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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시대 이웃을 위한 변호사, 조영래
1. 서론
사회주의, 자유주의, 공동체 주의 등 다양한 관점이 동일한 사회 현상을 두고 각각의 한계 속에서도 가치 있는 분석을 제시합니다. 하나의 사회 현상이 가지고 있는 천차만별의 양상을 하나의 관점이 모두 분석해 내는 것은 불가능할 지도 모르나 그러한 관점에 충실한 분석은 언제나 우리에게 큰 통찰을 제시해 주곤 합니다.
한 사람은 저마다 자신들의 삶을 통해 하나의 작은 우주를 형성해 가는 존재입니다. 인종을 불문하고, 출신 국가를 불문하고, 빈부를 불문하고, 사회 계층을 불문하고, 성별을 불문하고, 종교를 불문하고 모든 사람이 그러한 하나의 작은 우주와도 같은 가치와 그 만큼 특별한 이야기를 이 세상에서 만들고 또 그러한 이야기를 가슴에 품고 땅으로 돌아갑니다.
조 영 래. 그 역시 결코 누군가가 완벽히 알아 낼 수 없는 삶을 살다간 하나의 소우주와 같은 존재입니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는 부모의 아들로서, 세 누이들의 동생으로서, 그리고 셋 동생의 형과 오빠로서, 그리고 이옥경이라는 한 여성의 남편으로서, 일평-무현 두 아들의 아버지로서 ... 그 역시 부모로부터의 사랑과 꾸중, 누이 동생들과 끊이지 않는 티격태격하는 다툼, 집안의 부유함과 위기를 겪으며 어린시절을 보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는 급속한 경제적 근대화와 봉건제에 비견될만한 권위주의적 군사독재정권이 집권하고 있던 한국이라는 격동적인 사회 속에서 학생, 사법연수원생, 교도소 수감인, 불타 죽은 노동자의 친구, 현상수배자, 인권변호사라는 자리를 거치며 그 격동성을 자신의 온 몸으로 겪다 이승을 떠나간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을 하나의 관점으로 포섭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조그마한 망원경으로 500억 광년의 직경을 가진 우주를 보는 것과 같이 수박 겉은커녕 그 줄무늬조차 볼 수 없는 위험이 있으나, 저는 이 위험성을 떠 않은 채 발제를 해보려 합니다. 조영래, 비록 제가 직접 대면하지도 못한 사람이지만 적어도 그의 글과, 그의 행적을 따라 제작된 영상물, 그리고 그를 추억하는 많은 사람들의 추억문을 통해 일주일 동안 그와 함께할 수 있었습니다. 그 동안 단순한 그의 행적을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점을 통해 얼마만큼은 조영래 그 사람의 내면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2. 임마누엘 레비나스의 타자 철학
레비나스에 따르면 ‘존재’가 아닌 ‘존재자’로서의 인간은 그 존재적인 본질 상 끊임없이 다른 존재들을 자신의 것으로 환원시켜 내야 하는 이기적인 존재입니다. 인간을 먹습니다. 끊임없이 먹고 흡수함으로서 자신을 형성해 나가고 보존합니다. 곡식과 과일, 고기와 생선을 씹어 섭취합니다. 그것은 다른 것이 아닌 오직 자신의 육체만을 형성하고 보존하는 데 사용됩니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 역시 이와 동일합니다. 지식(知食), 안다는 것 역시 특정한 대상을 잘게 나누어 그것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글을 읽고, 영상을 보며 우리는 그렇게 우리 자신의 정신을 형성해 나갑니다. 아직 그 곳엔 타자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러한 존재의 한계가 곧 악한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존재자로서 주체가 벗어날 수 없는 한계일 따름입니다. 그러나 이런 주체의 한계는 타자의 ‘현현’ 혹은 ‘계시’로서 그 극복의 길이 열리게 됩니다. 자신이 도저히 다 알 수 없는 존재자의 등장! 그것은 일종의 신비이며, 탄성이며 경이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존재자가 주체를 뛰어넘어 마침내 자신을 초월할 수 있도록 인도하는 일종의 구세주와도 같은 무엇입니다. 타인의 기쁨과 아픔, 좌절과 고통을 함께 나누며 인간은 주체의 이기적인 본성을 극복하고 윤리적인 존재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나치로 대표되는 근대의 주체는 인간마저 하나의 물건마냥 자신의 이기적인 주체 속으로 포섭하고 철저히 파괴하며 주체의 폭력성과 이기성의 정점을 보여주었습니다. 