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볼 때 마라톤이 온전한 육상경기로 정착한 것은 불과 100년 전쯤이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마라톤의 공식 거리도 확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저 42km 내외의 거리를 ‘완주해 내는’ 게임이었다.
이 시대에는 주로 많이 걷거나 뛰는 직업을 가진 이들이 마라톤 무대에 섰는데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였다. 물장수, 신문배달원, 우편배달원, 두부장수, 인력거꾼 등이 대개 단골 입상자들이었다. 이 비공식적인 마라톤은 대개 단축코스로 치러졌고 참가자들도 전문 선수가 아니었다. 우승자에게 메달이나 상패 대신 송아지나 쌀, 주방용품 등을 주는 이벤트성 대회였다. 자연히 좋은 기록보다는 순위를 가리는 데 초점이 맞춰지곤 했다.
지구력 중심의 초기 마라톤
마라톤의 거리가 42.195km로 통일된 것은 1924년 파리올림픽부터였다. 이 거리는 1908년 런던올림픽 당시 42km로 설계된 코스를 '윗분'들의 관전 편의 때문에 억지로 늘린 것인데, 이후 올림픽 공식 거리로 정착되었다.
런던올림픽을 통해 마라톤 종목이 정착된 후 우리나라에도 ‘마라톤 선수’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일제 강점기 하에서 조선체육회가 발족되고 학원스포츠가 활성화되면서 5000m, 10000m와 같은 장거리 종목 선수들이 양성된 것이 토대가 됐다. 현 전국체육대회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조선신궁대회에서 42.195km 풀코스를 3시간 29분 37초에 완주(1927년 마봉옥)한 것이 한국 최초의 마라톤 공식기록이다. 동호인들이 흔히 말하는 Sub-4에 해당하는 저조한 기록이지만, 당시만 해도 인간이 105리를 쉬지 않고 뛴다는 것을 경이적로 바라보는 게 세계인들의 시각이었다.
이 시기에 기록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던 데는 코스의 여건도 한몫 했다. 노면이 좋지 않고 고도 제한이 없어 가파른 언덕이 많은 대회도 있는데다가 코스 길이 계측도 정밀하지 못해 고른 환경에서 레이스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완주’가 1차적 목표가 되는 ‘지구력’ 중심의 마라톤 시대를 한국에서는 권태하, 김은배가 이끌었다. 이들은 권투선수 황을수와 함께 한국인 최초로 올림픽 무대에 나간 3인방이다. 1932년 LA올림픽에서 6위(김은배)와 9위(권태하)를 차지하며 일제 치하에서 한국인의 혼을 불살랐다.
나라 잃고 세계를 재패한 30년대
권태하, 김은배가 한국 마라톤의 가능성을 보여준 뒤, 그들이 물심양면으로 지원한 후배들이 급부상하기 시작했다. 손기정, 남승룡이 대표적이었다. 기존의 마라톤이 지구력 위주였다면 이들은 스피드와 지구력을 겸비하여 기록을 단축하는 마라톤을 시작한 선구자들이었다.
이들은 자국 선수들을 올림픽에 내보내려는 일본의 교활한 작전에도 불구하고 전 일본 대표로 뽑혀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했다. 당시 손기정은 21세 되던 1935년 국내에서 비공인세최고기록(2:25:14)을, 일본에서 세계최고기록(2:26:42)을 수립하며 최고의 전성기를 맞고 있었고, 남승룡 역시 선발전에서 손기정을 앞서는 등 강력한 라이벌로 성장하고 있었다. 그 실력을 타국땅인 베를린에서도 유감없이 발휘했다. 모두들 잘 아다시피 세계의 내노라하는 건각들을 물리치고 금메달과 동메달을 차지하며 올림픽 무대에서 사상 첫 세계제패를 이룩한 것이다.
