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안케패스전우회 전우님 여러분 그 동안 안녕하셨읍니까?
제5차 정기총회를 유서깊은 전북 고창군 선운사에서 개최하고자 알려
드리오니 바쁘시드라도 참석하시여 자리를 빛내 주셨으면 합니다.
- 아 래 -
일 시 : 2005년3월26일(토요일)오후5시
장 소 : 전라북도 고창군소재 (유스호스텔)
전 화 : 063) 561-3445 (담당계장)
2005년 3월 일
베트남안케패스전우회 회 장 이 희 철
<총회 자료>
유스호스텔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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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치 : 전북 고창군 아산면 삼인리 287
전 화 : 063)561-3445 |
객실내역 : 양실,한실,회의실
사용카드 : 모든신용카드
교통안내 : (버 스) 고창시외버스터미널-->선운사행 직행버스 1일 8회운행군내버스40분간격 운행
선운산도립공원 (전북 고창군) | | | | | 관 리 자 : 선운산도립공원관리사무소(063-563-3450) 공원 개요 :
o 호남의 내금강으로 불러지는 선운산은 노령산맥의 지맥으로 서해안과 접하고 있으며 선운사는 금산
사와 더불어 대한불교 조계종의 도내 2대 본사로 한국의 명승고찰로 유명하다. 선운사 창건은 577년
백제 위덕왕 24년에 검단선사와 신라의 국사이자 왕사인 의운국사가 창건하였다고 전해 오고 있다.
선운사에 보존되어 있는 사적기에 의하면 선운사는 창건 당시 한때 89암자에 3,000승려가 수도하는
국내 제일의 대찰이었다고 한다. 현재 선운사에는 보물 5점, 천연기념물 3점, 전라북도유형문화재
9점, 전라북도문화재자료 2점 등 총 19점이 있다.
o 선운산도립공원은 해발 400여미터의 비교적 낮은 구릉으로 이루어져 탐방객들에게 각광을 받고 있
으며 선운사에서 도솔암까지의 제1코스 등산로는 울창한 수목이 터널을 이루고 있어 산림욕을 할수
있는 여건이 갖춰져 있고 경사가 완만하여 가족단위 관광객들도 선호하는 코스이다. 또한, 북방한
계선에 군락을 이룬 수령 500여년의 동백나무숲(4월 중순 개화)과 장사송.송악이 천연기념물로 지정
되어 대표적인 관광자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고 공원 도처에 천혜의 빼어난 자연경관이 펼쳐져 있다.
특히, 매년 9월 중순경에 가느다란 꽃대에서 만개하는 꽃무릇은 홍조를 띤 미소로 전국의 사진작가
및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
(선운사 자동전화 안내 : 02-134 , 관광지 코드번호 : 6061-2) |
관람시간 : 하절기 08:00~19:00 ,동절기 08:30~17:0 편의시설 : 야영장 1개소,취사장 2개소,대중음식점,기념품점 소매점, 찻집 현지교통 :1).고창⇒선운사:직행버스 8회,군내버스 22회/30분 소요/20km거리 2)흥덕⇒선운사:직행버스 4회,군내버스14회/20분소요/16km거리 3).정읍⇒선운사 :직행버스 4회/50분소요/34km거리 4).광주⇒선운사:직행버스 8회/2시간소요/2km 찿아오시는길:고속도로 서해안 ① 선운산 IC ⇒국도 22호선(부안면 방향)⇒부안면소재지통과⇒오산저수지⇒반암삼거리 우회전 ⇒2.8km직진후좌회전⇒선운산도립공원진입 ② 고창 IC⇒지방도 796호선(아산면 방향)⇒ 아산면소재지삼거리에서 우회전⇒반암삼거리 좌회전 ⇒2.8km직진후좌회전⇒선운산도립공원진입 (호남고속도로) ① 정읍 IC ⇒정읍시내 반대편 도로 진입후1.8km직진⇒국도22호선과 국도29번도로 갈림길(주천 삼거리)⇒국도22호선주행⇒흥덕면소재지 진입 ⇒흥덕검문소우회전 ⇒국도 22호선주행 ⇒부안면소재지통과⇒오산저수지⇒반암삼거리우회전⇒2.8km직진후좌회전⇒선운산도립공원진입숙박업소
o 유스호스텔 : 063-561-3333(객실수 32실) o 기타 민박안내 :선운산도립공원관리사무소(063-563-3450) ㅇ 잘 찾아서 무사히 천천히 오이소 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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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군(선운사 볼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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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운사 관음전에 봉안되어 있으며 머리에 두건과 유사한 보관을 쓴 보살좌상으로 선운사 사적기에 의하면 조선성종 7년 (1476)에 조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특히 고려말과 조선초기에 유행했던 보살상의 시대적 양식을 그대로 반영한 것으로 보문암의 나한상과 같은 양식이다.