레비나스는 그의 철학을 통해 이런 종말에 가까운 비극을 경험한 현대의 주체는 먹고 마심으로서 자신의 주체를 형성, 보존해 나가면서도 타인의 고통과 아픔에 긴밀히 응대함으로서 본질적인 인간의 이기심 혹은 폭력성을 극복 그리고 초월해 나갈 수 있으며,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저는 조영래는 그러한 주체의 이기심과 폭력성을 타인과의 진실된 만남를 통해 극복해내고 초월함으로서 고귀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한 철학자의 통찰이 아닌 진실로 조영래가 자신의 마음에 품고 살았던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부터 이야기할 조영래의 타인들과의 수 없이 많은 진실된 만남을 통해, 부조리한 체제에 의해 헐벗고 굶주리고 고통 받던 약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환대하고 그들과 함께 울고 웃었던 그의 생활을 통해, 그의 삶에 짙게 스며든 ‘사랑’의 향기를 통해 이러한 저의 생각이 여러분들에게 설득력 있게 다가 갈 수 있었으면 합니다.
3. 조영래의와 종교: 불교
그렇다면 조영래가 레비나스를 알고 있었느냐? 그것은 저는 알 도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추측하건데 1990년대가 지나서야 레비나스가 본격적으로 국내에 알려지게 되었다는 점에서 조영래가 레비나스의 철학 그 자체를 알고 있었다고 보이진 않습니다. 하지만 필시 철학이라는 것은 철학자가 무엇을 ‘발명’해 내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현상을 ‘발견’해 내는 것이라는 점에서, 철학자가 진리를 발견하기 전에 시골의 가난하고 성실한 농부는 이미 그 진리를 몸으로 깨우치며 살아가고 있을 수 있다는 점에서, 레비나스의 철학을 그가 알지 못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 아닙니다.
그럼 조영래는 어떤 계기로 주체의 이기심과 폭력성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인가? 군부독재라는 근대의 폭력성, 즉 주체의 이기심과 폭력성이 짙게 드리워져 있던 시대를 살아가면서, 어떻게 그것을 극복할 수 있었는가?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그의 탁월한 지적 능력에서 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서울대를 전체수석으로 입학하고, 전국의 수많은 수재들도 3년 이상을 공부해도 합격하기가 녹록치 않다는 사법고시를 공부한지 채 1년이 못 되어 합격시킨 조영래의 비범한 지적능력이 앞서 물음에 대한 답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답은 결과만을 놓고 쉽게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천재’라는 대답을 제시하는 사람들은 다른 비범한 ‘천재’들과는 달리 유독 왜 조영래만 “진실이 있고 정의가 있었던” 곳에 서서 군사독재 시절의 “불위와 허위를 깨뜨”리며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인가에 대해서 답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법고시를 통과한 수많은 수재들이 검사가 되고 판사가 되어 독재의 권위에 빌붙고 순종하며 작위 또는 부작위로 인권을 유린하던 그 시절에 왜 유독 조영래만이 거칠고 고독하며 험하디 험한 진실과 정의의 길, 그 좁디좁은 길을 걸어갈 수 있었던 것인가에 대해서 어떻게 ‘천재’였다는 간단한 답이 어떻게 설명해 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이 물음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영래에게 깊은 영향을 미친 종교에 주목을 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조영래는 카톨릭 신자였던 그의 어머니와 동행하여 성당에도 자주 출입했던 것 같지만 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종교는 불교였던 것 같습니다. 그의 말을 빌려 보겠습니다.
