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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니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8:12-13).
본문은 “그러므로 형제들아”(12상) 하고 시작되고 있습니다. 바울 서신, 특히 로마서에 있어서 “그러므로”를 인식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요점입니다. 극단적으로 “그러므로”를 모른다면 다음으로 나아갈 수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닌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도는 원리적인 말씀을 하고 난 다음에, “그러므로” 하고, 그 원리에 입각해서 우리에게 적용을 시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본문의 “그러므로”는 어떤 원리와 결부되어 있는가? 한마디로 “율법이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3) 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해주신 것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행해주신 것이 무엇인가?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그에게 우리의 죄를 정죄하신 일, 우리를 의롭다고 여겨주신 일, 허물과 죄로 죽은 우리를 거듭나게 해주신 일,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의 죽을 몸도 영화롭게 해주신다는 일 등입니다.
① 이런 은총을 입은 우리들은 필연적으로,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빚진 자로되”(12상) 하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 사도는 “형제들아”하고 부르고 있습니다. 원리(原理)적인 말씀을 하는, 9, 10, 11절에서는 “너희, 너희가, 너희 안에” 하고 불렀던 사도가, 적용(適用)시키는 12절에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하고 말씀하면서, “우리가 빚진 자로되”(12중) 하는 것입니다.
㉮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 사람은 다 한 형제(兄弟)요,
㉯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는 다 빚진 자요,
㉰ 너희만 빚진 자가 아니요 나도 빚진 자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셈입니다.
② “육신에게 져서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요”(12하) 합니다.
㉠ “육신(肉身)에게 빚진 것이 아니라” 하고 말씀하는 의도는, “육신대로 살 것이 아니요” 라는 말씀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인 “우리”는 육신에게 빚을 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도는, “너희는 너희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전 6:19-20) 하는 말을 하고 싶은 것입니다.
㉡ 그렇다면 누구에게 빚을 졌단 말인가? 육신(肉身)의 반대인 영(靈)에게, 즉 하나님께 빚을 졌다는 것이 됩니다. 그러나 사도는 침묵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육신에게 진 것이 아니요 영에게 졌나니”, 왜 이렇게 말씀하지 않았을까요?
㉢ 사도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해주신 것을 “은혜”(恩惠)로 여기고 있지, 빚으로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4:4절을 보십시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하고, “빚과, 은혜”를 구분(區分)을 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빚을 졌다”는 표현은 사무적인 거래관계가 연상이 됩니다. 그래서 갚고 나면 청산이 되고, 또한 빚은 아무리 많다 해도 한정적(限定的)인 것입니다.
③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대(無限大)한 것이요, 갚고자 한다 해도 갚을 길이 없는 것입니다.
㉠ 그래서 분명히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갚을 길 없는 빚을 졌으면서도,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통해서 행해주신 망극하신 사랑과 은혜를 빚이라고 표현할 수가 없어서, 사도는 입을 다물고 있는 것입니다. 자식이 부모에게 “빚을 많이 졌습니다”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를 생각해보십시오.
㉡ 사도는 1:14절에서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고 말씀했습니다. 하나님께 빚을 졌다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사람들에게 빚을 졌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언제, 무슨 빚을 졌단 말인가?
㉢ “은혜”를 주신 것은 자신만 받고 묻어 두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전해주라고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전 까지는 나는 그 사람에 대해서 빚진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값없이 거저 받은 사람들에게는 책임(責任)이 따른다는 말씀을 하려는 것입니다.
④ 사도가 이 대목에서 말씀하려는 바가 무엇인가를 정확히 파악해야만 합니다. 그것은 3번 등장(10, 11, 13)하는 “몸”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를 경계하려는 것입니다.
㉠ 11절에서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즉 영화(靈化)된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현재(現在)의 몸은 죄의 요소가 남아 있는 “죽을 몸”(11)인 것입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 이 “죽을 몸”을 어떻게 관리해야할 것인가?
⑤ 그래서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13상) 하고 경고하는 것입니다.
㉠ “육신대로 산다”는 것은 불신자와 같은 삶을 가리키는 것이고,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하는 것은 엄중한 경고인데, 이는 6절에서 언급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한 경계와 결부된다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믿노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중생하지 못한 사람들도 섞여 있고, 불신자나 다를 바가 없이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몸”은 소중(所重)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같이 탄식하는 것은”(고후 5:4) 한대로 무거운 짐이 되기도 합니다. 이점을 6:13절에서는, “의의 병기와, 불의의 병기”로도 이용이 될 수가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이 두 사이에 끼어 있는 것입니다. 영은 구원 받았음에도 몸은 죽을 몸이기 때문에, 두 사이에서 갈등과 많은 고난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 그러므로 사도는,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라” 하고, 부정적인 말씀을 먼저 합니다. 이는 우리의 이전 상태가 그러했고, 또한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후에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6:13) 합니다. 하나님은 형제의 “죽을 몸”을 필요로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7:5절에서 말씀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힐 수 있는 것”은 몸 안에 거할 때뿐이기 때문입니다. 복음 전도자가, “헬라인이나 야만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한, 빚은 “몸”을 통해서만 갚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양면성이 있는 몸을 어떻게 관리(管理)해야만 하는가?
