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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글은 필자의 논문, 「회재 이언적 유적지의 풍수적 특성」, 한국민족문화 제77집,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20년 11월. 내용을 바탕으로 작성했음을 밝힌다.
회재는 24세(1514)에 문과급제로 관직생활(경주향교 교관)을 시작했고, 그 다음 해에 소실인 양주 석씨를 맞이했으며, 이 때 소실부인의 재력으로 옥산 독락당(獨樂堂)의 살림채(1515)와 숨방채(행랑채)를 건립했다. 이후 회재는 41세(1532) 때 관직에서 파직 후 낙향을 하게 되는데, 이 때 옥산으로 들어와 독락당 사랑채(1532)와 계정(溪亭, 1533)을 창건하고 약 7년간 은둔생활을 하며 학문적 업적을 완성해 나가게 된다.
독락당으로 이어지는 산줄기(主龍)의 출발점은 영천시 임고면·자양면, 그리고 포항시 기계면 일대를 아우르는 낙동정맥(洛東正脈)상의 운주산(806m)으로 설정할 수 있다(그림1). 운주산을 일으킨 산줄기는 남동쪽으로 뻗어 가 옥산서원으로 이어지는 600m봉을 일으킨 다음, 남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진행해 655m봉을 일으킨다. 낙동정맥의 655m봉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산줄기는 도덕산(703m)과 자옥산(515m)을 연이어 일으킨다. 산줄기는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점차 산의 높이를 낮추면서 진행해 300m봉을 일으킨 다음, 독락당으로 이어진다.
풍수에서는 터의 사방을 둘러싸고 있는 산줄기를 사신사(四神砂)라고 한다. 사신사는 터의 후방을 받치고 있는 현무(玄武), 앞의 주작(朱雀), 좌우측의 청룡(靑龍)과 백호(白虎)로 구성되며, 터의 사방을 둘러싸고 외부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막아주고 내부의 생기를 보호해주는 역할(藏風)을 한다. 독락당의 풍수적 사신사를 설정하기 위해서는 먼저 주산(主山, 현무)을 설정해야 한다.
현재 독락당의 후방(북쪽)에는 바로 인접한 산이 없어 허결하며, 멀리 좌측(서쪽)에 도덕산이, 우측(동쪽)으로 302m봉이 보인다(그림2). 그 중 302m봉은 독락당의 풍수적 주산이 될 수 없다. 풍수에서의 주산은 단지 터의 후방에 있다고 해서 만족되는 것은 아니며, 가장 중요한 요건은 주산에서부터 터까지 산줄기로 직접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 그런데 302m봉에서 독락당을 향해 남쪽으로 내려오는 산줄기는 물길에 의해 가로막혀 있다(그림1).
독락당의 주산은 도덕산이다. 독락당의 시각적 후방에 있으면서 산줄기로 직접 연결되어 있는 산이기 때문이다. 그 형태 또한 웅장하면서도 반듯해 독락당의 주산으로서 손색이 없다. 그러나 독락당까지의 직선거리가 약 2.3km로 다소 거리가 먼 것은 풍수의 관점에서 흠결로 지적된다. 독락당의 청룡은 어래산(572m)에서 옥산서원으로 이어지는 산줄기다. 백호는 300m봉에서 옥산서원 방향으로 뻗어 내리는 산줄기다. 안산은 청룡 끝부분인 옥산서원 동쪽 산지 일대가 되지만, 전체적으로 허한 편이다.
수세(水勢) 또한 비교적 길하지 못한 편이다. 풍수에서는 물을 재물로 간주(水管財物)하며, 특히 물에 대한 터의 방향으로써 길흉을 판단하기도 한다. 즉 주택이나 묘소가 물이 들어오는 방향을 보고 있을 때 길하며, 반대로 물이 흘러가는 방향을 보고 있으면 흉하다는 것이다.
