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관음사 주지 허운 스님
‘제주 4·3 치유·상생 숲길’ 열고 명실상부 총림사격 일굴 터
4년 동안 준비한 불사, 2020년 1월 본격시작
사찰음식문화관 개관, 일주문 일대 정원 조성
해월굴·관음굴·산천단, 일대 여법하게 성역화
4·3교육관·템플스테이관, 사찰 도서관도 건립예정
매년 재가공덕주 추모, 신행단체 지원도 심혈
승·재가 함께 할 수 있는, 복지타운 조성도 구상
허운 스님은 “우리 관음사, 우리 관음사 스님이라는 말이
제주 사회에 회자되기를 희망한다. 꼭 그리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뭍에서 일었던 조선의 억불 소용돌이는 섬까지 몰아쳤다.
특히 곽홀 목사(牧使)부터 이형상 목사가 있던 시기(1567∼1702)에
종교편향적 훼불사태가 급속하게 확산됐다.
고려의 승과제도를 부활시켰던 조선의 허응보우(虛應普雨) 스님이
제주도로 유배됐다 변협 목사에게 장살(杖殺)당한 때도 이 시기다.
이후 200년 동안 제주의 법등은 점차 그 빛을 잃어갔는데
그 시기를 ‘무불시대(無佛時代)’라 이르기도 한다.
1909년 제주 출신의 비구니 봉려관(蓬廬觀) 해월(海月) 스님이
관음사를 창건했다. 한 사찰의 개산(開山)을 넘어선
근대 제주불교 태동의 상징으로 평가받는 역사적 사건이다.
1920년 5월31일자 ‘매일신보’ 기사는 관음사의 위상을 전한다.
‘지난 25일에 제주도 공립 보통학교에서는 생도 전부가
이날은 음력 4월8일 즉 석가세존의 탄신일임으로
이 기회를 타서 해도(제주도)에 창설된 관음사로 원족을 하였는데
돌아오는 길에 어린 생도들이 독립만세를 고창하고
또 독립창가도 병창하였는데 방금 제주도 관헌이 취조하는 중이라더라.’
무불시대의 흑막은 관음사 창건과 함께 거둬지고
부처님 오신날을 기념하는 불교시대의 새로운 막이 열렸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또한 관음사가 제주 사람들 가슴 속에서
자긍심으로 움트고 있음을 시사한다.
관음사(1909)에 이어 법정사(1911), 위봉사(1912), 불탑사(1914),
법화사(1921), 원당사(1924), 무관암(1924) 등이 연이어 세워졌다.
특히 해월 스님이 창건한 법정사는 항일운동을 주도하며
민중과 호흡했다. 1918년 법정사 주지 김연일 스님과
강창규, 방동화, 최태유 스님들이 700여명의 주민과 함께
주권회복 시위를 펼친 이 사건은 ‘법정사 항일운동’으로 기록돼 있다.
일주문에서 사천왕문으로 향하는 진입로.
불교계 선각자들이 주도한 항일정신은 불교진흥과 심신수양,
지방문화 발전을 목적으로 한 제주불교협회 창설(1924)을 잉태했고,
광복 직후 열린 조선불교혁신 제주승려대회(1945년 12월2·3일)까지 이어졌다.
당시 승려대회에는 대중불교 실현, 법려품위(法侶品位) 향상,
불교 전문강원 설치, 인재양성 등의 의안들을 논의 했는데
놀랍게도 승려의 대처육식 금지, 사찰경제 공개운영 안이 통과됐다.
친일청산과 승풍진작, 불법홍포를 위해 진력했던 제주불교계였음을
직시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 열정과 신심이 오늘날까지 그대로 이어졌다면 향토성 물씬 배인
제주도만의 독특한 불교문화가 꽃 피웠을 터. 안타깝게도
4·3사건(1947년∼1954년)이 제주불교의 중흥을 가로막고 말았다.