“나는 어린 시절에 우연히 절 동네에 살았던 인연으로 해서 일찍부터 불교의 영향을 깊이 받으면서 자라난 편이다. 그러니까 지금 승가대학 건물이 자리잡고 있는 바로 그 터에 내 청소년기를 보낸 집이 있었다. 내가 처음 심경을 읽은 것이 중학교 2학년 때였는데 한동안은 길을 가나 자리에 누워 있으나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여덟 글자가 뇌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 무렵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근 30년이 가까워오도록 내 마음에서 불경을 멀리한 일은 거의 없다.”
색즉시공. 몇 년 전 국내에서 흥행에 성공했던 성인 코미디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이 구절의 의미는 ‘색’, 즉 이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은, ‘공’ 즉 없는 것이요 ‘헛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반면에 공즉시생의 의미는 ‘없는 것은 곧 있는 것’이라는 의미로 ‘자기 집착에서 벗어나면 없는 것 같고 헛것 같은 이 세상이 새로운 의미의 실체로 다가온다’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인간이 자신의 본성인 자기 집착에서부터 벗어난다면, 그때부터 인간은 우주의 일원으로서 온 우주 만물에 보탬이 되는 전혀 새로운 차원의 삶을 살게 된다는 교훈입니다. 어린시절 조영래를 크게 흔들어 놓았던 이 법 구절, 그리고 자신이 평생 법경을 놓지 않게 만들었다는 이 법경의 구절은 타인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타자에 대한 윤리의식과 유사해 보입니다.
4. 조영래의 생애 I. 학창시절
조영래 평전을 지은 안경환 교수에 따르면 조영래가 대구의 국민학교에 재학 중인 시절 그의 아버지의 사업은 실패로 끝나게 되고, 그의 가족은 집까지 날려 버린 채 대구를 떠나 상경하게 되었습니다. 상경한 후에도 가정형편은 회복되지 않아 조영래는 중학생 시절부터 과외 교사를 하면서 학업을 꾸려나갔습니다. 조영래의 국민학교-중학교 시절의 이야기는 그리 많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다만 상상할 수 있는 것은 가난한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갔을 그에게 자연스레 타인에 대한 관심과 사랑 혹은 소위 “인권 감수성”의 씨앗이 뿌려졌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고등학교 시절 조영래의 가정형편은 이전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버스비가 없어 수유리에 있던 그의 집에서 버스를 갈아타고 다녀야 하는 학교까지의 짧지 않은 거리를 그의 동생과 종종 걸어 다녔으며, 3학년 때에는 그의 학교 동기생의 집에서 함께 기거하면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정의를 위한 직접적인 실천에 들어갔습니다. 고등학교 입시를 압둔 3학년 때 학생회 학술부장을 받고 있던 조영래는 박정희 군부가 추진하던 한일회담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하였던 것입니다. 1964년 3월 26일 조영래가 주도하는 경기고등학교 학생 1천여 명은 교내에서 성토대회를 연 뒤, 교문을 박차고 나가 국회의사당 앞까지 가두 시위를 벌였습니다. 학생들은 소위 “민족적 민주주의”를 주창하던 군부세력을 조롱하며 시위대의 선두에서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더냐”라는 플랜카드를 들고 행진하였는데, 그 당시 찍힌 사진도 남아 있습니다. 이 사건으로 조영래는 학교로부터 정학 처분을 받기도 하였습니다.
6. 조영래의 생애 II. 대학교 그리고 변호사가 되기 전까지
서울대 법대를 그것도 수석으로 입학한 조영래. 그렇지만 법학도 조영래의 대학생활은 육법전서와 거리가 멀었습니다. 1학년 때 그는 선배들과 함께 한일회담준비 반대 동맹 휴교를 주도, 제적 직전가지 갔다가 수석 합격자라는 프리미엄 덕으로 징계를 면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그는 66년 삼성재벌밀수사건 성토대회, 67년 6 ․ 8 부정선거규탄시위 등을 주도하며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며 법대 학생운동의 새 지도자로 떠오르게 되었습니다. 그는 또 그 과정에서 많은 유인물과 백서, 총학생회 이름의 선언문 등을 직접 쓰기도 하였습니다. 이같은 활동으로 “조영래가 법대에 들어온 뒤 학생 운동의 중심이 문리대에서 법대로 옮겨졌다”고 이야기될 정도였습니다.
