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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여행 2005. 7.
내가 초등학교 시절에 "소년세계" 인가 하는 어린이 잡지를 열심히 보았다. 그 책에는 가끔 외계인 이야기가 나왔는데 그중에서 2,000 여년전에 그려진 커다란 외계인 그림 이야기가 있었다. 그림이 너무커서 비행기에서 봐야만 알 수 있기 때문에 그 옛날 사람들이 그리기에는 너무 어렵다고 하였다. 그 그림이 지구상에 어디에 있는지는 기억하지 못하였다.
1985년에 미국 유학을 간후에 멕시코 마야 유적지나 남미 잉카 문명의 미지의 세계에 가보는 것이 꿈이었으나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갈 수가 없었다. 그때 멕시코 여행 안내책을 사서 읽으면서 마야 유적지 여행의 꿈을 키웠지만 막상 떠나지는 못하였다. 지난 2005년 1월에 Goerge Washington University에 방문 교수로 갔는데 이 실험실에 페루에서 온 학생이 있었다. 미국에서 남미로 여행하면 시차도 없고 비용도 한국에서 출발하는 것 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페루의 마추피추에 한번 가보고 싶다고 말하였더니, 우기인 11-4월을 피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다. 비용문제로 망설이면서도 페루 여행 프로그램을 한번 살펴보니까 페루의 Nasca 지역에 그 외계인 그림이 있다고 한다. 어릴 때 소년세계에서 본 그 그림을 직접가서 보고 싶었다. 잉카 문명의 도시 Cusco가 해발 3,300 m이고, 배가 다닐 수 있는 호수로 지구 상에서 가장 높은 Titicaca 호수도 고도 3,800 m 이어서 체력이 더 떨어지기 전에 가보고 싶었다. 고등학교 지리 시간에 Titicaca 호수를 배울 때에 그 울림이 "열려라 참깨" 보다도 더 주술적이고 원시적인 신비를 지닌 것처럼 들렸던 기억이 난다. 비용이 많이 들지만 소년시절부터 보고 싶었던 곳에 한번 가보도록 결정하였다.
페루에서의 교통수단이나 숙박지를 직접 예약하기 어렵고 스페인어를 못하기 때문에 package tour를 하기로 하였다. 남미에서 배낭여행을 하는 경우 도둑이나 강도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어느 여행기). 처음에는 미국에 있는 한인 여행사에 문의하였으나 페루에 가는 여행객이 없었다. 한국에서 페루에 출발하는 여행상품을 찾아보아도 여행자가 없어서 페루 현지 여행사를 인터넷으로 찾았다. 페루 사람들이 운영하는 여행사에서 제시한 비용이 더 저렴하였다. 시립 도서관에서 페루 여행 안내책자를 세권 대출하였다. Discovery에서 나온 책은 역사와 문화에 관한 내용이 많았고, Podor's 는 숙소, 식당 설명이 잘되었고, 영국에서 나온 Footprint는 문화와 숙소에 관한 내용이 균형있게 잘 설명되어 있었다. Podor에서 추천한 식당들을 찾아다니면서 페루 음식을 주문하였는데 아주 만족스러웠다.
페루의 면적은 남미에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이어 세 번째로 넓어서, 유럽의 스페인에서 서독까지 이르는 땅의 면적과 같다고 한다. 그러나 사막, 산악지대, 정글이 많아서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은 별로 없다. 인구는 약 2천7백만이고 그중에 7백만명이 리마에 집중되어 있다. 일인당 국민소득은 2,000 불이 약간 넘지만 물가가 싸고 자급 자족이 많기 때문에 생활수준은 그 보다 높은 편이다. (페루지도) 화폐의 단위는 태양을 뜻하는 Sol 이고 기호는 S/. 로 표시한다. 환율은 1 US$당 S/. 3.20 인데, 이곳의 교사, 경찰, 간호원 들의 한달 월급은 약 S/. 800 이라고 한다. 페루는 한국 여권을 소지하고 비자없이 관광 목적으로 단기 입국할 수 있지만 대부분의 남미 국가를 가려면 비자가 필요하다고 한다.
