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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의 아포리아
"나는 거기 없었다"
라울 힐베르크(Raul Hilberg)의 대작 <홀로코스트-유럽 유대인의 파괴(The Destruction of the European Jews)>는 홀로코스트에 관한 탁울한 종합연구서이다. 1961년 초판이 출간된 이래 두어 차례의 수정 증보판을 내면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홀로코스트 연구의 정전처럼 군림하고 있다. 김학이 교수가 공들여 번역한 한국어판을 비롯해 모두 9개국 언어로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 이 책은 힐베르크가 서가 길이만 무려 8킬로미터에 달하는 나치 관련 문서들을 읽고 집대성한 것이다. 나치의 정부 조직, 독일 군대의 편제와 명령 체계, 친위대와 제국 보안청만이 아니라 폴란드 총독부를 비롯해 모든 점령지역의 명령 체계 등을 정리한 정밀한 도표들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방대한 분량의 자료들을 폭넓고 엄밀하게 분석하여 읽는 사람들을 압도한다. 앞으로도 이를 능가하는 저작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한마디로 라울 힐베르크는 홀로코스트 실증 연구의 대가이다. 그런 그가 노년에 엉뚱한 글을 한 편 썼다. <나는 거기 없었다(I was not there)>라는 에세이다. 이 흥미로운 제목의 에세이에서 힐베르크는 뜻밖의 통렬한 질문을 던진다. "아우슈비츠 이후에 각주를 단다면 그것도 똑같이 야만적인 일이 아닌가?" 이 질문은 분명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시가 가능한가"라는 아도르노의 질문을 패러디한 것이다. 아도르노가 시로 아우슈비츠의 문학적 재현을 문제 삼았다면, 힐베르크는 실제 경험 없이 문헌 자료에만 의지해 아우슈비츠를 재현해온 자신의 연구에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힐베르크의 질문은 홀로코스트 연구가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를 한마디로 함축하고 있다는 점에서 역시 그가 탁월한 역사가임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홀로코스트-유럽 유대인의 파괴> 초판이 나온 1961년에는 공교롭게도 이스라엘에서 아돌프 아이히만(Adolf Eichmann) 재판이 열렸다. 재판을 지켜본 연구자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에 주목했고, 이를 계기로 홀로코스트 연구는 문서 자료에서 생존자들의 증언으로 서서히 중심이 이동하기 시작했다. 사실, 증인으로 소환된 생존자들은 나치의 범죄 행위를 입증하기보다는 자신들의 고통을 전달하기 위해 애썼다. 이들의 증언은 목소리에 한정되지 않았다. 다양한 표정과 제스처는 그 시각적 효과로 인해 증언에 생생함을 더했다.
재판 당시 할리우드의 전설적인 촬영감독 레오 후르비츠(Leo Hurwitz)가 지휘하는 촬영팀은 법정 곳곳에 카메라를 몰래 설치하여 전 세계에 재판을 생중계했다. 이제 머지않아 역사를 시간적으로 재현하는 문제가 논란이 될 터였다. TV 생중계 덕에 아이히만 재판은 과거의 역사를 재현하는 데 시각적 재현이 문자적 재현과는 비할 수 없이 효과적이라는 교훈을 남겼다. 그리고 이 교훈은 1970년대 들어 영화나 드라마, 사진, 카툰 같은 대중매체가 역사 서술의 주요한 양식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실증주의와 홀로코스트
역사 인식론의 관점에서 볼 때, 힐베르크의 에세이는 더 중요한 물음을 던졌다. 특정한 역사 사건에 관한 공식 문서 기록과 그 사건을 직접 경험한 증인들의 목소리 가운데 어느쪽이 더 역사적 진정성을 갖느냐는 질문이 그것이다. 특히 생존자 예히엘 니누어(Yehiel De-Nur)가 증언 도중 쓰러져 의식을 잃고 들것에 실려 나가는 광경이 그대로 방영되면서, 사람들은 비극적인 주인공에게 더 크게 공감했다. 재판이 한 편의 드라마처럼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비극의 주인공들의 등장은 재판에 대한 국제 여론을 바꾸어 놓았다. 나치의 범죄 행위는 인류에 대한 범죄이므로 이스라엘 법정이 아닌 국제 법정에서 아히히만을 재판해야 한다는,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나 마틴 부버(Martin Buber)의 비판적이 목소리가 심금을 울리는 증인들의 영상에 묻혀버렸다. 사실 아이히만의 유죄를 입증하는 데는 문서자료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이스라엘 검사 기드온 하우스너(Gideon Hausner)가 인터뷰를 거쳐 증인을 선별하고, 이들을 법정에 세운 이유는 TV를 통해 재판을 지켜보는 시청자들의 감정에 호소하기 위해서였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제 재판의 주인공은 아이히만이 아니었다.