그 당시 무장대의 본부가 있던 관음사 경내는 최대 격전지 중 하나였고,
무장대를 진압한 토벌대는 관음사 경내의 모든 전각을 전소시켰다.(1949)
관음사가 대웅전 중건에 착수한 건 한라산 금족지역(1954년 9월21일)이
전면 개방된지 10년 후인 1964년이다. 이곳에 영산전, 해월각, 나한전, 선원,
일주문, 천왕문, 종각이 들어선 건 1970년대다.
제주 최고 사찰로 거듭나기는 했지만 조계종 23교구본사로서의 사격에는 부족한 게 사실이다.
일례로 봉려관 스님이 정진했던 산천단과 해월굴 등은 아직까지 성역화하지 못했다.
실용성과 건축미를 담보한 템플스테이 전용관도 아직 없는 실정이다.
누군가 돌파구를 찾아야 했는데 허운 스님이 그 중심에 섰다.
허운 스님은 관음사 주지로 임명(2016)된 직후 이렇게 선언했다.
“현안 해결에만 멈추지 않겠습니다.
사격을 드높이고 사세를 확장할 수 있는 중·장기 발전 방안을 찾겠습니다.”
절실한 문제지만 서두르지는 않았다.
문화재, 미술, 건축, 역사분야의 각계 전문가들과 만나
‘관음사 미래 청사진’을 지난 4년 동안 차분히 그려갔다.
세미나도 적극적으로 열어 전문가들과 사부대중이 고견을 나눌 수 있도록 하며
작은 결정 하나도 신중을 기했다.
그 결과 최근 ‘전통사찰 관음사 종합정비불사’ 계획을 완성했다.
2020년 1월 일주문 앞 사찰음식문화체험관 개관과 함께 ‘10년 대작불사’를 시작한다.
“출재가자의 위의와 근기에 맞는 수행공간을 확보해
수행과 일상의 생활이 어우러지는 산사로 가꾸려고 합니다.”
“대흥사에서 수계(1907)를 받은 해월 스님은 산천단에서 정진했고,
그곳에서 ‘부처님오신날’ 행사도 봉행(1908)했습니다.
또한 1933년 산천단 소림원을 활용해 한라산신제단도 설립했습니다.
1907년 일제에 의해 끊어진 한라산신제가 지금까지 이어져 올 수 있던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산천단 성역화의 첫 불사는 소림원 복원입니다.
해월굴에서는 관세음 기도를 하셨는데,
그때 다진 신심과 정진을 바탕으로 관음사와 법정사가 창건됐습니다.
해월굴 주변을 정리해 여법한 공간으로 가꿀 것입니다.
아울러 불법홍포는 물론 독립운동 정신도 투철했던 해월 스님을 선양하는
창건기념관도 천왕문 인근에 세울 것입니다.
또한 승·재가 비가 혼재된 비림을 재정비하고 조사전도 신축할 예정입니다.”
관음사는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에 중추적 역할을 담당했던 사찰이기에
자부심 넘치는 사찰이지만, 제주 4·3사건의 주요 격전지였던 만큼
비극적 산사로도 기억되는 공간이다.
2019년 ‘제주불교 4·3희생자 추모사업회’가 발족했는데
허운 스님은 추모사업회 후원 총재를 맡고 있다.
“4·3항쟁 때 제주도민 3만여명이 희생됐는데
80%가 군정 토벌대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그 파장은 제주 불교계의 근간도 흔들었습니다.
36곳의 사찰이 전소·폐허됐고 16명의 스님들이 희생됐습니다.
불교계가 이토록 처참하게 당한 건 ‘항일운동’ ‘야학·농촌계몽운동’을 선도했던
불교계 인사들이 민중과 함께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한때는 처참했던 ‘그 날’을 떠올리고 싶지 않아
절에서는 4·3사건을 입에 담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습니다.
이제는 4·3을 끌어안아야 한다고 봅니다.