풍수 고전『인자수지(人子須知)』에서도“들어오는 물이 한 잔이라도 있으면 능히 가난을 벗어날 수 있다(朝水一勺能救貧).”, “만약 벼슬이나 부자 되기를 바란다면, 물이 들어오는 땅을 얻어라(若欲催官催富 必得朝水之地).” 등의 표현으로 이를 뒷받침한다. 이곳은 옥산천이 북서에서 남동으로 흘러가고 있고, 이 때 독락당이 남남동향(壬坐丙向)으로 옥산천이 흘러가는 방향을 보고 있다. 결과적으로 독락당 건물의 방향은 풍수의 수세적 측면에서 흉하다 하겠다.
이렇듯 독락당의 풍수 입지는 소위 말하는‘명당’의 조건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그러나 독락당의 건축 과정 및 당시 회재의 상황과 연결해서 보면 회재가 왜 이곳에 자리 잡고, 또 왜 그렇게 공간구성을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회재에 의해 독락당이 건축되는 과정은 크게 두 단계다. 첫 단계는 회재가 경주향교 교관 시절 소실인 양주 석씨의 재력으로 살림채와 숨방채를 건립했던 시절로서, 독락당의 입지선정과 관련된다.
회재가 이곳을 택했던 것은 옥산리가 전혀 낮선 곳이 아닌 친숙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이미 부친(이번) 소유의 정자(현 계정)가 있었고, 인근에는 어릴 적 수학했던 정혜사도 있었다. 또한 소실과의 생활을 위해서는 양동 본가와 별도로 떨어진 곳이 필요했다. 지리적으로 이곳은 본가인 양좌동에서 걸어서 반나절 거리로, 너무 멀지도 가깝지도 않아 적절했다. 비록 풍수적 길지는 아니었지만, 다른 여건들이 적합했던 것이다.
독락당 건축의 두 번째 과정은 회재가 41세(1532) 때 김안로(金安老)의 등용을 반대하다 정적들의 공격으로 파직되자 낙향을 하게 되면서 사랑채와 계정을 창건한 단계다. 이때 그의 마음은 세상에 대한 회의, 금의환향하지 못한 본인에 대한 실망, 성리학을 궁구할 기회에 대한 기대 등으로 복잡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심정을 한 단어로 나타내면‘은거(隱居)’로 표현된다. ‘은거’는 단순한 세상에 대한 회피가 아니며, 현실 정치에서 벗어나 자연에서의 유유자적한 안빈낙도의 삶을 추구하는 조선시대 사대부들의 유행이었다.
이에 회재는 은거생활을 위한 장소로 기존 독락당을 선택한 다음, 더 나아가 주변 자연환경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며 독락당 일곽을 보다 은거에 적합한 곳으로 ‘장소화(場所化)’시켜 나갔다. 이때 그는 풍수의 관점에서, 이곳의 땅이 지닌 풍수적 특성에 맞게 건물을 배치하고, 풍수적 결함이 있는 곳에는 보완책(裨補)을 마련하는 면모도 보였다.
회재가 독락당을‘은거의 장소’로 만든 행위로 가장 두드러진 것은 독락당 주변에 숲을 조성한 것이었다. 실제로『회재집』에는 회재가 독락당 일곽에 송림(松林)과 대숲을 조성했다는 여러 구절들이 등장하며, 지금도 독락당 주변에는 숲이 남아 있다. 이때 숲을 조성한 목적은‘은거’를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풍수의 관점에서도 많은 의미가 있었다. 독락당 북쪽의 송림은 겨울의 북풍과 옥산천을 따라 불어오는 바람을 막는 역할을 했다.
독락당 일곽에서 주목되는 또 하나의 숲은 수구(水口) 지점의 비보 숲으로 보이는 송림이다. 독락당의 수구는 백호 산줄기가 평지로 내려와 동쪽으로 낮게 이어져 옥산천을 만나는 지점(그림1의 ㉮)이다. 지형의 훼손으로 현재 백호 산줄기가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지는 확인할 수 없으나, 그 연장선의 옥산천 변에는 숲이 조성되어 있다.
