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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시는 고전시(舊詩)와 현대시(新詩)로 크게 구별된다. 고전시는 한국에서 한시(漢詩)라고 하는 것인데, 기본적으로는 정형시이다. 현대시는 1917년 문학혁명운동 이후 생겨난 신문학 장르의 하나로, 서유럽 시의 영향 아래 전통적 고전시를 비판하면서 출발한 자유시이다. 고전시는 고어(古語;文言)로 씌어지며 현대시는 구어(口語;白話)로 씌어진다.
⑴ 《시경(詩經)》과 초사(楚辭):시는 본래 민간의 가요로부터 성장하였다. 현존하는 중국의 가장 오래된 시집인 《시경》은 BC 1000∼BC 600년 무렵에 걸친 고대 주왕조(周王朝)의 궁정가요와 황허강[黃河] 유역의 지방 민요를 주체로 하며, 특정한 지은이를 가지지 않는 집단의 노래였다. 왕실의 제사나 연회 등에서 불리어졌던 궁정가요는 본래 민가(民歌)에 바탕을 두거나 또는 민간과 공통된 종교적 기반에서 발생한 악가였다. 현재 《시경》에 수록된 고대가요는 그 반수 이상이 지방의 민요(國風)인데, 현실적이며 소박한 이 노래들은 후세의 시인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그러나 《시경》의 형식은 후세에 그다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것은 노래할 때의 선율 때문인데, 기본적인 리듬이 일구사언의 짧은 것이어서 표현할 수 있는 내용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었다. 전국시대 말기에 양쯔강[揚子江] 유역에는 《시경》의 노래보다 좀더 자유롭고 복잡한 형식을 가진 가요가 발달하였다. 이 가요 역시 원래는 집단의 제사에 쓰이던 악가였는데, 이 형식을 사용하여 자기의 감정을 노래한 대표적인 시인이 초(楚)나라의 굴원(屈原)이었다. 굴원과 그의 뒤를 따르는 사람들의 노래는 초나라 가요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에 <초사(楚辭)>라고 총칭되고 있다. 초사는 한(漢)나라 때 이르러 <부(賦)>라는 독특한 유운문(有韻文)으로 발전하였고 시대가 흐름에 따라 점차 시의 주류에서 멀어졌는데, 초사체의 창작은 그 뒤에도 계속 이어졌다.
⑵ 한나라 악부(樂府)와 오언시(五言詩):한나라의 민간에서는 초사체와 다른 가요가 유행하고 있었다. 사서에 의하면 전한(前漢) 무제(武帝) 때 궁중에 음악서(音樂署)를 설치하고 각지의 민요를 채집, 정리하여 연주하였다고 한다. 기악의 반주를 곁들이는 이 노래들은 같은 곡에 많은 가사가 붙여지기도 하였으며, 하나의 곡에 많은 변곡(變曲)이 생기기도 하였다. 또한 그 무렵 개통된 비단길을 통하여 서역 음악이 들어와 전한의 중기와 후기에 걸쳐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것을 악부·악부시라 칭했던 것은 무제 때 음악서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악부의 시형은 각각의 곡에 따라 다양하며 때로는 장단구를 섞은 잡언시(雜言詩)의 형태를 취하기도 하였는데, 그 가운데 일구오언의 형식이 후한(後漢) 무렵에 일반에게까지 정착되었다. 그 뒤 이 형식은 초사체를 대신하는 새로운 시형으로 시인들에게 사랑받게 되었다.
