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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함이 사라지다 1
"자, 오늘은 이만 하고 내려가세."
지함은 이야기를 마치고 산방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박지화에게 화담 산방을 다시 열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선에 우리 산방 같은 곳이 한 군데쯤은 있어야합니다.
그래야 이 나라의 장래를 예비할 수있습니다."
"그러나, 내 학문이 짧은데 어떻게 학인들을가르치겠는가?
자네가 해야 하네."
"형님, 저는 행(行)이 부족합니다."
박지화는 극구 사양했으나 결국 그러마고 약속했다.
"그게 선생님의 뜻을 기리는 일입니다."
"그러면 자네는?"
"저는 따로 할 일이 좀 있습니다."
박지화는 산방을 다시 열었다.
화담 서경덕의 명성이 남아 있어서인지
학인들이 다시 모여들기 시작했다.
며칠 뒤 산방으로 지함을 찾아온 손님이 있었다.
다름 아닌 황진이였다.
황진이는 예전의 화려함과 아름다움을
되찾은모습이었다.
"이 선비님, 무사히 돌아오셨다는 말을
이곳학인들에게서 전해 들었습니다.
다행입니다."
산방의 학인들이 모두 눈이 휘둥그레져서
두 사람의모습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다.
황진이는 지함에게 예를 갖춘 뒤
화담의 산소로가서 절을 했다.
두 사람이 산방에 들어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가마 한 채가 산방으로 급히 들어왔다.
가마꾼들은황진이를 찾았다.
송도 유수가 보낸 가마였다.
"요즈음 시벗이 한 분 생겼답니다.
이 선비님, 다시오겠습니다."
황진이는 송도 유수가 보낸 가마에 올라
산방을내려갔다.
학인들은 구경거리가 너무 쉽게 없어져섭섭해 했으나
지함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이었다.
황진이가 산방을 떠난 지 두어 경이 지났을까,
가마한 채가 다시 산방으로 올라왔다.
가마꾼들 뒤로 관원두명이 따라와 지함을 찾았다.
그들은 지함을 보더니정중하게 예를 올리고는
송도 유수의 전갈을 알렸다.
"유수께서 선생을 뵙자고 하십니다.
지금 놀잇배에계십니다.
그리고 박지화 선생님도
함께 모시고오라고 하셨습니다."
지함이 의아하여 그들에게 물었다.
"도대체 송도 유수가 뉘길래 나를 부른단 말이오?"
"부르는 게 아니고 정중히 모셔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유수님의 호는 면앙정, 함자는 송자순자입니다."
"면앙정 송순? 아, 그분이...
알았네. 내 형님께말씀드리지."
지함은 박지화에게 그 말을 전했다.
박지화도반기는 기색이었다.
두 사람은 가마에 나누어 타고
면앙정이 화류를즐기고 있다는 박연폭포로 갔다."어서 오시오."
두 사람이 오는 것을 멀리서 알아본 송순이소리쳤다.
송순의 옆에는 황진이가 앉아서
가야금을뜯고 있었다.
"어서 오시오.
황진이한테서
그대들이 산방에있다는 소식을 들었소.
이렇게 다시 만나게 되다니매우 반갑소."
지함이 박지화와 함께 화담을 모시고
전국을 주유할 때
전라도 담양에서 만났던 바로 그 송순이었다.
그들이 면앙정을 다녀간 뒤,
송순은 조정의 부름을받았다.
북경으로 가는 진문사로 뽑혔던 것이다.
명을 다녀온 송순은 궐내 옥당에서 일했다.
그러던어느 날
명종과 맞닥뜨리는 좋은 기회가 찾아왔다.
바로 지난 가을이었다.
명종이 화분 하나를
송순 등여러 신하가 일하고 있는
옥당으로 보내왔다.
그러자송순이 이에 답하여
당장에 시를 지어 바쳤다.
풍상이 섯거친 날의
갓 ㅍ온 황국화를
금분에 가득 담아
옥당에 보내오니
도리야 곶이온 양 마라
님의 을 알괘라.
송순은 일약 이 시조 한 수로 명종의 총애를 받는
몸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송순은 명종의 신임을두텁게 받았고
벼슬길도 순조로워졌던 것이다.