숲은 옥산서원의 북쪽~서쪽으로 조성되어 있는 것으로, 서원으로 불어오는 겨울 북풍과 옥산천을 따라 부는 바람을 막기 위한 비보 숲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숲의 전체 수종이 느티나무인데, 북쪽(독락당 방향) 일부에만 옥산천과 수직 방향으로 소나무群이 있다(그림2의 ㉮지점).『회재집』에서 회재가 주로 조성했던 것이 송림과 대숲으로 기록되어 있는 점, 옥산서원 일곽의 숲의 주된 수종이 느티나무인 점, 이곳 소나무군의 식재 방향 등으로 보았을 때, 소나무는 회재가 독락당 조영 당시 수구 비보용으로 조성했던 것이고, 느티나무는 서원 조영 시 조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회재의 ‘은거’상황을 보여주는 독락당 공간구성의 두 번째 특성은 지붕과 기단의 높이가 일반 전통 주택의 그것보다 낮다는 것이다. 이것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고 조용히 유유자적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회재의 심정을 반영한다. 독락당의 명칭 또한 ‘홀로 즐겁다(獨樂)’는 뜻으로, 세상을 외면하고 옥산천 골짜기에 은거하며 자연만을 주된 교우상대로 하고자 하는 그의 내면이 담겨 있다.
그런데 입구의 솟을대문이 소박한 건물에 비해 높고 웅장한 편이다. 고전『황제택경(黃帝宅經)』에서는 주택의 거주자가 부귀하게 되는 경우(五實)와 가난하게 되는 경우(五虛)에 대해 각각 다섯 가지를 제시했는데, 그 중 가난하게 되는 경우의 두 번째가 ‘집 내부에 비해 대문이 큰 경우(宅門大內小)’이다.
솟을대문은 회재가 아닌 조선 말기에 들어 후손에 의해 설치된 것이다. 회재의 子, 이전인(潛溪 李全仁)은 서자였지만 회재의 사당을 건립하고, 인종이 세자시절 회재에게 보낸 어찰을 보관하기 위한 어서각을 세우는 등 옥산파 가문의 정통성을 세우기 위해 노력했다. 그 이후의 후손들 또한 가문의 정통성을 잇기 위해 노력했다고 전해지며, 솟을대문은 그 일환으로 해석된다. 실제로 오늘날 이곳을 방문하는 많은 사람들이 먼저 대문의 웅장함에 감탄하면서 집안으로 들어오게 된다.
독락당 공간구성의 세 번째 특성은 건축물의 배치가 세상(서쪽)을 향해서는 길게 둘러싼 담에 의해 닫혀 있는 반면, 자연(동쪽)을 향해서는 열려 있으며, 전체적 좌향(坐向) 또한 ‘임좌병향(壬坐丙向)’으로 정남에서 동쪽으로 약 15°돌아앉아 옥산천을 향해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모습의 절정은 사랑채(옥산정사)에서 명확히 드러난다(그림3). 사랑채의 구조는 세상을 향한 서쪽은 건물로써 막혀 있으며, 자연을 향한 동쪽은 상대적으로 낮은 담과 대문으로 열려 있다.
