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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하스 공항 우체국의 해프닝
페레그리노(순례자) 또는 카미노(Camino/사도 야고보의 길)와 무관한 방이다.
비록 슬럼가의 허술한 방이기는해도 안전이 보장되어 있고 누구의 눈치도 볼 일 없으며
이베리아 반도에서 가장 자유로운 방이며 밤인데도 잠을 이루지 못했다.
까닭이 무엇일까.
성취의 환희로 인한 흥분 때문이라면 포만감을 느껴야 하는데 왜 공허할까.
바로 전날 밤, 트레스 칸토스 시청 지하의 알베르게에서 환희에 찬 밤을 보냈건만 이와
같이 급전(急轉)한 이유가 무엇일까.
75일간의 여정에서 나흘을 남겨놓은 71일 동안 걸었다.
각 들머리로의 이동시간 6일을 제한다 해도 65일을 하루같이 온종일 걸었다.
당초의 예상(1.500km)보다 550km가 넘는 거리, 어림잡아 2.050km 이상이다.
게다가 귀국 비행기(현지시간6월16일아침)시간과 마드리드 국제공항 우체국에 탁송된
짐의 보관만료일에 맞춰 빠듯하게 짠 마드리드 길 일정이 이틀이나 단축되었다.
14일에 마드리드에 입성하여 하루를 쉬고 귀국하려 했는데 12일에 도착했으니까.
마드리드 체류에 2일간의 마지막 보너스까지 주어진 셈이다.
그런데도 왜 불만이며 허전해 하고 있는가.
차라리 이틀을 미리 당도하지 않고 당초 예정대로 빠듯하게 도착하느니만 못하다니?
가까스로 완료했다면 불만과 공허 따위의 사치스런 감정놀이 할 겨를이 없을 것이니까.
귀국하기 전, 마드리드에 머무는 3일 동안에 나는 이 까닭을 밝혀야만 가벼운 기분으로
집에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6월 13일, 마드리드의 첫 나들이는 국제공항 우체국 방문.
도심에서 북동으로 13km쯤 떨어진, 트레스 칸토스로 가는 길에 마드리드의 화곡동이라
명명했던 바라하스 국제공항(Aeropuerto de Madrid-Barajas)으로 갔다.
찾아간 공항우체국에서 해프닝이 벌어졌다.
우체국 바닥에 널려있는 박스들중 내 짐이 빤히 보이는데도, 탁송전표를 받아 대조하고
서도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우겨대며 늙은이를 당황하게 한 헤비급 여직원.
포르투 길 레돈델라 우체국에서 탁송한 후 산티아고 우체국에서 사아군으로 이송(移送),
사아군 우체국에서 다시 마드리드로 보냈기 때문에 멀리서도 쉽게 알 수 있는 박스건만.
여직원의 무성의에 화가 버럭난 나는 박스있는 데로 달려가서 내 짐임을 확인해 주었다.
그랬으면, 동양 늙은이에게 '로 시엔토'(lo siento/미안합니다) 한마디쯤은 당연히 있어
야 하건만 굼뜨고 떨떠름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뚱보녀.
'댐 잇'(damn it/빌어먹을)!
한마디 뱉고 나왔는데 알아들었을까.
프랑스 길과 포르투 길에서 애써 모은 자료들인데 실기(失期)하지 않고 찾은 것을 다행
으로 여겨야 한다?
아침부터 악담을 뱉은 늙은이도 마음이 언짢은데 원인이 어디에 있건 듣게 된 그녀 또한
기분 좋은 일이겠는가.
마드리드 왕궁과 알무데나 성모 대성당
짐을 숙소에 놓고 잠시 오수를 취한 후 에스파냐 광장(Plaza Espana)으로 갔다.
마드리드의 중심부(centro)인 이 지역은 골목들과 건물들이 서로 빼닮았기 때문에 외래
인에게는 헷갈려서 헤매기 십상인 곳이다.
