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방송설교(2006)
사랑하는 청취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은혜와 평안과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은 여러분과 함께 창세기 24장 61절 말씀을 통하여 ‘따르는 믿음’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의 늙은 종이 그 먼 길을 떠나 하룻밤을 리브가의 집에서 지낸 후, 그 이튿날 아침에 리브가의 가족들에게 ‘그 주인 아브라함에게 떠나게 해 달라’고 청하였습니다. 그 때 그들은 그 누이와 딸이 최소한 열흘을 그들과 함께 지내야 할 것으로 그에게 대답하자, 그 늙은 종이 다시금 그 주인에게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습니다. 그제야 그들은 리브가를 불러 그 의향을 물었습니다. 그때 리브가는 ‘내가 가겠나이다’라도 분명히 그 가족에게 말하였습니다.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을 따라 나서는 데엔 분명한 그 무엇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자신의 인생을 두고 도박을 하는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이 처녀 리브가는 그 늙은 종의 말을 통하여 분명한 사실을 발견하여 그렇게 단호한 대답을 한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녀의 대답이 그렇게 나오게 된 배경을 살펴볼 때, 그 늙은 종이 그 하나님께 기도한 것과 그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어떻게 응답하신 것을 들으면서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역사하심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는 그녀에게 그 늙은 종을 통하여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었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하여 그녀는 한번도 가 보지 아니한 땅과 그녀가 한번도 보지 못한 이삭을 신랑으로 선택하고, 그녀가 한번도 보지도 알지도 못한 늙은 종을 따라 나서기로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리브가는 일어나 자기 소녀들과 함께 낙타를 타고 그 사람을 따라 가게 되었습니다. 리브가는 그 신랑을 만나기 위하여 아브라함의 늙은 종을 따라 갔습니다. 그녀가 이삭을 만나기 위해선 그 무엇보다도 따라 가는 것이 필요합니다. 자신이 간 적이 없는 길을 가기 위해선 그 길을 아는 사람을 따라가는 일은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사람들은 리브가와는 달리 행동합니다. 그들은 가보지 않은 길을 혼자 가고자 합니다. 그들은 자신이 가보지 않은 길을 자신의 생각을 좇아가고자 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가보지 않은 길을 다른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가는 관습을 좇아가고자 합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리브가를 통하여 하나의 지혜를 발견하게 됩니다.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종을 따라간다는 점입니다. 리브가가 아주 단순한 진리를 따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자신이 한번도 가 보지도 않고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그 길을 가는데 있어 그 길을 가본 적이 있는 그 늙은 종을 따른다는 것은 당연한 진리가 아닙니까? 우리는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고 있어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합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말씀도 듣지 않으려 합니다. 로마서 1장 22절은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사람들이 스스로 지혜롭더라고 언급합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의 사람들을 잘 대변해 주고 있는 것으로 보아집니다. 오늘날 사람들은 누구나 다 지혜로운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모르는 것이 없는 사람들로 비추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지혜로움으로 그들이 우준하게 되었다고 선언하십니다. 여기서 우준하게 되었다는 것은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영어 흠정역성경은 ‘they became fools'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지혜로 그들은 어리석은 자가 된 것입니다. 그들이 어리석게 된 것은 그들이 지혜롭다고 여김이요, 그들이 지혜롭다고 여긴 것은 그들이 허망한 상상을 하고 그들의 어리석은 마음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지혜롭다고 여긴 그 까닭은 21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잘 따르지 않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진실로 전하는 사람들을 잘 따르지 않습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말씀 밖에 있는 자들 곧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연구하지 않는 소위 하나님의 사람들의 말은 너무나 잘 듣습니다. 로마서 1장 22절의 말씀과 같이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마십시오. 어리석은 자들은 스스로 지혜롭게 여깁니다. 그래서 확실한 구원의 길을 깨달아 알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으며 그들의 길을 걷지 않으려 합니다. 대부분의 종교인들은 자신이 걸어왔고 다른 동료들이 걸어온 그 옛길만을 고집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깨달으려 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어리석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분의 말씀으로 만나시며 마지막 심판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말씀으로 심판하신다는 사실을 아십니까? 하나님의 말씀만이 당신을 든든히 세우고 담담하게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여기 리브가는 그 늙은 종의 말을 통하여 그 늙은 종을 따르고 있습니다. 