⑥ 사도는 그 비결을, “영(靈)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13하) 합니다.
㉠ 먼저 생각할 점은 이 말씀은 아무에게나 해당이 되는 말씀이 아니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9상),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11상) 한, 그리스도인들에게만 해당이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없는 사람에게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⑦ “몸의 행실을 죽이면”의 뜻이 무엇인가? 그리스도인들이란, 영은 구원을 얻었으나 몸은 아직 죄의 뿌리가 남아 있는 “죽을 몸”입니다.
㉠ 그리하여 그리스도인 내면에서는,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갈 5:17)하는 갈등이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만 하는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합니다.
㉡ 여기 중요한 요점이 있는데,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점이 7장의 사람과 다른 점입니다. 7장의 사람은 율법 하에 있으면서 자기 힘으로, “몸의 행실을 죽이려고” 몸부림을 치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임이 판명이 났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말씀합니다.
㉢ 이일은 성령으로만이 가능한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의문으로 사는 삶이란, “내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삶은, 영으로 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화의 삶은 우리의 의지(意志)와 결단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사람의 의지력만으로는 이룰 수가 없다는 점을 우리들 보다 사도 바울이 더 잘 알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자기 노력으로만 하고자 한다면 그는 또다시, “의문의 묵은 것”으로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 됩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 할지니라”(7:6) 한 말씀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은 중요한 요점입니다.
⑧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구체적(具體的)인 방도가 무엇인가? 한마디로 “영의 일을 생각”(8:5)하라는 말씀입니다.
㉠ 사도는 사분오열한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하고 묻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교회라는 공동체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거하시는 “성전”이라는 점을 잊어버리고 놓치고 있기 때문에, 분열과 혼란을 겪게 되는 것입니다.
㉡ 문제를 일으키는 성도(聖徒) 개인들을 향해서, “너희 몸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 하고 묻고 있습니다. 형제 속에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다는 점을 잊지 않고 있습니까? 하루에 몇 번이나 이를 묵상하고 있습니까? 이 영광스러움을 자주자주 시인하고 인정해 드리십시오. 그 분과 교제를 나누며, 그 분께 도움을 요청하십시오.
㉢ 또한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2, 3, 15) 하는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을 잊지 않고 명심하는 것 이것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비결(秘訣)입니다.
㉣ 바울 자신도,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고전 9:27) 하고 말씀합니다. 하물며 우리이겠습니까? 예배를 마치고 성도들을 세상에 파송하기 전에 행하는 축도(祝禱)의 내용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交通)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 지어다”(고후 13:13) 합니다. 이것이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또 다른 표현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에 대해서 얼마나 둔감합니까?
㉤ 형제여,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의 반대(反對)의 경우가 무엇입니까? “몸으로써 영의 행실을 죽이면”이 되겠지요. 이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삶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제까지 얼마나 자주 성령님을 소멸하는 삶을 살았습니까? 그러므로 사도는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갈 5:16) 하십니다.
⑨ 말씀을 마치기 전에 “몸의 행실을 죽이라”는 말씀과 결부해서 당부할 말씀이 있습니다.
㉠ 그것은 다시 7장의 사람처럼 정죄감에 빠져 주저앉지 말라는 말입니다. 형제여, “죄의 몸을 멸하여”(6:6), 또는 “몸의 행실을 죽이면”(13), 그리고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고전 9:27) 등은 지난날에 이 말씀들을 붙잡고 얼마나 몸부림 쳤던 말씀들입니까? 금식하며, 철야하며, 기도원을 찾는 등 몸을 괴롭게 하며, 내 몸을 쳐서 복종시키려고 무진 애를 썼던 경험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렇게 해서 복종시키는데 성공하셨던가요? 아닙니다. 형제는 복종시키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도 못할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형제는 로마서 7장의 사람처럼 “내가” 그것을 하려고 했기 때문입니다.
㉡ “영으로써 몸의 행을 죽이라” 하십니다. 형제는 홀몸이 아닙니다. 주님은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요 14:18) 하셨습니다. 약속하신 대로 형제 속에는 “그리스도의 영”이 내주하고 계십니다. 이를 잊지 말고 자주자주 인정해드리십시오. 혹시 실수하여 넘어진다 해도 성령님은 정죄하지 않고, 치료해 주시며 새 힘을 주시며 다시 한번 시도해 보라고 격려해 주십니다.
형제여, 죽을 몸도 구속받을 날이 옵니다. 그 때 까지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는” 승리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그것은 고달픈 것만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남이 알지 못하는 성령님과의 달콤한 교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