바일렌 로(Calle Bailen)를 따라 사바티니 정원( Jardines de Sabatini/왕궁의 정원)을
지나면 스페인의 왕실 공식관저인 웅장한 마드리드왕궁(Palacio Real de Madrid)이다.
135.000m²의 건평에 3.418개의 방을 보유한 유럽 최대의 궁전이지만 카를로스 왕(Juan
Carlos)과 왕족은 마드리드 외곽의 작은 궁전에 기거한단다.
국가적 행사에만 사용할 뿐이라니 작은 나라 한국의 늙은이에게 쉬이 이해될 일인가.
더구나 중세 전성시기가 아니고 재정적 위기에 봉착해 있는 작금의 스페인 아닌가.
내 눈이 서쪽으로 흐르는 만사나레스 강을 따라가다가 놀란 것은 어제 오후에 황당했던
프린시페 피오가 바로 지근이라는 사실이다.
이어서 마드리드 대성당으로 나아갔다.
알무데나 성모 대성당(Catedral Ntra. Sra. de la Almudena)이다.
외관(外觀)이 사도 야고보의 길들에서 보아온 대성당들에 비해 좀 왜소하고 단조로우나
건물이 싱싱하게 느껴졌는데 완공된지 20년에 불과하단다.
1561년, 스페인의 수도가 톨레도(Toledo)에서 마드리드(Madrid)로 천도되었으나 교회
의 중심지는 여전히 톨레도에 머물러 있었다.
따라서 가톨릭국가의 새 수도 마드리드는 모든 교회의 중심이 될 알무데나 성모(Virgen
de la Almudena)를 위한 주교좌 성당의 건립을 논의하게 되었다.
논의는 16c부터 시작되었으나 본격적인 공사는 1879년에 착수하였는데 우여곡절 끝에
1993년에 완공되었다니까 114년에 걸친 공사였으며 스페인을 방문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축성되었단다.
시민전쟁(1936 ~1939/내전)의 발발로 대성당 건축은 1950년까지 중단, 방치되었다가
공사가 재개될 때는 설계를 전면 수정했단다.
완공된 후의 대성당이 맞은편의 마드리드 왕궁과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해서 였다나.
"내부는 독특한 현대식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부속경당과 조각상들은 네오고딕 양식
에서 팝아트 데코 양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꾸며져 있다"지만 나는 고백한다.
"무지, 무식해서 아무리 설명해도 모른다"고.
대성당의 위치는 1085년에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6세(Alfonso VI)가 마드리드를 탈환
할 때 파괴되었던 중세 모스크(mosque)가 있던 자리로 추정된단다.
한데, 알무데나(중세에 성모 마리아의 모습을 새긴 성상)와 관련된 전설이 다양하단다.
아랍어로 성채를 의미하는 단어 ‘알 무다이나(Al Mudayna)’에서 유래했다는 마드리드
수호성모의 이름은 '알무데나(Almudena)'
8c초, 이슬람 군대가 진군하여 마드리드를 장악하기 전에 시민들이 마드리드를 에워싼
성벽 안에 도시의 보호를 요청하는 뜻에서 성모상을 감추어두었단다.
마드리드를 탈환한 기독교 군은 성모상을 찾기 위해 며칠을 기도했는데 성모상이 숨겨
진 벽 부분이 절로 허물어지면서 성모상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는 것.
기독교 군대가 수세기 동안 이슬람의 수중에 있는 마드리드로 진격할 때 성모 마리아가
그들 앞에 나타나서 길을 안내했다.
성모의 안내로 따라가 도달한 성벽이 갑자기 무너지는 기적이 일어났으며 그 길을 통해
도시 안으로 진격했다는 다른 전설 등.
마드리드 길의 순례자여권 발급이 궁금하여 대성당에서 알아보려 했으나 마요르 광장
(Plaza Mayor)의 관광안내소(Oficina de Turismo)로 핑퐁을 쳤다.