"자, 한 순배씩 돌립시다. 하하하."
송순은 술병을 집어들어 두 사람에게 따라주었다.
박지화와 지함은 술잔을 받아 마셨다.
"역시 면앙정을 나오신 게 잘 하신 거였군요."
박지화가 술잔을 비우면서 말했다.
"그럼, 그럼.
그래서 이렇게 천하절색도 만나게되었으니
늙은이 말년 운수가 활짝 핀 것이라우."
"그러믄요. 회춘하시고 벼슬 오르시니
남부러울 게뭐 있겠어요?"
황진이가 송순의 수염을 쓸어올리면서 말했다.
지함은 그런 황진이를 바라보면서 술을 마셨다.
"그런데 이 선비는 왜 한 말씀도 없으시오?"
지함은 잘 차려진 잔칫상을 보면서
굶주린 백성들의부실한 밥상을 생각하고 있었다.
송순과 함께
호탕한웃음을 마음껏 웃어제끼는 관리들을 보면서는
임꺽정과 정해량을 생각했다.
송순의 옆에 앉아서교태스런 웃음을 흘리고 있는
황진이를 보면서는
박수 두무지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지함의 머리는 온갖 상념으로 얽혀들었다.
이 나라 백성은 누가 구할 것인가.
임꺽정 같은도적인가?
아니면 세상 물정 모르는 왕인가?
아니면 시절 모르고 무사안일하게만 지내는
관리들인가?
지함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송순이 그걸 보고지함을 나무랐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고 있는가?
잔치에 왔으면흥겹게 놀아주시게."
그러자 지함이 정색을 하고 송순에게 대답했다.
"지척에 임꺽정이라는 도적이 준동하고 있습니다.
장차 큰 도적떼로 자랄 것이니
유수께서는 미리방비를 하십시오.
때가 좋지 않습니다."
"으음. 자네다운 소리로군."
"농담이 아닙니다."
"그까짓 도적 몇 놈이 준동한다고
무슨 일이나겠는가?
나는 여기서 한두 해 있으면
다시 조정으로돌아가게 될 것이고."
"유수님, 유수님은 기미년이 되면
틀림없이 송도유수로 다시 오시게 됩니다.
그때는 사정이달라집니다."
"이보게. 내 나이가 몇인데
그때 가서 또송도유수를 한다고 그러나?
설사 그런다 한들 유수 한사람이
무슨 일을 크게 하겠는가?
자, 그런 걱정은그만두고 술이나 마시세."
마침 회갑연을 맞은 송순의 대부인을 위한 잔치가
벌어지고 있는 중이었다.
한양에서 온 묘기와 가희가 다 모여 있는 가운데
황진이가 송순 곁에서 시중을들고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오늘은 이 늙은이를 용서하게.
그동안고생만 해온 내 마누라에게
자리 한번 마련해주는것일세. 하하하."
좌중이 떠들썩하더니 황진이가 일어서서
옷자락을여미고는 술 한잔을 쪼르륵 마셨다.
그러고는 노래를불렀다.
유유히 흐르는 강물 소리를 따라 흐르는 노랫소리에
하객들은 넋을 잃었다.
높고 낮음은 물결이 치는듯했고,
맑고 부드러움은 불빛보다 더 했다.
"유수님, 나중에 후회하지 마십시오!"
지함은 자리에서 일어나 산방으로 돌아갔다.
송순이뒤에서 몇 차례 불렀으나
지함은 뒤도 돌아다보지않았다.
산방에는 지함을 기다리는 손님이 있었다.
"접니다. 기억하실는지..."
"어서 오게."
북창의 아우 정작이었다.
정작의 나이 벌써 스무살, 어른티가 제법 났다.
"많이 성숙하였구먼. 그런데 웬일인가?"
"웬일이라니요?
선비님께서 몇 해 더 있다가 오라고하셨잖습니까?"
"허허허. 그랬던가?
그렇지만 선생님은 이미선화하셨으니 안됐네그려."
"화담 선생께서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맞군요.
박복한 인연을 탓할 수밖에요.
화담 산방 소식은 이미한양에서 듣고 있었습니다."
"지금 산방을 맡으신 분도 훌륭하신 분이니
입실토록 하게."