⑶ 위(魏)·진(晉)·남북조(南北朝)의 시:후한 말기에 이미 정치의 실권은 왕실 유씨의 손에서 조씨 일족에게로 넘어가 있었다. 조조(曹操)·조비(曹丕)·조식(曹植) 부자와 왕찬(王粲)을 대표로 <건안칠자(建安七子)>라고 하는 시인들이 오언시 형식으로 뛰어난 서정시를 썼다. 그 뒤 오언시는 민요에서 분리되어 전문 시인이 쓰는 시형이 되었다. 위·진나라 때의 불안한 사회정세 속에서 오언시의 표현기술은 두드러지게 진보하였고 시인들은 가슴 속의 불안과 고뇌를 오언시로 표현하였다. <죽림칠현(竹林七賢)>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완적(阮籍)·혜강의 작품에는 명확한 자아의 주장 및 사색적 깊이와 신선한 서정성이 있다. 그러나 귀족사회의 확립에 따라 시의 표현도 화려함을 추구하게 되어 수사(修辭)에 공을 들이게 되었는데, 진나라의 육기(陸機)·반악(潘岳) 등이 선구자였다. 남북조시대에 양쯔강 남쪽으로 피해간 한민족(漢民族)은 정치·사회의 혼란 속에서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으나, 왕후·귀족 등은 양쯔강 남쪽의 풍부한 산물과 아름다운 산수에 묻혀 한때의 평안을 즐겼다. 이 무렵에는 서양의 살롱적인 분위기 속에서 수사적·유희적인 시가 인기를 모았는데, 양쯔강 남쪽의 자연을 생생한 감각으로 노래한 산수시의 사영운(謝靈運), 전원생활을 읊은 도잠(陶潛;陶淵明), 악부체 시의 포조(鮑照) 등이 있다. 남조(南朝) 중기에는 화려한 표현을 추구하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고 섬세한 구를 짓는 데 힘썼다. 이러한 표현기술의 연구는 언어학의 발달과 합쳐져 <사성팔병설(四聲八病說)>을 낳았다. 양(梁)나라 심약(沈約)이 주장한 이 설은 중국어에 사성(四聲)과 평측(平仄)의 구별이 있음을 알아내 그것을 효과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시의 음악적 미를 갖추도록 한 것인데, 이 규정이 정리되어 당(唐)나라 때에 이르러 근대시를 낳게 되었다. 또 남조의 특색은 방대한 양의 민간가요 발굴과 그것에 대한 시인들의 의작(擬作)에 있다. 그 가운데 칠언형식이 당나라 때 다시 크게 발전하여 칠언 정형시가 성립되었다. 한편 이민족의 통치를 받은 북조(北朝)에서는 소박하고 힘있는 악부작품도 나타났으나, 전체적으로 남조풍을 모방한 색채가 짙었다.
⑷ 당나라의 시:중국의 고전시는 단명한 수(隋)나라를 거쳐 당나라 때에 꽃을 피웠다. 당나라 때를 초(初)·성·중(中)·만(晩)의 네 시기로 구분하는 <사당설>은 뒤의 명(明)나라 때에 정착한 것으로, 왕발(王勃)·양형(楊炯)·노조린(盧照隣)·낙빈왕(駱賓王)의 <초당사걸(初唐四傑)>과 진자앙(陳子昻)이 활동했던 초당기(初唐期), 이백(李白)·두보(杜甫)를 비롯하여 왕유(王維)·맹호연(孟浩然) 등을 대표로 하는 성당기(盛唐期), 한유(韓愈)·백거이(白居易)를 대표로 하는 중당기(中唐期), 두목(杜牧)·온정균(溫庭筠)·이상은(李商隱)의 시대였던 만당기(晩唐期)를 말하는데, 각 시기를 특징짓는 많은 시인들이 활동하였다. <시의 시대>라고 할 수 있는 상황은 정치 안정과 문화 발전에 따른 생활의 확대와 심화, 외래문화와의 접촉 등에 따라 이루어졌으며, 과거시험에 시부(詩賦)가 과제로 주어지게 된 일도 시가 융성하게 된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한편 <안사(安史)의 난>을 기점으로 당나라 사회가 크게 바뀜에 따라 시단의 상황도 변하게 되었다. 백거이·원진 등의 <신악부운동(新樂府運動)>은 벽에 부닥친 시의 개혁운동이었으나, 한유·유종원(柳宗元) 등의 <고문운동(古文運動)>과 함께 고전주의적 입장에서 문학의 새로운 출구를 모색하려는 것이었다. 그들이 열었던 시문의 새로운 세계는 만당·5대를 거쳐 송(宋)나라 때 비로소 결실을 맺게 되었다.