안내소 직원이 알려준 곳은 산티아고 로(Calle de Santiago, 24)의 사도 야고보와 세례
요한 교구교회(Real Iglesia Parroquial de Santiago y San Juan Bautista).
교회의 문은 정문 옆 벽에 붙어있는 미사 시간표대로 열리는지 모든 문이 잠겨 있어서
인터폰으로 내가 페레그리노임을 밝혔으나 근무시간이 아니라며 끊어버리는 상대편.
아쉬울 것이 없으니 망정이지 곧 길을 떠나야 하는 순례자라면 얼마나 낙담될까.
경직되고 관료적이며 무성의한 이 교회의 이미지가 나로 하여금 귀국후 바로 그들의 홈
피를 방문하게 했다.
"마드리드에서 가장 오래된 하코베아(Jacobea/사도 야고보)의 성전으로 알무데나 대
성당에서 200m 지점에 있고 사도 야고보의 순례길(Camino de Santiago/마드리드 길)
이 시작되는 장소다.
이곳에서 매년 2000명이 순례자여권(Credencial)을 발급받고 있다"는 글을 읽었다.
내가 12박 13일 동안 만난 마드리드 길 순례자는 20명 미만이다.
구간순례자를 제외하면 10명이 채되지 않으므로 하루 1명꼴이 못되며 이는 알베르게의
방명록을 통해서도 어림할 수 있다.
내가 유일하게 역방향으로 걸었으므로 차량편이 아니라면 누구도 나를 피해 갈 수 없다.
더구나 6월은 성수기에 해당한다.
그러니, 1일 평균 5.5명꼴의 순례자여권을 발급했다는 것을 내 어찌 믿을 수 있겠는가.
대부분이 여권을 가지고 본국으로 직행했거나 차량을 이용했는가.
사도 야고보의 마드리드 길의 현주소를 보는 것 같아 씁쓸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준다
아침 6시부터 운행한다는 메트로를 이용하여 이틀 앞으로 다가온 귀국비행기 탑승시간
(9시 30분)에 맞추는 연습을 했다.
숙소와 가장 가까운 노비시아도(Noviciado) 역에서 10호선 열차를 타고 누에보스 미니
스테리오스(Nuevos Ministerios) 역에서 8호선으로 환승하여 아에로푸에르토 티1(Ae
ropuerto T1) 역에서 하차하기를 어제도 했지만 시간을 정확하게 측정하기 위해서.
어제는 오직 짐 찾는 일에만 매달려 사려깊지 못하게 무심코 다녀왔기 때문이다.
격일로 운항하는 대한항공의 탑승수속이 한창 지행중이었다.
간 김에 귀국 예약 확인까지 한 후 공항에서 집에 전화했다.(현지시간 9시경)
집 떠난 4월 3일로부터 73일 만의 이 전화는 이번 여정에서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막내가 준 전화카드가 있지만 모바일 휴대를 거부한 이유에 부합되지 않아 쓰지 않았고
포르투 길에서 로저교수의 호의도 사양했을 만큼 내게 무소식과 희소식은 동의어였다.
여기에는 모바일에 버금가는 인터넷을 외면하는 것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이 믿음의 근거는"믿음은 바라는 것들을 보증해 주고 볼 수 없는 것들을 확증해 준다"는
기독교 신약 히브리서 11장 1절이다.
내 가족은 내가 매주 한 두번 보내는 엽서를 통해 내 족적이라도 알고 있지만 나는 오직
믿고 있을 뿐이었다.
우리가 서로 멀리 있고 소식이 두절된 기간에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는 않으실 것"
(신약 고후10:13)을 믿지 못했다면 어떻게 오랜 세월에 걸친 나그네 길이 가능했겠는가.
또한,'그 분'은 한쪽 문을 닫으실 때는 반드시 다른쪽 문을 열어놓으시지만 우리가 당황
하여 그 문을 찾지 못하는 것 뿐이다.