"예."
정작이 산방에 입실하고 나자,
산방은 예전처럼활기를 띠었다.
박지화와 지함이 번갈아가면서
학인들을 지도하였다.
학인들이 늘어나 정휴, 전우치,남궁두, 정작 말고도
다섯 명이 더 있었다.
화담 산방이 문을 연 지 사 년째 되던 병진년(丙辰年, 1556),
여름이 다 가던 어느날,
구월산에서 사람이 찾아와 지함을 만나고 돌아갔다.
그런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함은 전우치를 따로불러
뭔가 은밀히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날로 전우치는 산방을 떠났다.
지함은 정휴와 남궁두 등 산방 학인들에게
전우치를구월산으로 보냈다는 말을 전했다.
그런 다음, 지함도행장을 꾸렸다.
'볼 일이 있어 떠나겠네."
"무슨 일이십니까?"
정휴가 놀라서 물었다.
"이로써 내 보림(保任)이 끝났네. 이제 할 일이있네."
"무슨 말씀이십니까?
지금껏 잠룡(潛龍)으로 계셨던것입니까?"
"이제 내가 나설 때가 된 것이네.
이 땅에 태어나 목숨을 부치는 사람들이
제 운명을 스스로 감정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밝혀주는 책을 지을것이네."
"운명을 밝히는 책을 쓰시겠다구요?"
"그렇다네.
그러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팔도 주유를해야 한다네."
"저희도 데리고 가주십시오."
"아닐세. 이 일은 나 혼자라야 제대로 할 수있다네.
내가 내 눈으로 보고 기록해야 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네.
전국 팔도의 지리, 물산, 인물, 천문,풍수 등을
차근차근 관찰해야 하네.
저번에 팔도를주유했다고는 하나
선생님이 가르쳐 주신 것만보았지,
내 눈으로 본 것이 아닐세
내 공부가 끝나거든 자네들에게도 가르쳐줌세.
내가 다녀오는동안
자네들은 산방에서 공부를 하고 있게나.
정휴,자네는 절로 들어가거나
아니면 이곳에서 지화 형님을도와드리게."
"여기 머물겠습니다."
"그러시게
"송악사에 적을 두고 산방 일을 도와주면 좋겠네."
"그러지요."
서운해 하는 정휴를 남겨 두고
지함은 홀연히 화담산방을 떠나갔다.
전우치는 구월산으로 향했다.
황해도 구월산 산적 임꺽정
그는 도적의우두머리로서
만족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왕조를무너뜨릴 야망을 갖고
도적의 무리를 강력한 군대로키워나가고 있었다.
임꺽정의 군사는 기왕의 산적 말고도
군적에서도망쳐 나온 군사를 비롯하여
탐관오리에 쫓겨 고향을도망쳐 온 농민,
그리고 큰 전염병 끝에 해먹을 일이없어
여기저기 떠돌던 유민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구월산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운기(雲氣)가점점뚜렷하게 하늘에 퍼져 있는 것이 보였다.
산적들의사기가 매우 충천해 있었던 것이다.
전우치는 구월산이 바라보이는 곳에서
사방을둘러보며 망기(望氣)를 했다.
임꺽정 군대의 기를살펴
몸을 의탁할지, 의탁한다면 어떻게 의탁할지를
스스로 결정하라는 지함의 지시가 있었던 것이다.
지함은 구월산으로 떠나는 전우치에게
이렇게일렀었다.
"내가 기론을 말하였으니
자네는 능히 군사를움직일 수 있을 것일세."
"기를 병법에 어떻게 쓰리까?"
"사기(士氣)를 다스리는 게 군사(軍師)가 할일이네.
적의 기가 발흥하고 감퇴하는 시기를간파해서 잘 대처하면
백전백승할 수 있다네.
격기, 이기, 여기, 단기, 연기의
다섯 가지 방법으로다스리게."
"어떻게 다스립니까?"
"군사를 통합하여 병력을 집결시킬 때에는
사기를격발시키도록 해야 하네.
싸움터로 나설 때에는
사기를 날카롭게 해야 하네.
적진을 마주해서는
사기를 북돋워
군사 스스로 떨쳐일어나도록 해야하네.
