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길동에 있는 한 놀이터에 오른팔을 합판으로 감싼 대학생으로 보이는 이와 어쩔 줄 몰라서 당혹해하는 표정이 역력한 중학생으로 보이는 아이들 2명이 서 있다. 한 아이의 손에는 알루미늄 배트가 들려져 있다. ‘차력 시범이라도 보이는 것일까?’ 그 순간, 아이가 배트로 사내의 팔을 내리친다. “꽝”하는 소리와 함께 스무 살 남짓한 이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지고, 두 아이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낸다. 눈물을 흘린 한 아이는 후에 야생마라고 불리면서 마운드를 지배한 이상훈 전 LG 투수이고, 배트에 팔을 내맡긴 이는 마포 리틀야구단의 조상진 감독이다. 그들에게 어떤 사연이 있었던 것일까? “그때 내가 데리고 있던 애들이 20여 명이 됐다. 근데 군대에 가야 하는데, 중학교 애들 진학문제도 있어서 어떻게 좀 연기를 시켜보려고 그랬다. (쓴웃음을 지으면서) 근데 팔이 부러진 게 아니라 접질렸던 거다. 예정대로 훈련소에 가서 의무소에서 1주일 있다가 자대에 배치됐다.” 야생마 이상훈과의 인연 “고등학교 3학년 때 아는 형을 도와주면서 이 길에 발을 내디뎠다. (이)상훈이는 신길 초등학교에서 우리가 운동할 때 엄마를 피해서 옥상으로 담을 넘어와서 야구를 하곤 했다. 부모님이 반대를 많이 하셨거든. 그래도 상훈이가 6학년이 되었을 때는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셨다. 해남으로 합숙훈련을 떠났을 때도 어머니가 따라오셔서 밥도 해주시고 그러셨다.” 군대에 가면서 이상훈을 이전처럼 자주 만나지는 못하지만, 한 번씩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거나 휴가 나왔을 때 만나서 야구 선배로서 고민을 들어주거나 조언을 해준다. 조상진과 이상훈은 리틀야구 시절 감독과 선수라는 관계를 넘어서 인간적인 교감을 나누는 사이이다. 서울고를 거쳐서 고려대에 입학한 이상훈은 ‘빠삐용’으로 불렸다. 한 대회가 끝나면 ‘지금은 훈련받기 곤란하다. 조금 기다려 달라.’라는 말도 남기지 않고, 고려대 합숙소를 탈출(?)하는 것이 일상이었기 때문이다. 1991년 12월 망원동에서 비닐하우스를 치고 합숙 훈련을 하던 그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다. 이상훈의 어머니였다. “상훈이가 지금 부산에 있는데, 올라오라고 해도 안 올라온다. 올라오게 할 방법이 없겠느냐? 고교, 대학 감독님이 전화해도 막무가내다.” 이상훈의 연락처를 받아서 전화를 건다. “상훈아, 뭐하고 있느냐?” “그냥 있는데요.” “만나서 나랑 이야기 좀 하자.” 반신반의하면서 통화를 이어가던 그의 귀에 뜻밖의 말이 들려온다. “지금은 차비가 없어서 곤란합니다.” ![]() 지금은 곤란하다고 해서 마냥 기다릴 수는 없는 법. 그 말을 듣자마자 은행에 달려가서 3만 원을 보낸다. 다음날 초췌한 몰골의 이상훈이 망원동 하우스에 나타났다. “근데 다 큰 애를 앉혀놓고 훈시할 수도 없고…. 어떻게 마음을 돌려놓을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핑계를 댔다. ‘오늘 내가 좀 바쁘다. 나 대신에 네가 애들을 좀 봐줘야겠다.’라고 말하고 바로 나왔다. 그렇게 나와서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저녁에 들어가니깐 애들이랑 밥을 먹고 있더라고.” 다 먹기를 기다리고 나서 “이제 집에 들어가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말에 이상훈은 순순히 “들어가겠습니다.”라고 답한다. 이상훈으로서는 항상 배우는 처지에 있다가, 애들을 가르치면서 “자신이 하는 야구에 대해서 진지하게 고민”하는 하루가 되었을 것이다. 그해 겨울 이상훈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동계훈련부터 전지훈련, 개인훈련을 꾀부리지 않고 성실하게 땀을 흘렸다. 그 결과. 조상진이 이상훈을 다시 본 것은 1992년 4월 7일이다. 직접 만난 것이 아니라 스포츠신문 1면에서. 성균관대를 상대로 조성민을 구원 등판한 이상훈이 14타자 연속 탈삼진이라는 신기록을 작성한 것이다. “상훈이가 프로에 가서도 계속 우리 리틀야구단의 OB 대 YB 전에 나왔다. 애들이랑 사진도 같이 찍고, 심판도 보고. 사실 고려대에서 LG로 갈 때도 장충야구장에서 심판을 보고 있었다. 기자들은 기다리고 있었고. 그리고 우리가 합숙훈련을 할 때도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놀아주고 가고. 한 번은 지금 연세대 감독님인 이광은 코치님이 따라오신 적도 있다. (웃으면서) 도대체 얘가 노는 날마다 어딜 가는지 해서.” 풍요 속의 빈곤 ‘리틀야구’ 최근 리틀야구의 성장은 눈부시다 못해 눈이 멀 정도이다. 2006년에 전국적으로 23팀이던 게 2009년 말에는 106팀으로 늘어났다. 게다가, 올해 상반기에 20여개의 팀이 창단할 예정이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지만, 양이 질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1천 원짜리 양은냄비 자장면에 맛을 따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울에 야구부가 있는 초등학교가 작년에 2개교가 해체되면서, 27개교밖에 안 된다. 