설영, 힘겨운 시련이 닥치거나 출구가 없다 한들 당장 달려갈 수 있거나 리모트 컨트롤
(remote control/遠隔操作)로 해결이 가능한가.
그러므로 내가 전화하는 시점은 곧 귀국이 가능한(바로 달려갈 수 있는) 때다.
윤기없는 아내의 음성이 수상쩍어 딸을 다그쳐 확인한 것은 그 사이에 아내가 응급실로
실려가서 수술을 받고 담도에 관을 끼워넣은 상태로 사는 중이라는 것.
자식들을 긴장하게 했지만 어려운 때 서로 돕는 가족이 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담도가 막히는 병은 남편의 부재와 무관하게 간혹 발생하는 노인병이란다.
멀리 떠나 있는 영감에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는 하나 고통스러웠을 늙은 아내는
물론 난감하고 당황했을 애들에게도 몹시 미안했다.
어느 때, 며칠간 까닭없이 심란했으며 밤에도 안절부절못했는데 그 때였던가.
더 나쁜 상태가 아니었음을 다행으로 여기고 현재는 위중한 상태도 아니므로 일정대로
진행하기로 했다.
격일운항이기 때문에 앞당긴다면 이틀이 당겨지게 되지만 이미 탑승수속이 완료되었을
뿐 아니라 짐이 숙소에 있으므로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고.
그렇기는 해도 귀국 비행기를 탈 때까지 이틀이 무척 길고 지루할 것만 같았다.
지루함을 잊기 위해 북부에서 남부까지 종일 더 걸으려고 네쌍둥이 빌딩 앞으로 갔다가
지근의 차마르틴 역(estacion de Chamartin/renfe)의 유혹에 끌리고 말았다.
관광욕(慾) 때문이 아니고 달리는 열차에 무심코 몸을 맡기고 싶었다 할까.
더는 쓸 일이 없게 되는 1년짜리 경로카드도 이런 생각을 거들었을 것이다.
역 여행상담소 직원의 도움으로 결정한 당일치기 목적지는 레온(leon).
프랑스 길에서 1박했으며 옛 레온 왕국의 수도였던 도시인데 억수로 쏟아지는 빗길의
대학방문에 얽힌 추억 밖에는 없기 때문에 미련이 남았던가.
그러나 서투른 발권 여직원 때문에 포기할 뻔 했는데 그녀의 미숙이 끝내 사고를 쳤다.
경로카드를 제시하였음에도 적용하지 않아 재발행할 때 신용카드를 취소하고 현금으로
결제했는데 귀국 후 황당하게도 카드결제금액 청구서를 받았다.
한 사람이 동일 열차를 타는데 결제방법과 금액이 다른 2개의 승차권을 사용하다니?
카드사를 통해 항의했으나 우겨대던 차마르틴 역으로 하여금 끝내 백기를 들게 한 것은
증빙자료를 꼼꼼히 챙겨두는 내 습관의 위력이었다.
사용한 현금결제 승차권을 버렸더라면 억울하게도 꼼짝 못하고 당했을 것이다.
카미노 데 산티아고, 대미를 장식하다
6월 15일(현지시간)은 마드리드의 마지막 날이며 이베리아 반도 여정을 마치는 날.
74일째는 대미를 장식함은 물론 아내의 와병소식으로 인한 심란을 덜기 위해 북부 마드
리드에서 남남서단의 알무데나 대성당까지 시내 구간을 걸으려고 숙소를 나섰다.
마드리드에 입성해 중지했던 베고냐 성모교회에서 4쌍둥이 빌딩(CTBA지구)으로 갔다.
CTBA(CuatroTorres Business Area)는 레알 마드리드 축구팀(Real Madrid Club de
Futbol)의 훈련장이었다는 카스테야나 가(Paseo de la Castellana)의 상업지역이다.
