북구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방하였다.
4월 대한민국 16대 총선에서 상대적으로 당선 가능성이 높았던 종로구 공천을 거절하고, “지역주의 벽을 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부산북·강서 을 지역구에서 새천년민주당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결국 낙선하였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네티즌들이 인터넷을 통해 노사모를 조직하였고, 이후 노사모는 노무현의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국회의원에 낙선이 된 후, 그는 2000년 8월부터 2001년 3월까지 김대중 정부의 해양수산부 장관을 지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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