당시 마라톤은 하나의 스포츠이기 이전에 일제 치하에서 울분을 터트려내는 해방구였다. 가난한 이들도 누구나 할 수 있는 운동이면서 거의 유일하게 세계무대에서 경쟁력 있는 종목이기에 나라 잃은 한을 마라톤으로 풀려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선수도 범 민족적인 사명감을 갖고 뛰었고, 국민들도 그만큼 열광했다. 특히 손기정은 시대가 만들어낸 민족의 영웅이자 스스로도 영웅적인 삶을 살다 간 거물이었다.
민족 분단의 현실 속에 전성기를 구가하다
이어서 한국 마라톤의 전면에 등장한 이들은 서윤복, 함기용, 송길윤, 최윤칠 등이었다. 서윤복은 해방(1945) 후 1947년 열린 보스톤 마라톤에서 2시간 25분 39초로 우승하며 다시 한 번 한반도를 열광케 했다. 당시 우리나라는 좌익과 우익으로 갈려 첨예한 이념 대립 중이었지만 일시적으로나마 민족이 하나 되는 화합을 이룰 수 있었다. 세계의 변방이던 ‘코리아’를 세계에 알린 승리이기도 했다. 그러나 손기정이 일장기를 달고 우승한 것처럼 서윤복도 미 군정 하에서 태극기와 성조기을 함께 달고 뛰는 서글픔을 맛봐야 했다.
1948년 임시정부가 수립된 후에도 승전보가 이어졌다. 1950년 보스톤 마라톤에서 함기용(2:32:39), 송길윤(2:35:58), 최윤칠(2:39:58)이 각각 1~3위를 차지하며 세계 최고의 무대를 휩쓴 것이었다. 세계적으로 다시 한 번 ‘코리아’를 알리고 한국이 마라톤 강국이라는 것을 증명한 쾌거였다. 그러나 이들의 이름은 대중에게 그리 익숙지 않다. 우승 후 얼마 되지 않아 6?25 전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포화 속에 이 3인방이 쉽게 잊혀졌고, 근래 들어 재조명된 바 있다.
이처럼 1930~1950년대에 이르는 한국 마라톤의 전성기는 일제강점기와 좌우익의 대립으로 점철된 시기였다. 반바지와 러닝셔츠 한 벌이면 족한 마라톤을 통해 억압과 가난에 지친 젊은이들이 세계 재패의 큰 꿈을 꾸었던 것이다. 마라톤은 그렇게 한국인의 투혼을 불사르는 민족적인 스포츠였다.
세계의 중심에서 멀어진 한국 마라톤
1952년 들어 세계 마라톤은 격동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제임스 피터스가 기존 세계기록을 5분 가까이 당긴 2시간 20분 42초의 기록을 작성했고, 그해 헬싱키올림픽 마라톤에서는 이미 5000m, 10000m를 재패한 체코의 ‘인간 기관차’ 에밀 자토펙이 2시간 23분 3초로 우승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최윤칠이 4위를 차지하며 선전했다. 종전 후 1956년에 열린 멜버른올림픽 마라톤에서도 이창훈이 자토펙을 제치고 4위를 차지했다. 2년 뒤에는 <도쿄아시안게임> 마라톤에서 우승하기도 했다. 이 밖에 임종우, 한승철이 이 시기에 활약한 선수들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는 꾸준히 세계의 문을 두드리며 정상급 수준을 유지했다. 그러나 끈기와 정신력을 앞세운 우리와 달리 세계 마라톤은 과학적인 훈련을 통해 스피드 위주의 마라톤으로 변모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맨발의 아베베’로 불린 에티오피아의 아베베 비킬라였다. 덴마크 출신 코치의 지도를 받은 그는 1960년 로마올림픽 마라톤에서 맨발로 2시간 15분 16초의 세계기록을 세우며 우승한데 이어, 1964년 도쿄올림픽 마라톤에서는 2시간 12분 11초의 세계기록으로 우승했다. 세계는 그의 놀라운 스피드에 감탄했다. 마라톤대회에서 5km 랩타임을 중요한 지표로 여기게 된 것도 이때부터였다. 우리나라는 김연범, 이상철, 송삼섭 등이 선배들의 뒤를 이어 활약했지만 세계기록에 근접하지 못하고 있었다.