에스파시오(Espacio/230m-57층), 카하 마드리드(Caja Madrid/250m-45층), 크리스
탈(Cristal/250m-52층), 피w시(PwC/236m-52층) 등 2007년~2009년에 준공되었다는
4동(棟)의 마드리드 최고층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마드리드 뿐 아니라 스페인의 명물이라나.
1990년대 초에 마드리드 대학교에 유학했던 큰 딸에 의하면 공부하느라 구경다닐 틈이
없기도 했지만 이 일대는 대부분이 미개발지역이었단다.
남북으로 긴 카스테야나 가와 CTBA지구는 수도 마드리드의 현대화의 상징들이란다.
정남으로 곧게 뻗은 카스테야나 가의 남에서 북으로 표시된 화살표를 역으로 따라가면
카스티야 광장(Plaza de Castilla)도로 양쪽에 삐딱하게 기운 두 건물이 별난 모습이다.
유럽의 문(Puerta de Europa/또는 키오/Torres KIO/Kwait Investment Office)라는 이
쌍둥이 빌딩은 각각 높이 115m, 26층으로 마주서서 15도 인사하고 있는 형국이다.
계속해서 카스테야나 가를 따라 남하하면 쿠스코 광장(Plaza de Cuzco)을 지난다.
나는 에우로파(Europa/120m-30층)와 피카소(Picasso/157m-46층), 방코 데 빌바오
(del Banco de Bilbao/107m-32층)를 지나 국철 아토차 역(Atocha) 한하고 내려갔다.
사도 야고보의 마드리드 길 걷기를 마드리드에서 시작한다면 알무데나 성모 대성당과
산티아고 교회를 떠나 이 길을 따라서 북상해야 한다.
CTBA지구의 국철 차마르틴 역(Chamartin) 이후 시야에서 사라졌던 철도가 아토차 역
(Atocha)에서 다시 나타났다.
그 사이의 남북간을 지하로 운행하기 때문이다.
아토차 로(Calle Atocha)를 따라 마요르 광장으로 갔다.
이틀 전에 걸었던 산티아고 로(路)를 따라서 대성당으로 다시 갔다.
2011년 6월 15일 오후 5시경, 마드리드의 알무데나 성모 대성당에서 74일간의 장정(長
程)에 마침표를 찍었다.
마드리드의 북에서 남으로 10km여를 더 걸음으로서 총 2.060km가 넘는 사도 야고보의
길 장정은 페레그리노 아닌 한 늙은 길손의 완성도를 극대화했다고 자평하면서.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부른다지만 욕심을 마음껏 부린 결과다.
환상의 솜포르트 길과 실시간으로 시련과 성취의 길인 마드리드 길(역코스)은 전적으로
욕심으로 얻은 보너스 길이니까.
국내에서 과욕이 119구조대를 부르게 하였음에도 같은 과오를 반복한 것은 산야에서만
발동하는 욕심에 브레이크(brake)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베리아 반도에서는 욕심이 하자는 대로, 전적인 자유의지에 따라 하였음에도
화를 부르지 않은 것이 국내와 다른 점이다.
사도 야고보의 길에서는 내 욕심에 성능 좋은 자동 브레이크가 장착되어 있었는가.
이베리아 반도의 긴급구조대를 부르지 않은 것은 과욕을 억제하는 브레이크 덕인가.
그렇다면 좀 더 과감하게 욕심을 부려도 됐을 것이며 그랬다면 더 흡족한 성취감에 취해
있을텐데 그러지 않은 것이 귀국을 앞두고 나를 불만과 아쉼에 사로잡히게 하나?
스페인의 수호성인이며 내가 72일간 걸어온 길의 주인인 사도 야고보는 "욕심이 잉태하
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 온다"(신약 야고보1:15)고 경고했다.
그의 길을 걸으면서 더 많은 욕심을 부리지 않은 것을 아쉬워 하고 있다니?(욕심의 성격
은 다르지만)
내가 이베리아 반도에서 순례자(peregrino) 또는 순례길(camino de Santiago), 사도
야고보의 길 등의 표현을 상용(常用)한 것은 단지 관행적이었을 뿐이다.
