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룻과 보아스의 사랑 이야기 . 밀레 화가의 추수후에 휴식 작품 배경.
시어머니 나오미의 결정 .
베들레헴은 무슨 뜻입니까? 집이라는 뜻의 ‘베트(Beit)’와 떡 또는 빵이라는 뜻의 ‘레헴(lehem)이 합쳐진 말로 ‘빵집, 떡집’이라는 뜻입니다. 성경의 다른 곳에서 베들레헴은 에브랏 또는 에브라다 라고 불리우기도 했습니다. 룻기의 저자는 주인공의 이름과 지명을 통해 뭔가를 알려주고 싶어 합니다. 빵집에 기근이 들어 빵이 없는 현실을 보십시오. 마치 ‘자비의 집’이란 뜻의 베데스다에 자비가 없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엘리멜렉은 ‘나의 하나님은 왕’이라는 뜻이지만 정작 이스라엘에는 왕이 없고 각자 자기 소견대로 살아가는 현실입니다. 뭔가 결핍되고 상실이 가득한 현실을 이름들을 통해 역설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엘리멜렉은 가족을 굶기지 말자는 일념하에 큰 결단을 내립니다. 그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강한 적대감을 일으켰던 민족인 모압 사람들이 사는 땅으로 이민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어지간히 없으면 그랬겠느냐는 짐작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압땅으로 간다는 것은 모압의 신인 그모스 (Chemosh)가 다스리는 영역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였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이 있는 베들레헴을 벗어나 이방신이 다스리는 영역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에서 엘리멜렉 가족의 이주는 심각한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잠시 머물다 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고향 베들레헴을 등지고 그렇게 이주를 결단한 것이었죠. 모압은 베들레헴의 동쪽에 위치한 나라였습니다. 유대땅과 모압을 가르는 시내가 흘렀는데 얍복강이었습니다. 얍복강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었던 야곱이 천사와 씨름하여 복을 쟁취해 낸 곳이었죠. 엘리멜렉은 그의 조상인 야곱을 생각하며 복을 쟁취해 내기 위해 그렇게 얍복강을 건너는 위험을 감수했는지 모릅니다.
룻기 1장 1절에서 5절의 말씀만을 가지고도 소설 한 권이 나올 정도입니다. 한 가정의 가장이 고된 타향살이를 견디지 못하고 그렇게 스러지고 있습니다. 이주를 해 간지 10년도 안된 시점에 엘리멜렉은 그렇게 죽은 것이지요. 가족들에게 좀 더 나은 기회를 주겠다는 생각에 쉽지 않은 결정을 했을텐데 안타까운 죽음입니다. 당시 남자의 결혼 적령기가 18살이라고 추정한다면 엘리멜렉은 30대 정도에 요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모압 땅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가기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모압은 그야말로 적국이었습니다. 현재의 요르단 땅입니다. 성지답사를 가 보면 모압 땅이 그렇게 비옥해 보이지 않습니다. 척박한 이국 땅에서 땅을 일구며 가족을 건사하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아버지의 사후에 얻은 이방인 며느리들과 시어머니 사이는 원만했을까요? 분명히 나오미와 룻 그리고 오르바 사이에 여러 문화적인 차이에서 빚어지는 갈등들이 존재 했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심각한 일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들은 말룐과 기룐의 죽음 앞에 속절없이 눈물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여인들의 생명력이 남자들의 그것보다 훨씬 질기고 길었었나 봅니다. 엘리멜렉은 어린 아들들과 아내를 남기고 죽어가며 안타까운 마음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렇게 이국 땅에 묻혀야 하는 자신의 신세가 한탄스럽기까지 했을 겁니다.
