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
|
嘉祥武氏墓群石刻
|
|
武氏墓群石刻坐落在山东省嘉祥武翟山北麓的武家林。
武氏墓群石刻俗称武梁祠,是武氏家祠。据祠内石阙铭文的记载,东汉末年,嘉祥的武氏世代为官,武氏的族人于东汉桓帝建和元年(147年)在墓前建立了武氏祠堂,历经数十年才建成。 关于祠堂的结构,说法不一,有的说祠堂是由四个石室组成的,前室是武荣祠,后室是武开明祠,左室为武班祠,中间的是武梁祠;有的说祠堂由三个石室组成,即上述四室中没有后室。祠内的石刻有石阙、石狮、墓碑、画像等,石刻中的画像石早在宋代时就已经发现,宋金石学家赵明诚的《金石录》、文学家欧阳修的《集古录》都对此做过记录。后来又经过了多次的洪水漫淤,石室被湮没在地下。清乾隆五十一年(1786年),金石家黄易亲自到这里寻找,第一次发现了三个石室以及汉碑、汉阙等,后又陆续发现了许多画像石,现在除了流散国外的两石及运往济宁保存的两石以外,还有石阙、石狮各一对,石碑二方,画像石四十三块,隶书题记共约有一千多字。 武氏墓群石刻的画像多采用减地阳刻法,精密细致,内容丰富,画像内容的取材也很广泛,其中有手持铁锸农具耕作的神农氏,手持铁叉率众治水的夏禹,肩扛武器坐在妇女身上的暴君夏桀等各具特色的历史人物;还有曹沫刺桓公、专诸刺王僚、荆柯刺秦王、完壁归赵、秦始皇泅水捞鼎等脍炙人口的历史故事;有闵子骞芦衣赶车、丁兰刻木奉亲、董永卖身葬父等孝义故事,以及列女故事、神话故事、宴会、狩猎、车马出行、攻战等,画像人物众多,雕刻精细,栩栩如生,从各个不同的角度反映了东汉的社会状况、风土人情、典章制度、宗教信仰等丰富的历史信息,不仅是一组精美的石刻艺术品,也是研究东汉历史的重要实物资料,历来被考古学家、历史学家誉为汉代画像石的代表作。
-------------------------------------------------------------- 武氏祠为汉代祠堂和墓地,位于嘉祥县纸纺镇武宅山村北,始建于东汉桓、灵时期,是我市最早的建筑物,全石结构,石刻画像,内容丰富,雕制精巧,是我国保存完整的汉代石刻艺术珍品。现存石阙、石狮各一对,石碑两块,祠堂石刻构件四组40余石。 |
[펌]☞http://www.sach.gov.cn/publishcenter/sach/sachwindow/centerchina/first/1985.aspx
===
무씨사당 화상석의 단군탄생 설화
- 고고학자 김재원(金載元)씨 논문 단서로 중국 산동현지답사
- 윤여덕 | 현정회 이사
◈ 사학자 이병도씨의 마지막 소원
실증사학이라는 미명아래 단군의 실재를 부인하던 역사학자 이병도(李丙燾)씨가 아이러니칼하게도 권위있는 단군단체 가운데 하나인 현정회 임원으로 있으면서 행사 때마다 단군초상 앞에 꿇어 엎드려 극진히 예를 올렸다. 이를 지켜보던 한 인사가 그의 행동의 모순성을 지적하자 이씨는 태연하게 ‘내가 학문으로 역사를 연구하는 것과 단군을 민족의 시조로 경배드리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재야 사학계의 끊임없는 공격과 매도에 시달리던 이씨는 작고하기 2년전 병석에 누워서 ‘단군은 신화 아닌 우리의 국조’라는 글을 그해 10월 9일자 조선일보(1986)에 기고하여 종래의 그의 사관을 180도 수정하는 결단을 내렸다. 이 작업을 착상하고 주도한 분은 일본유학시절부터 이씨와 막역한 교분을 쌓아온 법학자로 말년에는 역사연구에 전념하고 있는 최태영(崔泰永, 104세)옹이다. 이때 이씨는 이미 집필능력을 잃었기 때문에 그의 제자였던 이희수(李喜秀) 당시 현정회 상무이사가 구술(口述)에 따라 원고를 초(草)하고 필자가 교정정리를 맡아하느라 자주 동숭동 이씨 댁을 드나들었다. 이씨는 병석에 누운 채로 원고를 위로 치켜들고 자신의 이름으로 나갈 논문을 꼼꼼하게 교열했는데 어느 때는 토씨 하나를 첨삭(添削)하는데만 몇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 문헌사학의 한계극복 위한 돌파구
원고가 완성되어 갈 무렵 어느 날이었다. 느닷없이 ‘무씨사당(武氏祠堂) 그림을 꼭 한번 보아야 할터인데 …하면서’ 당시는 중국과 국교도 트지 않았을 땐데 설사 여건이 허락한다 해도 병상의 몸으로 어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이 안타깝다는 표정이었다.