창세기 24장 61절에서 그 늙은 종이 리브가를 데리고 자기 길로 가니라’고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 늙은 종은 자기 길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걸어간 적이 있는 길이 있었기 때문이며 그 길을 그는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걸어간 길이 없다면, 누군가 그 길을 걸어간 적이 있다면 그를 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늙은 종이 자기 길을 가는 것은 이상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우가 자신이 걸어간 길이 아니라고 해서 그 늙은 중이 걸어가는 길을 잘못된 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아닐 것입니다. 누가 자신의 생각으로 그 길이 잘못된 길이라고 해서 그 늙은 종의 길이 잘못된 길이 될 수 있겠습니까? 리브가는 따라가고 그 늙은 종은 데리고 가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장면입니까? 그 길이 아는 길이라면, 누군가가 아는 길이라면, 이와 같이 함께 가는 것은 얼마나 쉽고 안전한 길이겠습니까? 남을 따라가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따라가는 것보다 쉬운 것은 없습니다. 누군가를 데리고 가는 것 보다 따라가는 것은 참으로 쉬운 일입니다. 그 사람이 길을 확실히 잘 알고 있는가가 문제입니다만, 만일에 그 사람이 그 길을 확실히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을 따라 가는 것 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누가 그 길을 확실히 알고 있는지 알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많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찾은 자는 극히 적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따라라’고 말씀하시기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천국으로 가는 길이며 문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확실히 하늘나라로 가는 길을 알고 계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나오신 곳이요 길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로 이끄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대신 희생을 당하셨습니다. 그 길은 죄와 상관없는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리브가는 지금까지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던 중, 아브라함의 늙은 종을 만나 아브라함과 하나님의 이름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지금까지 일에 매여 마음의 안식을 누리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소녀는 그 늙은 종을 만난 이후로 얼마 되지 않은 짧은 하루 만에 그 마음의 안식을 누렸고 참된 축복이 무엇인가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 늙은 종이 가고자 할 때, 그녀는 가겠다고 단호히 말하였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마태복음 11장 27절에서 예수님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고 직접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계시란 하나님께서 그 말씀을 통하여 그 비밀을 드러내심으로 말미암는 것을 의미합니다. 당시나 지금이나 예수님은 명백히 드러나 모든 사람들 눈앞에 잘 알려져 있는 것 같으나 사실 그분의 사역이나 그 말씀이 하나님이 보시듯 밝히 알려지지 않고 있어 예수님은 비밀 속에 계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아는 길도 사실 성령님으로 가능합니다. 물론 그분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십니다. 이 리브가 역시 하나님으로 그 늙은 종을 믿을 수 있어 그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믿음은 성령님으로 가능합니다. 사람이 믿어지지 않고는 누구든 따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리브가가 그를 따랐던 것은 그녀 속에 믿음이 왔기 때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창세기 24장 62절부터 67절까지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늙은 종을 따르게 된 것은 그녀 속에 믿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으로 그녀가 아브라함의 늙은 종의 길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 믿음은 성령님을 가능하다는 것을 지난주에 저희들이 함께 보았습니다. 그 믿음은 사람들이 믿는다는 그러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으로 변함이 없는 믿음을 가리킵니다. 리브가가 아브라함의 늙은 종과 함께 여행을 계속해 가고 있었을 때, 이삭은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삭은 브엘 라 해 로이라는 우물길에서 왔습니다. 그가 당시에 남쪽 지망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브엘 라 해 로이란 히브리말로 ’나를 감찰하시는 생존자의 우물‘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우물은 가데스 근처에 있는 우물로서 하나님의 천사가 하갈에게 나타난 곳이기도 합니다. 우물은 당시에 참으로 긴요한 것이었습니다. 목축을 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우물에서 그는 이동하고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63절에서 그는 묵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삭은 묵상의 사람이었습니다. 묵상이란 무엇입니까? 묵상이란 ’말을 하지 않고 조용히 생각한다‘는 국어사전적 뜻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삭은 무엇을 묵상하고 있었을까요? 예,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삭만큼 예수 그리스도를 잘 나타내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삭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의 여러 가지 의문이 풀리기 까지 생각하고 또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묵상이란 유익한 것입니다. 