1) 전태일과의 만남
타인과의 진실된 만남, 타인을 그 그대로의 모습으로 환대하는 것은 하나의 사건이자 그것은 자신의 주체를 초월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런 만남은 한 사람의 만남을 영원히 뒤바꿔 놓는 충격을 가져다주기도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평가하듯 조영래와 전태일의 만남은 비록 산 자와 죽은 자의 만남이었지만 조영래 자신의 삶의 방향을 절대적으로 결정한 하나의 사건이었습니다.
69년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3선 개헌 반대시위를 주도하는 한편 변호사가 되기 위한 사법시험을 준비하였습니다. “학생 신분을 떠나 사회 활동의 기반을 가지고 계속 운동을 하기 위해서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69년 11월 13일 평화 시장 노동자 전태일이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자살하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조영래는 사법시험을 위해 보던 법전을 덮고 전태일의 시신이 안치돼 있던 명동 성모병원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이 사건을 종교계 등 각계와 언론에 알리는 일을 맡기도 하였습니다.
“우리가 이야기하려는 사람은 누구인가?
전태일
평화시장에서 일하던, 재단사라는 이름의 청년노동자.
1948년 8월 26일 대구에서 태어나 1970년 11월 13일 서울 평화시장 앞 길거리에서 스물둘의 젊음으로 몸을 불살라 죽었다.
그의 죽음을 사람들은 ‘인간선언’이라고 부른다‘
...
그는 말했다.
인간의 생명은 고귀한 것이라고. 부자의 생명처럼 약자의 생명도 고귀한 것이라고.
그는 고발했다.
이사회의 밑바닥에는, 인간이면서도, 짐승이 아닌 인간이면서도 “그저 빨리 고통을 느끼지 않고 죽기를 기다리는, 그리고 죽어가고 있는 생명체들”이 있다고.
...
그리하여 그는 맹세했다.
“인간을 물질화하는 세대 ..... 한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모든 것을 박탈하고 있는 이 무시무시한 세대에서, 나는 절대로 어떠한 불의와도 타협하지 않을 것이며, 동시에 어떠한 불의도 묵과하지 않고 시정하려고 노력할 것이라고 ....”
그는 싸웠고, 그는 죽어갔다.
비장한 글, 전태일 평전의 시작부분의 글입니다. 조영래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되어 6년 가까이 도피 생활을 하는 동안 전태일 평전 당시의 제목으로는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을 집필하였습니다. 집필을 하는데 3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이 기간 동안 그는 전태일을 일기를 읽고, 체포의 위험을 무릅쓰고 전태일의 어머니 이소선을 꾸준히 만나며 전태일에 대한 그녀의 기억을 꼼꼼히 기록합니다. 그리고 그의 기억을 최대한 되 살려 나기 위해 평화시장을 서성거리며 거리의 분위기를 체험하고, 스스로 전태일이 되어 허리를 펼 수도 없을 정도로 낮은 2층 작업대에 앉아 보기도 하고, 열 살이 조금 넘은 여성 노동자들과 이야기를 하며 마침내 전태일 평전을 완성합니다. 노동법을 쥐고 “나에게 대학생 친구 한명만 있었다면..”이라는 절절한 아쉬움을 표현한 전태일에게 대학생 친구가 생겼습니다. 이 대학생 친구는 이미 불에 타 죽은 노동자 전태일의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이 땅의 대부분의 민중들의 친구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책은 당시 국내에서 출판하기에는 위험이 너무 커, 외국인 목사가 원본을 일일이 찍은 사진을 일본으로 전달하여 일본에서 먼저 출판되어 이후 국내에서 비밀리에 출판되어 판매되었습니다.
“학교를 다닐 수 없었던 소년 소녀들이 학생복을 입고 거리를 오가는 같은 나이 또래들을 쳐다보는 그 쓸쓸한 눈망울에 담긴 패배감, 좌절, 자학, 절망... 그것을 어떻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으랴. 자식을 학교에 보낼 수 없었던 부모들이 학교에 다니는 남의 집 자식을 볼 때 그 가슴 찢는 괴로움을 무엇으로 표현하랴.”