나오미가 나중에 베들레헴으로 돌아갔을 때 자신을 더이상 나오미라고 부르지 말고 마라라고 부르라고 한 것은 모두 이런 상실이 가져다 준 씁쓸함 때문입니다. 상실을 경험하는 이들은 모두 이런 쓴 마음이 자연스럽게 생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정말 나에게 이래도 되는가? 정말 이러셔야만 하는가? 라는 원망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밀레가 농부를 소재로 그린 그림 가운데 최고의 완성도를 가진 작품을 꼽으라면 단연 '추수 중에 휴식'이다. 이 그림에는 '룻과 보아스'라는 부제가 따른다. 룻과 보아스는 구약성서 룻기에 등장하는 인물로 남편을 잃고도 지극 정성으로 시어머니를 모시던 룻에게 감동해 아내로 맞은 대지주 보아스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진다. 맨 왼쪽에 푸른 옷을 입은 여인이 룻, 그녀에게 일꾼들과 함께 앉아서 쉬라고 이끄는 남자가 보아스다. 밀레는 실제 농부를 모델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세를 관찰한 다음 이들이 겹쳐진 모습을 철저하게 계산해 그렸다.
사사 시대 말기, 흉년을 피해 고향을 떠나 모압 지방으로 이주해 간 한 가정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가장인 엘리멜렉이 아내인 나오미와 두 아들, 말론과 기룐을 남겨두고 일찍 세상을 떠난다. 그 후에 두 아들은 모압여자, 룻과 오르바를 아내로 맞이한다. 하지만 그 두 아들마저 자식없이 세상을 등진다. “그 여인(나오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룻 1:5) 두 며느리가 곁에 있었건만 나오미는 세상에 덩그마니 홀로 남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모압으로 이주한 지 십 년 만에 나오미는 베들레헴에 풍년이 들었다는 소문을 듣는다. 그녀는 길 떠날 채비를 하면서 청상과부가 된 두 며느리에게 재혼을 종용한다. 근데 오르바는 시어머니와 작별하고 자기 집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한사코 나오미를 붙좇았다.
룻의 결정은 매우 놀랍다. 나오미가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룻 1:13)라고 한탄하는데 룻은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 1:16)라고 고백한다. 그녀는 남편을 통해 홍해 바다에서 보여주신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 능력의 사건을 전해 들었을지 모른다. 또한 그들에게 결국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 이야기를 그녀는 기억하고 있었을까? 여하튼 룻은 비탄에 빠진 나오미의 하나님을 믿고 따라나선다. 마침내 룻과 나오미는 유대 땅 베들레헴으로 돌아온다. 두 아낙네의 걸음으로 한 사나흘 걸리는 길이다. 그 길 위에서 서로 무슨 말을 주고받았을까? 어쩌면 별로 할 말이 없었는지 모른다. 성경기자는 두 여인의 귀향에 대해 간략히 언급한다. “나오미가 모압 지방에서 그의 며느리 모압 여인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그들이 보리추수 시작할 때에 베들레헴에 이르렀더라”(룻 1:22) 생뚱맞게도 ‘보리추수 시작할 때에’라는 시기를 강조한다. 나오미는 알았을까? 그 보리밭에서 룻은 훗날 결혼하게 될 보아스를 만난다.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다. 때론 쓰라린 아픔과 고통으로 다가온다. 그러나 그 분을 신뢰하라! 그리고 끝까지 인내하라! 어두운 밤 구름 속에 감춰진 하나님의 크신 긍휼이 이윽고 축복의 비가 되어 당신의 머리 위에 쏟아져 내릴 것이다.
그들이 고향에 도착했을 때 오랜 가뭄이 해갈되었는지 튼실한 곡식들이 들판에 널려 있었다. 보리 수확이 한창이었다. 룻은 아무 밭에나 가서 떨어진 이삭을 주우려고 했다. “룻이 가서 베는 자를 따라 밭에서 이삭을 줍는데 우연히 엘리멜렉의 친족 보아스에게 속한 밭에 이르렀더라”(룻 2:3) 필연이란 우연을 가장해서 찾아온다.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나니 사람이 어찌 자기의 길을 알 수 있으랴”(잠 20:24)
한편 룻은 밭자락에서 이삭을 줍는 권리마저 당연히 여기지 않았다.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룻 2:7)라고 허락을 구했다. 겸손한 자는 자신이 은혜를 받을 만한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은혜를 입을수록 더욱 겸손해진다.