그 묵상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 하나님의 말씀이 깨달아지기 까지 그 말씀을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깊이 계속적으로 생각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음으로 오는 은혜의 풍성함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은혜들을 말하곤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음으로 오는 그 은혜의 풍성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놀랍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오는 그 은혜를 따른 감사와 기쁨 또한 억누를 수 없는 것입니다. 여호수아 1장 8절은 ’이 율법 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라고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여호수아에게 모세가 말한 말을 통하여 묵상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기서 주야로 하나님의 율법을 묵상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율법으로부터 자유함을 얻었으니까 우리에게 있어선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다윗은 시편 1편 2절에서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시편 63편 6절에선 주님에 대하여 묵상한다고 말씀하고 있으며, 시편 77편 12절에서는 주님의 모든 역사를 묵상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으며, 시편 119편 15절에서는 주님의 교훈(precepts)을 묵상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으며, 시편 119편 148절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으로 말씀하며, 시편 119편 99절에서는 주님의 증거(testimonies)를 묵상하고 있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약성경 디모데전서 4장 15절에서는 바울 사도가 디모데에게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라‘고 말하고 있는데 전심전력을 영어 흠정역 성경에서는 ’meditate‘ 로서 묵상한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 모든 일에 대하여 묵상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모든 일이란 바울이 전달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가리킵니다. 그리하여 바울 사도는 자신이 전달한 하나님의 말씀들을 디모데가 묵상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묵상들을 하는데 있어 우리의 머리로 하는 묵상이 아니라 마음의 묵상을 다윗은 언급하고 있습니다. 시편 19편 14절과 49편 3절은 마음의 묵상으로 언급합니다. 마음으로의 묵상이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합니까? 마음의 묵상은 머리로 하는 묵상과는 달리 깨달음과 연관됩니다. 이 마음의 묵상이란 이미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말없이 생각하거나 아직 깨닫지 못한 하나님의 말씀을 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러한 묵상은 소의 되새김으로 비유됩니다. 소는 그 여물을 위에 저장하였다가 다시 그것을 되새김하는 과정을 반복하여 그 먹은 음식을 소화시켜 나갑니다. 그러한 되새김을 하는 짐승을 정한 짐승으로 말씀하시는 것을 보아, 되새김은 무언가 우리에게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되새김이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묵상과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묵상도 듣거나 깨달은 말씀을 계속하여 반복적으로 조용히 떠올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가 듣고 읽고 하는 성경은 누구의 말씀입니까? 예,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엔 누구의 생각이 실려 있습니까? 하나님의 생각이 담겨 있습니다. 반면에 우리는 누구입니까? 예, 인간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하나님의 생각을 한번에 잘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예, 아무도 그 말씀들을 한번에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말씀을 포기하여야 할까요?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깨달아 알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생각을 우리가 이해하려면 성령님의 도우심이 있어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그 말씀들을 깨달을 길이 없습니다. 누군가 깨달은 하나님의 말씀을 해도 그것은 그 전하는 사람이 깨달은 것이지 내 것은 아닙니다. 자 자신이 깨닫기 까지 그 말씀들을 생각하는 가운데 있어야만 합니다. 그때 성령님께서 그 말씀의 뜻을 우리에게 밝히 보여주실 것입니다. 이삭은 우리가 상당히 오래 살펴본 바로 그 묵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으로부터 들은 말씀들, 그의 어머니로부터 들은 말씀들, 그리고 그 종들로부터 들은 말씀들 그리고 자신이 목도한 하나님의 일들을 묵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말씀들과 일들을 통하여 그에게 아직 의문으로 남아 있는 것들도 묵상하였을 수도 있습니다. 이삭은 저물 때에 묵상을 하면서 들에서 배회하였습니다. 이삭은 참으로 하나님의 행하신 일들을 직접 목도하기도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결박되어 죽기 직전에 하나님께서 그를 대신하여 한 양을 준비하심으로 죽음에서 살아난 경험이 그에게 있었기에 그는 그것 하나만으로도 묵상할 동기가 충분하였습니다. 그는 묵상하는 가운데 걸어 다녔음 알 수 있습니다. 그는 걸어 다니면서 묵상을 하였던 것입니다. 묵상에는 어떠한 형식이 없음을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 형식이나 자세가 어떠하든 묵상을 할 수 있으며, 묵상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시기 바랍니다. 어떠한 교회 사역이나 봉사도 하나님의 말씀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까진 그 무엇도 우리에게 은혜와 감사가 계속 이어지게 하지 못할 것입니다. 묵상을 하는 가운데 그는 눈을 들어 낙타들이 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리브가도 눈을 들어 이삭을 보았습니다. 