우리나라 최고의 엘리트인 서울대생이 경험하지 못했을 감정을 섬세하게 잡아낸 조영래의 문체, 조영래의 오랜 벗이자 이 책의 집필을 먼저 시도한 장기표에 따르면 전태일 평전의 문체는 조영래의 문체가 아니라 전태일의 일기에 적힌 전태일의 문체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2)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과 복역의 교훈
조영래는 71년 사법시험에 합격 후 사법연수원생으로 연수를 받고 있던 중 서울대생 내란 음모 사건으로 1년 6개월의 형을 만기 복역하고 출소하였습니다. 그는 당시 1년 반 동안 감옥에서 생활을 하며 ‘잡범’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제까지 자기가 알지 못하던 세계에 대해 새삼 눈뜨게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생존을 위해 범죄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잡범들, 범죄가 개인의 전적인 책임이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에 의해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있는 현실 ... 그러나 그런 수많은 잡범들의 정상을 참작하지 않고 사회의 부조리를 시정하지 않은 채 그저 그들을 희생양삼아 정죄함으로서 ‘눈먼 정의’를 일방적으로 선포하는 한 사회의 모습을 말이죠.
교도소의 경험은 더욱 그를 성숙케 했던 것 같습니다. 이후 1981년 사법연수원에 재입하여 검사시보를 하던 중 교도소에서의 깨달음이 묻어난 작성한 그의 일기를 잠시 읽어 보겠습니다.
“나로서는 권력을 향유하는 최초의 체험이며 .... 어쩌면 아마도 마지막 체험이 될지도. 그러므로 이처럼 기이하게 주어진 넉달의 기회를 내 영혼의 가장 깊은 곳에서부터 가장 맑고 신선한 숨결로 부딪쳐 나아가 최선을 것을 이루어내어야 한다고 마음먹고는 있다....
*내가 처음으로 구속 기소한 운전사
2.5톤 트럭에 소금을 싣고 소금장사 하러 장위동에 갔다가 후진사고로 3살짜리 어린아이를 치어 숨지게 했다. 업무상과시치상 전과도 있고, 폭력 전과까지 있는 데는 다소 놀랐다. 집유 기간 중, 첫 번째 구류심문에서 떨고 있었다....
석방할 가능성이 있는가 기준을 알아보았더니 도저히 불가.
하여간 공소장을 섰다. 구공판은 어쩔 수 없었으나 이 최초의 사건에서 우선 이 사람에게 미안한 것 두 가지가 남아 있다.
하나는 구형을 담당검사의 의견을 들어 덜컥 그 의견대로 1년 6개월로 해버린 것. 또 하나는 수갑을 풀어주고 담배를 권하지 못한 것. 물론 보다 근본적인 회한은 이런 사소한 것을 훨씬 넘는 것이다.
*강모씨. 27세 운전사. 내가 석방한 최초의 사람이다.
...
석방품신서에는 이런 등등의 가정형편이나 본인의 성실성 등을 정상란에 많이 섰으나 기실 그런 것 때문에 구디 석방시키고자 뛰어다녔던 것은 아니다.
운전사들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형사책임을 부과하고 있는 사법관행. 또 그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운전사들 자신의 체념에 대하여 그대로 승복할 수 없다는 것. 한 젊은 인간의 장래와 그에 연관된 숱한 사람들의 생애가 기실은 그 한 인간만의 과오로 돌릴 수 없는 ‘재수 없는 사고’로 인하여 관료적 절차에 따라 간단히 아무렇게나 짓밟혀버려서는 아니 된다는 것. 그리고 또한, 관행이나 사무처리상의 편의가 한 인간의 전생애보다도 우선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의무감. 이런 것들이 나로 하여금 아직도 낯선 검찰청의 여러 방들을 쩔쩔매며 돌아다니게 만든 것 같다. 이 사람은 나에게 축복을 가져다 주었다.
