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와 같은 해인 1454년 완성된 세종실록 지리지에 강진현(康津縣)의 인물로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안우(安祐) 한 사람을 들고 있다. 안우 장군의 연고지가 강진이라는 또 하나의 증거이다. 이런 기록들로 보아 그가 원나라 출신은 아닐 것이다.
탐진의 성씨에는 안(安)씨가 있는데 탐진안씨들로 보인다.
세종실록 151권, 지리지 / 전라도 / 나주목 / 강진현(康津縣)
◎ 강진현(康津縣)
도강현(道康縣)은 본래 백제의 도무군(道武郡)이었는데, 신라에서 양무군(陽武郡)으로 고쳤고, 고려에서 도강군으로 고쳐서 영암군(靈巖郡)의 속현(屬縣)으로 삼았다가, 명종(明宗) 2년 임진에 【송나라 효종(孝宗) 건도(乾道) 8년. 】 감무(監務)를 두었으며, 탐진현(耽津縣)은 본래 백제의 동음현(冬音縣)이었는데, 신라에서 탐진현으로 고쳐서 도강(道康)의 영현(領縣)으로 삼았고, 고려에서 영암(靈岩)의 임내(任內)로 고쳤는데, 〈본조〉 태종(太宗) 17년 정유에 병마 절제사 영(兵馬節制使營)을 도강의 옛읍에 옮기고, 두 현을 합하여 강진(康津)으로 하고 읍을 탐진현에다 정하였다. 금상(今上) 11년 기유에 읍을 도강현의 송계(松溪)로 옮겼다. 【도강의 별호는 금릉(金陵)이요, 탐진의 별호는 오산(鼇山)이다. 】 옛 속향(屬鄕)이 1이니, 평덕(平德)이요, 【혹은 덕평(德平)이라 한다. 】 부곡(部曲)이 2이니, 수운(水雲)·영가(永可)요, 소(所)가 8이니, 산계(山計)·산심(山深)·대곡(大谷)·대구(大口)·칠량(七良)·종옥(種玉)·구계(舊溪)·부원(富元)이다.
사방 경계[四境]는 동쪽으로 장흥(長興)에 이르기 32리, 서쪽으로 해진(海珍)에 이르기 7리, 남쪽으로 바다 어귀에 이르기 37리, 북쪽으로 영암(靈巖)에 이르기 21리이다.
호수가 3백 55호요, 인구가 1천 6백 44명이다. 군정은 시위군이 29명이요, 영군(營軍)이 54명이요, 선군이 2백 52명이다.
도강(道康)의 성이 4이니, 김·조(趙)·황(黃)·임(任)이요, 망성(亡姓)이 1이니 표(表)요, 【어떤 본(本)에는 표(表)가 배(裵)로 되었다. 】 탐진(耽津)의 성이 6이니, 최(崔)·조(曺)·유(兪)·안(安)·정(鄭)·하(河)요, 내접성(來接姓)이 2이니, 강(康) 【행주(幸州)에서 왔다. 】 ·박(朴) 【영암에서 왔다. 】 이요, 평덕향(平德鄕)의 망성이 1이니, 박(朴)이다. 수운 부곡(水雲部曲)의 망성이 2이니, 조(曺)·오(吳)요, 영가 부곡(永可部曲)의 망성이 1이니, 신(申)이다. 대곡소(大谷所)의 속성(續姓)이 1이니, 조(曺)요, 대구소(大口所)의 속성이 1이니, 서(徐)요, 칠량소(七良所)의 속성이 1이니, 백(白)이다.
인물(人物)은 문하평장사(門下平章事) 안우(安祐)이니, 고려 공민왕(恭愍王) 때 사람이다.
땅이 기름진 것이 3분의 1이 되며, 풍속이 고기잡이를 좋아한다. 간전(墾田)이 7천 1백 79결이요, 【논이 조금 적다. 】 토의(土宜)는 오곡과 귤·석류·뽕나무·닥나무·왕골이다. 토공(土貢)은 여우가죽·삵괭이가죽·족제비털·지초·작설차·전복·상곽(常藿)·표고·석이·비자·칠이요, 약재(藥材)는 겨우살이풀뿌리[麥門冬]·인삼·녹용이요, 토산(土産)은 은어·왕대다.