나는 종교적 영성수련,고행을 통한 자기검증과 성장 또는 유사한 목적을 가진 순례자가
아니고 오로지 늙은 길 나그네였다.
순례길도 내게는 비교적 마음 편히 실컷 걷기 알맞는 길이었을 뿐이고.
그러므로, 내게 놀라운 은혜(Amazing Grace)란 때와 장소를 불문하고 오직 당당하고
힘차게 걷는 것 자체를 말한다.
국내에서 보다 더 놀랍고 많은 은혜를 받았다면 그것은 국내의 길들에서 보다 더 마음
껏 많이 걸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스케치와 단상
대성당에서 돌아와 숙소가 위치한 마르께스 데 산타 아나 거리를 거닐어 보았다.
나흘을 보내면서도 처음이며 마지막이다.
내 눈에는 한국인과 중국인, 일본인을 구별하는 능력이 없다.
오직 두 귀만이 그 일을 가능하게 할 뿐.
마드리드의 골목상권을 싹쓸이 한 중국인들을 한국인으로 착각하기 일쑤였는데 귀(耳)
로 가려냈으니까.(말을 들고)
그들에게는 시에스타 휴점이 없는 대신 바가지가 대기하고 있다.
이베리아 반도의 전반적인 현상이지만 마드리드의 이곳은 특히 심한 것 같다.
주민들이 남녀노소 불문하고 모두 야외 바르(bar)로 몰려나온 듯한 야경이.
골목마다 다닥다닥한 집들이 오죽이나 답답하면 해지기를 기다려 우르르 나올까.
들어가기가 오죽 싫으면 새벽녘까지 저러고 있을까.
우천 외에는 날이 날마다 이러는 그들을 나는 이같은 시각으로 보고 있는가.
무얼 먹거나 마시고 싶어도 혼자는 주눅이 들어 엄두를 내지 못하거니와 이 시간대에는
손님 대접도 받지 못한다.
와인 1병을 사들고 배회하다가 술잔 구할 기회를 놓쳤다.
각종 음료와 크림 가게에 들러 핸섬(handsome) 청년에게 와인잔 하나를 팔라고 했다.
잔 하나를 넣은 봉투를 주며 한사코 돈받기를 거부한 젊은이의 인상이 하도 생각나 발
길을 돌려 갔으나 어느 새 문이 닫혔다.
내게 호의를 베푸는 이들이 이렇게 많은 이베리아 반도에 여생을 맡겨봄은 어떨까.
그들이, 금과옥조로 삼아오던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이 입에서 조차 멀어져 가고 있는
우리네 보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이라 여겨지니 말이다.
75일째 되는 2011년 6월 16일의 전야.
이베리아 반도의 마지막 밤은 토끼잠이었다.
깰 때마다 시간을 확인했고 그 때마다 시계가 정상인가도 살펴보았다.
메트로의 첫 차를 놓지면 귀국비행기도 놓치고, 영영 이베리아 반도의 홈리스가 되는가.
새벽에 나와 메트로의 닫혀 있는 셔터(shutter)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서있다니.
사도 야고보의 길에 모여든, 나와 상대한 세계의 모든 늙은이를 두달 이상 스스로 굴복
하게는 했지만 나도 남과 다를 것 없는 77세의 늙은이 아닌가.
한국인이 득실거리는 프랑스 길과 땅끝 길 외의 길들(포르투, 솜포르트, 마드리드 등)에
서는 한국인을 만나지 못했다.
볼성사나운 꼴들을 보지 않으므로 마음이 편하고 좋았는데 바라하스 공항의 대한항공
탑승수속장은 한국의 공항을 방불케 했다.
값이 최고로 비싸지만 국적비행기라 그럴 것이다.
아재비 떡도 싸야 사먹는다잖은가.
