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가 임재용 씨에게 집 지을 땅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하나는 질서나 조직에 둘러싸인 도심의 주거지이고, 다른 하나는 자연에 오픈된 시골 땅이다. 이 중 어느 땅에 집을 짓는가에 따라 설계 방식은 완전히 달라진다. 서울과 일산에 지은 그의 도심주택 시리즈들. 이들과 대비를 이루는 문호리 전원주택을 통해 이 건축가의 땅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두 속성의 땅 - 전원주택, 도심주택
건축가 임재용 씨의 주택작업은 크게 두 가지로 구분된다. 바로 전원주택과 도심주택이라는 땅에 의한 구분이다. 전원주택은 풍경과 어우러져 있는 듯 없는 듯 그저 간결한 모습이고, 도심 주택은 독특하고 기하학적인 형태로 많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있는 듯 없는 듯한 전원주택
양평군 문호리의 한 전원주택. 울창한 산을 등지고 선 이 집은 마당에 잔잔한 연못을 가진 그림 같은 집이다. 유난히 아름다운 대지는 건축주가 10년에 걸쳐 조경가의 설계대로 가꾸어온 결과물이다. 그런 소중한 경관을 흩트리지 않고자 건축가는 ‘최소한의 집’을 그려넣었기로 했다.
우선 주위 풍경에서 모티프를 찾았다. 겹겹의 산세가 연못 주위로 흘러내려 평지로 바뀌는 땅이기에, 이러한 선의 흐름을 사선형의 지붕으로 이어냈다. 층고를 높인 이 경사 지붕은 바깥 풍경을 더 잘 감상할 수 있게 하고, 채광도 좋게 하는 역할을 해냈다.
그리고 전원생활에 맞게 각각의 방보다는 공용공간에 비중을 두었다. 침실을 작고 기능적으로 배치하는 대신 거실과 주방, 데크 등 다양한 공용공간을 마련한 것이다. 그게 전부다. 원래의 땅 안에서 솟아오른 듯 자연스럽고 간결한 집. 있는 듯, 없는 듯 선 그 집은 멀리서 보면 간결한 지붕선 몇 개만 느껴진다.
“시골집은 건물 주변의 풍경까지가 그 집입니다. 인공적인 무언가를 짓는 대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움을 이끌어냅니다. 펼쳐진 자연 속에 편안한 공간을 그저 세워놓는 거죠.”
호기심을 자아내는 도심주택
시골집의 경우와 달리 도심의 주택은 공간을 적극적으로 창조해야 한다. 아름다운 자연이 있는 주위 환경에 의미를 둘 수 없다면 건물 자체에 충분한 이야기를 심기 위해서다. 건축법상 많은 규제를 지녔고, 각색의 건물들에 에워싸인 도심 필지. 그곳에서 건축가는 환경에 휩쓸리는 않는 힘차고 당당한 공간을 지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과정에서 건축가의 개성과 역량이 한껏 펼쳐지는데, 임재용 소장의 키워드는 바로 ‘기하학적 형태’다. 그동안 일산에 지은 다섯 채의 주택이나 서초동 스튜디오, 우면동 스튜디오 등 각각의 도심주택이 저마다 개성있는 형태를 띠고 있다.
▲ 서초동 스튜디오의 외관. 짜임새 있는 도형적 외관이 건물의 구조와 기능을 그대로 담고 있다.
도형적이고 기하학적인 형태
원형과 사각형 매스들의 충돌과 조합, 직선과 곡선의 만남, 도형들이 만들어내는 선의 각도 등 그의 건축은 기하학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러한 기하학적 형태는 그 자체로 건물의 기능과 구조를 한눈에 보여준다. 건물에 있어 각 도형 공간의 기능이 명확히 구분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1998년에 지은 일산주택 1. 임재용 소장의 국내 첫 작품인 이 집은 파격적인 기하학적 충돌 형태로 시선을 모았다. 거대한 원통형 건물을 중심축으로 네모난 두 공간을 붙여 세운 모습. 원기둥이나 원뿔, 혹은 정육면체, 직육면체 등의 도형을 건물 외관에서 직접 바라보는 느낌은 강렬했다.
일산주택 2에서도 네모난 중심축을 찾아볼 수 있는데, 대신 축의 중간을 유리로 투명하게 해 떠 있는 느낌을 준 후 한 겹 한 겹 요소들을 덧붙여냈다. 가장 최근 작품인 일산주택 5 역시 임재용 소장의 도형적 건축언어를 느끼기 충분하다. 네모난 시멘트 덩어리를 조각도를 이용해 깎아들어간 형상이랄까? 외부와 내부 공간이 묘하게 섞여 있어 개방과 폐쇄를 오가는 구조가 매력적이다.
이 집들에서 눈길을 끄는 또 한 가지 요소는 담장 대신 세운 거대한 아치형 프레임이다. 건축법상 높은 담을 세울 수 없는 곳이기에, 50cm짜리 낮고 긴 콘크리트 시설물로 울타리 역할을 띄게 한 것. 윗면은 거대한 프레임 형태로 만들어 시각적인 흥미를 더했다.
임재용 소장이 일산에 지은 다섯 번째 주택. ▲ 낮은 울타리 역할을 하는 긴 담장이 네모난 프레임처럼 세워진 모습이 독특하다.