형태를 보면 오른쪽 손은 위로 들어올려 밖으로 향하고 무명지만 자연스럽게 굽히고 있고, 왼손은 무릎위 배앞에 들려 있다.
양팔에 각각 한쌍의 팔찌를 끼고 있으며 얼굴은 온유하고 부드러운 모습을 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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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운사는 백제 위덕왕 24년 (577) 검단선사와 의운국사가 창건하고 조선성종 3년(1472) 행호선사가 중건하였으며, 정유재란때 불타 없어진 것을 광해군 5년(1613) 당시 무장현감 송석조가 원준대사를 화주로 재건하였다.
이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맛배지붕 양식을 가진 다포작 불전이다.
정면 5칸중 중앙은 4분합이고 그 외는 2분합의 문비를 달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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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운사에서 서방 2㎞ 지점인 도솔암의 내원궁에 있다.
보물 제279호와 동시 동년 동일 수법이며 크기도 비슷하다.
머리에 두건을 쓰고 두발은 어깨 뒤에 드리우고 긴귀는 귓밥이 턱밑까지 내려왔으며 용모는 단정하고 인자하여 위엄이 깃든 모습으로 고려후기 불상양식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어 가장 우아하고 세련된 당대 최고의 걸작이라고 일컫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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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당암 대웅전은 백제 위덕왕 28년 (581)에 신라 진평왕의 시주로 의운이 창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대웅전은 정면.측면 각 3칸의 맛배지붕 다포계 건물로 전면 길이 10.8m 측면 8.3m 기둥높이 3.03m 주춧돌 높이 0.4m이다.
전면에 1.2m 높이의 석축기단을 쌓고 이 석축 중앙에 계단을 설치하였으며 굵은 자연석을 다듬은 주춧돌로 기둥을 세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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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마애불상은 도솔암 왼편 칠송대라 불리우는 암벽에 양각되어 있는 미륵좌상으로 머리위 암벽에 사각형 구멍들이 10개이상 있으며 부러진 목재들이 보인다.
이 마애불상의 높이는 약 5m, 무릎폭은 약 3m이며 무릎아래에는 삼단 형식의 불단이 조각되어 있다. 가슴 한가운데에는 배꼽과 같은 돌출부가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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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마애불좌상은 원래 공중누각을 지어 공중감실처럼 꾸몄는데 인조 26년(1648)에 건물은 내려 않고 동량을 걸었던 구멍만 남아있다.
이 불상 배꼽부위에 하얀 석회로 막은 흔적이 있는데 그곳에 무엇이 들어 있는가 수수께끼 였었는데 전라감사 이서구가 열었더니 비바람과 벼락이 일어 그대로 닫으면서 '이서구가 열었다'고 써 넣었다고 하며, 동학농민혁명 당시 손화중 접주가 무장에 머무르면서 심한 비바람을 무릅쓰고 은밀히 꺼내보니 선운사를 창건한 검단선사의 비결록이었다는 말이 전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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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창읍성은 조선 단종 원년(1453년)에 왜침을 막기 위하여 전라도민들이 유비무환의 슬기로 축성한 자연석 성곽이다.
일명 모양성이라고도 불려지는 이성은 나주진관의 입암산성과 연계되어 호남대륙을 방어하는 전초기지로서 국난극복을 위한 국방관련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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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년 4월 1일 사적 145호로 지정된 이성은 둘레 1,684M, 높이 4-6M, 면적 50,172평으로 동서북문과 옹성 3개소, 치성 6개소, 성밖의 해자등 전략적 요충시설이 두루 갖추어져 있다.
성내에는 동헌, 객사등 22동의 관아건물,2지, 4천이 있었으나 전화로 대부분의 건물이 손괴된 것을 1976년부터 복원해 오고있다. 자연경관 또한 참으로 아름다워 하늘을 뒤덮는 노송과 빽빽하게 들어선 맹종죽은 운치를 더하여 준다.
지금까지 22동 중 14동(동헌, 객사, 풍화루, 공북루, 진서루, 등양루, 성황사,관청, 작청,내아. 향청,서청,장청,옥)이 복원되었고 앞으로 8동의 관아 건물도 복원할 계획이다. 또한 성밖의 외곽도로를 말끔히 정비하고 철쭉과 백일홍등 꽃나무를 심어 꽃길로 가꾸어 놓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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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부안면 소재지에서 약 6km지점 해안에 있는 요지는 야산의 동쪽을 향하고 있으며 총면적은 4,530평으로서 군유지가 3,088평, 사유지가 1,442평으로 되어있다.