7/18 낮 12시40분에 Washington DC Reagan 공항을 출발하여 Huston에서 비행기를 바꾸어 타고 Peru의 수도 Lima에 도착하였다. 멕시코 만에서 올라오는 허리케인을 피하여 가느라고 비행시간이 30 여분 길어져서 밤 11시 10분경에 도착하였다. 여행사에서 마중나온 직원이 내 이름을 적은 종이를 들고 서있었다. Email로 보내온 주의 사항에는 나를 마중나올 사람의 이름이 있었고, 내 이름을 적은 종이에 자기 여행사 로고가 인쇄된 것을 확인하라고 하였다. 또한 그 사람의 이름을 확인하고, 짐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말고, 소매치기를 조심하라고 하였다. 밤 12시인데도 공항 주위에는 자기 차를 타고 가라고 호객행위를 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 마치 스필버그 감독의 우주전쟁 (War of the Worlds) 영화에 나오는 군중들 처럼 무섭게 보였다. Miraflores 지역의 호텔에 도착한 것은 새벽 1시였다.
7/19 아침 6시에 호텔로 나를 데리러 온 사람은 Edith라고 하는 젊은이인데 1 주일 전에 결혼을 하였다고 한다. 부인은 고등학교 교사라고 한다. 영어는 배우기가 어려워서 잘 못한다고 한다. 내가 가져간 여행자용 스페인어 회화책을 보면서 조금씩 이야기를 하였다. 리마에서 Ica까지 310 Km의 거리이고 4 시간이 소요된다. 거기에서 Nasca까지 120 Km이고 2 시간이 걸린다. 이 길은 Pan American Highway라고 불리우며 칠레를 통하여 남미의 끝까지 간다고 한다. Ica의 사막지역에는 모래산도 있었고, 아스파라가스 경작지, cochineal (Dactylopis coccus)이라는 벌레를 키우는 선인장 농장 등을 볼 수 있는데 이 벌레는 립스틱등의 빨간색 염료로 사용된다고 한다. Nasca 사막의 그림을 연구하는데 일생을 보낸 독일인 Maria Reiche가 살았었고 지금은 그 무덤이 있는 박물관을 구경한 후에, 약 12 m 높이의 전망대에서 나무와 손 그림을 보고 경비행장으로 향하였다. 여기에서 6 인승 비행기를 타고 30 분간 선회하면서 소년세계에서 사진으로 보았던 그림들을 볼 수 있었다. 맨 위에 올린 사진의 왼쪽 아래 부분에, 길이가 32 m 인 외계인 같은 그림이 있다. 그 사진은 오른쪽 사진의 비행기를 타고 찍은 것이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선회하면서 그림을 보여주기 때문에 상당히 어지러웠다. 땅위에서 보면 선이 몇 개 보이지만 무슨 그림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비행기를 타고 보아야 원숭이, 고래, 허밍버드, 콘돌등의 그림을 인식할 수 있다. 만들어진지는 2,000년이 되었지만, 서기 600 년경에 Nasca 문화가 사라져서 이 그림들의 존재가 완전히 잊혀졌었다. 이 그림들은 1939년에 이 지역을 비행하던 Paul Kosok이 발견하였다. (참고1 참고2) 1970년대 까지는 고대인들의 기술을 무시하여 사람이 그릴 수 없다고 믿고 외계인의 우주선 착륙지라던가 이상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최근 연구에 따르면 고대인들이 밧줄을 사용하여 작은 그림을 확대하여 그린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림들이 단순하면서도 아름답게 균형잡혀있다.
리마에서 Nasca까지 모두 사막 지역이며. Panamericana라고 불리우는 도로는 리마 지역을 벗어나면 편도 1차선이된다. 내가 지나간 약 400 Km 거리에 드문 드문 마을이 있었지만 신호등이나 가로등이 하나도 없다. 길가에 자전거도 지나가고 사람도 걸어다닌다. 주변의 집들은 너무나 허름하여 우리나라 무허가 움막보다도 못하다. 아주 가난한 집들은 작은 상자곽처럼 보인다. 이런 상자 같은 것들이 사막위에 뚝뚝 떨어져 있는데 물도 전기도 없다.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내 어릴 적 기억을 생각하면서 사진을 찍지 못하였다. 1960년대 초 우리나라가 가난하게 살 때에 미군들이 빈민촌 사진을 찍는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나빴던 기억이 났다. 내가 이 처참한 모습을 사진기에 담으면 이 운전사의 마음도 상할 것이다. 남미를 motor cycle을 타고, 또 트럭을 얻어타고 다녔던 체 게바라가 혁명가가 된 것을 이해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공산주의가 가난을 극복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것이 알려지기 전에 그는 총살당하였다. 한 10 시간 정도 사막과 빈민촌을 보면서 리마 시내로 들어오니까 빌딩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이 빌딩들이 사상누각처럼 보인다. 영화 Matrix에 나온 대사처럼 "저것이 진짜 건물인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Are those buildings real?" 또 이 생각을 하고 있는 나는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Am I real?