수인산 석성(修因山石城) 【둘레가 1천 3백 96보요, 안에 샘 6이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에도 마르지 아니한다. 】 내상 석성(內廂石城) 【둘레가 5백 61보 남짓하다. 】 백련사(白蓮社) 【현의 남쪽 만덕산(萬德山)에 있다. 남쪽으로 대해(大海)에 임해서 소나무·잣나무·가는 대·왕대·동백나무가 섞여 있으며, 뜰에 귤나무가 있고, 비석 둘이 있다. 】 역(驛)이 2이니, 통로(通路)·진원(鎭原)이다. 【진원역은 본래 무진(茂珍) 내상성(內廂城) 북쪽에 있었는데, 본조 태종(太宗) 17년 정유에 내상(內廂)을 도강현에 옮김에 따라 이곳에 옮겨 설치했다. 】 관방(關防)은 마도(馬島)이다. 【병선이 머무른다. 】 봉화가 3곳이니, 거차산(巨次山)이 현의 남쪽에 있고, 【동쪽으로 장흥(長興) 천관산(天冠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좌곡산(佐谷山)에 응한다. 】 좌곡산(佐谷山)이 현의 서쪽에 있고, 【서쪽으로 영암 갈두(葛頭)에 응한다. 】 수인산(修因山)이 현의 동쪽에 있다. 【동쪽으로 장흥 어불산(於佛山)에 응하고, 서쪽으로 내상영(內廂營)에 응한다. 】 해도(海島)가 4이니, 완도(莞島) 【사전(祀典)에 실려 있다. 】 ·조약도(助藥島)·선산도(仙山島)·고이도(古尔島)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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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1487)을 증보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1530)의 전라도(全羅道) 강진현(康津縣)에 안우(安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나온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제37권 / 전라도(全羅道) 강진현(康津縣)
【성씨(姓氏)】 탐진(耽津) 최(崔)ㆍ조(曺)ㆍ유(兪)ㆍ안(安)ㆍ정(鄭)ㆍ하(河), 강(康)ㆍ박(朴) 모두 내성(來姓)이다.
【고적(古跡)】 .... 안우택(安祐宅) 옛터가 읍성 남쪽에 있다.(古基在邑城南。)
【인물(人物)】 고려 ......안우(安祐) 공민왕 때에 홍건적이 서울을 함락시켰는데, 안우가 이방실(李芳實)ㆍ김득배(金得培)와 함께 쳐서 평정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세 원수(元帥)라고 일컬었으며, 벼슬이 평장정사(平章政事)에 이르렀으나, 얼마 뒤 김용(金鏞)에게 피살되어, 여론이 그를 아깝게 여겼다...... 본조(本朝) 안지(安止) 두 번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이 영중추원사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정(文靖)이고, 문장으로 이름이 있었다.
아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강원도 원주목(原州牧)에 나오는 변(邊)씨는 원나라 심양(瀋陽)에서 공민왕을 따라 고려로 와서 귀화하여 원주로 본향을 하사받아 원주 변(邊)씨 시조가 된 변안렬(邉安烈, 1334 ~ 1390)의 후손들이다. 원문의 " 邊。賜瀋陽。 "은 심양에서 왔으며 원주로 본향을 하사받은 것을 뜻하는 말로 보아야 한다. 이처럼 고려사의 변안열 열전이나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원주 성씨 기록에나 변씨가 원나라 심양에서 왔다는 것을 명기하고 있다. 반면에 안우 장군의 기록에는 이런 표현이 전혀 없으므로 그는 원나라 출신이 아닌 것이 틀림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6권 / 강원도(江原道) 원주목(原州牧)
【성씨】 본주 원(元)ㆍ이(李)ㆍ안(安)ㆍ신(申)ㆍ김(金)ㆍ석(石). 변(邊) 본관을 심양(瀋陽)으로 하사하였다. 최(崔) 내성(來姓)이다. 조(趙) 횡성(橫城).
【姓氏】 本州 元,李,安,申,金,石。邊。賜瀋陽。崔。來。趙。橫城。
조선(朝鮮) 영조조(英祖朝)에 각도(各道) 읍지(邑誌)를 수취(收聚), 개수(改修)하여 성책(成冊)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원주(原州) 성씨 기록도 신증동국여지승람과 거의 같다.
한국사료총서 제20집 輿地圖書 上 解說
한국사료총서 제20집 輿地圖書 上 > 江原道 > 原州 > 姓氏
[本州] 元 李 安 申 金 石 邊賜瀋陽 崔來 趙橫城
조선(朝鮮) 후기에도 변안렬의 후손인 원주 변(邊)씨는 심양(瀋陽)에서 왔다는 꼬리표를 달고 다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