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회원여러분!
여러분의 관심가운데 중국에 무사히 갔다 오게 됨을 감사 드립니다.
한국 도착 후 여행 중에 쌓인 피로가 저를 한동안 묶어두었고, 이제야 심신을 가다듬고 여러분과 깊은 해후의 기쁨을 나누고자 합니다. 여러 장의 사진을 찍어왔는데, 컴 이 인식을 못해 해결되는 데로 사진은 올리겠습니다.
1편 상해에서
중국이 초행길이 아니라 그다지 큰 신비감은 없었다. 그래도 이번 방문은 그전하고 그 의미가 다르기에 내심 기대를 갖고 비행기에 올랐다. 1시간 여의 거리, 특유의 중국 음식 향이 깃 든 기내식을 물리치고 잠간의 추수림과 동시에 기체는 푸동 공항에 안착하고 있었다.
금번 중국 방문의 공식행사는 연태시에서 있는 한,중 미술 교류전이다. 실상 이 전시만을 위해서 중국을 찾은 것은 아니다. 9월에 있을 상해 개인전 때문임이 더 정확하다. 그래서 난 일행과 이탈하여 후배 한 명을 대동하고 상해를 찾은 것이다.
입국자 출구에 수많은 사람들이 피켓을 들고 저마다 고정되어있다. 그런데 내 이름은 보이지 않는다.
5분여 동안의 설래임, 후배님이 내 이름이 적힌 피켓을 든 이를 대동하고 내 앞에 나타난다. 반가운 인사와 함께 그가 가져온 고급 지프차에 올라 상해 시내로 향했다.
1600만 인구의 한국물가와 비슷한 상해, 북경이 중국의 심장이라면, 중국의 허파와 같은 거대한 국제도시에 잠시나마 합류하는 것이다. 상해시내에서 9월 전시를 궁극적으로 이끌어낸 상해거주 한국인친구를 반갑게 만나 곧바로 내가 전시할 전시장으로 향했다. 전시장은 슈즈호에 위치하고 있다.
슈즈호, 뉴욕의 소호 같은 곳. 수십 명의 작가 스튜디오와 갤러리, 화랑이 집단으로 동거하고 있는 곳, 미로 같은 이곳을 거닐면서 묘한 감동이 파동 친다. 내가 전시할 반가르드 갤러리에 들어서니 관장겸 디렉터 역할을 하는 30대 중반의 어여쁜 쥔장이 반갑게 인사한다.
유창한 영어실력, 북경대, 칭화대와 더불어 상해에서 가장 좋다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은행 근무 후 미술계에 발을 디뎌놓았다고 한다. 엘리트임에는 분명하다.
전시장 구석구석을 살피며, 디카에 담았다. 차를 대접받으며, 개인전에 관한 대화 후 슈즈호의 이곳 저곳을 안내한다. 참고로 슈즈호는 미술관련 외국인이 자주 찾는 곳이라 한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현대미술의 생산지로써 많은 것을 담아내고 있었다. 수많은 스튜디오를 방문하면서 그들의 가능성을 충분히 감지할 수 있었고, 그들의 친절과 관심에 자뭇 흥분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중국현대미술을 이끄는, 그리고 작품이 수장되어 있는 거대한 창고형 화랑에서 수 억원 짜리 작품도 볼 수 있었다. 이곳의 분위기를 시간관계상 육감적으로 체득 할 수밖에 없었으나, 9월을 기약하며 다시 반가르드 갤러리로 향했다.
잠시 후 이곳 저곳에서 스튜디오 작가들이 갤러리로 몰려온다. 3회 개인전 도록 을 접한 그들은 나에 대한 관심이 지극했다. 순간 나는 다음카페에 개설된 내 작품들을 컴 을 통해 보여주었고, 이러한 보여주기는 이어서 3번씩이나 계속되었다.
저녁 우리 일행은 한 스튜디오에 초대되었다. 스튜디오쥔장의 생일 파티겸 환영파티가 열린 것이다. 그들이 손수 만들고 사온 음식을 나누며 국경을 넘은 동질의식이 20여명의 우리를 하나로 만들었고 이러한 시간은 밤 11시까지 계속되었다. 키타와 드럼, 즉석악기로 벤드를 만들고, 노래를 주고받았다. 동시대 젊은 미술인들의 호흡, 나는 그들에 대한 또 다른 코드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정치적 인식이다. 그들 작품에서 드러나는 보편적 색깔에서 강한 실존의식을 엿보았고 표현방식 또한 강렬한 인상으로다가 왔기 때문이다.
거대 국가를 규합하는 그들의 통제 방식이 이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또한 그들의 삶에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이러한 물음은 자기 고백인 솔직한 진술로 그들에게 조심스레 노크했다. 그들의 요청으로 키타를 잡은 나는 통역을 통한 전언으로 스튜디오를 고요케 만들었다.
"이 노래는 한국에서 한 미술가 출신이 만든 곡입니다. 국가에서 통제되던 노래였지요. 민중의 자유, 민주를 염원한 노래입니다. 80년 광주에서 민주를 외치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갔지요. 그 때 사랑 받던 노래입니다. 나는 이 노래를 부르려 합니다. 나는 천안문 사태를 알고 있습니다. 그때 혹여 부르던 노래가 있는지요. 아니면. 이후에라도 만들어져 불리어지는 노래가 있는지요. 있다면 답가로 그 노래를 듣고 싶습니다."
한동안 조용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긴장되었다.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않은 이들에게 실수하지 않았나 후회도 들었다. 그러나 그러한 노래가 있고, 답가로 화답해주겠단다. "그래 난 너희들의 가능성을 믿고 있다." 속으로 되세기며, 김민기의 아침이슬은 슈즈호의 밤거리에 몽롱함과 투명함이 교차되며 펴졌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