7/20 수요일 오전에 Lan Peru 항공사의 비행기를 타고 잉카시대의 수도였던 Cusco로 갔다. Cusco는 잉카족이 사용하던 Quecha 언어로는 Qosqo 인데 "navel of the world" 즉 "세상의 배꼽 혹은 중앙" 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높이가 해발 3,300 m 이어서 고산병에 대한 걱정을 많이 하였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날은 바람이 심해서 항공편이 몇 편 취소되었다고 하는데 오늘은 날씨가 청명하다. 우리를 마중나온 여행사 직원은 Cusco에서 태어나서 고산병을 겪어본 일이 없다고 한다. 오후에는 관광버스를 타고 잉카 태양신전에 성당을 지어서 잉카와 스페인의 건축 양식이 겹쳐서 보이는 Qoricancha를 보았다. 스페인 사람들이 처음 이 성전에 왔을 때 금과 은으로 만든 사람 크기의 동상과 조형물들이 많았다고 한다. 금과 은을 녹이는데에도 3 개월이 걸렸다고 한다. 그 위에 카톨릭 성당을 건축하여 잉카 신전의 훌륭한 석조 벽돌과 16 세기 건축물을 볼 수 있다.그 다음 관광지는 대성당이다. 이곳은 1550 년부터 약 100년간에 걸쳐서 건축되었다. 설계는 스페인 사람이 하고 실제 건축과 실내 장식은 잉카인이 하였다. 이 성당에 있는 최후의 만찬 그림은 아주 독특하다. 예수님 앞에 있는 음식은 기니 피그, 옥수수, 감자 등 잉카인들의 음식이다. 또 예수님과 12 제자는 백인 얼굴이고, 예수를 배반한 유다는 검은 색얼굴이어서 잉카왕을 나타낸다고 한다. 그다음에는 능선에 세워져 있어서 군사 요새로 알려졌던 Saqsaywaman (왼쪽 사진) 등을 구경하였다. 지금은 종교적인 건물로 알려져 있다. 커다란 돌들을 정교하게 다듬어 맞춘 기술이 아주 우수하다. Cusco 시내 중심부에는 잉카시대의 석조 건축이 많이 남아있고, 1535 년 스페인 군이 점령한 후에 지은 건물들이 있어서 아주 고풍스러운 도시이다. 그러나 스페인 군이 점령한 후 잉카 문화를 많이 파괴하였고, 1940년경 까지도 이 돌들을 가져다가 집을 지었다고 한다. 우리가 묵은 숙소도 잉카 후손을 위하여 지은 1600년대 건물의 내부를 개조한 것이다.
7/21 목요일은 Urubamba 계곡 (해발 2,500 m)에 Pisac에 가서 화, 목, 일요일에 서는 인디오 장을 보고, Ollantaytambo를 구경한 후에 Chinchero 마을을 보았다. 인디오들 사이에는 아직도 물물 교환을 한다고 한다. 너무 믿기 어려웠지만 나중에 만난 안내인에게도 확인하고 또 미국에 돌아와서 페루 학생에게 물어보아도 같은 이야기를 하였다. 왼쪽 사진에서 인디오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은 관광객에게 보이기 위하여 입은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외출복이다. 내가 어렸을 때에도 갓을 쓰고 한복을 입은 노인들을 볼 수 있었다. 그 분들은 민속촌에 출근하는 길이 아니고 외출복으로 입은 것 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갓을 쓰고 외출하는 사람을 볼 수 없다. 이 마을 입구에도 인터넷 카페가 있었다. 관광객들과 서구문명이 밀려오고 있다. 인디오 전통복장도 서구 문명이 들어오면서 곧 없어질 것이다. Ollantalytambo는 Ollantay 장군이 만든 tambo (우리나라에서 파발마를 바꾸어 타고 가는 역처럼, 도보로 가는 연락꾼이 쉬어가는 기지)이다. 잉카의 Tupac Yupanqui 왕 시절의 유능한 장군이었던 Ollantay는 지금의 Equador, Chile, Argentina 등을 점령하는 커다란 공을 세웠다. 잉카 왕이 그 장군의 소원을 들어 준다고 하였더니 서로 좋아하던 Kusi Kuyur (혹은 Cusi Coyllur, 'joyful star'라는 뜻) 공주와 결혼을 시켜달라고 하였다. 그 공주도 Ollantay 장군을 사랑하였지만 평민출신의 장군과 공주사이의 결혼은 금지되었고 이 장군은 투옥되었다. 그러나 해피엔딩으로 반전되어 함께 결혼을 한 후에 Ollantaytambo를 건설하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페루에서 연극으로 많이 공연된다고 한다. 이 마을은 지금도 상당히 잘 보존되었고, 신전과 마을에 잉카시대에 만든 수로가 남아있다. Ollantalytambo에 올라갔을 때 비가 가끔 뿌린 후에 해가 나서 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발 아래로 보이는 무지개가 땅에서 시작하여 하늘로 이어지고 또 반대편 땅으로 이어져서 완벽한 원의 일부분을 보여주었다. 잉카 사람들은 무지개를 축복의 상징으로 신성시하였다고 한다.