⑸ 송나라의 시:송나라 때는 한민족이 남북의 두 중국을 통일하였던 북송시대와, 북중국이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에게 점령당해 있었던 남송시대로 나누어진다. 강력한 중앙집권국가로 출발했던 송나라는 문인관료를 중용하여 이른바 <문치(文治)>에 힘을 썼으므로 시문에 재능있는 사람들이 사회적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던 시대였다. 이 점에서 볼 때 대체로 사회적으로 불우하게 생애를 마치는 경우가 많았던 당나라 시인들과는 양상을 달리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송나라 시인들에게서 볼 수 있는 침착성과 자부심은 사회·문화와 그들과의 깊은 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것은 시의 내용에도 반영되었는데, 송나라 시인들은 독자적인 시 세계를 구축하여 당시(唐詩)와 비견되는 또 하나의 절정기를 맞았다. 그것은 당시와 뚜렷한 대조를 보였는데, 즉 당시의 격정에 대응하여 송시는 냉정함과 여정(餘情)을 그렸고 당시의 웅대한 스케일에 반하여 송시는 일상생활 속에서 발견한 섬세한 미를 다루었으며, 당시가 감정 그대로 절규하는 것에 대하여 송시는 치밀한 논리로 시인의 사상을 전개하는 등의 특징을 가진다. 이와 같은 송시의 세계는 북송시대의 구양수(歐陽修)·매요신(梅堯臣) 등에 의해 개척되고, 왕안석(王安石)·소식(蘇軾)·황정견(黃庭堅) 등에 의해 완성되었는데, 특히 소식은 송시의 대표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북송 말기 이후 시구의 섬세한 표현에 마음을 써서 미묘한 정취를 중시하는 <강서파(江西派)>의 시풍이 유행하였으나, 남송의 육유(陸遊)는 열정을 담아 중국 북부의 탈환을 노래하였고 범성대(范成大)는 전원생활의 신선한 감흥을 읊는 등 강서파의 시풍에 얽매이지 않는 시경을 보여준 시인들도 적지 않다.
⑹ 금·원·명·청나라의 시:중국 고전시를 극히 개괄적으로 말하면 당·송나라 두 시기에 내용과 형식이 대부분 완성되었고, 그 이후로는 특별히 새로운 발전은 없어졌다. 시인들은 저마다 개성적인 시를 추구하기는 했으나, 배워야 할 대상으로 당시와 송시 가운데 어느쪽으로든 선택을 강요당하는 일이 많았다. 금·원나라의 시는 금나라의 원호문(元好問)과 같이 당시를 존중한 사람도 많았지만 대체로 송시의 영향을 받아 섬약한 시풍을 나타냈다. 명나라 때에는 이몽양(李夢陽)·하경명(何景明) 등의 <전칠자(前七子)>, 이반룡(李攀龍)·왕세정(王世貞)을 대표로 하는 <후칠자(後七子)>의 사람들이 당시특히 성당의 시를 높이 평가하여 의고적(擬古的)인 작품을 썼는데, 이들을 <고문사파(古文辭派)>라고 한다. 지나치게 배타적인 고문사파의 주장은 그 자체가 단순한 모방으로 타락해버린 적도 있어서 명나라 말기에는 당·송 절충의 시를 강하게 주장하게 되었다. <공안파(公安派)>의 원굉도(袁宏道)는 백거이와 소식을 존경하면서도 그들에게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입장을 취했다. 청나라 때에 들어와 고문사파의 세력이 힘을 잃어가자 당시 일변도의 풍조도 바뀌었고, 시인들은 저마다 당시 또는 송시 가운데에서 배울 대상을 찾게 되었다. 하나의 시대, 한 사람의 시인에게 얽매이지 않고, 당·송나라의 시를 겸하거나 또는 원·명나라의 시중에서도 대상을 선정하였다. 한편 그 가운데에서도 유행이 있었는데, 청나라 초기 왕사정(王士禎)은 성당의 왕유나 맹호연의 시의 여운을 중시하여 <신운설(神韻說)>을 주장하였으며, 중기의 심덕잠(沈德潛)은 이백·두보 시의 풍격과 음조의 전아를 존중하는 <격조설(格調說)>을 주장하였다. 또 규범에서 벗어난 정신의 자유를 외친 원매(袁枚)의 <성령설(性靈說)>은 명나라 말기 공안파의 주장에 따른 것이었다. 청나라 말기에는 중시가 널리 읽혔다.