문헌사학으로 일가를 이루었던 이씨는 그의 학문적 소신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2천 여년전의 이 고고학자료를 통해 문헌사학의 한계를 극복하는 일종의 돌파구를 기대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이 그림을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한 사람은 해방 후의 고고학 1세대로 꼽히는 김재원(金載元)박사다. 광복직후부터 70년까지 꼭 25년간 국립중앙 박물관장을 역임한 김박사가 1947에 ‘檀君神話의 新硏究’라는 책을 내면서 ‘武氏祠石室의 畵象石에 보이는 ‘檀君神話’ 편에서 이 문제를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다. 즉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탄생 설화와 적어도 8, 9부까지 부합되는 내용이 그 화상석에 나타나 있다는 것이다.
◈ 청대 ‘금석색’이 연구바탕 제공
다만 그는 탄생설화의 골자가 결코 우리 민족 고유의 것이 아니라는 전제 아래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이 화상석에 관하여는 일찍이 청조(淸朝) 도광(道光) 2년(1829)에 풍안해(馮晏海)가 출판한 금석색(金石索)이라는 책을 저본으로 하여 프랑스학자 에두아르 샤반( Edouard Chavanes)이 연구 소개한 것을 주로 참고하였다고 하면서 논문 착상에는 은사 헨제(Hentze, carl)교수의 조언에 힘입은 바 크다고 솔직하게 밝히고 있다.
아무튼 무씨사당의 화상석에 관한한 김박사의 논문이 국내에서는 최초이며 이후 반세기가 넘도록 단편적으로 인용하는 경우는 더러 있어도 과문의 탓인지 몰라도 본격적인 연구 논문은 아직 보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 무씨사당 답사는 마치 미지의 세계를 개척하는 탐험가의 심정처럼 설래었다. 그 넓은 중국 천지를 손금보듯 한다고 큰소리치던 경력 10년차의 한족 가이드에게도 무씨사당만은 초행이었던지 두세번이나 헛걸음을 친 끝에 재령 군용 비행장을 왼편으로 끼고 가다 다시 흙먼지가 자욱히 날리는 비포장도로 따라 10여분,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 앞에서 우리나라 정문(旌門)에 해당하는 사당석문을 발견하고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산동성 가상(嘉祥)현 소재지에서 동남방 30리 거리에 있는 무적산(武翟山)아래 무진리라는 마을이라고 했다. 산동 답사 3일째인 2004년 10월 26일 낮 12시 무렵이다.
◈ 2천년 세월에 그으른 화상석 26매
최초의 건립연대는 한(漢)나라 건화(建和) 원년(서기 147)전후라고 한다. 후세에 하수가 범람하여 토사가 밀리는 바람에 한때 흙속에 묻혔다가 청나라 건륭(乾隆) 51년(서기 1766)에 황역(黃易)이라는 자가 발굴하여 벽돌로 사당을 세우고 내부 벽에 화상석을 끼워 전해 내려왔다고 하는데 문화혁명 이후 국가문화재로 지정되어 일반에게도 공개되고 있다 한다.