7/22 금요일 5:30 분에 호텔을 떠나서 6시에 마추피추로 출발하는 기차를 탔다. 가는 길에 만년설이 쌓인 산들을 볼 수 있었다. 9:40 분에 Aguas Calientes 역 (해발 1,800 m)에 도착하여 버스를 타고 마추피추 (해발 2,200 m)로 올라갔다. 마추피추는 예일대 역사학자인 Hiram Bingham이 1911 년에 이 지역을 답사하다가 부근의 인디오들의 안내로 발견을 하여 서구세계에 알려졌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에 의하면 이곳은 1400 년경에 건축된 것으로 보이고, 약 100 년후에는 이곳 인디오의 역사와 기억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1535 년에 잉카를 멸망시킨 스페인 사람들이 이곳을 전혀 몰랐고, 또한 이 스페인 군인과 내통한 인디오들도 전혀 몰랐기 때문에 파괴되지 않고 잘 보존될 수 있었다. 약 200 채의 가옥에 1,000 명 정도가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곳에 있는 농경지는 그 인구가 충분히 먹고 남을 정도의 식량을 경작할수 있다. 영화 Man in Black에서 flash로 사람의 기억을 지우듯이 이 도시는 잉카의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져 버렸는데 무슨 이유로 그렇게 되었는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저녁에 Aguas Calientes의 호텔에 묵었다. 이 곳은 열대 식물이 자라는 곳이다. 그 다음 날에는 묻고 물어서 Putucusi (happy) 산에 올랐다. 2시간 정도 오르니까 마추피추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온다. 거의 수직의 사다리 5 개 정도를 지나서 올라가는데 등산로가 아주 좁다. Putucusi 정상에서 영국인 John과 독일여자 Simone 커플을 만나서 등산 기념으로 함께 사진을 찍었다. 아직은 널리 알려지지 않아서 찾는 사람이 별로 없지만 이곳이 널리 알려지면 오가는 관광객으로 인하여 많이 손상될 것같다.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기 전 이틀동안 비가 많이 왔다고 하는데 우리가 있는 동안은 날씨가 청명하였다.
7/23일 밤에 Cusco에 돌아와서 하루를 자고 7/24 일요일은 버스를 타고 Titicaca호수가 있는 Puno로 가는 날이다. 일요일은 성당 관광을 할 수 없어서인지 관광객들이 별로 없다. 이 유서깊은 호텔에서 아침식사를 하는 사람은 우리밖에 없다. 라디오에서 이곳 음악이 흘러나온다. 무슨 가사인지는 모르겠지만 가끔씩 아모르 아모르 하는 말이 들린다. 외국인이 우리 나라 노래를 들어도 사랑이라는 말을 자주 듣게 될 것이다. 사랑에 울고 사랑에 웃는 것은 잉카사람이나 우리나 똑같을 것이다. 사랑을 받으려고 애태우고, 사랑이 사라질까봐 불안해 하지 말고, 사랑을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고 느끼면 좋을 터인데.... 하늘과 바람과 별과 사막과 돌과 호수를 사랑하게 하시고, 이 세상의 모든 죽어하는 것들을 사랑할 수 있는 축복을 저에게 내려주시옵소서.
