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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한 번에 설교하기
본문 : 21:43-45절
주제 : 선한 싸움을 싸운 후에 주어지는 안식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붙잡아야 할 점은 성령께서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려는 바가 무엇인가 하는 점입니다. 여호수아서의 중심점은,
㉠ “여호수아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온 땅을 점령하여 이스라엘 지파의 구분에 따라 기업으로 주매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1:23)한 “정복하는 전쟁”(戰爭)을 수행했다는 점과,
㉡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을 주셨으되 그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하셨다”(21:44)한 “분배하여 정착한 안식”(安息)과,
㉢ “여호와께서, 이 땅에 거주하던 아모리 족속을 우리 앞에서 쫓아내셨음이라 그러므로 우리도 여호와를 섬기리니 그는 우리 하나님이심이니이다”(24:18, 21)한 “전쟁, 안식, 섬김”이라는 세 가지 주제로 요약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호수아서를 통해서 말씀하시려는 바는 분명해진다 하겠습니다. “선한 싸움을 싸운 후에 주어지는 안식(安息)과 영원한 섬김”입니다. 이점을 사도 바울은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 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엡 6:13)고 말씀하고, 계시록에서는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계 7:15)합니다.
여호수아서는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 1-12장까지는 가나안 땅을 정복하기 위해 “전쟁”하는 내용이고, ㉡ 13-24장까지는 점령한 땅을 분배하여 정착하는, 즉 “안식”하는 내용입니다. 이처럼 교회는 크게 지상(地上)의 교회와 천상(天上)의 교회로 나눌 수가 있는데 지상의 교회는 전투적(戰鬪的)인 교회요, 천상의 교회는 안식(安息)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해 나가는 것은 전투적인 교회의 모형이고, 점령한 후에 땅을 분배하고 정착하는 것은 안식하는 교회의 모형입니다. 우리는 지금 “전투하는 교회”에 속해 있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서는 “여호와의 종 모세가 죽은 후에”(1:1)하고 시작이 됩니다. 이는 모세는 떠났으나 구속사역은 중단됨이 없이 계속 추진되어 나가신다는 뜻인 것입니다. 하나님은 모세가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라고 말하자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출 3:11-12)하셨습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출애굽은 네가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하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세의 하나님이 되셔서 출애굽을 시키시겠다는 말씀입니다. 모세와 함께 하신 하나님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너게 하시고 약속의 땅 문턱인 모압 평지까지 인도하신 후에 모세는 구속사의 무대에서 퇴장을 시키시고 후계자로 여호수아를 세우신 것입니다.
모세가 죽은 후에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내가 모세와 함께 있던 것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라”(1:5)하십니다. 무슨 뜻인가? 이제부터는 여호수아의 하나님이 되셔서 요단강을 건너게 하시고 가나안 땅을 정복하게 하시겠다는 보장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강하고 담대하라 너는 내가 그들의 조상에게 맹세하여 그들에게 주리라 한 땅을 이 백성에게 차지하게 하리라”(1:6)하십니다.
그리고 전투하는 교회에 격려하시기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니 강하고 담대하라”(1:5-6)하십니다. 1:9절에서도,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하십니다. 소극적으로는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하시는데 이는 전투하는 교회가 “두려워하고, 놀랄”것을 아시기 때문에 격려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강하고 담대하라”하십니다.
신약성경은 이 말씀을 받아, “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말하되 주는 나를 돕는 이시니 내가 무서워하지 아니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히 13:5-6)하고 담대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의 전투하는 교회에 속한 우리들에게 하시는 격려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군대가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에 입성하자 곧바로 전투를 한 것이 아닙니다. 먼저 할례를 행하고, 유월절을 지키라(5장)고 명하셨습니다. 이렇게 명하신 의도가 무엇인가? 먼저 할례(割禮)를 행하라 명하신 의도는 하나님의 선민 된 표징으로 주어진 것입니다. 가나안 땅은 비어 있는 곳이 아닙니다. 마치 전염병이 창궐하는 것처럼 부패한 땅입니다. 그들과 섞이지 않도록 구별하는 표가 “할례”인 것입니다. 십자가 군병들은 “마음의 할례”를 받은 자들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다.
