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성임원 날다 ① ◆
기업의 꽃 `임원`. 월급쟁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자리다. 남녀 불문하고 원하는 자리다보니 국내 대기업에서 임원까지 올라가는 여성은 흔치 않았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최초 여성 임원`이라는 타이틀이 대부분이었고 그 후 많이 늘었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대기업의 여성 임원은 손에 꼽을 정도다. 각고의 노력, 가정 밖 그리고 가정 내 편견과 싸움, 보이지 않는 유리천장 등 그들이 헤쳐온 길은 험난하기 그지없다. 매일경제는 여성들을 위한 지면 `女, 세상의 중심`을 기획하며 가장 먼저 여성 임원들의 일과 삶, 그 빛과 그늘에 대해 조명해 본다.
광화문 한 음식점에서 만난 김미형 금호아시아나그룹 부사장(45)은 검은색 가죽 재킷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청바지를 자주 입는다는 김 부사장에게서는 임원의 권위보다는 소탈한 여성성이 느껴졌다. 하지만 3시간가량 그가 풀어놓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당찬 카리스마에 압도됐다.
◆Fortune
"유독 저한테는 운이 많이 따른 것 같아요." 여성 임원이 되는 그럴싸한 비법을 기대한 기자에게 김 부사장은 `운이 좋았다`는 말부터 꺼냈다.
고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을 지칭하는 말이다. 김미형 부사장이 금호와 인연을 맺은 것은 1993년. 고문변호사이자 상무 자격이었다. 미국 로펌에 근무하다가 잠깐 한국에 들른 길에 고 박성용 금호그룹 명예회장과 만난 것이 계기가 됐다. 처음에는 1~2년 머물다가 미국으로 돌아갈 작정이었으나 일에 재미를 느끼면서 16년째 여성 임원으로 금호에 몸담고 있다. 96년엔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제가 솔직하고 직선적인 편인데 고 박 회장님과는 처음부터 대화가 잘 통했어요. 변호사 역할 외에 금호가 음악 영재들에게 대여하는 악기 구매, 비행기 구입을 위한 파이낸싱 등 너무 다양한 일을 맡겨주셨어요. 회사에만 묶어두지 않고 사회로 나가게 해주셨고 딸처럼 믿어주셨습니다."
김 부사장이 자신에게 따른 `운`이라고 표현한 또 다른 하나는 스탠퍼드대 로스쿨 졸업 후 동문인 워런 크리스토퍼 전 미국 국무장관에게 발탁돼 대형 로펌에 들어갔던 사건(?).
◆Work
임원이 되는 것, 좋은 상사를 만나 인정받는 것이 어디 운만으로 가능했겠는가.
미국 로펌에 근무할 당시 김 부사장은 `코리안 일벌레`로 이름을 날렸다. 로펌에 근무하는 변호사들은 연간 1900~2400시간 정도 일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그는 3000시간 일하는 `3000hour 클럽`에 속했다. 연간 3000시간 근무는 하루에 15시간 꼬박 일해야 나올 수 있는 수치다.
원래 완벽주의자인 데다 미국 로펌에 있을 때 철저하게 트레이닝을 받은 탓에 계약서를 볼 때 워낙 꼼꼼하게 챙기다보니 `지독하다`는 소리를 항상 듣는다.`꼭 해야 한다면 떠나간 비행기도 쫓아가서 돌려야 한다`는 좌우명을 갖고 있을 정도로 어떤 일이든 쉽게 포기 못하는 성격이다.
첫 아이를 출산하기 두 달 전까지 비행기를 타고 출장을 다녔고, 임신중독증에 걸려 출산도 예정보다 빨리했다. 뿐만 아니라 출산 후 병실에 팩스를 설치해 놓고 일을 해 주변 사람들이 혀를 내두르기도 했다.
김 부사장은 금호에 근무하면서 가장 보람 있었던 일로 지난해 열린 뉴욕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평양 공연을 꼽았다.
김 부사장은 미 국무부, 뉴욕필과 손발을 맞추며 무료 전세기 제공, 초고가 악기 운반 등 곳곳에 산적한 난제들을 척척 풀어냈다. 역사적인 뉴욕필 평양 공연의 숨은 주역이었던 셈이다.