아침 7:30 분에 Cusco를 출발하여 Titicaca 호수가 있는 Puno로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에 16 세기 성당을 보고, Raqchi로 가서 잉카시대 이전에 건축된 Wiracoche (혹은 Virachoche) 사원 을 보았고 오후에는 Pucara의 유물등을 보았다. Cusco에서 Puno까지 390 Km 정도로 6시간 반 정도 소요되지만 구경을 하면서 가니까 10 시간 정도 걸린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가끔 만나는 마을에는 전통 복장의 인디오 들이 지나 가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3,500 m 이상의 평원이 계속 펼쳐져 있고 알파카나 야마들을 키우는 목장 곳이 있다. Altiplano라고 불리우는 이 안데스 산맥의 고원지대가 800 Km 정도 계속 이어져 있다. Puno 가는 길에 제일높은 고개가 4,335 m이다. Titicaca호수는 해발 3,810 m이고 길이가 165 km 폭이 60 km 정도이다. 잉카 신화에 의하면 태양신의 아들과 딸이 이 호수에서 태어난 후에 Cusco에 가서 잉카제국을 건설하였다고 한다. 이 호수에는 갈대로 만든 물위에 떠있는 인공섬 Uros가 있다. Uros 족들은 서기 1,200 년 경부터 호수에 살고 있었고 아주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나 순수 Uros족은 1959 년에 멸종되었고 그와 동시에 Uros언어도 사라져 버렸다. 주변의 Quechua, Aymara 족들과의 혼혈인들이 Uros 섬에 살고 있다. 페루 인디오와 사진을 찍으면 돈을 달라고 하는 경우가 많다. 여행 책자에는 돈을 주는 것 보다 볼펜이나 과일등을 가져다 주는 것이 더 좋다고 한다. 우리도 볼펜과 작아진 옷을 가지고 가서 Uros 섬의 어린 아이들에게 주었다. 그 섬의 어른에게 먼저 양해을 구하고 아이들에게 주었는데 모두 다 좋아하였다. 사탕을 주니까 껍질을 벗기지 않고 그냥 입에 넣어서 내가 사탕 포장을 벗겨서 다시 주었다. Puno 항구 에서 45 Km 떨어진 Taquile 섬은 직조로 유명하다. 이 섬에 가는 배의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2 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8월에 바람이 많이 불면 섬에서 배가 떠나지 못하여 하룻밤을 보내야 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우리가 도착한 7/25일은 카톨릭의 Fiesta de Santiago (St. James) 축제이어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광장에 나와서 축제를 벌이고 있었다. 동네 꼬마들도 정장을 하고 축제를 열심히 보고 있다. 이 축제는 관광객을 위한 행사가 아니라 마을 사람을 위한 것이다. 이곳에는 동네 유지와 기관장들이 나와서 앉아있었다. 함께 유람선을 타고간 약 30 명의 관광객중에 영어를 사용하는 사람은 시카고에서 온 미국인 부부, 네덜란드에서온 2 명, 체코 커플 2 명, 그리고 우리 부부이고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스페인어를 사용한다. 안내인이 스페인어로 한참 설명하고 영어로는 짧고 간단하게 설명하는 것 같아서 약간 소외감을 느꼈다. 내가 사진을 찍는데 네덜란드에서 온 Richard가 앞에서 장난을 하여서 함께 사진을 찍고 email로 보내주기로 하였다. 관광버스를 타고 여행할 때나 현지 비행기를 타는 경우에도 대부분의 경우 우리가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이곳 여행사 직원도 일본사람들이 단체로 다니는 것은 보았어도 동양인 둘이서 여행하는 것은 매우 드물다고 한다.
7/26일 Juliaca에서 비행기를 타고 Lima에 도착하였다. Miraflores에 있는 호텔에서 택시를 타고 구 도시 중앙에 있는 Iglesia de San Francisco, Plaza de Armas, Catedral를 보고나서 Museo Nacional de Antropologia, Arqueologia, e Historia de Peru (National Museum of Anthropology, Archeology and History of Peru)에 갔다. 건물은 우리나라 시골 초등학교처럼 보이는데 전시중인 유물은 국보급이다. 리마는 바닷가에 있어서 기온차이가 별로 없다. 낮에는 20 도 밤에는 16 도 정도이다. Cusco와 Puno등의 고산지대의 온도는 낮에는 20도 정도이지만 밤에는 영하 1도 정도로 일교차가 아주 크다. 7월은 남반구의 겨울이다.