때마침 추수를 독려하기 위해 보아스가 밭에 당도한다. 그는 이방 여자인 룻에게 호의를 베푼다.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룻 2:10) 이는 실로 우리 각자의 삶에서 주님께 드려야 할 가장 중요한 질문이 아닌가?
그러자 보아스는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일을 알고 있었노라면서 이제 이스라엘 하나님의 날개아래 보호를 받으러 온 그녀에게 (그 분께서) 온전한 상 주시길 원한다고 빌었다.(룻 2:12) 여기서 상이란 우리의 행위와 공로에 의한 보상이 아닌,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께 참 기쁨과 소망을 두는 자들에게 주시는 복이자 동시에 그 분의 인자하심을 안전한 피난처로 삼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은총을 뜻한다.
흥미롭게도 그가 기원한 ‘하나님의 날개’ 밑에서의 보호는 (바로) 보아스 자신의 책임있는 행동에 의해 곧 실현될 바였다. 나오미가 시킨 대로 한밤중 룻이 보아스를 찾아가서 그 발치에 누워있다가 잠을 자던 그가 깨어났을 때에 (그녀는) 그에게 말하길, “당신의 옷자락을 펴 여종을 덮으소서”(룻 3:9)라고 간청하였다. -본문의 그 ‘옷자락’과 그 ‘날개’는 동일한 히브리어 ‘카나프’라는 단어가 사용되었다.-
여성이 남성에게 옷자락으로 자기를 덮으라는 의미는 청혼을 가리킨다. 이른바 보아스의 옷자락이 하나님의 날개였다. 구약에서 -‘날개를 펴다’라는 표현과 관련해-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당신의) 아내 삼으신 젊은 처녀로 묘사하면서 “네 때가 사랑을 할 만한 때라 내 옷으로 너를 덮어(내 날개를 네 위에 펴서) 벌거벗은 것을 가리고 네게 맹세하고 언약하여 너를 내게 속하게 하였느니라”(겔 16:8)고 말씀하신 구절이 있다. 쌍방간 신실한 결혼서약을 일컫는다.
룻기는 한 편의 드라마틱한 문예작품과도 같다. 삶의 잇따른 고난으로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룻 1:21)고 탄식한 나오미가 하나님의 자비하신 손길에 의해 자부인 룻과 기업무를 자인 보아스를 통해 (다시) 그녀인생이 풍성하게 채움을 받는 놀라운 반전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녀의 통곡을 춤으로 바뀌게 하였을까? 우선, 룻은 곤고한 시어머니를 한결같이 사랑하였다. 그녀는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았다. 나오미도 젊은 룻이 행복한 가정을 꾸릴 수 있도록 훌륭한 배우자를 물색했다.(룻 3:1~2) -아마 가문의 상속자를 위해서도 그렇게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보아스는 향기로운 인격의 룻이 험한 세상에서 용기를 가지고 살아갈 수 있도록 애를 썼다. 더 나아가 그는 그녀에게 기댈 언덕이 되어주려고 굳이 하지 않아도 될 수고를 감당하였다. 그처럼 서로 동정과 인애의 심정으로 따뜻이 품어주려고 노력했기에 그 어렵고 힘든 상황을 헤쳐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속담에 하나님은 굽은 막대기로도 똑바른 선을 그으신다고 하신다. (당시) 이스라엘의 배타적인 사회에서 이방여인 룻과 보아스의 결혼은 일종의 특종기사에 해당됐다. 말인즉 그들이 상종을 꺼리는 모압 출신 여성이, 그것도 한 번 결혼해 10년간 아기를 낳지못한 여자가 뭇사람에게 존경받는 유력자 보아스와 재혼해서 ‘나오미의 아들’이라 칭하는 아기가 태어났다는 사실은 있을 수 없는 사건이었다. 부언하자면 그 아기의 이름을 ‘오벳’이라 했는데 그는 다윗 왕가의 조상으로서 유명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