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서원
1643년(인조 21)에 문익점을 추모하기 위해서 월천사에 위패를 모신 뒤, 1692년(숙종 18)에는 문위세를 추가 배향하였다. 1785년(정조 9)에 강성(江城)으로 사액을 받아 서원으로 승격되었고,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인하여 훼철되었으나, 1905년 전라남도 유림들에 의하여 복원되었다.
숭덕사 · 강수당 · 준소 · 원직사 등이 있다. 숭덕사의 중앙에는 문익점의 위패가, 왼쪽에는 문위세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영귀정(詠歸亭)
영귀정이 1895년 이전에 창건되었지만 장흥위씨 복재(復齋) 위계민(魏啓玟, 1858~1925)이 1923년에 다시 지은 정자
동백정(冬柏亭)
동촌 김린(金潾,1392~1474)이 관직에서 은퇴한 후 세조 4년(1458)에 만년리 강가에 가정사를 세워 후학 양성으로 여생을 보내면서 시작된 곳이다.
선조 17년(1584) 후손 운암 김성장이 가정사를 중건하였고, 이 때 김린이 심어 놓았던 동백나무가 울창하여 정자의 이름을 동백정이라 하였다.
그후 후손들이 여러차례 고쳐 짓고, 1985년 후손 김종근 등이 개보수하였다.
경호정(鏡湖亭)
운암 위덕관이 1593년 운암이 이곳에 입향하여 은거하면서 마을을 기동이라 이름짓고 정자를 지어 경호정이라 하였다.
후손 육화당 위세한과 백우당 세빈이 이곳을 풍영지소(風詠之所)로 사용했다고 전한다. 경호정이 퇴락하여 없어지자 운암의 10대손 행은 위계훈(1866~1942)이 1912년에 선조의 공적을 추모하는 뜻에서 선조의 유장지인 경호상(鏡湖上) 석대(石臺) 위에 정자를 새로 짓고 경호정이라 하였다.
경호(鏡湖)의 한 구비를 지켜 이어가고자 행은 위계훈은 증조부 죽와 위영질이 계획해 놓고 이루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경호정을 세웠다.
행은 위계훈이 경호정을 세운 이래 1964년에 회은 위원량의 송암정(松岩亭)이 현 위치로 이건되어 문중의 소유가 되었다. 그 결과 이건한 송암정으로 새로 중수한 경호정 또한 운암공파(雲岩公派)의 종중 소유로 바뀌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첫댓글 정자는 언제나 편안하고 시원하다
탐진강이 재산이여... 강이 있으니 웅덩이와 물이 있고 절벽이 있으며 정자가 있더라.
바람이 지나고 물이 흐르고 시간이 멈추었다 가니 삶이 자리하고 있더라.
정자는 친구일 수 밖에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