또한 유월절을 지키라 명하심은 “출애굽한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약속의 땅에 입성하게 된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구속의 은총을 잊지 않게 하기 위해서인 것입니다. 영적 싸움에 임하는 정신무장과 승리의 비결은 선민의식과, 은총의식이라는 점을 명심하십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3:16),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고전 6:19)고 성도들의 정체(正體)성을 일깨워주었던 것입니다. 현대교회의 치명적인 결함이 은총의식과 정체성을 망각한 것이라 할 수가 있습니다.
홍해는 갈라진 후에 건넜습니다만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3:15)한 요단강은 어떻게 건넜습니까? 또한 난공불락을 자랑하던 여리고성이 어떤 방도로 무너졌는지 여러분은 잘 알고 있습니다. “선민의식과 은총의식”으로 무장한 하나님의 군대들의 “믿음의 순종”(順從)에 의해서 갈라지고 무너졌던 것입니다.
출애굽한 제1세대들은 불순종하다가 “너희 시체가 이 광야에 엎드러질 것이라 너희 중에서 이십 세 이상으로서 계수된 자 곧 나를 원망한 자 전부가, 갈렙과 여호수아 외에는 내가 맹세하여 너희에게 살게 하리라 한 땅에 결단코 들어가지 못하리라”(민 14:29-30)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이점을 신약성경에서는 “내가 노하여 맹세한 바와 같이 그들은 내 안식에 들어오지 못하리라 하였다 하였느니라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히 3:11-12)하고 적용시켜 줍니다. 이처럼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정착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적인 가나안에 들어가서 누리게 될 영원한 안식에 대한 예표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자손들이 약속의 땅을 취하는 데는 7년의 전쟁 끝에 차지할 수가 있었다는 점을 유념해야만 합니다. 11장 끝에 가서야 “그 땅에 전쟁이 그쳤더라”(11:23)말씀하고 12장 끝에서는 그들이 정복한 왕들은 “모두 서른 한 왕이었더라”(12:24)합니다. 이는 그들이 약속한 기업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치열한 싸움을 했는가를 말해줍니다.
땅 분배하기를 마친 후에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사 주리라 하신 온 땅을, 다 주셨다, 여호와께서 그들의 주위에 안식(安息)을 주셨다”고 말씀합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전쟁이 그쳤더라, 안식(安息)을 주셨다”는 두 주제가 여호수아서의 중심적인 말씀이요, 우리에게 적용이 되는 점입니다.
“안식”이라는 주제는 여호수아서의 핵심적인 주제일 뿐만이 아니라 성경 전체에 있어서도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입니다. 출애굽의 목적도 안식이요, 신약교회의 목표도 궁극적으로는 안식입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은 애굽에서 고역으로 인하여 탄식하며 부르짖던 노예들이었습니다. 이는 다름 아닌,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히 2:15) 사탄의 종노릇을 하던 우리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이들이 갈망하는 것은 “안식”(安息)입니다.