‘제주불교 4·3희생자 추모사업회’가 발족한 연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처참한 비극의 현장에 빛을 밝혀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과 상생의 가치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하여 4·3유적지 발굴이 마무리되면 ‘관음사 4·3교육관’도 마련할 생각입니다.”
관음굴 전경.
허운 스님은 산천단, 관음사, 백록담을 잇는 옛 길을 살릴 것이라 했다.
현재 한라산을 오르는 코스는 6개다.
그 중 하나가 ‘관음사 코스’인데 이 길은 관음사를 우회하고 있다.
허운 스님의 바람대로 옛 길이 열리고 4·3기념관까지 세워지면
‘관음사 코스’는 ‘4·3 치유와 상생의 길’로도 회자될 것이다.
허운 스님은 일주문 앞 사찰음식문화체험관 옆에 2층 규모의 찻집을 내려 한다.
그리고 그 주변 일대를 사찰정원으로 새롭게 단장할 것이라 했다.
관음사의 미래가 그려진다. 성역화한 산천단에서 첫 발을 떼면
일주문 앞 관음사 특유의 정원을 만난다.
일주문으로 들어서서 합장한 후 몇 걸음 옮기면 천왕문에 이른다.
곧이어 ‘창건기념과’과 ‘4·3유적지·교육관’을 만날 것이고,
이어서 수행·예불 공간에 접어든다.
산사에서 얻은 휴식과 신심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겨 관음굴을 참배한 후
걸음을 재촉하면 한라산 정상 백록담에 이른다.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불사가 아닐 수 없다.
주지로서 ‘어떤 관음사’를 지향하는지를 직설적으로 묻자
허운 스님은 주지임명 직후 제주공항에 내려 택시를 이용했던 순간을 회상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관음사로 가 주세요!”
“관음사요? 어디에 있지요?”
관음사를 모른다는 사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한두 번이 아니다.
제주공항에서 택시를 여러 번 이용했는데
운전기사불자연합회 소속이 아닌 이상 대부분의 운전기사가
내비게이션에 의지해 관음사를 찾더라는 것이다.
“제주 사람들 가슴 속에 관음사라는 세 글자가 ‘콱’ 박혀 있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겁니다.”
지역 주민들 경조사부터 챙겼다. 직접 걸음하지 못하면 조화라도 보냈다.
신행단체는 물론 의미 깊은 행사에 초청되면 두말 않고 참석했다.
대각사 전법회관 건물의 일부를 ‘청년몰’로 임대해 활용토록 했다.
6월 첫째주 토요일이면 본말사에 공로가 있는 재가공덕주의 뜻을 기리는 특별법회를 봉행한다.
현재 재가불자 100여명이 포함돼 있는데 추천·심의를 거쳐 지속적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승·재가 불자가 함께하는 복지타운도 구상하고 있습니다.
평생을 함께 한 스님과 불자인 경우 입적에 든 순간까지도 함께하고 싶은 분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물론 당장 이룰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원력만은 잊지 않으려 합니다.
저는 ‘우리 관음사’ ‘우리 관음사 스님’이라는 말이 제주 사회에 회자되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꼭 그리 되도록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허운 스님이 그린 불사는
조선불교혁신제주승려대회 당시의 원력과도 맞닿아 있음을 알겠다.
사찰을 성역화하고, 승재가의 품격을 높이고, 대중불교를 실현하려는 바람이 읽혀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승려대회에서는 또 하나의 중요한 의제 하나를 논의했는데
바로 ‘모범총림 창설’이었다. 허운 스님은 그 원력마저도 실현시키려 한다.
‘처염상정(處染常淨)’을 삶의 지침으로 삼는다는 허운 스님은 연꽃처럼 살고 있다.
그 누구보다 ‘상구보리 하화중생’을 실천에 옮기고 있지 않은가.
‘관음사 10년 불사’가 결코 장밋빛 그림으로만 그치지 않을 게 확실하다.
채문기 상임논설위원
2019년 12월 4일
법보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