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
백석
바닷가에 왔드니
바다와 같이 당신이 생각만 나는구려
바다와 같이 당신을 사랑하고만 싶구려
구붓하고 모래톱을 오르면
당신이 앞선 것만 같구려
당신이 뒷선 것만 같구려
그리고 지중지중 물가를 거닐면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것만 같구려
당신이 이야기를 끊은 것만 같구려
바닷가는
개지꽃에 개지 아니 나오고
고기비눌에 하이얀 햇볕만 쇠리쇠리하야
어쩐지 쓸쓸만 하구려 섧기만 하구려
- 백석( 白石): 1912. 7. 1 평북 정주 ~ 1995. 1. (83세) 본명은 백기행(白夔行),필명은 백석(白石, 白奭)인데 주로 '白石'으로 활동했다. 일본의 시인 이시카와 다쿠보쿠(石川啄木)의 시를 너무나도 좋아하여 그의 이름의 '석'을 빼와서 썼다고 한다. 과거 한국에서는 월북 작가라는 인식이 강해 언급을 피하는 편이었다.그러나 월북 문인의 해방 이전 작품에 대한 공식 해금 조치가 이루어진 1988년부터 다시 각광을 받기 시작한다. 토속적인 우리말로 민중들의 삶을 노래한 뛰어난 시인으로, 지금도 많은 시인들이 인정하고 존경하는 명실상부한 현대시 최고의 절창으로 꼽힌다.
해방 후 고향 정주에 머물면서 글을 썼으며, 6·25전쟁 뒤에는 북한에 그대로 남았다. 1936년에 펴낸 시집 〈사슴〉에 그의 시 대부분이 실려 있으며, 시 〈여승 女僧〉에서 보이듯 외로움과 서러움의 정조를 바탕으로 했다. <여우 난 곬족>(조광, 1935. 12)·〈고야 古夜〉(조광, 1936. 1)에서처럼 고향의 지명이나 이웃의 이름, 그리고 무술(巫術)의 소재가 자주 등장하며 정주 사투리를 그대로 썼는데, 이것은 일제강점기에 모국어를 지키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사슴> 이후에는 시집을 펴내지 못했으며 그뒤 발표한 시로는 〈통영 統營〉(조광, 1935. 12)·〈고향〉(삼천리문학, 1938. 4)·〈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南新義州柳洞朴時逢方〉(학풍, 1948. 10) 등 50여 편이 있다.
시집으로 1987년 창작과비평사에서 〈백석시전집〉과 1989년 고려원에서 〈흰 바람벽이 있어〉
[ 자야부인에 대하여 ]
김자야(金子夜): 1916년 서울 관철동에서 태어나. 일찍 부친을 여의고 할머니와 홀어머니 슬하에서 성장했다. 금광을 한다는 친척에게 속아 가정이 파산하게 되자. 1932년 김수정의 도움으로 조선 권번에 들어가 기생이 되었다. 한국 정약계의 대부였던 금하 하규일 선생의 지도를 받아 여창 가곡. 궁중무 등 가무의 명인으로 성장했다.
1935년 조선어학회 회원이던 해관 신윤국 선생의 후원으로 일본에 가서 공부하던 중. 해관 선생이 투옥되자 면회차 귀국하여 함흥에 일시 머물렀다. 1936년 함흥에서 영생고보 영어교사로 와 있던 청년 시인 백석과 뜨거운 사랑에 빠졌다. 1938년 백석이 함께 만주로 떠나자고 제의했으나 혼자 서울로 돌아왔다. 같은 해에 『조선일보』기자로 다시 서울로 뒤따라온 백석과 재회하고, 청진동에서 살림을 차렸다. 1939년 백석이 만주의 신찡으로 떠나게 되면서 이별했다. 1953년 중앙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만학으로 졸업했다.
1989년 백석 시인에 대한 회고 기록 「백석, 내 가슴속에 지워지지 않는 이름」을 『창작과 비평』에 발표한 바 있고, 1990년 스승 하규일의 일대기와 가곡 악보를 채록한 『선가 하규일 선생 약전』을 출간했다.
- 2001/04/30 동아일보 자료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