사당 두 번째 석실에서 우리가 찾는 화상석을 발견하고 먼저 사진을 찍으면서 김박사의 논문에 나와 있는 순서대로 그림을 확인하려 하였으나 처음엔 실내라 어둡고 2000년 세월에 그으른 석각(石刻)이 너무 희미해서 얼른 식별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논문에 첨부되어 있는 석각그림과 일일이 대조를 하여 찾아낸 그림에 대해서는 가장 핵심적인 화상석 몇 개만 골라서 현장 안내원에게 해석을 먼저 구했다. 김박사의 고고학적인 해석과 비교를 해보기 위해서였다. 화상석은 동서남북 네벽에 모두 26석이 끼워 있는데 정문에서 오른쪽, 그러니까 동쪽 벽에 걸린 화상석에 대해서 그것은 무씨 집안의 장례의식이라고 단정하고 구름무늬에 대해서는 망자의 영혼이 승천하는 것을 상징한다고 해석해 주었다.
◈ 삼국유사기록 그대로 재현
그러나 김박사의 논문에서는 단군 탄생 설화의 첫머리 ‘父知子意 下視三危太白可以弘益人間 乃授天符印三個遣往理之’와 7, 8부 가량이 부합되는 장면이라고 보는 것이다. 구름위에서 지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두사람중 수염 있는 남자가 환인(桓因)천왕이고 맨밑 지상에서 천사(사자) 넷이 붙들고 있는 3개의 원형판이 천부인 3개라는 것이다.
제3석에서는 세 마리 용이 끄는 수레탄 신인(神人)이 환웅이며 맨앞에서 백성들이 엎드려 환웅을 맞이하는 모습이 보인다. 환웅을 맞이하는 사람들이 모두 날개가 없는 것은 지상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본다.
제3석 2층에 풍백(風伯)과 우사(雨師) 운사(雲師)가 주곡(主穀) 주명(主命) 주병(主病) 주형(主刑) 주선악(主善惡)한다는 장면이 나온다. 벼락을 맡은 뇌부중신(雷部衆神)들이 선악을 판단하여 형(刑)을 집행하는 과정이 실감나게 그려져 있다. (雄率徒三千降於太白頂神檀樹下……) 제3석 3층의 이인기수(異人奇獸)그림이 단군탄생설화의 핵심을 이룬다. 이 그림 역시 구름 위, 즉 천상에 있는 것도 아니고 날개를 달고 있는 것도 아닌 지상의 일을 담고 있다. 그림의 중심은 바른쪽 두괴인(괴수)의 모습인데 화면에 나타나는 모든 인물이 그곳을 향해 있다. 두 괴인 중 바른쪽이 생김새로 보아 범이고 왼쪽은 곰이다. 범이나 곰이라기 보다는 호인(虎人) 또는 웅인(熊人)이라고 하는 것이 옳을 듯싶다.
[펌]☞濟寧시에 가시면 가상현 지방진 소재 무씨사당 벽화를 꼭 보아야~
===
嘉祥武氏墓群石刻
作者: 更新时间:2006-7-25
武氏墓群石刻,位于嘉祥县城南15公里纸坊镇武翟山村,是东汉末年武氏家族墓地前的一组石刻艺术品,有石阙、石狮各1对,汉碑2块和武氏祠汉画像石44块。它是国家一级重点文物保护单位,为世界文化遗产中的瑰宝

从题材内容上看,武氏祠画像可大致分为神话传说、经史故事、现世生活三种类型。
神话传说部分,极为瑰丽精彩。主要包括:
1、人类始祖、仙界领袖及远古帝王;
2、天界水府“自然神灵”;
3、龙凤图腾、仙人出行及“四方神灵”等;
4、各种奇禽异兽、祥瑞灵异。
===
무씨사당(武氏祠堂) 석실(石室) 화상석(華像石),武氏墓群石刻
무씨사당, 武氏墓群石刻
무씨사당, 武氏墓群石刻
무씨사당, 武氏墓群石刻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