지금까지 충분히 실천을 못하였으나 4개월 동안 내가 준행하려고 하는 제일보는 피의자 또는 참고인, 가족 들에게 친절히 대하는 자세를 견지하는 것이다. 어떤 경우에라도 친절한 자세를 흩뜨리지 않도록. 어떤 경우에도 조금이라도 권력을 가진 자의 우월감을 나타내거나 상대방을 위축시키거나 비굴하게 만드는 일이 없도록.
다른 것만 다 못하더라도 이것만 해낼 수 있다면 더 이상 좋을 수가 없겠다. 만약 친절히 해서 일이 안 되다는 것을 내가 마침내 승인하게 되는 일이 만의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것은 나에게 더할 수 없는 심대한 패배가 될 것이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혹은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해서는 안 된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유고집, p 267)
7. 인권 변호사로서의 조영래
“변호인들은 먼저 이 법정의 피고인석에 서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권양 - 우리가 그 이름을 부르기 삼가지 않으면 안 되게 된 이 사람은 누구인가? 온 국민이 그 이름은 모르는 채 그 성만으로 알고 있는 이름 없는 유명인사, 얼굴 없는 우상이 되어버린 이 처녀는 누구인가? 그녀는 무엇을 하였는가? 그 때문에 어떤 일을 당하였으며 지금까지 당하고 있는가? ...에 대하여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국가가, 사회가, 우리들이 그녀에게 무엇을 하였으며 지금가지도 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
이제 저 잔혹하였던 여름과 가을을 지나, 권양은 이 법정에 섰습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눈물로써 호소하고자 하는 것은, 이 빛나는 영혼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순결무구한 처녀는 이 시대의 모든 죄악과 타락과 불의를 속죄하는 제물로서 역사의 제단 앞에 스스로를 바쳤으며, 우리들 중 누구도 이 시대에서 가장 죄가 없는 이 처녀를 더 이상 단 한시라도 차디찬 감옥 속에 갇혀 이께 하는 죄악의 공범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권양, 온 국민의 가슴속 깊은 곳에 은밀하고 고귀한 희망으로 자리잡은 우리의 권양은, 즉각 석방되어야 합니다."
위 부분은 조영래가 맡은 많은 사건 중 가운데 그 개인적으로나, 한국 사회적으로나 가장 중요한 사건 중의 하나인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의 변론의 시작과 끝 부분입니다.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은 1986년 위장취업 때문에 잡혀온 여대생을 취조하던 중 문귀동이라는 경관이 그녀를 성고문한 사건입니다. 당시 20대였던 피해자 권인숙은 수치스러움과 주변의 시선을 각오하고 사실을 밝혔지만, 정부와 검찰 그리고 언론은 그녀를 “성까지 혁명의 도구로 이용한다”고 매도하여 성고문 사실을 은폐하려했던 사건이었습니다.
그와 함께 피고인 권인숙 양의 공동 변호인이었던 박원순 변호사의 증언에 따르면 이 사건은 조영래가 맡은 인권사건 가운데 가장 혼신의 힘을 기울인 사건입니다. 그는 독재정권의 부조리함의 최대의 희생양이 된 피해자의 고통에 진심으로 함께 아파하였기 때문에 이 사건에 그러한 힘을 기울였고, 또한 파렴치한 비인륜적 행위를 저지를 전두환 정권의 비도덕성을 만천하에 폭로하고 정권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가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자신의 온 정열을 이 사건에 쏟았던 것입니다.
이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 그는 당시의 전형적인 방식만을 고수하지 않고, 사법 제도 안과 밖을 거치며 창조적으로 변호를 진행하였습니다. 그는 고문 경관을 변호인들의 이름으로 직접 고발하기도 하였고, 검찰의 문귀동에 대한 불기소 발표에 대해 기자회견을 열어 의견을 발표하기도 하였다. 또한 피해자 권인숙 양과의 면담록을 계속 작성해 두어 이를 공개하기도 하였고, 국민들 사이에서도 어느 주장이 진실인지 왈가왈부하고 있는 상황에서 당시 우리사회에 가장 영향력이 컸던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가 그를 진실의 편으로 끌어들이기도 하였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이 조영래로부터 사정의 자초지종을 듣고 난 이후 변호인단의 편을 들었던 것입니다.