1964년 도쿄올림픽부터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 이후까지 약 20년간은 한국 마라톤의 긴 암흑기였다. 우리 선수들은 세계 주요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고, 세계기록의 차이는 좁혀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 어렵고 힘든 시기를 달린 이들이 김봉래, 김차환, 조재형, 문흥주, 박봉근, 박원근, 김양곤 등이다. 이들은 한국 마라톤의 숨은 공로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국제무대 성적이 나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옛 영광을 반추하며 사명감을 가지고 달리며 명맥을 유지했다.
뒤이어 이홍열, 이종희, 유재성, 김원탁 등은 암흑기를 벗어나는 과정을 이끌었다. 특히 이홍열은 1984년 동아마라톤에서 2시간 14분 59초로 10년 만에 한국기록을 깨며 희망을 안겨주었다.
또 한 번의 전성기, 영광을 재현하다
선배들이 2시간 12분대까지 당겨놓은 기록을 다시 세계적인 수준까지 끌어올린 이들은 김재룡, 김완기, 백승도, 황영조 등이었다. 1990년 이후 김재룡과 김완기가 11분대를 찍으며 기록 단축에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신성 황영조가 가세하며 ‘3두마차’로 떠올랐다. 세 명이 물고 물리는 치열한 기록경쟁을 벌이면서 한국 마라톤은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을 준비를 했다.
3두마차 중 선두에 나온 것은 황영조였다. 1992년 벳부-오이타마라톤에서 2시간 8분 47초로 준우승하며 새로운 한국기록을 세운 것이었다. 그 상승세를 타고 같은 해 바르셀로나올림픽 마라톤에 출전한 황영조는 무더위 속에서 동서양의 최강자들과 경합을 벌인 끝에 당당히 금메달을 차지했다. 특히 일본의 모리시타를 몬주익 언덕에서 따돌린 역주는 희대의 명승부로 꼽히며 ‘몬주익의 영웅’이라는 칭호를 안겨줬다.
이후 황영조와 김완기는 절정의 기량을 겨루며 국내외에서 2시간 8분대 기록을 번갈아 작성하는 등 한국 마라톤 제2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뒤이어 등장한 스타는 현재 국내 유일의 2시간 7분대 기록자인 이봉주와 김이용이다. 특히 이봉주는 1993년 전국체육대회 마라톤에서 느닷없이 10분대 기록을 작성한 이후 줄기차게 자기 기록을 당겨 김완기, 황영조를 위협하는 거물로 성장했다. 1996년 애틀란타올림픽 마라톤 은메달 획득과 1998, 2000년 두 차례에 걸친 한국기록 작성 등 그의 전적은 화려하다. 40대에도 전성기 시절에 버금가는 기록을 작성하며 후배 선수와 팬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안타까운 것은 이봉주 은퇴 후 한국마라톤의 맥이 뚝 끊겨버렸다는 점이다. 지영준이 한동안 간판스타 역할을 했지만 부상 등으로 부진에 빠졌고, 젊은 후배들은 이렇다 할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다. 마라톤계가 새로운 스타를 기다리고 있는 사이 한국기록(2:07:20 / 2000년 이봉주)과 세계기록(2:3:38 / 2011년 패트릭 마카우)의 차이는 점점 벌어지고 있다.
첫댓글 세계적인선수들로 못키운것이 안타깝습니다...
1954년부터 2004년까지 아시아경기대회 메달을 획득한 우리 나라 남자 육상 선수들의 명단입니다.
이창훈
1958 마라톤 금
김양곤
1982 마라톤 금
김원탁
1990 마라톤 금
황영조
1994 마라톤 금
이봉주
1998 마라톤 금
2002 마라톤 금
이상훈
1966 마라톤 동
강명관
1970 마라톤 동
류재성
1986 마라톤 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