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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부혈(覆釜穴)을 소점한 장성의 여흥민씨(驪興閔氏) 할머니
<<울산김씨 23세손인 김성길 묘, 여흥민씨 좌측(청룡)자락을 점했다>>
<<비룡상천의 여흥민씨 복부혈(입수처)>>
2005년 4월 24일 넷째주, 오늘 실시하는 풍수지리 간산은 홍길동의 고향 장성(長城)으로 예정되어 있다.
새벽 5시 30분, 집을 나서며 하늘을 쳐다본다. 약간의 회색 구름을 드리운 봄철의 전형적인 날씨를 보여, 오늘 답사도 순조로울 것으로 예고된다.
서초 구민회관 앞에서 정시보다 20분 늦은, 7시 20분에 출발한 답사버스가 경부고속도로를 달리다가 8시가 조금 지나, 천안톨게이트로 진입하여 이 지역에서 거주하는 임원진과 회원들을 탑승시키고 다시 고속도로로 진입한다. 한참을 달리던 버스는 호남고속도로를 진행하여 서대전 톨게이트로 빠져나와 이곳에서 기다리던 고문들과 회원들을 탑승시키고, 장성을 향해 힘차게 달려나간다.
장성은 전라남도의 최북단에 위치하며, 동쪽은 담양군, 서쪽은 영광군, 남쪽은 광주와 함평군이 연접되고, 북쪽은 전북 순창과 정읍시, 고창군에 접한다. 특히 이곳은 호남지방의 중추적인 거점도시인 광주광역시에 인접되어 그 영향을 크게 받는다.
이곳 남도지방에서 부당한 일에 타협하지 않고 굴복하지 않는 고을을 "삼성(三城) 삼평(三平)" 이라 불렀다. 그것은 일정시대 때, 호락호락 협조하지 않던 여섯 고을을 그렇게 불렀는데, 3성이란 장성(長城), 보성(寶城), 곡성(谷城)을 말하고, 3평이란 함평(咸平), 남평(南平), 창평(昌平: 현재는 담양군 창평면으로, 조선시대때는 별도의 현이었음)을 말한다.
즉, 삼성 삼평이 의미하는 것은 지역 색과, 의리를 존중하는 기질이 강하다는 것을 뜻한다.
좌측 창가로 우람하고, 튼실한 입암산(笠岩山, 655m)의 자태가 나타난다. 마이크를 잡고 회원들에게 설명한다. "이 산은 오늘 첫 답사지인 여흥민씨 할머니 묘소의 태조산(太祖山)에 해당하는데, 이곳에서 생기를 크게 응축(凝蓄)한 용맥이 서남쪽으로 행룡하여 호남 터널이 지나는 장성 갈재로 급락(急落)하면서, 서쪽으로 진행하다가, 지리산(智異山), 무등산(無等山)과 함께 호남의 삼신산(三神山)인 금성체(金星體)의 방장산(方丈山, 733m)을 솟구칩니다. 그리고 계속 서남쪽으로 행룡하다가 민씨 할머니가 잠든 복부혈(覆釜穴)의 주산(主山)인 방문산(640m)을 일으키는데, 민씨 할머니 묘역은 이곳 입암산을 주시(注視)하고 있는 회룡고조형(回龍顧祖形)에 해당합니다."
호남터널을 통과하고 백양사(白羊寺) 톨게이트를 빠져나온 답사차량은 호남고속도로 밑을 통과하는 15번 도로를 타고 약 2Km쯤 진행하다가, 좌측의 달성저수지를 끼고 주유소가 있는 삼거리에서 명정마을로 좌회전한다. 여기서 조금 더 들어가다 보면 우람하고 둥그스름한 산자락 하나가 산객(山客)을 마중하는데, 바로 민씨 할머니 묘소가 조성된 정상의 복부혈이다.
이곳은 둥그스름한 금성체(金星體)의 현무봉을 출발한 주룡이 크게 과협(過峽)하고는 몸통을 크게 흔들며, 기복(起伏)과 굴곡(屈曲)을 하면서 진행한다. 그리고는 위에서 아래로 뚝 떨어졌다가 다시 위로 솟구치면서 평지돌(平地突)을 일구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무쇠 솥을 거꾸로 엎어놓은 형상 같기도 하고, 거북이가 물에 둥둥 뜬 복구혈(伏龜穴)같기도 하다.