호텔에서 주는 아침 식사가 여행비에 포함되었는데 대부분 과일까지 주었고, 점심은 주로 뷔페식으로 하는데 음식이 아주 좋다. 저녁은 대부분 중상급의 좋은 식당에서 페루 전통요리를 주문하였다. Ceviche 는 날 생선에 레몬즙을 넣은 것으로 페루에서 제일 유명한 것이고, 알파카 고기, lomo saltado (소고기 요리), aji de gallina (닭), Titicaca호수에서 잡은 송어를 훈제시킨 요리를 먹어보았다. 그리고 Cusco에서 한국식당 아리랑에 한번 갔었고 점심을 아주 잘 먹은 날은 김치 사발면과 햇반으로 저녁 식사를 하였다. 한국보다도 음식값이 저렴한데다가 요리를 하나 주문하여 두사람이 먹었기 때문에 식사비는 별로 들지 않았다.
고산병 (이곳 말로 soroche)은 3,000 m 이상에서 나타난다고 한다. 두통과 속이 울렁거리는 증상을 보이고 맥박이 빨라진다. 물을 많이 마시고 코카잎 차를 많이 마시고 천천히 움직이라고 하여서 코카차를 여러 번 마셨다. Cusco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에 고산병 증세가 조금 나타났지만 아침을 조금 먹고 해발 2,800 m 의 Urubamba 계곡을 다니면서 고산병 증세가 없어졌다. 그 다음 날 아침도 약간 머리가 아팠지만 마추피추로 내려가면서 바로 좋아졌다. Puno로 버스를 타고 가기 전날 저녁에 고산병 약을 사서 한알을 먹었다. 버스를 타고 4,300 m 고개를 지나서 3,800 m 지역으로 가면서 고산병이 나타나면 정말 힘들기 때문에 약을 먹은 것이다. 그랬더니 그 다음 날에는 아침부터 몸이 가벼웠다. 또 Uros 섬에 배를 타고 가기 전날 밤에도 약 한알을 먹었더니 그 다음 날도 몸 상태가 아주 좋았다. Puno를 떠나기 전날 밤에는 약을 안먹었는데 그 다음 날 아침에 약간의 두통 증세를 보인다. 이 약은 Boliva 산이고 상품명은 Sorojchi Pill이라고 되어있다. 주성분은 Acetylsalicylic acid 325 mg, Salophen 160 mg, Caffeine 15 mg이다. 왼쪽 사진은 Puno에서 찍은 것이다. 미역국 포장과 instant coffee봉투가 팽창한 것을 볼 수 있다. 오른 쪽 사진은 리마에서 찍은 것이다. 고산지대에서는 기압이 낮아서 밀폐된 봉투의 부피가 놀랄 정도로 팽창한다 (고산병 참고1 참고2).
관광객이 있는 곳이면 거의다 internet cafe가 있다. Cusco에서는 1시간에 S/. 1.50, 마추피추 아래 마을에서는 S/. 4 이다. Windows OS와 자판은 모두 스페인어이다. 스페인어 자판에서 @ 표시를 하려면 ctrl-alt를 누른 상태에서 2를 눌러야 한다.
우리는 북반구에 살기 때문에 남향집에 햇빛이 잘 들어온다. 점심때 해를 바라보면서 왼쪽 방향이 동쪽이다. 그런데 남반구에서는 해가 북쪽에 있어서 해를 바라볼 때 오른 쪽이 동쪽이다. 처음에는 guide가 말하는 방향하고 내가 짐작한 방향이 서로 반대라서 한참 생각을 해보니까 해 있는 쪽이 북쪽인 것을 깨달았다. 해있는 방향이 남쪽이라고 믿었던 것은 북반구라는 상황에서 올바른 것이다. 이와 같이 과학적인 사실도 주어진 제약조건이나 context를 고려하지 않고 모든 경우에 적용되는 불변의 진리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다. 가치관이나 도덕에서는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기가 더욱 더 어렵다. 2,000 년전에 Pucara에서 어린 아이를 대지의 여신 Pachamama에게 제물로 바치던 잉카사람들은 그 상황에서는 축복받을 일을 한 것이고, 16 세기 후반에 잉카 신전을 파괴하고 카톨릭 성당을 건축하던 스페인 사람들은 사탄의 건물을 부수고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면서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일이라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열녀문을 가문의 영광으로 여기지 않는다. 한편 동성연애자 목사도 인정하기 시작하였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 것일까? 지금 이 시대, 우리 나라에서 내가 진리라고 믿고 있는 많은 것들 중에 잘못된 것이 또 얼마나 많을까?
첫댓글 모소님! 정말 요긴한 정보입니다. 오늘도 감사히 잘 보고 갑니다.^^
부산도 많이 추운가요? 늘 건강하시길 바랍니다..도움 되셨다니 기쁩니다.
많은 도움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