◆Woman
"저는 일할 때 파트너가 여성인지 남성인지 별로 인식하지 않아요. 상대방이 능력이 있나 없나를 따지죠. 여성이라고 주눅 들 필요도 없고 튈 필요도 없고, 그저 능력을 발휘하는 게 최선이죠."
그는 여성들이 성장하려면 혼자 승진하려고 발버둥치기보다는 서로 도와주며 같이 커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여 갈등이야말로 조직생활을 하는 여성들이 가장 지양해야 할 문제라는 게 그의 지적이다.
그는 "정부가 전체인구 중 일하지 않는 절반(여성)의 노동력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을 안 쓰는 것 같다"면서 "사회 진출의 가장 큰 걸림돌인 육아문제를 정부가 책임지는 시스템을 빨리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Davos Forum
김 부사장은 한 기업의 임원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다보스가 사랑하는 국제 스타다. 2004년 세계경제포럼(WEF)에서 `차세대 아시아 지도자`로 선정됐고 이듬해에는 40세 이하 인재들 중에 선발하는 `2005 영 글로벌 리더`로도 뽑혔다.
그는 5년 전부터 매년 1월이면 눈 덮인 스위스 산골마을 다보스에 간다. 이유를 묻자 "공부하고 싶어서"라는 답이 돌아왔다. 기업 임원이지만 그의 관심사는 기술 쪽이다. 미래기술이 삶을 어떻게 바꿔놓을지에 대한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김 부사장은 "어릴 때는 그저 하루를 어떻게 재미있게 보낼까를 고민했는데 나이가 드니까 세상에 무엇을 남기고 갈까를 자주 생각하게 된다"며 "자식 세대에게 지금보다 더 좋은 환경을 남겨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최근 들어 부쩍 환경 쪽에 관심이 많아졌다"고 말했다.
◆ 가족도 소중하죠…세계은행 제의받고 석달 고민하다 사양
= 김 부사장은 열 살, 일곱 살 두 딸의 엄마다. 아이들 때문에 행복해하고 속상해하는 것은 여느 워킹맘과 다를 바 없다.
그런 김 부사장이 지난해 6월부터 3개월간 `일이냐 가족이냐`를 놓고 심각한 갈등에 빠져 있었다. 세계은행(The World Bank)으로부터 법률담당 부사장 제의를 받았기 때문이다. 스페인 전 외무장관, 칠레 총리 등 막강 여성들이 거쳐간 자리라 탐이 났지만 워싱턴본부로 갈 경우 지금 홍콩에 머물고 있는 가족과 자주 만날 수 없어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속이 쓰렸지만 또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결혼 전에는 일에 100% 몰입했는데 지금은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시간을 쪼개야 하니 힘들죠. 아이들 준비물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하거나 필요로 할 때 함께 있어주지 못하면 죄책감을 느끼기도 해요. 그래서 가끔은 내게도 와이프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안타까워 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을 정리하고 나니까 편해졌다. 아이들이 학교에 있는 시간은 아무래도 신경이 덜 가다보니 집중력을 발휘해 힘든 일을 해둔다. 아이들이 집에 올 시간에는 전화로라도 꼭 엄마의 존재를 느끼도록 한다.
그는 특별한 교육철학은 없지만 과거 부모님들이 했던 대로 아이들을 교육하고 있다고 했다. "아버지는 늘 세상에 빚을 남기지 말라고 강조하셨지요. 저도 틈날 때마다 세계지도를 펴놓고 아이들에게 글로벌 시민으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가르칩니다."
■ She is…
1964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미국 웨슬리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스탠퍼드대학 로스쿨을 졸업했다. 우루과이, 노르웨이 대사를 지낸 김병연 씨가 부친이며 한ㆍ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주역인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이 큰오빠다. 외국생활을 많이 했기 때문에 영어, 일어, 불어, 스페인어, 한국어 등 5개 언어가 가능하다.
가장 친한 벗은 김성주 성주그룹 회장이다. 성격이 극과 극인데도 둘이 만나면 궁합이 척척 맞다고 한다.
[심윤희 기자 / 사진 = 이승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