조영래의 분석대로 1986년에 있었던 이 사건은 1년 뒤인 87년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과 함께 우리시대 민주화의 토대가 된 6월 혁명의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이 사건 외에도 10년이 채 못 되는 변호사 활동을 하는 동안 그가 이룩한 업적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최초의 집단 소송을 이끌어낸 “망원동 수해 사건”, 최초의 공해소송을 승소로 이끌어 낸 상봉동 진폐증 사건, 사법부의 여성에 대한 차별을 시정하는 계기를 만든 “여성의 조기정년제 철폐사건”등이 단적인 사례들입니다.
9. 정리하며
타인에 대한 사랑, 휴머니스트 조영래. 일주일 동안 틈나는 대로 그와 응대하며 조영래 그의 힘은 탁월한 지적능력에 더 해진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기표씨의 말처럼 사랑의 효과, 즉 진실로 인간을 사랑할 때 생겨나는 지혜를 조영래는 가지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꽤 긴 발제문 속에도 담고 싶었지만 담지 못한 이야기들도 있습니다. 조영래와 그의 아내와의 사랑이야기, 그와 그의 자녀들의 사랑이야기 등 말이죠. 미국에서 그의 아내에게 보내는 짙은 그리움이 넘쳐나는 편지와, 그의 애틋한 부정이 넘쳐나는 그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등 많은 글들이 있지만 그 모든 글을 다 말하진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그의 아들 일평에게 보내는 짧은 편지 하나를 읽어 보겠습니다.
“일평이에게
앞의 사진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이 되거나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다. 실은 그것이야말로 이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처럼 높은 소망인지도 모르겠지만 ..."
괴물과 싸울 때는 자신이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경고입니다.
독재 정권이라는 괴물에 맞서 치열한 삶을 사는 동안에도 괴물이 되지 않고 결국 괴물을 물리친 조영래, 그의 힘은 타인에 대한 지극한 환대와, 사람에 대한 사랑, 그리고 그것을 토대로 한 지치지 않는 정의에 대한 열정과, 결코 끊어지지 않는 소망이었던 것 같습니다.
조영래를 마주하며 한 단계 깊이 그 뜻을 묵상하게 된 성경 구절로 발제를 마무리 하려합니다.
가난한 자는 복이 있고, 슬퍼하는 자는 복이 있으며, 온유한 자에게 복이 있고, 공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에게 복이 있다. 자비로운 자는 복을 받을 것이며 마음이 정결한 자에게 복이 있고, 평화를 만드는 자에게 복이 있고 끝으로 의를 위하여 환난과 핍박을 경험하는 자에겐 복이 있다.
조영래, 그 이름이 우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쉽지 않을 일생을 사랑과 소망이 그치지 않는 삶으로 살아가는 힘이 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참고 자료
<도서>
조영래 (조영래변호사 추모를 위한 모임 엮음),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워 놓을 수는 없습니다」, 창작과 비평사 1991, p.94
안경환, 「조영래 평전」, 강, 2006
박원순, 「역사가 이들을 무죄로 하리라」, 두레, 2003
<논문, 칼럼>
천호영, “조영래와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월간 말, 통권69호, 1992, pp166-171
<영상물>
KBS, 인물현대사; 진실은 감옥에 가두어 둘 수 없다 - 조영래, 방송일 2003.7.25.
다시보기:
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manhistory/vod/1264304_968.html
EBS, 지식채널e :조영래 변호사,
다시보기: http://www.youtube.com/watch?v=ZhhrqBXKKuY
첫댓글 멋진 발제문이었습니다.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다만, 교수로서 지적하자면, 레비나스의 '타자의 철학(윤리학)'에 대한 설명이 조금 낯설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타자의 철학'이 어떻게 '배제 혹은 권력의 철학' 아니라 '환대 혹은 윤리의 철학'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설명이 조금 아쉽습니다. 물론 조영래 변호사의 삶이 그것을 실증해 준다고 할 수도 있겠지요?
작년에도 많은 분들이 법조윤리 수업에서 조영래 변호사님을 존경하는 법조인으로 발표했었는데 .. 감정은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공유할 수 있는 것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