산뜻하고 널찍하게 조성된 울산김씨 문중 주차장에 버스가 정차를 하고, 선두에서 동행하던 대전의 일송(一松)고문이 민씨 할머니 묘역 뒤쪽, 청룡자락 사이에 소점(所占)된 민묘(民墓)에 대하여 자세한 설명과 함께 혈처(穴處)로 피력을 하신다. 본인도 얼마전에 그곳 묘소를 둘러 본적이 있어 호기심이 발동을 한다. 먼저 그곳을 간산키로 하고, 회원들과 함께 복부혈 아래로 난 밭두둑으로 이어지는 산길을 오른다. 민씨 할머니 묘소의 청룡자락 견정(肩井)에 조성된 묘역에는 6개의 묘소가 위 아래로 옹기종기 자리를 잡았는데, 위쪽 좌측 묘소가 이곳 묘역에서 제일 먼저 선점(先占)된 것으로 추측된다.
묘비(墓碑)에는 <<麥老 金先生 之墓>> 라고 음각(陰刻)되었고, 상석(床石) 전면에 <<訓導 蔚山 金公 成吉 之墓, 丙申 二月>> 이라 쓰여있다. 울산김씨(蔚山金氏) 문중 사이트를 확인해보니, 민씨 할머니의 부군(夫君)인 김온(金穩: 17세)보다 6대가 늦은 23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약간 급락하는 주룡 끝자락으로 조성된 묘역 이곳 저곳에서 간산에 열중하는 회원들을 모으고는 설명을 한다. "이곳 묘소는 현무봉에서 크게 낙맥한 용맥이 우선(右旋)으로 진행하여 용맥하나가 서남쪽으로 분맥되어 이곳 묘역을 일구었는데, 용맥이 굴곡(屈曲)과 위이(위이) 등 변화(變化)를 하면서 들어 왔으나, 옆의 민씨 할머니보다는 약간 격(格)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이곳 묘소와 명당을 감싸주는 용호(龍虎)는 완벽하리만큼 청룡끝자락이 백호를 끌어 안듯 관쇄(關鎖)가 되었는데, 지금은 밭으로 개간되어 청룡이 약간 벌어진 상태이지만, 지금도 어떤 자리 하나를 숨기고 있는 듯한 감(感)도 듭니다. 그리고, 앞쪽으로 나지막하고, 길게 펼쳐지는 곤모봉자락이 너울너울 춤을 추는 듯한 안산(案山)과 함께, 뒤쪽으로 웅장하리 마치 병풍을 친 조산(朝山)이 이곳을 향해 크게 응기(應氣)하는데, 당시 터를 소점한 지사(地師)의 고뇌를 보는 듯하고, 나름대로 실력을 발휘한 묘소로 평가(評價)됩니다......"
입수일절(入首一節) 신방(辛方)에 머리를 묻고, 유좌묘향(酉坐卯向)을 놓았다. 명당수(明堂水)가 빠지는 수구(水口)는 명당의 지형이 우측(백호 쪽)이 높아 청룡끝자락으로 입을 댄 갑파(甲破)가 되어 팔십팔향법(八十八向法)의 길향(吉向)인 태향태류(胎向胎流)가 되었다. 그리고 물의 득수처(得水處)는 묘향(卯向)에서 나경의 8칸을 건너뛴 미방(未方)으로, 사대국(四大局)의 관대수(冠帶水)가 되어, 칠세아동능작시(七歲兒童能作詩)라 하여 문장명필(文章名筆)을 배출하는 길수(吉水)이다.
그러나 태향태류는 두 가지 조건을 충족해야 성격이 된다. 첫째는 백보전란(百步轉欄)이라 하여, 혈을 보호하는 청룡과 백호중 물이 빠져나가는 끝자락이 묘소에서 130m 이내의 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두 번째는 불견직거(不見直去)라 하여 명당으로 나가는 물이 당판에서 보아 직거(直去)를 하면 불격(不格)이 된다. 그런데 이곳 명당수는 구곡수(九曲水)로 나가기 때문에 두 번째 조건은 충족이 되었지만, 물이 빠지는 청룡 끝자락이 약간 먼 감이 있어 첫번 째 조건은 성립되지 못했다고 판단 된다.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맥동(麥洞)에 잠든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선생을 비롯하여, 호남의 명문가로 제 2대 부통령(副統領)을 지낸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선생을 배출하고, 울산김씨를 오랫동안 반열(班列)에 세운 장본인은 이곳 복부혈의 주인공인 여흥민씨(驪興閔氏: 1351∼1421)로, 하서의 5대 조모(祖母)다. 하소부인(荷沼夫人)으로도 불러지는 민씨 할머니는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민량(閔亮)의 딸로, 조선 3대왕 태종(太宗)의 비(妃)가 되는 원경왕후의 사촌동생이기도 하다.