그녀가 이삭을 본 후에 낙타에서 내렸습니다. 그 후에 그녀는 아브라함의 늙은 종에게 물었습니다. ’들에서 배회하다가 우리에게로 마주오는 자가 누구뇨?‘라고 이브라가 물었습니다. 그때 그 늙은 종이 ’이는 내 주인이니이다‘ 라고 리브가에게 대답하였습니다. 자신의 주인임을 말하자 리브가는 ’면박을 취하여 스스로 가리웠습니다. 이는 그녀의 얼굴을 천으로 가리웠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그 얼굴을 천으로 가리운데서 우리는 리브가의 정숙함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이 이삭에게 그 행한 일들을 다 이삭에게 고하였습니다. 역시 종은 종이었습니다. 그 종은 자신이 행하였던 모든 것들을 그 주인에게 다 보고하였던 것입니다. 그러자 이삭은 리브가를 그 모친 사라의 장막으로 인도하여 들였습니다. 이삭이 그녀를 취하여 아내를 삼았습니다. 이삭은 그녀를 아내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그녀를 사랑하였습니다. 그는 남편으로서 리브가를 사랑하였습니다. 부부간의 관계에서 사랑의 관계는 필수적입니다. 이삭은 그 모친이 돌아가신 후에 그녀로 인하여 위로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이삭의 가정은 시작되었습니다. 이삭의 가정은 행복하였습니다.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창세기 25장 1절부터 6절까지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이 1절에서 그 후처를 취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아내 사라는 이미 죽었고, 그 후에 그가 후처를 취하였는데 그 이름은 그두라였습니다. 이렇듯 성경은 아브라함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성경은 그 삶의 모습을 하나 가감 없이 드러냄으로써 인간이 어떠한 존재인가를 확연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삶을 언급하고 있지만, 성경이기에 그러한 좋아 보이지 않는 것들을 감추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기에 성경은 사실이며 진실된 진리의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그는 누구입니까? 그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고, 그는 가나안 까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았고, 그는 하나님의 말씀들을 지속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들어왔고, 그는 자신의 100세 때 하나님으로 그 아들 이삭을 기적적으로 얻었고, 그리고 모리아 산에서 기 달을 번제로 드려려 할 순간에 하나님으로 그 아들을 다시 얻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을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바꾸시기 까지 한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러한 그가 후처를 취했다니 말씀입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그 놀라운 아브라함이 그렇게 할 리가 없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아브라함은 후처를 취하였습니다.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을 드러낸 것이 성경이 아닙니까? 아브라함은 그두라를 통하여 아들들을 얻었는데 그 아들들의 이름은 시므란과 욕산과 므단과 미디안과 이스박과 수아를 낳았습니다. 욕산은 스바와 드단을 낳게 되었는데 드단의 자손들은 앗수르 족속과 르두시족속과 르움미족속이었습니다. 미디안의 아들들은 에바와 에벨과 하녹과 아비다와 엘다아였습니다. 이렇듯 아브라함이 그두라를 통하여서도 많은 아들들과 그 손자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아들들이 결국 하나님의 약속하신 이삭의 후손들을 괴롭히게 된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가 육신으로 얻은 이스마엘로부터 그리고 그두라를 통하여 얻은 자식들이 나중에 곧 오늘날 까지도 이삭의 후손들을 괴롭힌다는 사실 앞에 우리는 하나님의 엄위하심을 보게 됩니다. 그의 육신으로 말미암은 그 결과가 결국 하나님으로 기적으로 낳은 이삭의 후예들을 괴롭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사람이 육신적으로 그리고 세상적으로 살지 않을 수는 없으나, 그러한 삶을 살았을 때 그는 그의 생존시나 그가 죽은 후 대대로 괴로움을 고통이 따른 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오히려 약속의 자손의 수 보다 육신의 자손의 수가 훨씬 더 많은 형국이 되었습니다. 약속의 자손은 한명인데 반하여 지금 육신의 자녀들의 수는 이스마엘을 포함하여 7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후처로 그두라를 취한 것은 무슨 잘못된 것이 없다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 아내 사라가 죽은 후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그 아내가 살아 있을 동안은 그 아내의 법에 매여 있는 것으로 로마서 7장 1-3절에서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 남편의 법에 매여 있듯, 아내가 살아 있을 땐, 그 아내의 법에 매여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내가 죽었을 때, 그 아내의 법에서 풀려나기 때문에 아브라함이 후처를 취한 데에는 문제가 없다 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이스마엘을 낳은 데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그 아내 사래의 말을 듣고 그 종 하갈을 통하여 아들을 낳았기 때문에 그가 육신적으로 산 그 삶에 대하여 문제가 있었습니다. 비록 그가 후처를 취한 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더라도 그의 후처를 취하여 낳은 아들들로 인하여 후일에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한 문제는 수천 년에 걸쳐 계속되고 있습니다. 갈등과 전쟁과 증오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참으로 사람이 뿌린 것은 무서운 결과로 나타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들이 이 땅에서 저질은 것들 중에 죄가 아닌 것도 있겠지만 그러한 것들이 자신의 육체를 채우기에 이루어진 것들이라면 그 결과는 엄청나게 큰 문제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그 문제들은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두고두고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것을 아브라함을 통하여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육신적으로, 그리고 세상적으로 사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죄이며 그 죄의 결과는 반드시 찾아온다는 것을 여기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그분의 말씀은 사람을 위하여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분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들으십시오. 