싸울 날이 정해진 때에는 결단을 하는 기를 높여야 하네.
마침내 싸움이 시작되면
사기를지속시키는 데에 힘써야 한다네."
"장수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그때마다 기를 올바로 잡아야 하네.
장수 한사람의 기가 제대로 잡히면
그 기가 군사들에게 두루확산돼
의심하는 사람이 없어지게 되네.
그렇게 되어야 적과 싸워 이길 수가 있는 것이라네."
"장수나 병졸은 어떻게 골라야 합니까?"
"제왕의 기는 안쪽은 붉고 바깥쪽은 황색일세.
그러므로 천자가 행차할 때에는
수십 리 떨어진곳에서도 알 수 있다고 하네.
그리고 현인의 기는
오색을 고루 갖추고 사방으로 넓게 퍼지네.
장수의기는 살기로 뻗친다네.
마치 불꽃이 일거나 연기가피어오르는 것 같다네.
병졸의 기에는 승군의 기가있고, 패군의 기가 있네.
운기가 하늘까지 닿아있거나
불꽃처럼 서리면 승군의 기요,
말라서 흩어진것 같고
불꺼진 재 같으면 패군의 기로 보네."
"적의 기를 한꺼번에 볼 수는 없습니까?"
"그게 망기(望氣) 아닌가?"
"그런 병법은 처음 듣는 말입니다."
"신비롭게 전해오는 병법이네만,
이것이야말로병법의 극치라네.
그래서 전쟁이 나면 장수는 반드시
음양가(陰陽家)를 거느리고 다닌다네.
음양가로는천문에 능한 자 세 명,
지리에 능한 자 세 명 해서
여섯 명을 두네."
"그들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원래 망기를 잘 하는 사람은 머리 위로는 수백 리,
거리로는 이천 리, 내려다보는 쪽으로는
삼천 리에걸쳐 서려 있는 기를 본다고 하네."
기의 모습을 어떻게 분별합니까?"
"운기(雲氣)가 짐승의 형상을 하면
그 아래에 있는군대가 이긴다고 하네.
운기란 나라에 부역이 있으면백색을 띠고
토목 사업이 있으면 황색을 띠네.
또운기가 서로 만날 때에는
낮은 것이 높은 것에이기고,
날카로운 것은 네모난 것에 이기네.
운기가 움직여서 색깔이 청백색이 되는 것은,
그밑의 장군은 날쌔고 사납지만
부하 병졸은 비겁하다는것일세.
그리고 운기의 뿌리가 크고
앞쪽으로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아군과 적군의 사상자가 서로 맞먹을것이라는 조짐이네.
또한 운기가 청백색이면서 앞이 낮은 것은
싸워서이기며,
앞이 빨갛고 높게 되어 있는 것은
전투에서 패할 것임을 알려 주는 것이네."
"그같이 알면 백전 백승할 것입니다.
그러나 천지인 삼재를 고루 다스리는 일을
인간이 어떻게 다 할 수있습니까?"
"그래서 어려운 것이라네.
그렇게 알고도 안 되는게 인사(人事)라네."
"무슨 뜻인지요?"
"임술년이 되면 하늘이 임꺽정을 칠 걸세.
신유년에는 산채를 떠나게.
어차피 칼로써 백성을구제할 수는 없는 것이라네."
"그렇게 패배가 뻔한 싸움에 왜 저를 보내십니까?"
"하늘의 일에는 지고 이기는 게 없다네."
"그렇다면 왜 죽는 사람이 생기고
다치는 사람이나옵니까?"
"다 제 업이라네."
"선생님!"
"사람이 살다 간 자리에는 그 사람이 남긴 자취만남네.
하늘로 가지고 갈 것은 그것뿐이라네.
몸뚱아리는 필요가 없으니까 땅에다 묻어두고
혼만올라가는 것이지.
그게 무슨 뜻인지 알겠는가?"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게.
자네는 죽을 때가 아직멀었으니.
다만 망기를 소홀히 하지 말고
반드시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아서
스스로 처신토록하게."
지함은 그렇게 말하면서 전우치를 밀었었다.
첫댓글 오늘도 즐독하였습니다 ~ 감사합니다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