울산김씨의 중시조(中始祖)인 김온은 1387년(고려 우왕 13)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왕실의 계보인 선원보첩을 기록하는 종 6품 벼슬)를 지내다가, 이성계를 따라 요동정벌에 참가하였으며, 이성계의 위화도회군에 공로를 인정받아 이조좌랑(吏曹佐郞)이 되었다. 1395년(태조 4) 회군원종공신(回軍原從功臣)에 책록되어 밀양부사(密陽府使)를 거쳐, 1400년(정종 2) 좌명공신(佐命功臣)으로 흥려군(興麗君)에 봉해졌으며, 태종 때에 양주목사(楊州牧使)로 부임하였다.
1413년(태종 13), 태종의 외척척결(外戚剔抉)로, 원경왕후의 동생인 민무구, 민무질 형제의 옥사(獄事)가 일어나고, 사촌 처남인 김온도 함께 처형을 당한다. 그러자 민씨 할머니는 양주 땅에다 남편의 시신을 수습하고, 아들 3형제(달근, 달원, 달지)와 식솔들을 거느리고, 한양을 떠나 장성에 정착한 것이다.
울산김씨 가승보에 의하면 민씨 할머니는 학문에 밝았다고 한다. 당시 부친과 친분관계를 맺고 있던 무학대사(無學大師)에게 천문(天文)과 복서(卜筮), 지리(地理)를 수학하였고, 그 이론을 정립하여 하소결(荷沼訣)이란 향법에 관한 지가서(地家書)를 저작(著作)할 정도로 풍수지리에도 매우 해박하였다고 한다.
맥동마을에 양택지(陽宅地)를 정한 것도 순전히 민씨 할머니의 혜안(慧眼)으로 전해 진다. 무작정 장성에 도착한 할머니는 산등성이로 올라가 나무로 깎아 만든 매를 하늘로 날려보내, 매가 내려앉은 곳을 터로 정했다고 한다.
또한 자신의 사후지지(死後之地)로, 이곳 명정 땅의 복부혈을 정하고는 "내가 죽으면 방장산(方丈山)기슭의 명정마을에 묻어다오, 그러면 말 탄 자손들이 집안에 가득할 것이고, 내가 정한 맥동 터에서 선현(先賢)이 탄생하는데, 필암(筆岩)은 필시 사람들의 발길이 끊어지지 않는 사원(祠院)이 들어설 것이다" 고 예언하였다고 한다.
민씨 할머니가 잠든 복부혈에서 국세를 조망한다. 앞쪽의 널따란 명당과 안산과 조산이 발치 아래로 펼쳐진다. 다소 높게 느껴지는 혈장은 마치 만백성 위에 군림하여, 눈 아래로 굽어보는 형상이다.
청룡 백호가 감싸주는 국세는 평화 그 자체이고, 혈을 환포(環抱)하는데, 마치 군왕을 시립(侍立)하면서, 정사(政事)를 보좌하는 신하들과 같다. 또한 앞쪽의 광활(廣闊)한 명당은 평탄원만(平坦圓滿)하게 펼쳐지면서, 훈훈한 화기마저 감돈다.
안산너머의 조산(朝山)이 넓게 장막을 두르고, 사방의 산자락이 명당을 향해 모여드는 모습은 용사취회(龍蛇聚會)하는 형세로, 마치 민씨 할머니가 주최하는 만찬(晩餐)에 초대된 손님들의 형상이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 할까? 아래쪽, 후손의 묘에서 보았을 때는 안산의 형태가 그런 대로 격(格)을 갖추는듯 보였지만, 이곳 복부혈에서 바라본 안산은 신하가 땅바닥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듯이 미미(微微)하기 짝이 없다. 아마 그것은 남편(울산김씨)의 세도(고집)가 날뛰듯 완고하여, 생전에 남편을 위한 내조에 진력을 다했던 향상으로 매김질 된다.
