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이번에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의 만리장성(戰國時代)에 대해서 알아 보겠습니다.
만리장성(戰國時代)은 갈석산(碣石山)과 더불어 고대사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건축물입니다. 만리장성은 동북방의 이민족들을 막기위해 진시황제 때 쌓은 장성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의 고대 강역의 경계에 있어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만리장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국시대의 장성들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전국시대(戰國時代)는 하상주(夏商周), 춘추시대(春秋時代) 이후에 진시황의 진(秦)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 중원을 지배한 7개의 고대 국가를 의미합니다.(기원전 476년 또는 기원전 403년 ~ 기원전 221년) 특히 그중에 진(秦)나라, 조(趙)나라, 연(燕)나라는 만리장성과 매우 관련이 깊습니다.
보통 중국이나 강단학계에서 주장하는 전국칠웅(戰國七雄)의 국가들의 위치와 장성의 모습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위키의 전국시대 장성)
여기의 진장성(秦長城), 조장성(趙長城), 연장성(燕長城)을 연결한 것이 진시황이 쌓은 고대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라고 칭하는 것이고 이후에 명(明)나라가 산해관(山海關)까지 쌓은 것이 현재의 만리장성입니다.
그림의 만리장성의 모습을 보면 조장성과 연장성이 좌우로 뿔처럼 이상하게 뻗어 있으며 연장성은 산해관을 넘어 현재의 요하까지 그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생긴 장성은 존재하지도 않습니다. 이는 상당히 왜곡된 만리장성의 모습입니다.
또한 국내 강단사학자들은 이병도의 설을 지지하여 만리장성이 요하를 넘어서 황해도(黃海道) 수안(遂安)까지였다는 상식적이지 않은 주장까지 하고 있습니다. 이런 내용은 국민세금 47억이 사용된 동북아역사지도에서도 이를 채택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주장은 일제 식민사학자 이나바이와기치(稻葉岩吉)의 주장이며 이를 이병도가 그대로 따라한 것 입니다.
현재 중국은 한술 더 떠서 헤이룽성(흑룡강성:黑龍江省)의 무단장(牧丹江)까지 만리장성이 있다고 주장하며 계속 장성을 확장해 가며 쌓고 있습니다. 참 어이없고 기가 찰 노릇입니다. 이에 대해 국내 학계에서는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고 있고 지켜보는 것이 현실입니다.
실제로 만리장성이라고 볼수 있는 장성의 모습은 아래 그림과 같습니다. 위의 전국칠웅의 만리장성의 모습이 얼마나 왜곡된 엉터리 인지 알 수 있습니다. 즉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아무리 멀게 잡아도 산해관(山海關:Shanhaiguan)을 넘지는 않습니다.
1) 진장성(秦長城)
사기 흉노열전을 보면,
기록에는 “진(秦)나라가 농서(隴西), 북지(北地), 상군(上郡)을 차지하고 장성을 쌓아 호(胡)를 막았다”고 하였고, 이것이 춘추전국시대 진장성입니다. 농서는 농산(隴山)의 서쪽지역으로서 지금의 감숙성 난주(Lanzhou) 부근 을 말하고 이 위치를 임조(臨眺)로 보고 있습니다. 현재 중국에서는 자위관 (가욕관:Jiayuguan)을 만리장성의 서쪽 경계로 보고 있습니다.
2) 조장성(趙長城)
기록에는 “조 무령왕(B.C.325-299)이 또한 풍속을 바꾸어 호의 복장을 하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익혀 북쪽으로 임호, 누번을 격파하고 장성을 쌓아 대(代)에서부터 음산(陰山)기슭을 따라 고궐(高闕)에 이르기까지 새(塞)를 만들고 운중(雲中), 안문(雁門), 대군(代郡)을 설치하였다"고 하였으며 이것이 춘추전국시대 조장성(趙長城)입니다. 운중의 위치는 내몽골자치구 호화호특시(呼和浩特市:후허하오터시) 부근, 안문의 위치는 중국 산서성 삭주시(朔州市:숴저우시) 부근으로 비정됩니다.
戰國策碣石山在常山九門縣
전국책에 갈석산(碣石山)은 상산(常山) 구문현(九門縣)에 있다.
『사기색은(史記索隱) 』
사기"와 "진서"에 의하면 "상산(常山) 구문현(九門縣)에 갈석산"이 있다고 했다 하였는데 이곳이 하북성 보정시에 있는 우갈석 백석산(白石山)입니다. 대청광여도를 보면 이 조장성(趙長城), 연장성(燕長城), 갈석산(碣石山)의 위치를 모두 볼 수 있습니다.
3) 연장성(燕長城)
其後燕有賢將秦開,爲質於胡,胡甚信之.歸而襲破走東胡,東胡卻千餘里.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開之孫也.燕亦築長城,自造陽至襄平.置上谷ㆍ漁陽ㆍ右北平ㆍ遼西ㆍ遼東郡以拒胡.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왕(秦王)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다. 상곡ㆍ어양ㆍ우북평ㆍ요서ㆍ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사기』 ‘흉노열전’
즉 이것이 춘추시대의 연장성이며 조양에서 양평까지 이어졌으며 조양의 위치는 상곡군, 양평은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현으로 보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상곡과 양평의 위치가 중요한데 현재 상곡의 위치를 북경 북쪽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위치 비정입니다.사료를 살펴보면 조양(造陽)은 상곡, 탁군과 거의 같은 곳이며 위치를 찾아보면 상산(常山) 갈석 부근 임을 알수 있습니다.