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가슴속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들을 끄집어 내기 시작한 증인들이 관객의 시선을 끌기 시작했다. 기억의 관점에서 본다면, 아이히만 재판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을 증언에 대한 두려움에서 해방시켰다는 데 의의가 있다. 아무도 자신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갖지 않거나 믿어주지 않을 것이라는 두려움 말이다. 이 재판으로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말문이 트였다. 홀로코스트 희생자나 생존자라는 사실은 이제 숨기거나 창비해야 할 문제가 아니었다. 더 나아가 그들은 존경과 경외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는 훗날 역사 연구에 '감정의 전회(emotional turn)'라는 패러다임적 전환을 가져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감정의 전회는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의 증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실증주의적 방법론에 회의를 품고 이를 성찰하는 데서 출발했다. 문서만이 과거를 입증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라는 실증주의의 폭력에서 증인들을 보호할 장치들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 그 밑에 깔려 있었다. 실증주의도 이데올로기다. 기억 전쟁에서 실증주의는 특히 '아래로부터의 기억이란 과장되고 부정확하며, 정치적으로 왜곡되었거나 심지어 조작된 것'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자주 소환되는 이데올로기인 것이다. 힘있는 가해자가 관련 문서와 역사적 서사를 독점한 상황에서 힘없는 희생자들이 가진 것은 대개 경험과 목소리, 즉 기억과 증언뿐이다. 그런데 증언은 불완전하고 감정적이며 때로는 부정확하다. 그러므로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힘없는 자들의 풀뿌리 기억은 실증주의라는 전선에서는 문서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할 수밖에 없다. 실증주의로 무장한 부정론자들이 증인을 취조하듯이 압박하고 증언과 증언 사이의 모순을 끄집어내 증언의 역사적 가치에 흠집을 내려는 시도가 잦은 것도 이 때문이다. '거짓말', '혐오스러운 조작', '진실의 왜곡', '사실의 날조', '전적으로 날조에 의존한 싸구려 픽션', '각주가 있는 소설', '수백 가지의 거짓말' 같은 언어폭력이 역사적 비극의 생존자-증인들에게 가해지고, 이는 '실증'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된다.
부정의 실증주의
부정론에 실증주의를 가장 먼저 활용한 것은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이었다. 나치가 홀로코스트를 실행했다면 아돌프 히틀러의 명령이 담긴 문서가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그런 문서는 한 통도 발견되지 않았다는 식이다. 명령서가 하늘에서 툭 떨어지지 않는 한 홀로코스트 부정론자들에게는 모든 생존자의 증언이 꾸며낸 이야기가 된다. 아시아-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사람들의 논리도 유사하다. 국가나 군이 '위안부' 제도에 관여했다고 증명할 문서 기록이 없으므로 일본군 '위안부'는 사실이 아니라며 피해자들의 증언을 모두 위증으로 몰고 간다. 특히 '위안부' 부정론자 중 한 사람인 후지오카 노부가쓰는 "일본군이 강제로 조선 여성을 연행했다면, 명령서가 반드시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서는 한 통도 발견되지 않았다"라며 일본군 '위안부'에 대한 역사적 논의를 느닷없이 강제 연행으로 제한해버리고는, 강제 연행을 지시한 군의 공식 문서가 없으니 피해자들의 증언은 거짓이라고 몰아붙인다. '일본군에 의한 조직적 성폭력'이라는 '위안부' 문제의 본질을 흐리는 전략으로 실증주의를 활용하고 있는 것이다. 후지오카는 '위안부' 피해자들이 특정 시간과 장소를 기억하지 못하고 문서 자료로 확증할 수 없으니 그들의 증언은 '사실'이 아니라고 한다. 이뿐만 아니다. "저 할머니들이 정말로 위안부였다고 보증할 만한 것이 어디에 있는가?"라고 반문하기까지 한다. 사실 부정론자들에게 '증거'(=문서)의 존재 유무는 중요하지 않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증거' 그 자체가 아니라 '증거의 정치'인 것이다.