그리고 그 말씀이 깨달아지기 까지 지속적으로 생각하고 연구하십시오. 성령님께서 여러분을 도와 그 말씀을 깨닫게 하여 하나님의 축복들을 마음껏 누릴 것입니다. 여기에 여러분의 자손의 행복도 약속되지 않습니까? 자시의 죄로 자신만 괴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후손도 괴로움을 당한다는 것을 우리는 보아왔지 않습니까? 아브라함의 경우에 자신이 하나님께 번제를 잘못드림으로 인하여 그 후손이 400년간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게 되지 않았습니까? 그는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에 있어 새를 쪼개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는 새는 작으니까 쪼갤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징벌은 엄격하였습니다. 다른 번제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대로 피를 흘려 드렸으나 작은 것 그리고 적은 수의 번제를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지 않음으로 해서 당시에 어두움이 그에게 임했고, 그 후손이 큰 괴로움을 오랫동안 당하였습니다. 인간이 살아가는데 있어 너는 너고 나는 나라는 논리는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인간과 인간간의 관계를 지니고 살아가야 하며 그 관계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 관계가 없다고 주장한다 해도 그 관계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관계를 무시한다 해도 그 관계는 지속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은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그 영향은 오랫동안 지속된다는 현실과 성경에서의 진리를 직시하시기 바랍니다. 5절과 6절을 보면, 아브라함은 그가 죽기 전에 약속의 아들 이삭과 그 외의 아들간의 관계에 대하여 분명히 인식하고 있기는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에게 자기 모든 소유를 주었음을 25장 5절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아브라함은 아직도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억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삭을 자신의 아들로 인정하는 것을 그 소유를 나누어 주는데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주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소유를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모든 소유를 이삭에게 주었다는 말에서 아브라함은 이삭을 유일한 아들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직도 하나님의 축복을 상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주었습니다. 그 서자들에게도 재물을 줌으로서 그들로 일정한 삶을 유지하게끔 해 주었습니다. 이는 아브라함의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은 자신의 생전에 그 서자들로 그 아들 이삭을 떠나게 하였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아브라함은 이삭과 그 서자들이 함께 있을 때, 문제가 발생할 것을 알았습니다. 이는 그가 자신의 조카 롯과 함께 있을 때 경험한 것이기도 한 것이었습니다. 조카와의 문제로 인하여 그들이 헤어지게 된 것이었습니다. 물론 더 깊은 이유도 있었지만 표면적으론 그들 간에 문제가 생겨 헤어진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염두에 두고 그 서자들로 하여금 이삭을 떠나게 하였는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는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롯과의 경험을 생각했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쨋든 그가 그의 생전에 그들로 하여금 떨어져 살게 하는 것은 그러한 문제를 예감하였던 것입니다. 아브라함 자신이 그 서자들로 하여금 동방 곧 동쪽 나라로 가게 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은 가나안에 그대로 살게 하고 다른 서자들은 동쪽으로 가 살게 한 것은 그 서자들이 문제라는 것과 그 문제를 야기한 사람이 자신인 것으로 인식하여 이러한 조치를 취했다고 보아집니다. 아브라함은 그 일에 자책보다 하나님으로 바로 수정하였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창세기 25장 7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죽기 전에 서자들이 이삭을 떠나도록 조치한 것을 지난주에 보았습니다. 그 후에 아브라함은 그의 나이 175세에 나이 많아 기운이 진하여 죽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나이 75세에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과 더불어 약 100년간을 동행하였습니다. 그는 그 100년동안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직접 목도하며 그 은혜를 누렸습니다. 그도 이제 늙어 그 기운이 다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은 그의 죽음을 나타낸 말입니다. 성경은 사람의 죽음을 너무도 잘 표현하였습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그의 숨이 거두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그 혼이 떠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람의 죽음을 본 적이 있으십니까? 사람이 죽었다고 할 때,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 그 사람의 외관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사람이 죽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무엇을 가리킵니까? 