이 요지는 l5세기 후반에서 16세기의 고려청자로부터 조선 분청사기로 옮아가는 과도기의 분청사기 가마로 전남 광주 무등산 가마와 함께 규모가 크고 다양한 대표적 요지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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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요지에는 15-16세기 가마와 파편이 산재해 있어 그당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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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장면 성내리에 있는 이 성은 1991.2.21 사적 제346호로 지정되었으며, 성의 남문인 진무루에서 무장초등학교 뒷산을 거쳐, 해리면으로 가는 도로의 좌편까지 뻗어 있는데 성의 둘레는 약 1,400m,넓이는 43,847평 이다.
성내에는 객사,동헌,진무루 등 옛 건물이 그대로 남아있고 건물 주변에는 여러가지 유구들이 산재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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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동안 흙으로만 축조된 토성으로 알려져 왔던 이 성이 공사때에 성벽 동쪽 끝부분의 단면이 드러 났었는데 성곽일부가 흙과 돌을 섞어서 축조된 것임이 밝혀졌다. 1915년에 발견된 「무장읍지」에 의하면 조선 태종 17년(1417) 병마사 김저래가 여러 고을의 백성과 승려 등 주민 20,000여명을 동원하여 그해 2월부터 5월까지 만4개월 동안에 축조했다고 전한다. 한편 1894년 일어났던 동학 농민혁명은 이곳 무장읍성에서 맨 처음 봉기하였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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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지석묘군이 분포된 입지를 살펴보면 고창읍에서 서방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북방식 지석묘가 있는 도산마을이 있다.
다시 이마을을 안고 북행하면 약 1.2km떨어진 곳에 죽림리 매산마을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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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매산마을은 화실봉(표고 400m)의 봉우리로부터 서남을 향하여 활 모양으로 뻗어내리는 산지맥을 배경으로 하고 앞에는 주진강 상류인 고창천이 가로 흐르고 있다.
매산마을 뒷산은 말 안장 모양의 지형으로 그 서방은 섬틀봉(표고 150.3m)이라는 삼국시대의 산성이 있는 봉우리가 있다. 이 지석묘군은 매산마을 기점으로 동서에 걸쳐 산줄기의 남쪽 기슭을 따라 대체적으로 표고 15m내지 50m의 범위내에서 몇 무더기의 군으로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곳 지석묘군을 관찰해보면 그 숫자의 방대함과 아울러 실로 다양한 형식 곧 이른바 탁자형의 북방식으로부터 가장 말기퇴행적인 다지석식에 이르기까지 집중분포되어 있다. 뿐만아니라 상석의 크기도 소형 석곽의 개석으로부터 차츰 거석화되어 가는 과정을 엿볼수 있는 성격을 간직하고 있어 동북아시아의 지석묘 변천사를 규명하는데 있어 중요한 자료가 되며 희소가치가 있는 선사시대의 유적지 이다.
한편 이곳 지석묘의 총수가 50,000여평에 1,000기이상 될것 이라고 추정하고 있으나 1990년도에 마한백제 문화연구소가 이곳을 지표조사한 결과 북방식 3, 지상석곽식 44, 남방식 251, 기타불명이 149 계447기가 확인되었다.
지석묘의 크기는 길이 1.Om 미만에서 최대 5.8m에 이르는 것까지 공존하고 있으며 총447기중 3.Om 미만이 80% 3.0m 이상이 20% 4.0m 이상은 21기 그중 6기는 5.0m 이상이다.
이곳 지석묘군은 약 2500여년 전부터 500여년간 이 지역을 지배했던 족장의 가족 묘역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며, 청동기 시대 농사를 기본으로 한 족장 내지 부족체제의 사회를 구성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 이전에 살았던 빗살무늬토기인이 강가에서 생활했던 것과는 달리 낮은 야산과 비옥한 터전인 이곳 고창의 죽림, 아산 상갑을 찾아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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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요지는 고창에서 선운사 방면 중간지점인 아산면 용계마을에서 윗쪽으로 운곡댐 중상류 쪽에 있다. 또한 이 요지는 40m * 80m에 걸쳐 동쪽은 높고 서쪽은 낮은 4개의 거대한 퇴적 구릉과 주변의 작업장,건물터로 이루어진 청자가마터이다. 1983년 원광대학교 마한백제연구소에 의하여 아산댐 수몰지의 일환으로 발굴조사 되었고 그후 사적 제345호로 지정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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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발굴조사 결과 퇴적구릉 사이에서 3개의 가마가 겹쳐져 발견되는데, 가마의 길이는 38m, 31m, 14m로 일정하지 않았고, 가마폭은 1.1-1.2m였다. 가마벽은 안벽이 갑발과 석재를 사용하여 점토와 섞어 쌓고 바깥벽은 잡석을 점토와 섞어 쌓았다.
