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이 '영어 상용 도시'가 된다고 한다. 이제 우리나라 사람은 영어를 못 해서 부산 놀러갈 일이 없을 것이고, 서양인들은 부산이 영어 상용 도시라고 해서 더 찾아올 일은 없을 테니 부산은 앞으로 지금보다 좀 더 조용하고 살기 좋은 도시가 될 듯하다. 그런데 기후 문제 때문에 부산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소멸될 대도시라던데, 영어 상용 도시가 되면 그 문제가 극복되나?
1446년 10월 9일 ‘훈민정음’이 반포되었다. 1957년 10월 9일 한글학회가 전 6권의 <우리말 큰사전>을 30년 만에 완간했다. 2022년 10월 9일 한국인 다수는 한글에 전혀 무관심한 채로 공휴일을 즐기고 있다.
이범선 소설 <피해자>의 한 작중인물은 일요일을 여러 형태로 재치있게 분류했다. 그에 따르면 일요일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에게는 주일, 한 주간의 피로를 풀기 위해 쉬는 사람에게는 휴일, 아무 의미도 부여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공일이 된다. 그냥 일요일은 관념상으로만 존재할 뿐 실재하지는 않는다.
마찬가지로, 같은 대한민국 국민이지만 누군가에는 10월 9일이 한글날이고, 다른 누군가에는 휴일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자신의 영업장이나 소규모 일터에서 변함없이 노동을 하는 평일일 뿐이다. 국민 모두에게 10월 9일이 한글날이 되도록 만들어내는 것이 정치가들의 소임이고, 그들을 추동하는 것이 국민의 의무인데, 우리나라는 정치꾼들은 물론 국민들조차도 그러한 본질적 과제에 대해서는 전혀 무관심하고 또 무지한 듯 여겨진다.
‘훈민정음’은 우리나라가 자랑하는 국보이다. 그냥 국보가 아니라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이다. 유네스코가 문맹 퇴치에 힘쓴 사람이나 단체에게 상을 주면서 ‘세종대왕 문맹 퇴치 상’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영국 옥스퍼드 대학이 세계 모든 문자들을 대상으로 합리성, 과학성, 독창성 등을 기준으로 순위를 매겼을 때 한글이 1위를 차지한 것도 우연이 아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스스로는 한글의 우수성을 자각하지 못하고 문화적 사대주의에 매몰되어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이 모양이 될 줄 알았더라도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하셨을까 싶은 의문이 일어날 지경이다. 2022년 한글학회의 성명서를 읽어본다.
<부산시는 영어 문화권 종속화를 즉각 중단하라>
부산시와 부산시교육청이 추진하고 있는 ‘영어 상용도시’ 정책에 대해 적극 반대하며, 우리나라 제2의 도시이자 최대의 항구도시를 영어권 문화에 예속되지 않은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도시, 세계에서 빛나는 국제도시로 발전할 수 있도록 힘써 줄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1. 부산시장과 부산시교육청장은 부산시를 영어 상용도시로 만들겠다는 부끄러운 짓을 당장 그만두기 바란다. 박형준 부산시장은 부산시민이라면 누구나 영어를 상용할 수 있는 영어 친화 환경을 조성하겠다며, 이에 필요한 여러 관련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하였다. 부산시는 이미 광안대교를 다이아몬드 브릿지로, 달맞이길을 문탠로드로 바꾸어 부르는 등 공공시설물 이름을 영어로 짓고, 센텀시티, 마린시티, 에코델타시티, 그린시티 등 지역 이름에마저도 영어를 마구 붙이는 등 우리나라 제2의 도시답지 않게 외국어를 남용하여, 부산시민은 물론 온 국민에게 깊은 문화적 열등감과 상실감을 심어 주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어 상용도시’를 표방하며 갖가지 정책과 행정 용어에서도 영어 사용이 늘어날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니, 자칫 영어권 문화 식민지로 전락할지도 모르는 부산시의 앞날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2. 대한민국 정부는 부산시가 영어에 강점당하는 것을 적극 막아주기 바란다. 영어 소통 환경 조성을 지역사회 발전의 첫째 조건으로 꼽는 것은 우리 말과 글을 얕잡아 보는 사대주의적 풍조의 확산을 부추길 뿐, 시민의 행복한 삶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 오히려 영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되는 시민들에게 영어 사용 환경을 조성하여 영어를 강요하는 것은 생활의 불편만 초래할 뿐이다. 인공지능 기반의 통번역 기술이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시대이니, 영어가 필요한 곳이 있다면 필요로 하는 곳에서 얼마든지 소통이 가능하다. 그럼에도 강대국의 언어를 우월한 위치에 올려두고 스스로 우러르는 것은 식민 근성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말이 일본어에 ‘국어’의 자리를 빼앗긴 채 ‘국어 상용 정책’에 억눌려 살았던 일제강점기 우리 국민의 불행한 역사가 21세기 대한민국 제2의 도시에서 ‘영어 상용 정책’으로 다시 반복되는 비극을 두고 볼 수만은 없다. 우리 정부가 나서서 부산시의 영어 문화권 종속화를 적극 막아야 한다.
3. 부산시민은 우리말 우리글을 지켜낸 자랑스러운 향토사의 주인공이다. 올해 10월 1일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우리 말글 독립운동이었던 ‘조선어학회 사건’ 80돌이 되는 날이다. 부산시와 울산시를 아우른 경남 지역은 당시 수난을 겪은 조선어학회 선열을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으로 꼽힌다. 일제에 당당히 맞서 목숨을 걸고 우리 말글을 지키고 겨레의 자존심을 지켜낸 자랑스러운 역사를 가진 부산시민은 줏대 없는 영어 문화권 종속 정책을 외면하게 될 것이며, 이에 따라 부산시가 꿈꾸는 ‘영어 상용도시’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정책 실패가 초래할 막대한 예산 낭비를 막기 위해, 부산시민은 한마음으로 부산시장의 망상을 깨트리는 데에 힘을 모아주기 바란다. 2022년 9월 1일 한글학회
10월 9일, 다이아몬드 브릿지에는 누가 놀러가나? 그날이 평일이기 때문에 개인 영업장이나 소규모 일터에서 노동하는 가난한 국민과는 무관한 일이다. 다이아몬드 브릿지는 미국이나 영국에 있는 ‘그림의 떡’일 따름이다. 아, 큰 실수를 했다. 촌스럽게 ‘그림의 떡’이 뭔가! Pie in the sky!
이 글은 현진건학교가 펴내는 월간 '빼앗긴 고향'에 수록하기 위해 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투고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