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후8장과 9장은 연보의 문제입니다. 바울의 입장에선 좀 유치하겠지요?
저 같은 무명용사도 오래 전이지만 11년 동안 연보를 하라는 설교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자로서
돈 이야기를 하려니 왠지 무안해서 광고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신령한 은혜와 물질을 대비한다는 것이 싫었고,
그 다음엔 자기 것을 드리는 수준이라면 연보하지 말라는 의미였습니다.
이스라엘이 자신의 죄의 속죄와 하나님과 화목에 대한 경각심이 없이 소나
양을 잡아 제사를 드리면 살인과 같고 개의 목을 꺾는 것과 같다 하십니다.
다른 예물도 그 의미를 상실하고 자기의 것인 양 드리면 돼지 피로
간주하고 우상을 찬송하는 것과 같은 행위로 보겠다고 말씀하십니다(사66:3)
만약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으로 말미암은 죄 사함과
지금도 살아계셔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시는 중보의 간구를 감사하지 않고
자신의 소유를 하나님께 드린다고 여기는 수준이면 연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연보는 어떻게 하는가? 왜 내는가? 유익이 무엇인가?
설명합니다. 지금의 헌금의 개념과 고린도후서의 헌금 곧 연보의 개념은 다릅니다.
바울이 말한 연보는 구제 곧 빈부의 차이를 줄이는 헌금, 그리고 선교비 등입니다.
물론 바울도 그 속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헌금이 신앙의 척도가 맞기는
하지만 자칫하면 하나님과 사이에 자신을 드리는 것을 대신하는 대용품이 될
위험이 많습니다. 어린 신자들의 눈에 하나님께서도 돈을 좋아하는 줄 압니다.
또 인간들이 자신이 돈을 좋아하다보니 하나님도 돈을 좋아하시는 줄 착각을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제시한 연보의 조건은 자신을 먼저 드리고 난 다음에 자신의 것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드리라고 제시합니다(5절) 그러므로 연보는 사랑의 진실함의
표현입니다(8절) 입만 주님 사랑해요 하고 지갑이 닫혀 있으면 바리새인들처럼
쉐마를 달달 외우는 입장사만 될 뿐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먼 사람들입니다.
연보를 할 수 있는 중요한 포인트는 과연 우리 가운데 임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신령한 복으로 부요함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점입니다(9절)
연보를 억지로 짜내는 일꾼들도 문제가 많지만 연보를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하는
사람 또한 문제가 많습니다. 이를테면 죄의 문제로 티격태격하면 둘 다 죄인입니다.
의인들은 이미 죄에서 주님과 함께 죽고 주님과 함께 다시 살아나서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기 위해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느라고 남을 정죄할
겨를이 없습니다. 자기 짐만 해도 태산인데 남의 죄를 간섭할 여유가 없습니다.
그렇듯 연보를 해야 된다고 강조를 하거나 안 해도 된다거나 하는 사람들 양편이
다 자신을 주님께 드려진 사람이며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의 보화로
영광스러운 풍성한 부요를 얻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연보는 강요도 기피도
할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심의 결과와
성령이 임하셔서 자신의 몸을 성전 삼고 거기에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비친
그 은혜와 사랑에 붙잡히지 않고 자신의 것을 하나님께 드린답시고 우리가
성과 대를 쌓고 우리의 이름을 새겨 떨치자 하면 그건 성경의 연보가 아닙니다.
8장의 요절은 13-15절입니다. “이는 다른 사람들은 평안하게 하고
너희는 곤고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균등하게 하려함이니 이제 너희의 넉넉한
것으로 그들의 부족한 것을 보충함은 후에 그들의 넉넉한 것으로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여 균등하게하려 함이라 기록된 것같이 많이 거둔 자도 남지
아니하였고 적게 거둔 자도 모자라지 아니하였느니라”
고린도교회는 아직 이와 같은 영적 경지에 다다르지 못했습니다.
물론 오순절 성령이 임하신 다음의 최초 교회는 이와 같은 나눔과 통용이
있었지만 자본주의가 발달이 되고 시장적 사고가 만연한 말세에는 나름 민주적
사고가 교회에 침투하여 일부 실력자들 중심의 다수가 교회를 좌지우지합니다.
아마 요즘 교회는 바울과 같은 목회자들은 청빙 투표를 해도 가결이 안 될 겁니다.
고후 9장을 보면 고린도교회는 아직 연보를 드릴만한 자질도 안 되고
관리할 능력도 안 되므로 마게도냐인들을 모델로 제시하고 그들로 연보를
관리하도록 합니다. 그리고 바울은 연보에 손을 대지 않는 걸 봅니다. 교회에
일꾼이 없으면 할 수 없지만 목회자가 연보를 관리하므로 잡음이 많습니다.
9장의 요절은 9-11절입니다. “기록된바 저가 흩어 가난 한 자들에게 주었으니
그의 의가 영원토록 있느니라 함과 같으니라 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너희가 모든 일에 넉넉하여 너그럽게 연보를 함은 그들이 우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게 하는 것이라”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이 복에 참여하길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주께 온전하게 헌신이 된
자가 자신을 주께 먼저 드리고 주를 사랑하는 증거로 연보를 드린다면 씨와
양식을 풍성하게 주셔서 의의 열매가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놀부가
제비다리 분질러 싸매듯 연보로 하나님의 복을 받아내려는 의도는 막아야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15절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하고
연보에 대한 언급을 총정리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큰 연보라 할지라도 독생자를
주셔서 그 안에서 이루어진 속죄와 새 생명과 그 형상과 영광과 부어지는
사랑 등 그 말할 수 없는 은사에 비하면 그야말로 조족지혈이지요. 그런
믿음의 연보라면 열납이 되고 더 풍성하게 드릴 복을 받는 건 당연합니다.
첫댓글 아멘!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