부정론자들은 실증주의를 자신의 주장을 입증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사용한다. 즉, 문서가 아니라 기억에 토대한 상대방의 증언이 지닌 허점을 파고들어 기억의 진정성에 타격을 입히기 위해 사용한다. 음모론이 횡행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위안부' 피해자들의 증언이 '돈'을 노린 거짓이며, 그 배후에는 일본국의 명예를 실추시키려는 '국내외의 반일 세력'이 있다는 식이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음모론을 실증하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는다. 이들의 실증주의는 사실을 확인하기보다는 증언의 진정성을 깎아내리는 데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이때 실증주의는 사실과 상관이 없다.
'부정의 실증주의'는 홀로코스트나 일본군 '위안부' 부정론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잘 알려진 난징대학살이나 아시아-태평양전쟁 말기인 1945년 일본군 점령하 베트남에서 일어난 대기근에 관한 부정론도 이 부류에 속한다. 종전 직후인 1945년 9월 2일 호치민은 <베트남민주공화국 독립선언>에서 처음으로 200만 명 아사설을 제기했다. 200만 명은 당시 베트남 전체 인구의 15%에 달할 만큼 엄청난 수치이다. 문제는 이 대기근에 관한 문헌 자료가 거의 없어 증언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데 있다. 더구나 이 사건에 대한 기억은 베트남에서조차 민족해방투쟁의 영웅주의적 기억에 묻혀 오랫동안 말할 수 없는 기억으로 억압되었다. 일본은 이 역시 실증주의를 내세워 '믿기 어렵다'고 공식적으로 부인한다. 부정의 실증주의는 결국 대기근에 관한 베트남 희생자들의 기억을 부정하고 일본의 책임을 모호하게 만들었다. 기억에 대한 '사실'의 폭력인 것이다.
홀로코스트를 둘러싼 기억 전쟁
"예드바브네의 유대인 학살(Jedwabne pogrom)'에 대한 폴란드인 이웃들의 책임을 부정하는 논리에서도 '부정의 실증주의'는 어김없이 발견된다. 이 충격적인 사건은 폴란드 출신의 유대계 미국인 역사학자 얀 그로스(Jan T. Gross)의 책 <이웃들(Sasiedzi)>를 통해 밝혀졌다. 제2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7월 10일, 폴란드 북동부 인구 3,000여 명의 소도시 예드바브네에서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유대인 1,600여 명이 학살되었다. 당시 예드바브네는 독일군 점령 하에 있었지만 유대인들을 무참히 학살한 것은 오랜 이웃인 폴란드인들이었다. 가해자가 이웃들이었다는 점도 참으로 충격적이지만, 생존자들이 전하는 학살 광경 또한 참혹하기 짝이 없었다.