비싸도 우리 국적비행기를 탈만한 애국심이 내게는 없다.
축적된 마일리지를 사용하느라 이용하는 것일 뿐.
이미 누누히 말했으므로 듣기 거슬리는 표현의 중언부언 대신 경유지 암스테르담 공항
대기실에서 만난 한 한국 영감의 말을 소개한다.
"온갖 풍진을 몸으로 이겨낸 특별한 분" 으로 보여 찾아왔다는(관상가?) 그는 나와 연배
처럼 보였으나 나보다 10여년 연하라 했다.
부부가 스페인 1개월 여행에 1만 유로 이상 썼다는 D광역시의 돈많은(?) 그가 2달 반에
1.500유로(항공운임 제외)도 쓰지 못한 늙은이를 부러워하다니.
마치 밀란의 거리를 활보하는 걸인을 부러워한 어거스틴(St. Augustine)처럼.(참회록)
돈만 많이 썼을 뿐 공허하다는 그.
내 공허는 전적으로 마음먹기 달렸으며 이미 넘치도록 채웠지만 많은 돈을 쓰고도 흡족
한 응답을 받지 못함에서 생긴 그의 공허는 더 많은 돈 외에는 해결의 길이 없을 것이다.
누구의 꾐으로 와서 많이 돌아다녔지만 스페인의 볼거리가 자기에게 이렇다할 감흥을
주지 못했는데 문화와 정서가 다르기 때문일 것이라는 그의 말에 나는 일면 동의했다.
나 또한 스페인의 것이 무엇이며 스페인의 문화와 정서는 어떤 것인지 아직도 모른다.
이 분은 내게 귀국 비행중에 스페인에 대해 마지막으로 점검해볼 동기를 부여했다 할까.
유럽에서 가장 오래 되었으나 가장 복잡한 역사를 가진 나라 스페인.
기원 전후의 500년간 로마제국의 지배를 받을 때는 히스파니아(Hispania).
5c초 부터는 게르만계 반달족과 서고트족, 이슬람족이 차례로 지배해온 나라.
711년,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침입해온 이슬람의 왕국은 거의 800년이나 이어갔다.
1c부터 꾸준히 성장해온 기독교는 이슬람족을 축출하기 위해 7c반에 걸친 '레콘키스타
(Reconquista/국토회복운동)'라는 이름의 투쟁과 전쟁을 하여 1492년 마침내 기독교
왕국을 건설했다.
이 기간에 사도 야고보는 스페인의 수호성인, 백마타고 칼을 휘두르는 무어인의 처단자
(Santiago Matamoros)로 등극했다.
또한 그의 유해 발견을 계기로 사도 야고보의 길(Canino de Santiago)이 개설되었다.
명맥만 유지해 오던 이 순례길은 각광받는 글로벌 황금길로 부활함으로서 산티아고는
명실상부한 스페인의 수호성인의 자리를 굳게 지키게 되었다 할까.
개발을 거듭하여 12개로 늘어난 길들(12사도를염두에두었는가)은 관광과 편의를 위해
보수와 이설(移設)도 거듭하고 있는데 한국인이 가장 열광적이다.
왜 그럴까.
왜 야고보에 열광하며 야고보의 길로 모여드는가.
야고보가 스페인인의 사랑과 존경, 더 나아가 숭배까지 받는 것은 그가 스페인의 수호
성인이니까 그렇겠지만 스페인 밖의 기독교도들은 왜 그러는가.
그들은 예수를 믿는가 야고보를 믿는가.
온통 야고보 밖에 없는 야고보의 길에서는 예수의 존재감은 희박하니 어찌 이런 일이?
그들의 로사리오 기도에 마리아와 예수 외에 야고보도 있는가.
기독교 왕국의 이사벨 1세는 기독교 영역확대를 명분으로 이탈리아의 탐욕스런 탐험가
콜롬보(Cristoforo Colombo/Cristobal Colon 스페인/Christopher Columbus 영어)를
고용해 금과 보물을 약탈, 스페인의 전성기를 열었다.
