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나무, - 홰나무라고도 부르지만 - 정확하게는 회화나무이다. 한자로는 '괴(槐)'라고 쓰는데, 괴의 중국 발음이 '회'인 연유로 말미암은 것이다.
회화나무는 중국에서 매우 상서로운 나무로 대접받아 왔으며, 그 영향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도 귀하게 여기는 나무다. 가지의 뻗음이 조금은 제멋대로인데 그것이 학자의 절개를 닮았다하여 '선비나무'로 알려져 있다.
중국 주나라 때 우리나라의 삼정승에 해당하는 삼공(三公)이 조정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고, 그 아래에서 서로 마주보고 앉아 정사를 보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고사에 따라 주례(周禮)라는 책에는 궁궐의 바깥문을 들어서서 바로 만나는 조정 가운데에 세 그루의 회화나무를 심도록 했는데, 그 나무 아래가 최고 벼슬아치인 삼공이 앉는 자리라 하였다. 중국 풍습의 영향 탓인지 실제로 우리나라 창덕궁의 돈화문을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나무가 왼편으로 나란히 서 있는 세 그루의 회화나무이다.
회화나무를 심으면 큰 학자가 배출되고, 나라를 위해 큰 일을 하게 되는 인물이 나온다는 믿음이 있다. 하여 이름있는 양반동네 치고 회화나무 노거수 몇 그루쯤 없는 곳이 없고, 학당, 향교, 서원이나 궁궐에서 흔히 만나는 나무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조계사 대웅전 앞에는 수령이 400년을 넘긴다는 거대한 회화나무가 있다. 일대에 회화나무가 많아 토박이 마을 이름이 회나뭇골(괴목동; 槐木洞)이었다고 한다.
경복궁을 비롯하여 왕조의 궁궐을 바로 등 뒤에다 두고 육조거리에서 종각으로 넘어가는 중턱에 위치하는 까닭에 여러 관청과 벼슬아치들의 집이 많았다. 회화나무가 많아 이 일대의 이름이 회나뭇골이었다면, 근방에는 조계사 회화나무 말고도 살아 남은 회화나무 노거수가 더 있으리라.
회나뭇골의 흔적은 의외로 쉽게 찾아진다. 우선 조계사 종무소 앞마당에서 우정총국 방향으로 시선을 돌리면, 아랫가지가 우정총국 기와지붕을 덮고 있는 오래된 회화나무 한 그루가 보인다. 대충 눈어림으로도 12, 3미터 높이에 아래 둥치가 두 아름은 족히 넘을 듯한 나무다. 비슷한 높이의 건물들로 둘러싸여 그 동안 눈에 잘 띄지 않다가 공원조성 공사로 인해 주변건물들이 헐리면서 그 모습을 드러냈다. 공사에 방해가 되었던 것일까? 조계사 쪽으로 뻗은 제법 굵은 가지 하나가 속절없이 잘려 나갔다. 그 때문에 수형(樹形)이 많이 기울어 보인다.
수송공원에도 한 그루가 있다. 이종일 선생 동상 뒤에 있는데, 음습한 기운이 감도는 공원 한구석에 있으면서 다른 나무들에 치이고 있어 다소 옹색하고 불안정한 느낌을 준다. 더구나 호기있게 뻗어나가던 굵은 가지들이 무참히 잘려나가 단 하나도 온전하게 남은 가지가 없다. 그대로 자랐으면 15, 6미터 높이에 강건함을 자랑했을 나무인데, 상처투성이의 몸뚱아리가 안타까움을 더하게 한다. 가지치기를 한 것이 아니라 나무가 더 이상 자라지 못하도록 일부러 그리한 모양새이다. 얼마나 몸부림을 쳤던 것일까? 푸른 이파리들을 매달고 있는 건 온통 맹렬한 기세로 뻗쳐나간 맹아지들 뿐이다.
연합뉴스 앞 중부학당길에도 회화나무 노거수가 한 그루 서 있다. 식당 건물로 둘러싸이다 보니 두어 가지가 잘려 나갔지만, 5층 건물 키를 훌쩍 넘기며 그런대로 잘 자랐다.
다리품을 팔다 다시 조계사로 돌아와 회화나무 아래에 선다. 멋대로 인 것 같으면서도 섬세하게 뻗어나간 이 나무의 가지들을 올려다보노라면 아슈밧타, '거꾸로 선 나무'가 종종 연상되어지곤 한다. 조석 예불을 올리는 것이 어디 사람 뿐이랴. 이 나무가 오늘까지 이토록 온전히 몸을 보전해 올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부처님의 가피를 입은 덕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