얀 그로스가 밝힌 이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부정론자들은 전혀 다르게 해석한다. 이들은 그로스의 접근 방식이 폴란드에 뿌리 깊은 반감을 가진 유대인들의 폴란드 때리기이며, 폴란드인들은 타고난 반유대주의자라는 편견을 증폭히키려는 악의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예드바브네의 유대인 학살이 폴란드인 이웃이 아니라 독일 게슈타포의 짓이라고 규정한다. 그뿐 아니라 독소불가침조약에 따라 소련이 이 지역을 지배한 1939년부터 1941년까지 오히려 폴란드인들이 유대인들의 손에 고통받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소련의 비밀경찰에 협력하는 유대인 공산주의자들이 폴란드 민족주의 진영의 반공 파르티잔을 밀고하여 중앙아시아나 시베리아로 쫓아내는 데 앞장섰다는 점을 강조한다. 이 역사에서 희생자는 유대인이 아니라 폴란드인이었고, 유대인들은 배반자였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부정론자들은 소련 점령기를 '소비에트-유대점령기'라고 재정의하고 유대인들이 폴란드인들을 박해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인식론적 차원에서 예드바브네 학살 부정론자들은 근대적 실증주의의 입장을 취한다. 기억에 의존하는 생존자의 증언보다는 문서 자료가 항상 더 신뢰할만한다는 것이다.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증인들의 기억은 부정확해서 믿을 수 없다는 게 이들의 기본 입장이다. 그로스가 의거한 주요 자료는 전쟁 직후인 1946년 폴란드 유대사연구소 비아위스토크(Bia lystok)위원회에서 증언한 슈물 바세르슈타인(Szmul Wasersztain)을 비롯한 유대인 생존자들의 증언인데, 증언 자체를 믿을 수 없으므로 그로스의 연구도 신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로스에게 포스트모던적이며 주관주의적 역사 서술을 한다는 비판이 쏟아지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이다. 예드바브네에서 폴란드인이 유대인을 학살한 배후에는 '나치 독일'이 있었는데, 그로스는 이 '사실'에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부정론자들 역시 나치가 예드바브네의 폴란드인에게 유대인들을 학살하도록 유도했거나 명령했다는 문헌 증거는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 부정론자들의 실증주의와 맞서다 보면, 결국 문서 자료와 증언의 관계나 증언의 자료적 가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더 근원적인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지적 기억' 대 '깊은 기억'
루마니아 출신의 유대계 미국인 심리학자인 도리 라우브(Dori Laub)는 예일대학교 홀로코스트 생존자 증언 비디오 아카이브 프로젝트의 책임자로서 오랫동안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의 심리 분석을 해왔다. 그는 '지적 기억' 대 '깊은 기억'이라는 대조법을 통해 '사실'과 '진실'에 대한 아주 흥미로운 통찰을 제시한다. 사건을 기록한 문서보다 부정확한 증언이 더 진정한 과거를 말해줄 때가 있다는 것이다. 예컨대 1944년 10월 아우슈비츠 수감자들이 폭동을 일으켰을 당시 "굴뚝 네 개가 폭파됐다"는 어느 생존자의 증언은 역사가들에게 거짓이라고 무시되어왔다. 이 증언은 폭파 현장에 굴뚝이 하나뿐이었던 사실과 분명 어긋나는 것이었다. 그런데 라우브는 오히려 사실과 어긋나기 때문에 이 증언이 더 진정성이 있다는 신선한 해석을 내놓았다.
라우브에 따르면 도저히 일어날 것 같지 않던 일이 눈앞에서 벌어질 때, 이간은 그것을 과장되게 기억하는 경향이 있다. 굴뚝 하나가 사실에 부합하는 '지적 기억'의 영역이라면, 사실과 모순되는 굴뚝 네 개는 '깊은 기억'의 영역인데, 아우슈비츠 생존자들처럼 트라우마를 겪은 사람들의 기억은 대개 '깊은 기억'에 속한다. 아우슈비츠 폭동을 목격한 생존자의 증언은 사실과 부합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어긋나기 때문에 더 진정성이 있다는 것이다. '사실'과 '진실'이 일치하지 않는 이 재현의 역설은 증언과 문서 자료의 역사적 진정성에 관해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날조된 아우슈비츠 생존 수기들이 진짜 수기들보다 역사적 사실을 더 확실하게 복원하고 있다는 역설도 이 지점에서 흥미로운데, 이는 날조된 수기들이 대부분 역사 자료들을 주도면밀하게 검토하고 연구한 뒤 쓰이기 때문이다.
조르조 아감벤(Giorgion Agamben)이 아우슈비츠의 해결할 수 없는 문제라는 의미의 '아우슈비츠의 아포리아(aporia)'라고 이름 붙인 이 재현의 역설은 기억과 역사의 관계를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목소리 소설'이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해 노벨 문학상을 받은 벨라루스 출신의 소설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Svetlana Alexievich)는 자신을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역사가'라고 소개한 바 있다. 기억 연구는 알렉시예비치처럼 타인의 아픔에 '공감'할 줄 아는 역사가들만 할 수 있는 일이다. 트라우마가 있는 증인들을 문서 자료에 비추어 날카롭게 신문할 때 역사적 진실이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역사가는 하수이다. 역사, 특히 실증주의적 역사에 비추어 기억 연구가 갖는 윤리적 감수성은 다른 무엇보다 알렉시예비치의 목소리 소설에서 잘 표현되는 게 아닌가 싶다. (임지현 / 서강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