자기집에서 자기집을 볼 수 있는 집
대지의 성격을 읽는 것이 임재용 소장의 첫 번째 작업이라면, 두 번째는 마당의 배치다. “좋은 집은, 자기 집 안에서 그 집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마치 ㄱ자나 ㄷ자 한옥처럼 말이죠. 그러기 위해서는 외부공간이 꼭 필요하죠. 해서 마당 위치를 제일 먼저 정한 뒤 방들을 배치하는 방식으로 설계합니다.”
그가 지은 어느 집이나 예외 없이 아늑한 마당을 지니고 있다. 그 마당이 바로 집의 중심 공간. 특히 일산주택 2의 경우가 재미있는데, ‘선큰가든’이라는 이름의 지하 중정을 두고, 이를 중심으로 공간이 집중되는 구심적 구도를 지니고 있다. 하늘을 향해 수직으로 뻗어올라간 작은 중정. 사면이 통유리창들로 둘러싸인 그 마당에 서면 오직 집과 자신의 모습만 있을 뿐이다.
▲ 우면동 스튜디오의 마당에서 본 모습. 자기집안에서 자기집을 볼 수 있어야 좋은 집이라고 임재용 소장은 생각한다.
콘크리트와 나무의 풍부한 질감
재료를 쓸 때 그가 가장 염두에 두는 건,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나이들 수 있을 것인가,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느낌이 풍부해지는 소재, 구체적으로 말해서 페인트를 칠하지 않아도 되는 재료들이라 하겠다. 노출 콘크리트, 압출성형 시멘트 패널, 아연 합금판, 동판, 시멘트 블록, 적삼목 등이 그 예다. 그리고 어떤 건 외장재, 어떤 건 바닥재라는 편견을 깨고 자유롭게 시도하는 것이 그의 즐거움이다.
멀리서 보는 그의 집은 회색이다. 그 모노톤의 느낌이 가까이 다가가면 다양한 질감과 패턴으로 살아난다. 외장은 대부분 콘크리트를 쓰는데, 일반 콘크리트와 달리 개성있는 질감으로 회화적인 분위기를 낸다. 최근 완성한 우면동 스튜디오의 경우 송판을 찍어 나뭇결을 살리거나 빗살무늬를 낸 콘크리트 벽면이 무척 인상적이다. 마당에는 시멘트 블록으로 낮은 담장을 세웠다.
“담장에 사용한 블록은 축사에 주로 쓰는 그 싸구려 블록 맞아요. 하지만 이 집에서처럼 정돈된 상황에 쓰이면 느낌이 다르죠. 루이비통 매장 속에 이 벽이 있다면, 아마 백만불짜리로 보이겠죠? 주변이 같이 허접하면 축사가 되겠지만 정돈된 상황에선 대조를 이루면서 상승 작용을 일으킵니다. 이런 것이 건축가들의 힘이라고 생각해요. 무조건 비싼 걸로 발라서 좋은 건 아니라는 거죠.”
화가인 건축주의 작업실과 생활공간이 함께 있는 우면동 스튜디오. ▲ 송판을 찍어 나뭇결 패턴을 만든 콘크리트 외관이 인상적이다.
주택에서 공공영역의 확장
임재용 소장은 유난히 예술가 클라이언트들이 많다. 우면동 스튜디오나 서초동 스튜디오는 부부 중 한사람이 미술이나 음악을 하는 경우고, 헤이리 주택은 도예가의 작업실 겸 살림집이다. 이 집들은 하나같이 주거공간에 작업실이 함께 있다. 예술가의 작업실뿐 아니라 남편의 치과나 학자의 연구실, 카페, 전시장, 공연장 등 성격도 다양하다.
이처럼 주거공간에 공공영역이 확장되는 현상은 최근 건축에서 추세로 꼽힌다. 그리고 내 집이자 내 작업의 무대를 더욱 무대가 되는 공간만 만들고 끝내기보다, 사는 사람과 기능에 맞는 집을 짓고 싶은 게 임재용 소장의 바람이다.
▲ 서초동 스튜디오의 침실. 오른쪽 천장의 세모난 창틈으로 들어오는 빛이 인상적이다.
부드러움 속에 깃든 힘
건축은 다른 사람의 꿈을 나의 언어로 실현시켜주는 거라 했다. 그렇기에 가장 중대하고 어려운 점은 클라이언트와의 의견 조율이다.
“요즘 건축주들 대단하잖아요. 잡지나 인터넷은 물론 일산을 직접 둘러보며 마음에 드는 집을 선택해서 그 집의 건축가를 찾아오곤 합니다. 철저한 자료 조사로 자신과 맞는 건축가를 결정했기에 클라이언트와 취향에 대한 설득이나 조율이 필요 없습니다. 오히려 제게 더 과감한 작업을 요구해 부담스러운 적도 있었어요.”
이렇게 말하지만 이유가 그것만은 아닌 것 같다. 집 한 채를 짓고자 찾아온 사람에겐 얼마나 많은 기대와 바람이 있겠는가? 녹녹치 않은 그 걱정들을 잠재우는 건 임재용 소장과 대화하며 느끼게 되는 신뢰감 때문이다. 부드럽고 자상하게 말하지만, 그 반듯함 속에 깃든 힘이 믿음을 자아낸다. 여느 건축가에게서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장점이다.
‘비밀스럽거나 애매하지 않은, 상식적이고 일반적이며 단단한.’ 임재용 소장을 표현한 이 특성들이, 그가 어떠한 파격을 시도해도 믿음을 먼저 주는 대단한 능력으로 작용한다.
첫댓글 낙타님집 설계하신분
그러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