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악 한계령
강원도 고갯길의 진면목
강원도 인제, 양양, 속초 지역을 취재하면서 수 차례 이 길을 지났다. 촬영을 위해 다시 오르자 긴 한숨이 나온다. 앞뒤로 구불구불 도로에 양옆으로 으리으리한 산중이다. 한계령 칼바람이 카메라를 든 손을 공격해 온다. 창문을 열고 몸을 내밀자 눈발이 품안으로 파고든다.
강원도 고개의 진면목을 맛보다
매주 강원도의 길, 숲, 섬을 찾아다니다 보니 험준한 산맥으로 둘러싸인 지형이 익숙해졌다. 이름만 알던 강원도 고갯길을 밟아가는 재미도 제법 쏠쏠하다. 대관령 옛길을 넘을 때만 해도 영동과 영서를 이어주는 고갯길이 생소하기만 했다. 강릉에서 서울로 가는 문턱인 대관령을 비롯해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이 어디 있는지 이제야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인제에서 동쪽으로 한계 삼거리를 거쳐 용대리에 진입하면 진부령과 미시령을 만난다. 좌측 길을 택하면 진부령을 넘어 강원도 고성군에 이르고 우측 길은 속초로 가는 미시령이다. 한계령은 한계 삼거리에서 양양으로 향하는 남동쪽 길이다. 인제에서 아침 일찍 출발해 남동쪽 한계령으로 차를 달렸다. 강원도 고개의 진면목을 볼 수 있는 곳이다. 대관령과 미시령은 고개를 관통하는 터널이 생겼지만 한계령은 고갯길을 올라야 한다.
한계령은 인제에서 내설악을 지나 남설악을 거쳐 양양에 이르는 관문이다. 험준한 코스가 싫어도 그 길뿐이니 풍광을 즐기며 드라이브를 하는 수밖에 없다.
멀미도 달아나는 설악의 진풍경
평소 차만 타면 멀미를 느끼는지라 굽이치는 길이 걱정되던 터였다. 바람은 어찌나 매서운지 눈물이 절로 난다. ‘인제군 북면과 양양군 서면의 경계에 있는 해발 1004m의 고개‘라는 설명을 기억하며 길을 달렸다. 한계리를 지나자 설악의 비경이 펼쳐진다. 내설악 광장에서 옥녀탕을 지나 장수대에 서면 해발 1519m의 가리봉이 보인다. 뒤로 돌아서면 대승폭포가 있는 대승령이 버티고 있다. 설악산 봉우리 속에 폭 파묻힌 한계령에 서니 깎아지른 자연의 예술품을 감상하느라 멀미도 사라진다. 설악산국립공원 장수분소 옆으로는 한계사지로 통하는 길이 있다. 오랫동안 관리를 안 했는지 팻말조차 보이지 않는다. 신라 제28대 진덕여왕 원년(647)에 자장율사가 창건했던 절인데 다섯 차례에 걸친 화재로 현재는 백담사로 옮겨졌다. 절터에는 탑, 주춧돌, 기단석 등이 남아 며칠 전 내린 눈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다. 다시 길을 나서자 점점 더 가파르고 험난해진다. 양양으로 넘어가는 길목 한계령 정상 바로 아래쪽에 한계령휴게소가 자리 잡았다. 휴게소에는 거센 바람이 분다. 바람 앞에서 실눈을 뜨고 풍경을 살펴보니 설악산의 장엄한 절경이 가슴 속에 박힌다. 휴게소 건물은 자연과 잘 어울리도록 설계돼 오가는 이의 시선을 거스르지 않는다. 1982년에는 한국건축가협회 대상을 수상했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에도 한계령휴게소가 붐비는 이유를 알 만하다.
다섯 빛깔 매력, 오색령을 잊지마세요
한계령휴게소를 지나 양양으로 가는 길은 더욱 짜릿하다. 남설악의 중심인 오색지구까지 아슬아슬 가파른 경사다. 내려가는 굽이마다 눈은 즐겁고 마음은 환해진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함경도와 강원도의 경계인 철령, 그 아래 추지령, 금강산 연수령, 설악산 오색령, 그 밑의 대관령과 백봉령을 강원도의 이름난 여섯 고개로 꼽았다. 그 중 한계령의 옛 이름인 오색령을 최고라 칭했다는 대목은 길 위에 서니 저절로 수긍하게 된다. 오색이란 이름은 마을에 다섯 빛깔의 꽃이 피는 나무가 있어 생겨났단다. 지금이야 그 꽃을 볼 수 없지만, 오색약수에서 다섯 빛깔 맛을 느낄 수 있다. 너럭바위에서 조금씩 솟아나는 오색약수에는 톡 쏘는 탄산에 쌉싸래하면서도 시원한 맛이 숨어 있었다. 근처 오색온천은 관광객으로 항상 붐빈다. 지금의 한계령은 1968년 육군 공병단에서 44번 국도 공사를 시작해 만들어졌다. 오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라 마의태자가 망국의 한을 안고 피눈물을 흘리며 이 고개를 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때는 퇴각하는 거란군을 김취려 장군이 뒤쫓아 이 골짜기에서 섬멸했다고 전해진다. 아름다운 가락으로 유명한 노래 한계령은 가수 하덕규씨가 슬럼프에 빠졌을 때 설악산에서 위로를 얻고 지은 것이란다. 험하지만 깊고, 아찔하지만 수려한 한계령. 눈물과 위로를 함께 건네는 그 길에 서면 청미한 다섯 빛깔 매력에 젖어든다.
남설악의 비경
한계령 정상에서 내려다 본 도로
한계령휴게소를 지나 양양으로 가는 길은 더욱 짜릿하다. 남설악의
중심인 오색지구까지 아슬아슬 가파른 경사다. <이다일기자>
(길숲섬, 이윤정, 경향신문)
2024-01-20 작성자 명사십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