그 사람의 외형에 따라 죽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혼이 떠났기에 그가 돌아가셨다 혹은 그 사람이 떠났다고 말합니다. 그 혼이 떠나는 순간 그 숨 곧 호흡이 멎게 됩니다. 따라서 사람의 본체는 사람의 육체가 아니라 그 안에 있는 혼인 것입니다. 그 혼이 그 사람의 몸에서 떠날 때, 그 사람이 죽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로 볼 때, 사람에게 있어 더 중요한 것은 사람의 혼입니다. 사람의 육체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람의 혼이지만,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육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사람의 육체를 단장하며 사람의 육체를 위해서만 살아가곤 합니다. 이는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사람의 육체란 사람의 혼을 담은 그릇과 같습니다. 그 긄 보다 그 그릇에 담긴 내용물이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마귀에게 속아 그 육체가 자신인 것으로 여겨 그 육체를 따라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한 가운데 사람들은 죽어가게 됩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혼을 생각하고 그 혼에 관심을 가지신 적이 있습니까? 그리고 여러분이 죽은 후 갈 장소는 어느 곳입니까? 아브라함은 자신의 삶을 마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그 자손을 통하여 메시야가 올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메시야로 말미암는 구속도 그는 알았습니다. 아브라함도 하나님과 더불어 함께 살다가 175년동안 장수하던 중 그 몸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건강하게 장수하였습니다. 이제 그는 이 세상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습니다. 그 밭은 아브라함이 헷 족속에게서 산 밭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몸은 이제 무덤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아브라함의 삶과 죽음 그리고 장사지내는 과정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길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 태어나 성장을 하게 되고 이제 죽음 과 무덤에 묻히는 등 반복되는 인간의 삶의 결국이 죽음입니다. 그 막벨라 굴은 아브라함이 전에 그 아내 사라를 장사지내었던 장소이기도 하였습니다. 따라서 그 장소는 아브라함과 사라가 함께 장사지내어진 장소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시대는 이제 끝났습니다. 아브라함이 죽은 후, 하나님께서는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신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그 축복에 그 후손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 이삭에게 복을 내리셨습니다. 그런데 상당한 시간이 흘러 이스마엘도 137세로 죽게 되었습니다. 이스마엘도 여러 알들을 낳았고 그 아들들의 이름은 느바욧, 게달, 앗브엘, 밉삼, 미스마, 두마, 맛사, 하닷, 데마, 여둘, 나비스 그리고 게드마였습니다. 이스마엘도 많은 아들들을 낳았습니다. 그런데 이삭이 리브가를 아내로 삼았을 때, 이삭의 나이는 40세였습니다. 그러나 참으로 우리가 생각하기에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이삭의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거기엔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첫째로, 리브가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왜 리브가는 아들을 임신하지 못했을까요? 여기에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요? 사실 리브가는 아브라함이 그 늙은 종을 보내어 데리고 오게 한 처녀로서 순종이나 정숙함에 증명된 여자였습니다. 그리고 그 늙은 종이 하나님께 기도한 대로 한 하나님의 기도의 응답으로 데려 온 이삭의 아내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애기를 수태하지 못하였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리브가는 아기를 임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렇다면 리브가에게 무슨 문제가 있어 임신을 하지 못하였을까요? 그러나 리브가에게서 어떤 문제를 발견하기란 대단히 어렵습니다. 단하나 그 문제를 찾는다면 리브가는 이삭의 사랑을 입었다는 것입니다. 리브가가 이삭을 사랑을 입었기에 수태하는 것은 별 문제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리브가가 쉽게 수태한다면,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하지 못하고 그 남편 이삭만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리브가도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능력을 알게 하기를 원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는 리브가와의 관계를 개인적으로 맺기 원한 하나님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둘째로,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도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셨다고 하셨는데, 그 집엔 아들이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이상하지 않습니까?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으면 이삭의 집에 아들이 한명쯤은 태어나게 하셔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한 생각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삭의 집엔 리브가가 임신을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삭은 그 아내 리브가를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 가장에 애기가 없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체의 자식들은 곧 그 서자들은 자식도 잘만 낳게 해 주셨는데 약속의 아들 이삭에겐 정작 아들이 없었습니다. 이스마엘은 12명이 되었고 그두라의 아들은 6명이나 되었는데 이삭에겐 아무런 아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이삭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이었을까요? 