그렇다고 출애굽하자 곧바로 안식이 주어진 것도 아닙니다. 40년이나 광야에서 방황하는 세월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그렇다고 가나안에 입성하자 안식(安息)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 선한 싸움을 싸운 후에야 “전쟁이 그쳤더라, 안식(安息)을 주셨다”고 말씀한다는 점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만일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안식을 주었더라면 그 후에 다른 날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라”(히 4:8)하면서,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히 4:9)고 말씀한다는 점입니다. 출애굽 사건이 영적 출애굽의 예표이듯이 가나안에 정착하게 된 안식도 예수(여호수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질 참 안식에 대한 예표였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에 대해서 좀 더 살펴보고자 합니다. 성경에 “안식”(安息)이라는 첫 단어가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2:2절입니다.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합니다. 그런데 이 “안식”이 3장에서 죄가 침입을 함으로 깨어지고 맙니다. 하나님은 “내가--하리니”(창 3:15)하고 다시 재창조의 일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친다고 비난하는 자들을 향해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하심으로 하나님은 안식하고 계시는 것이 아니라,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렘 33:2)이시라는 점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 어찌하여 “안식일을 지키라”고 명하셨는가? 성경은 문제에 대한 해답입니다. 주님은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니 이러므로 인자는 안식일에도 주인이니라”(막 2:27-27)고 대답하십니다. 안식일을 지키라 하심은 메시아언약을 잊지 말고 진정한 안식을 주실 “안식일의 주인”을 기다리라는 뜻에서 지키라 명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지금 안식을 하시는가? 일을 하고 계시는가? 모세의 하나님, 여호수아의 하나님은 지금 형제의 하나님이 되셔서 형제를 의의 병기로 삼으셔서 일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이루었도다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라”(계 21:6)고 선언하실 주님의 재림의 때에야 완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달려갈 길을 마치려는 여호수아는 유언과 같은 중요한 말씀을 하는데 우리가 명심해야 할 요점이기도 합니다. 23:3절을 보겠습니다.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이 모든 나라에 행하신 일을 너희가 다 보았거니와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합니다. 두 마디로 되어 있는데 첫째는 “너희의 하나님”이라고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23장에는 “너희의 하나님”이라는 말이 12번이나 등장합니다.
자신은 떠나나 하나님은 떠나시지 아니하시고 “너희의 하나님”이 되셔서 구원계획을 중단함이 없이 이루어 나가신다는 뜻입니다. 이점을 신약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인하시니라”(히 13:8)고 말씀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베드로, 바울은 달려갈 길을 마치고 구속사의 무대에서 퇴장하였으나, 바울과 함께 하셨던 주님은 형제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둘째는, “너희를 위하여 싸우신 이시니라”(23:3)고 말씀합니다. 23:10절에서는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니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희에게 말씀하신 것 같이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합니다. 우리를 위하여 전에도 싸워주셨고 지금도 싸워주고 계시며, 앞으로도 싸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너희 중 한 사람이 천 명을 쫓으리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지상명령(至上命令)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이 엄청난 사명을 우리 힘으로 감당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아닙니다. 이 불가능성을 아시기에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9-20)하신 것입니다. 이는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함께 있으면서 “너희를 위하여 싸워주시겠다”는 보장인 것입니다.
우리를 위하여 싸워주시는 장면이 계시록 17:14절에 등장하는데,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 여호수아”의 하나님이 되셔서 일을 하심과 같이 우리들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이 되셔서 역사하고 계신다는 점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은 지금 전투하는 교회와 안식하는 교회 중 어디에 속해있습니까? 그리고 전투적인 교회에게 하시는 격려가 무엇입니까?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1:9)하신 말씀입니다.
마지막으로 명심해야 할 요점이 있습니다. 모세나 여호수아가 죽기 전에 행한 마지막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24:25절을 보겠습니다. “그 날에 여호수아가 세겜에서 백성과 더불어 언약을 맺었다”(24:25)는 점입니다. 이를 언약갱신이라 하는데 아브라함에게 세워주신 메시아언약을 보수하면서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갈 것을 다짐하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 11:9절에서는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 “유다인과 예루살렘 주민 중에 반역이 있도다”하십니다. 그리고 21:13절에서는 “나는 네 대적이라”하시는 두려운 말씀을 듣게 됩니다. 그들이 메시아언약을 잃어버리자 싸워주신 것이 아니라 도리어 바벨론으로 추방을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를 위해서 싸워주시는 것은 “복음”을 보수하고 증언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만일 복음을 잃어버리게 되면 “촛대를 옮기리라, 입에서 토해내리라”하신다는 점을 명심하십시다. 그리고 이것이 현대교회의 실정이기도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창 3:15)고 선언하신 영적 싸움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안식”도 온전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딤후 4:7)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형제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우리 앞에 아직 무너지지 않고 굳게 닫혀있는 오늘의 여리고성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들의 믿음의 순종에 의해서 무너지게 될 것입니다. -아멘-
첫댓글 목사님^^ 넘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