가마터 앞의 건물터는 작업장과 관리소로 추정되는 기와가 덮여 있는 대형 건물터로 확인되었으며,주변에는 점토등이 덮여 있었다. 이곳 가마에서 제작된 청자들은 대접, 접시, 완, 병, 호, 합, 탁잔, 발유병 등 다양하였으며, 드물게 운문,초화문이 음각된 청자들과 함께 대부분 무문의 청자들이 제작되었다.
유약빛은 엷은 담청녹색이고 태토는 회백색인 양질의 청자였으며, 굽 바닥에는 회백색의 내화토받침을 받쳐 구웠다. 특히 해무리굽 청자완들이 주로 제작되었는데,태평 임술 2년명(1022) 있는 기와조각과 함께 발견되어 11세기 초반을 중심으로한 고려초기의 청자가마터로 확인되었다.
전북지방에서 가장 오랜 가마터로 12세기에 줄포만을 낀 부안일대의 청자가마터로 옮겨가기까지 청자의 발생을 알려주는 귀중한 가마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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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산면 중산리의 마을앞에서 자라난 이 나무는 높이 12m 가슴높이 둘레1.16m 나무가 차지하는 면적은 300㎡이다. 높이 1.4m에서 큰 가지가 4개로 갈라져 있다. 이팝나무는 물푸레 나무과에 딸린 낙엽교목으로 이암나무, 벗나무, 문도목이라고도 하며 한국에서는 남부지방에 자생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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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잎은 타원형이고 꽃은 5-6월경에 백색의 원추형으로 뭉쳐 피는데 만개시에는 적설뭉치가 나무가지에 걸린듯 농악꾼이 쓰는 고깔의 조화송이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꽃이 지면 작은 열매가 맺어 처음에는 녹색이었다가 익어감에 따라 흑색으로 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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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백나무숲은 선운사 입구 오른쪽 비탈에서부터 절 뒤쪽까지 약30M너비로 연속 되어있고 5,000여평에 3,000여그루의 군락을 이루고 있으며, 나무의 크기는 6M 정도이다.
이 동백나무들은 언제 누가 심었는지는 확실하지 않으나 선운사가 창건된 백제 위덕왕24년(577) 이후에 심었을 것이라 추측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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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현재 동백나무숲은 거의 순림에 가까우며 숲 밑에도 별로 다른 식물들이 자라지 못하고 있다. 주변에는 송악, 차나무, 조릿대, 맥문동, 실맥문동, 마삭덩굴등과 더불어 늙은 줄사철나무 한그루가 바위에 붙어서 자라고 있으며 절뒤에는 수선화과 식물의 일종인 석산이 큰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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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솔암 가는 길옆에 있는 이 소나무는 수령이 약600년으로 추정된다. 높이 28M 줄기 둘레 3M에 이르는 크고 오래된 나무로서 지상 1.5M되는 높이에서 8개의 가지가 사방으로 펼쳐져 있어 멀리서는 큰 우산 모양으로 보인다. 이곳 사람들은 이 나무를 장사송 혹은 진흥송이라고 부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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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사송이라고 불려지는 것은 이곳의 옛지명이 장사현이었던 사실에서 온것이라하며 진흥송이라는 이름은 이 나무 옆에 있는 굴인 진흥굴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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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운산관리사무소 옆 냇가 건너 암벽에 자생하고 있는 송악은 드릅나무과에 속하는 덩굴식물로 가슴높이의 줄기 둘레가 8Ocm에 이르고 나무의 높이도 약15m나 되는 거목이어서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내륙에 자생하고 있는 송악중에서 가장 큰 나무이다. 꽃은 10-11월에 황록색으로 피는데 짧은 가지끝에 여러 개가 둥글게 모여서 달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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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송악은 본래 따뜻한 지역에서만 자라는 늘 푸른 넝쿨 식물이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남부의 섬이나 해안지역의 숲속에서 주로 자라지만 동해안쪽으로는 울릉도까지 서해안쪽으로는 인천 앞바다의 섬까지도 퍼져있다. 그러나 내륙에는 이곳이 송악이 자랄 수 있는 가장 북쪽이 된다. 남부지방에서는 송악을 가리켜 소가 잘먹는 식물이라고 해서 소밥이라고도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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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거리 당산은 고창읍 읍내리에 위치하고 있는 화강암석주 3기로 그 중 1기는 중앙동 미륵당산으로 매일 시장 한가운데 있으며 둥근 갓을 쓴 안면의 미륵형 화강앞 석주이다. 이 당산은 화강암의 6각모형으로 높이390cm, 아래직경70cm, 안면길이70cm, 갓 직경65cm, 갓의 두께7cm로 되어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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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미륵석주는 가경 8년(1803)이라 새겨져 있고 시주자들의 명단이 새겨져있는 것으로 보아 미륵석주를 동신으로 모시기 위해 동민들이 공동건립 한것으로 추측된다. 중거리 당산은 영광에서 고창읍으로 들어오는 속칭「오거리」의 도로변에 위치해 있으며 높이 328cm의 화강암 4각주로 상부에 65cm x 65cm의 갓이 얹혀 있다. 석주 앞면에「천년완골연진남계해3월」이라 음각되어 있다. 이 곳에서 매년 당산제를 지내며 줄다리기,연등놀이,농악놀이등이 열린다.