이삭은 그 아내가 잉태하지 못하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하였을까요? 예, 하나님께 그 아내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그 아내가 잉태할 수 있도록 간구하였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이삭의 간구를 들으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삭의 아내 리브가가 아기를 잉태하게 되었습니다. 다른 아브라함의 서자들은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아도 아들들을 많이 낳게 해 주셨는데 이삭은 하나님께 간구함으로 아기를 잉태한 것을 생각해 볼 때, 우리는 그 까닭은 상고해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는데도 간구해야 함은 무엇일까요? 이는 하나님의 이삭에 대한 목적이 있었음을 나타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의 아들이었고 또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태어난 아들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다른 아브라함의 아들들과는 달라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아들이기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하나님으로부터 그 기도한 것을 얻게 된다는 것을 이삭으로 깨닫게 하려 하는 목적이 있었습니다. 다른 아브라함의 아들들은 구하지 않아도 얻음으로 사람이 보기엔 참 으로 복 받은 사람으로 보이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쉽게 아들들을 낳을 수 있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의 손길을 경험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삭은 그러한 잉태치 못함으로 해서 하나님께 간구하였고 그 간구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이삭을 만나 주셨음을 이삭으로 하여금 알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이삭으로 하여금 자신의 능력의 크심을 경험하게 하여 하나님을 점점 더 알아가게 하셨습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 아버지 아브라함과 나누던 그 방식으로 이삭과 관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사람들은 그 삶이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다는 것을 이삭으로부터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로 죄로 부터 구원받은 사람들의 삶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기에 이를 이상히 여기지 않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창세기 25장 22절부터 26절 까지의 말씀을 여러분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 이름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분이십니다. 아들이 없는 이삭의 가정에 이삭과 리브가에게 그 능력을 나타내 보이는 과정에서 그들이 그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간구를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들을 낳게 하는 과정에서도 그들과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자 함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를 계속한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 상황이 좋지 않다든지, 그 형편이 나쁘다는 것으로 불평하거나 원망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생명에게 대해선 그 상황과 형편을 충분히 활용하여 그 능력을 나타내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의 간구를 들으셨으므로 리브가가 수태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시는데 있어 하나님께서는 평범한 것을 사용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리브가로 하여금 수태케 하였는데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그녀가 수태를 하였는데 쌍둥이를 수태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펴실 땐, 놀랍게 그 능력을 펴신다는 것을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도 없던 아들을 하나님께서 두 아들을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우리가 생각하고 짐작하는 일을 초월한다는 것을 이 본문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초월하는 능력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 쌍둥이가 태중에서 서로 싸우는 참으로 특이한 일이 발생하였습니다. 어떻게 태중에 있는 아이들이 싸울 수 있는 지 참으로 알기 어렵습니다만 그 아이들이 태중에서 서로 싸웠습니다. 그 일 앞에 리브가는 의문을 가졌습니다. 그녀는 22절에서 ‘이 같으면 내가 어찌 할꼬’라는 반문을 하였습니다. 이 구절의 말은 영어 흠정역성경에선 ‘ 이 같으면 나는 왜 이렇습니까(If it be so, why am I thus?)’라고 하나님께 여쭈었습니다. 여기서 리브가가 하나님께 그 현상에 대하여 여쭙게 될 때, 그녀는 자신을 탓하였습니다. 그녀가 ‘나는 왜 이렇습니까?’라고 말한 데서 자신을 자책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다른 여인들은 그러한 일이 없는데, 자신에게 희환한 일이 생겼으니 자신을 탓하는 말이기도 하나, 한편으로는 하나님께 대한 원망이 섞여 있는 말이기도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도의 응답으로 주신 그 아이들이 왜 싸우는 기이한 현상이 생기게 하셨냐는 원망 섞인 말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녀는 그때 자신을 바라보았습니다. 수태도 하지 못하다가 수태를 하니까 이젠 특이한 일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그녀가 입은 충격은 대단히 컸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리브가는 그 기도가 원망 섞인 기도라 하더라도 그녀가 개인적으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어습니다. 