涿州。春秋戰國。皆燕之涿邑。秦爲上谷郡。漢置涿郡
탁주는 춘추전국시기 연나라의 탁읍인데 진나라가 상곡군으로 바꾸었다.한나라때 탁군을 설치했다
『소전집(少痊集) 』
師古曰 造陽地名在上谷界 襄平即遼東所治也.
[주] 사고가 말하기를 "조양은 지명으로 상곡의 변경에 있고 양평은 즉 요동의 치소이다."라고 했다.
『前漢書』 권94 上
晉太康地記 秦塞 自五原郡北九里 地名造陽
《진태강지기》에 "진(秦)장성에는 오원군(五原郡)북쪽 9리에 조양(造陽)이라는 지명이 있다."고 했다.
『御批資治通鑑綱目』 권2 上
代郡 秦置 莽曰厭狄 有五原關 常山關 屬幽州 應劭曰故代國
대군(代郡)은 진나라가 설치하였다. (왕)망이 말하기를 "염적이다. 오원관(五原關)과 상산관(常山關)이 있다. 유주에 속한다."고 했다.
『前漢書』 권28 下
위에 있는 대청광여도를 통해서도 옛(古) 대군(代郡)의 위치와 상산(常山)의 위치를 통해 연장성이 갈석산(碣石山) 부근에서 부터 시작하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또한 연장성의 끝인 양평은 요동군의 치소인데 만번한으로 추정되는 지역입니다. 갈석산을 경계로 동쪽을 요동으로 보는데 장성의 위치로 살펴볼때 요동을 동쪽으로 아무리 길게 잡아도 난하를 넘어 설수는 없습니다. 중국사서에서 보통 만(滿)이라고 하면 이는 위만(衛滿)을 칭하는 말입니다. 즉 위(魏)나라 사료인 위략(魏略)의 만번한(滿潘汗)의 기록은 위만조선(衛滿朝鮮)의 번한 지역(요동군 번한현)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또한 연나라의 위치에 대해서 소진열전을 보면...
燕東有朝鮮、遼東,北有林胡、樓煩,西有雲中、九原,南有嘑沱、易水...南有碣石、鴈門之饒...
연나라는 동쪽으로 조선(朝鮮)과 요동(遼東)이, 북쪽으로는 임호(林胡)와 누번(樓煩)이, 서쪽으로는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이, 남쪽으로는 호타하(嘑沱河)와 역수(易水)가 있습니다...남으로 갈석(碣石)과 안문(雁門)의 풍요로움이 있고...
『사기(史記)』 「소진열전(蘇秦 列傳)」
아래 그림은 사료를 통해 비정되는 전국시대의 연나라의 강역과 연장성, 조선의 위치입니다.
4) 명장성(明長城)
명나라는 주원장 때 부터 장성 축조에 적극적이였습니다. 특히 15~16세기에는 북방에 있는 몽골의 침입을 대비해서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는데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繼光(1528~1588)이 거의 마지막으로 보수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오늘날 남아 있는 장성의 성벽의 대부분 15세기 이후 명나라 때에 축조, 개ㆍ보수하여 쌓은 것입니다. 아래 지도는 명나라 장성이 표시된 북직례여도(北直隸與圖)입니다. 장성의 가장 동쪽의 위치가 산해관(山海關)입니다.
4) 진시황의 만리장성
진나라가 여섯나라(초연조위한제)를 멸하여 중원을 통일하고, 시황제가 몽염을 보내 10만을 거느리고 북쪽으로 호를 공격하게 하여 하남 땅을 모두 빼앗아 하수(황하)를 따라 새를 만들고 하수변에 44개 현성을 쌓아 적수를 옮겨 이를 채웠다. 그리고 직도를 뚫어 구원에서 운양까지 이르렀고, 변경 산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계곡을 참호로 하고, 수리할 수 있는 곳은 수리해서 쓰며, 임조(臨洮)에서 요동(遼東)까지 (장성을 쌓았는데) 만여리에 이르렀다 라고 기록함으로써 만리장성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소위 진시황 때 쌓았다고 전하는 만리장성인데, 기록을 보면 이때 몽염은 춘추전국시대에 쌓았던 진장성, 조장성, 연장성을 연결하고, 수리한것으로 새로 쌓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始皇并天下,使蒙恬将三十万众,北逐戎狄,收河南,筑长城,因地形开附制塞,起临洮至辽东,处袤万余里
진시황이 천하를 병합하고 몽염 장군과 30만 명을 보내 북쪽 융적을 몰아내고 하남을 빼앗아 장성을 쌓았다. 서쪽 임조에서 일어나 동쪽은 요동까지이다. 길이가 만 여리이다.
『사기 몽염열전』
始皇令太子扶蘇與蒙恬築長城 起自臨洮至于碣石
진시황이 태자 부소에게 명하여 몽염과 함께 장성을 쌓게 했는데 임조(臨洮)에서 시작하여 갈석(碣石)까지 이르렀다.
『수경주 하수주』
종합해보면 진장성, 조장성, 연장성을 연결해 임조에서 갈석까지 쌓은 장성이 진시황시기에 축조한 장성으로 보입니다.
진무제 태강지리지의 기록의 장성에 대한 내용을 살펴보면...
樂浪遂城縣有碣石山,長城所起
낙랑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으며 만리장성이 시작된다.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
사료에 기록된 진시황제가 중원을 통일하고 축조한 만리장성은 임조(臨洮)에서 갈석(碣石)까지 연결한 장성이며 그 동쪽의 시작점이 수성현에 위치한 갈석산(碣石山)으로 해석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