⑺ 현대시:고전시의 최초의 변모는 청나라 말기에 변천하는 시대의 새로운 사물을 노래하기 위하여 말을 혁신하는 일에서 시작되었다. 청나라 말기의 황준헌(黃遵憲) 등이 문언(문어)속에 새로운 명사나 속어를 적극적으로 채용하여 변화하는 시대흐름에 따르려고 했으나, 시어를 전면적으로 구어(口語)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은 1917년 후스[胡適]의 <문학개량추의(文學改良芻議)>가 그 최초이다. 고전시와의 결별을 호소한 이 문장은 신해혁명 직후개혁에 불타는 청년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고, 이른바 문학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다. 그러나 초기의 시는 거의 서유럽 시의 모방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중국의 독자적 현대시를 창조하기 위해서 궈모뤄[郭沫若]·원이둬[聞一多] 등이 창작과 평론으로 고심을 거듭하였다. 그 뒤 중·일전쟁, 중국 내의 혁명전쟁을 통하여 많은 작품이 나왔으며 이론화가 추진되었다.
중국시의 원조가 되는 《시경》은 본래 상고시대에는 궁정의 악가와 각지의 민요였는데, 그 뒤 경서(經書)의 하나가 되었고 유가적(儒家的)인 문학이론의 기초가 되었다. 즉 <시는 본래 순수한 마음의 소리이므로 태평시대에는 즐거운 노래가, 난세에는 슬픈 노래가 나오게 된다. 이와 같이 시는 그 시대의 사회정세를 정확하게 반영하므로 권력자나 정치가는 이것에 의해 민정(民情)을 판단할 수 있다. 시인도 마찬가지로 정치·사회에 대한 현실 비판의 자세로 작품을 써야 한다. 또한 시는 작자의 인격을 정확하게 반영하므로 뛰어난 시는 당연히 윤리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니며 그것을 읽는 독자의 인격까지도 높여주게 된다. 그러므로 작자 자신도 인격을 높이는 노력을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사고방식은 유교의 권위와 함께 중국 초기의 문학혁명에 이르기까지 시인들에게 계승되어 시단의 풍조가 기교주의·수사주의에 지나치게 기울게 되면 언제나 이 주장이 나타나 보정하는 역할을 하였다. 고전시는 대구 등의 수사적 기법이 요구되며, 이밖에 고전 또는 선인(先人)의 작품에 관한 지식 등 상당한 교양을 필요로 하므로 시인은 일부 지식계급에 한정되었다. 고전시를 감상하는 데에도 이와 같은 교양이 필요한데, 이 점에서 보면 고전시는 소수 지식인 사이에서 육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현대시가 지향하고 있는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는 시를 소수 지식인의 손에서 일반인의 것으로 하는 일이며, 또 중국민족의 자각을 촉구하고 중국 근대화를 추진하기 위하여 시를 하나의 수단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고전시의 시형은 고시(古詩·古體詩)와 근체시(近體詩·今體詩)로 나누어지며, 시대적으로는 당대를 경계로 하여 그 이전에 성립된 시형을 고시, 그 이후의 것을 근체시라 하는데, 근체시 쪽이 엄격한 규칙을 가지고 있다. 한 구(句)의 자수, 한 수(首)의 구수에 따르는 고시와 근체시의 시형은 〔표〕와 같다. 고시와 근체시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는 운율의 규칙에서 각운을 다는 방법, 평측의 배열법, 용자(用字)·대구 등의 수사법적 기교 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