이는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사라의 경우엔 하나님께 개인적으로 기도한 내용이 성경에 기록된 적은 없습니다. 물론 성경에 기록되지는 않았다 해도 사라가 아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음엔 틀림없을 것입니다. 리브가는 하나님께 그 일을 여쭙는 것을 통하여 개인적인 관계를 하나님과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물으면 하나님께서는 꼭 대답하신다는 것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23절에서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는 어린 자를 섬기리라’고 리브가에게 대답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리브가에게 하신 대답을 통하여 몇 가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리브가의 태중에 두 국민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두 아이들이 후일에 두 국민 곧 두 민족이 될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태중의 아이들을 통하여 그 미래를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보다 그 미래를 보고 계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미래를 리브가로 하여금 보게 하셨습니다. 그 태중에 두 민족이 잇음을 알게 하심으로 리브가를 안심시키실 뿐만 아니라 리브가로 하여금 큰 목을 느끼게 하였습니다. 둘째는 그 두 국민이 태중에서부터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불행한 일입니다. 그녀의 태중에 두 국민이 있다는 것은 기쁜 일이었지만 그 두 국민이 나누어진다는 것입니다. 그 두 국민이 함께 하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이는 서로 대적하여 싸우게 된다는 것을 타나냅니다. 셋째는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두 국민이 있겠지만 그 힘의 우위는 다르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한 족속이 다른 족속보다 그 힘이 더 강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상대적으로 다른 족속은 약하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넷째는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긴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이라고 말씀함으로서 큰 자는 쌍둥이이지만 형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형이 동생을 섬긴다는 의미의 말씀입니다. 이는 부모의 입장으로 보면 그렇게 좋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형이 잘 되어야 형제 우애가 잘 유지되고 또한 그들의 관계가 잘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형이 아우를 섬기겠다는 말씀을 하심으로 동생이 더 강하고 잘 될 것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대답이 잇은 후, 그 해산 기한이 찼습니다. 해산 기한이 되어 리브가가 해산하게 되었습니다. 그녀가 해산할 때, 먼저 나온 자는 붉고 전신이 갖옷 곧 털옷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에서라 불렀습니다 에서의 이름의 뜻은 붉음입니다. 에서는 이로 볼 때 그 피부가 붉고 그 피부에 털이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가 먼저 나왔기에 형이 된 것이었습니다. 그 후에 나온 아우는 손으로 에서의 발꿈치를 잡았으므로 그 이름을 야곱이라 불렀습니다. 야곱이라는 이름의 뜻은 발꿈치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특이한 일입니다. 금방 태어나는 신생아가 그 형의 발꿈치를 잡았다는 것입니다. 신생아로서 그 아이의 손의 힘이 상당히 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형의 발꿈치를 잡을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리브가가 에서와 야곱을 낳을 때 이삭은 60세였습니다. 이삭이 40세에 리브가를 아내로 취하였기에 이삭은 결혼 후 20년만에 아들들을 얻은 것입니다. 이삭도 상당히 오랫동안 그 아들이 없었음을 여기서 보게 됩니다. 20년 동안에 아들이 없었다는 것은 그 아버지 아브라함만큼은 아니더라도 상당히 오랫동안 아들이 없었습니다. 결국 이삭은 19년 동안이나 그 아들을 위하여 기다리다가 19년이 지날 즈음에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이로 보면 이삭은 하나님을 오래 기다리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청취자 여러분, 여러분은 이삭과 같이 그렇게 오래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저 역시 그렇게 기다릴 수 없습니다. 제가 이삭을 바라 볼 때, 저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크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삭이 그렇게 기다리는 중에 주신 그 아들들은 그에게 그리고 그 아내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두 아이들에 대하여 왜 그 태중에서 그와 같이 말씀하셨을까요? 그 해답은 로마서에서 찾아볼까 합니다. 로마서 9장 13절은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 고 야곱과 에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에서는 사랑하였고 에서는 미워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까? 하나님께서 불공평하다는 의미의 말씀입니까? 하나님께서 자신의 하시는 일에는 선택이라는 하나님의 고유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들을 하나님께서 선택에 따라 구별하셨던 것입니다. 로마서 9장 10절부터 11절은 ‘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잉태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이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신 것은 하나님의 뜻이 사람의 행위에 의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 있어 부르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는 일은 그 사람의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있음을 여기서 드러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