이곳 터로 연맥(連脈)되는 산줄기는 백두대간(白頭大幹)이 무주 덕유산을 지나 육십령 고개를 넘어 영취산(1076m)을 일으키고, 여기서 서남쪽으로 한 맥을 분맥(分脈)하는데, 바로 금남호남정맥(錦南湖南正脈)이다. 이곳을 출발한 정맥은 서북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진행하다가 진안의 마이산(馬耳山)을 솟구치고, 다시 주화산(珠華山)을 일으킨 뒤, 여기서 두 맥으로 분맥되면서 한 맥은 금남정맥(錦南正脈)이 되어, 북쪽으로 진행을 하고, 한 맥은 호남정맥(湖南正脈)으로, 남쪽을 향하다가 정읍의 내장산(763.2m) 어름에서 영산기맥(榮山岐脈)을 분맥한다. 이곳에서 갈라진 호남정맥은 장성에서 발원한 영산강 좌측으로 진행하면서 광주 무등산(無等山)을 지나 섬진강이 있는 광양의 백운산에서 긴 행로를 멈춘다. 한편 내장산에서 갈라져 영산강의 우측을 행룡하는 영산기맥은 입암산을 솟구치고,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면서 호남고속도로가 통과하는 호남터널의 갈재고개로 급락(急落)하여 방장산과 이곳 주산(主山)이 되는 방문산을 기봉(起峰)한다. 이 맥은 계속 남으로 진행하다가 목포 유달산(儒達山: 228m)을 솟구치고는 바다를 만나 긴 행로를 멈춘다.
이곳 혈장아래 우측 제각(祭閣)사이에는 샘물이 솟구치는데, 이렇게 혈을 짓고 혈장아래에서 솟는 물을 진응수(眞應水)라 한다. 진응수는 용맥 양쪽에서 생기를 보호하며 수천, 수백리를 함께 동거(同去)해온 수기(水氣)가 혈후(穴後) 입수도두에서 분수(分水)되어 혈판을 둥그렇게 감싸주고 혈전(穴前)에서 합수(合水)되어 지상으로 용출(湧出)되는 물을 말한다. 혈장 주변의 진응수는 생기의 누설(漏泄)을 막아, 혈이 단단하게 뭉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또한 이곳처럼 수량이 풍부하면, 그만큼 주룡(主龍)의 기세가 강하다는 것을 유추할 수 있는데, 기세가 강한 것은 그만큼 이곳 혈장이 대단하다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현무봉에서 개장천심(開帳穿心)하여 중출룡(中出龍)으로 진행하던 용맥이 온 힘을 쏟아 부으며, 좌우굴곡(左右屈曲)과 상하기복(上下起伏)으로 행로(行路)하다가 혈장 뒤에서 크게 낙맥(落脈)하는 벌의 허리를 닮은 결인속기(結咽束氣)가 되었다. 여기서 온 힘을 모아 위로 솟구치는 비룡상천(飛龍上天)하여 혈장에 기운을 응축시켰는데, 그 기운이 터질 듯한 혈증(穴證)을 보여주는 거대한 돌중와(突中窩)를 이루었다.
봉분 뒤, 도두(到頭)에서 격룡(格龍)한다. 입수도두(入首倒頭)까지 직룡(直龍)으로 들어오는 미룡(未龍), 입수일절(入首一節)하여, 곤좌간향(坤坐艮向)을 놓았다. 물은 좌측 청룡자락에서 득수(得水)하여 우측 백호 입을 적시는 갑파(甲破)로 꼬리를 감추면서, 팔십팔향법의 문고소수(文庫消水)가 되었다. 풍수에서는 용이 물을 만나,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멈추는 것을 용진(龍盡)이라 하고, 여기서 혈을 맺는 것을 용진혈적(龍盡穴的)하였다고 한다. 즉, 용진혈적의 문고소수이면 녹존유진패금어(祿存流盡佩金漁)라 하여, 필시, 총명(聰明)하고 재능(才能)이 뛰어난 자손이 집안을 빛내고 관복(官服)의 허리춤에 금어(金魚)를 차는 관리와 녹관(祿官)이 속출하는 합당한 향법이다.
그러나 이곳 묘소도 자세히 살펴보면 완벽하지는 못하다. 우선 좌우용호(左右龍虎)가 완벽하게 혈장을 감싸지 못하고 팔을 벌리듯 벌어졌으며, 안산이 너무 멀고, 낮게 드리워 혈장의 기가 소산(消散)될 기미마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