그러나 당시의 스페인의 기독교(가톨릭)를 우리 안에 있는 99마리 양보다 길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 산야를 헤매는 목자의 종교라 할 수 있는가.
만인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를 진 성자(聖子) 예수를 믿는 종교일 수 있는가.
그들의 종교재판을 보라.
재판이 열렸던 장소를 지날 때마다 예수는 홍의(紅衣)의 조폭들에 의해 화려한 감옥에
연금되고 예수 없는 재판은 암흑가의 잔혹사에 다름 아니었음에 나는 소름을 지었다.
게다가 전쟁으로 날이 새고 지는 나라였다.
외세의 침략에 대한 저항 투쟁과 식민지 전쟁, 왕국들 간의 먹고 먹히는 전쟁, 반도전쟁
(독립전쟁), 왕위 계승전쟁, 20c중반의 내전(시민전쟁)까지 헤아릴 수 없이 계속되었다.
거룩한 목적이라 해서 악랄한 수단이 정당화 될 수 있는가.
(시민전쟁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조지 오웰의 '카탈루냐
찬가'를 비롯해 여러 소설과 영화로 소개되었다.
미국은 이 때도 겉으로는 중립을 표방했지만 은밀하게 양다리를 걸치고 장사를 했다.
한 쪽에는 비행기를, 다른 쪽에는 기름을 팔아 재미를 본 그들의 버릇은 망하기 전에는
없어지지 않을 불치병이다)
민족 또한 선사시대의 켈트족을 비롯하여 고대 그리스인, 북아프리카와 서유럽인, 카르
타고, 페니키아와 로마인, 반달과 서고트족, 아랍인과 바스크인과 집시 등 많은 종족이
유입된 것은 이베리아 반도의 지정학적 불가피성을 인정하지만 언어도 다양하다.
스페인어 외에도 바스크어, 갈리시아어, 카탈루냐어 등 공용어와 지방 방언들.
마드리드 공항을 이륙하는 순간부터 비빔밥에 대한 기대로 군침이 돌려는 듯 하였는데
실망스럽게도 첫 식사로 나온 고기가 하던 생각을 이어가게 했다.
김치 없는 식사는 단 한끼도 해본 적이 없는 내가 74일간 김치를 생각해본 적이 없다.
밥을 빵으로 대체한 후에 밥 생각도 나지 않았다.
침대를 한사코 거부해온 내가 메트리스 이틀 외에는 줄곧 불평없이 침대생활을 했다.
나의 적응력에 스스로 경악하며 "마음먹기 달렸다"는 말을 실감했다.
"심생종종생 심멸종종멸(心生種種生心滅種種滅)"로 요약되는 원효대사의 돈오(頓悟)도
이것에 다름 아니다.
끝 없이 이어지던 상념은 두번째로 나온 기내식 비빔밥에 의해 종료되었다.
비빔밥을 먹는 순간 불가사의하게도 딴판이었던 내 이베리아 반도의 74일은 한꺼번에
날아가고 4월 3일 이전으로 돌아가버렸으니까.
2개월 반은 짧은 기간이지만 유심히 보며 생각하며 걸은 거리가 2.060km가 넘는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돌아가는 스페인의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헝가리안 처녀 에디나의 영웅적인 모습뿐.(메뉴'카미노이야기 52번글 토말길3 참조)
귀국후 우리는 할아버지와 손녀 관계가 되었는데 오는 6월 15일에 결혼하는 그녀에게
결혼선물을 보낼 수 있어(딸들의 도움이지만) 얼마나 기쁜지.
그리고 차량의 공포로부터 자유로운 사도 야고보의 길에 상응되는 국내의 길로 '서남동
길'에 이어 '휴전선 155마일'을 떠나기 직전에 <카미노 이야기>를 마치게 된 것도. <끝>
첫댓글 고생 하겼습니다 잘 보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