하거리 당산은 신흥동 하거리 길가에서 약 50m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석간에 갓을 씌워 「할아버지당산」으로 높이 670cm 화강암 4각주 석간에 50cm x 50cm 의 갓이 얹혀 있다. 석간의 받침대는 126cm x 136cm의 반석이며 석간 전면에 「진서화표」라 음각되어 있으며 주민300호가 합동으로 매년1월1일밤 자정에 동제를 지낸다. 특이한 것은 일반 당산의 신체가 입석일 경우도 자연석인데 비해 본 당산의 신체는 인공의 대형 석주인 것이다. 매년 정월 대보름이면 당산에 동민들이 모두 모여 풍년을 기원하고 액운을 쫒는 당산제가 성대히 거행되어 오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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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건물은 1850년에 건립된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물을 멀리서 끌어들여 마루 밑을 통해서 서재 밖 연못으로 흘러가도록 꾸몄었으나 모두 매몰되고 연못은 복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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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합되기 이전 고창은 본래 백제의 모량부리현인데 신라 삼국통일 이후 경덕왕 16년 고창현으로 고쳐 이웃 무령군(지금의 영광)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 때에는 고부군의 영현이 되었으며 이웃 상질감무가 겸임했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태종원년 두 현에 각기 감무를 두었고, 그 뒤 현감을 두어 나주진관에 소속되었다가 고종 32년 군으로 고쳐졌으며 건양 원년 전라남도에 소속시켰고 융희 원년 전라북도로 소속되었으며, 1914년 흥덕 무장을 병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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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덕은 본래 백제의 상칠현인데 신라 경덕왕 16년 상질이라 고쳐 고부군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에 들어서는 장덕, 창덕을 거쳐 흥덕으로 고쳐졌는데 장과 창은 충선왕과 창왕의 이름 이었기에 그걸 피하느라고 고쳐진 것이며, 감무를 두어 이웃 고창을 겸임시켰고, 조선조에 들어서는 따로 각기 감무를 두었다가 뒤에 현감을 두었으며 진관으로는 전주, 토포로는 나주, 속오로는 입암산성에 속했고, 고종 32년 군으로 고쳐졌고(1904년에 고부의 부안면이 편입되었다) |
건양 원년 전라남도에 소속시켰다가 융희 원년 전라북도로 소속되었으며 1914년 고창에 병합되었다. 무장은 본래 무송과 장사 두 고을이 병합된 고을이다. 무송은 백제때 송미지현인데 신라 경덕왕 16년 무송현으로 고쳐 이웃 무령군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에 들어서도 그대로 내려왔으며, 장사는 백제때 상로현인데 신라 경덕왕 16년 장사현이라 고쳐 이웃 무령군의 영현이 되었고, 고려에 들어서도 그대로 내려왔으며, 뒤에 감무를 두어 무송을 겸임시켰고 조선조에 들어와 태종 17년 이 두 고을을 병합하여 무장이라고 하고 진을 설치하여 병마사를 두어 현 행정까지 겸임시켰다.(나주진관) 세종 5년 병마사를 첨절제사로 고치고, 그 뒤 현감을 두었다. 고종 32년 군으로 되어 전주부에 속했다가 건양 원년 전라남도에 소속시켰고 융희 원년 전라북도로 소속시켰으며, 1914년 고창군에 병합되었다. 1914년 3군은 병합하여 17면으로 갈랐다가 1935년 오산, 벽신, 석곡 3면을 없애 그 이웃에 편입시켜 14면으로 되고, 1955년 고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어 1읍 13면의 체제로 지금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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