이러한 공간구성은 은거 목적을 채우면서도 이곳의 풍수적 결함을 보완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곳의 입지는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옥산천을 중심으로 발달한 좁고 긴 계곡 지형이다. 그래서 독락당의 북쪽~서쪽 방향은 계곡바람과 더불어 겨울바람에도 취약하다. 이에 회재는 북쪽에는 송림을, 서쪽에는 높은 담을 조성했던 것이다. 그리고 건물의 전체적 좌향이 동쪽으로 살짝 돌아앉은 것은 자연(옥산천)을 향한다는 의미도 있지만, 풍수의 관점에서 서쪽의 자옥산을 회피하기 위한 의도도 있다. 자옥산은 그 형태는 길(吉)하나 시각적 높이가 너무 높아 심리적 부담감을 주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인자수지는 안산의 형상이 비록 귀하더라도 그 거리가 너무 가까워 혈장을 핍박(逼迫)하면 사람이 흉하게 되고 어리석은 자가 나온다고 했으며, 입지안전서(入地眼全書)에서도 안산이 너무 높을 경우 핍착(逼窄)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여러 전통마을의 주택들이 길상의 산봉우리를 향해 마당이나 대문을 조성하는 것과 대조적으로, 이곳 건물의 좌향을 동쪽으로 살짝 튼 것은 심리적 부담이 되는 자옥산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건물의 배치가 세상(서쪽)을 향해 닫혀 있고 자연(동쪽)을 향해 열려 있는 구조임에도, 큰 마당이 서쪽으로 나 있는 것이다(그림4). 통상 전통 주택의 마당은 배산임수(背山臨水)의 개념으로 물과 가까운 낮은 쪽에, 그리고 주변 길상의 봉우리를 향하도록 조성되어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곳의 마당은 배산임수 개념으로는 산에 가까운 높은 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또 위압적인 자옥산을 피해 건물의 좌향을 동쪽으로 살짝 튼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물론 독락당 공간구성의 중심이 계정이기 때문에 동쪽으로 마당을 낼 수 없었던 것이 당연하겠지만, 마당이 서쪽에 있는 이유는 회재의 ‘은거’적 상황과도 연관된다. 회재의 독락당 조영 당시, 옥산천 상류에는 정혜사(定惠寺 또는 淨慧寺)가 있었다.
또한 독락당 영역 안, 앞쪽에는 솔거노비들의 살림집이었던 공수간(供需間) 건물이 남아 있는데, 과거에는 대문 밖에도 또 한 채의 공수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주변으로도 많은 노비들과 소작인들의 살림집이 있었다고 추정된다. 이를 통해, 독락당 주변, 특히 서쪽으로 사람들이 왕래하는 길이 있었고, 이에 회재는 사람(세상)들의 시선을 피할 수 있는 공간구성이 필요했을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림5>는 서쪽에서 독락당을 바라 본 모습이다. 담장 바로 옆에서 보든 멀리 떨어져 조금 높은 곳에서 보든, 독락당 건물들이 담장에 가려 지붕만 살짝 보임으로써, 외부인의 시선으로부터 피할 수 있다. 만약 배산임수 원리만을 좇아 큰 마당을 동쪽이나 남쪽으로 만들고 살림채를 담장 가까이 붙여 건축했다면, 지금의 모습을 위해서는 담장을 더 높게 쌓거나 건물의 지붕 및 기단의 높이를 더 낮추어야 했다.
담장의 높이는 더 높일 수 없었다. 현재의 담장도 일반 전통 주택의 담장보다 높은 편이기 때문이다. 풍수의 관점 또한, 담장의 높이가 과도하게 높을 경우 흉하게 여긴다. 그리고 지붕과 기단의 높이를 낮추는 문제 또한 쉽지 않다. 결국 회재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생각한 방법이 서쪽으로 마당을 내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로써 회재는 담장의 높이를 조금만 높이고, 그 반대로 건물의 지붕 및 기단의 높이를 조금만 낮추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독락당 공간구성의 네 번째 특성은 이곳 땅의 풍수적 특성을 잘 활용했다는 점이다. 이곳은 긴 계곡 내에 자리해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주거목적의 양택풍수(陽宅風水)의 관점에서 다소 불리한 입지다. 그러나 학문과 유식(遊息)을 목적으로 하는 정자 입지의 관점에서 보면 풍수적 장점도 발견된다. 우리나라의 전통 정자의 입지는 대부분 절벽 위나 계곡에 자리해 있어 풍수적 흉지에 자리한 듯하지만, 현대의 휴양(休養), 즉 학문과 유식의 개념으로 보면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장소가 된다.
독락당의 공간구성은 주거공간 및 휴양공간이 같은 영역에 있으면서도 각각의 목적에 맞게 배치되어 있다. 독락당 일곽에서 주거공간은 사랑채고, 휴양공간은 계정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사랑채와 계정이 건물 옆으로 흐르는 옥산천과 만나는 방식은 서로 다르다. 사랑채는 일곽을 형성하는 담을 두르고 개울에 면한 담에 작은 살창을 내어 개울과 접하는 방식을 취했고, 계정은 대청에서 앞으로 보이는 산수를 직접 접하도록 했다(그림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