그리고 중학교도 23개교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리틀야구단만 많아진다고 좋아할 일은 아니다. 어차피 야구라는 게 함께 커 나가야 하는데, 한쪽만 성장하면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리틀야구연맹이 성장하는 게 기쁘면서도 걱정스러운 이유다.” 2010년 대한야구협회에 등록된 전국 초등학교 야구부는 102개교이며, 중학교는 78개교, 고등학교는 56개교이다. 현재 초등학교와 리틀야구단에서 3천 명 정도가 야구를 하고 있는데, 중학교 야구선수는 1천 5백 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50% 이상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야구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 더 큰 문제는 야구를 할 수 있는 공간이 태부족하다는 것이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발간한 ‘2009 야구장백서’에 따르면, 전국에는 140개의 야구장이 있다. 이에 비해서 일본(일본 통계연감)은 약 78배인 10,870개가 있고, 그중에서 초중고에만 2,256개나 된다. 한국은 초중고에 43개밖에 없다. “일전에 일본 체육공원에 간 적이 있다. 거기에 야구장이 몇 개 있을 것 같나? 성인구장을 비롯해 23개가 있더라. 그러니 야구 저변에서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일본은 팀 수도 많고, 야구장도 많으니까 야구를 하는 애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거다. 최근 KBO 등에서 야구 육성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하지만, 다른 거 필요 없이 야구장만 많이 만들면 된다고 본다. 리틀야구가 평일에도 야구를 하는데, 서울에서는 야구장 3개만 있으면 우리도 일본 등과 같이 주말에만 할 수 있다.” 대한야구협회는 2011년부터 초중고대학에서 주말리그를 실시한다. ‘야구 기계’만 만들어내는 현실을 타파하려는 조치이다. 환영할 조치이지만, 산적한 문제도 적지 않다. 그중에서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야구장이다. 구경백 대한야구협회 홍보이사는 “주말리그를 시행했을 때 가장 우려가 되는 게 야구장 문제다. 초중고대학팀은 어떻게 꾸려갈 수는 있는데, 문제는 사회인야구다. 현재 사회인야구가 고교 운동장을 주말에 활용하고 있다. 이게 불가능해지기 때문에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다.”라고 지적했다. 이명박 정부의 정책기조는 ‘녹색성장’이다. 단순히 전국을 자전거 길로 잇는다고 해서 녹색성장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야구장을 비롯한 축구장, 농구장 등 각종 체육시설을 갖춘 체육공원이 녹색성장이라는 말에 어울리는 방향은 아닐까. 야구가 아닌 추억 만들기 힘든 역경 속에서도 조상진 감독이 20여 년을 리틀야구와 함께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리틀야구의 매력은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뭔가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볼 수 있다는 점인 것 같다. 무에서 유가 되어가는 애들이 참 신기하다. ‘오, 어제까지만 해도 이게 안 됐는데, 오늘은 이게 되네.’ 이런 느낌이다. 또한, 중학교나 고교는 함께 하는 시간이 길어야 3년이지만, 리틀은 일찍 들어온 아이라면 5년을 함께 한다. 매년 선수등록을 하기 위해서 증명사진을 찍는데, 애들이 커가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외형뿐만이 아니라 성격 등 애들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는 게 매력인 것 같다.” 성장을 지켜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한 야구인은 “리틀야구 감독을 하기 위해서는 하루에 참을 인자 300개를 쓴다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독심술이라도 하는 듯이 기억에 남는 한 경기를 이야기해준다. “상훈이가 있을 땐 데, 준결승에서 상대 번트를 수비하다가 3번 다 실수를 했다. 공을 잡아서 던지지도 못하고, 던지면 세이프고. 자기도 화가 나니까 마운드 위를 뱅글뱅글 도는 거다. 그러다가 안 되겠으니까 바꿔달라고 신호를 보내더라. 근데 나는 못 본 체했다. 위기에서 한 번 피하기 시작하면, 다음에도 피할 생각만 한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자신이 그 고비를 넘겨야만 하는 거다. 가장 어려운 순간을 넘겼을 때 성취감도 생기고, 또 그게 자기 실력이 될 수 있다.” ![]() 자아성장을 위해서 항상 부원들은 ‘야구 일기’를 쓰고 있다. 자신의 문제점만이 아니라 장점, 경기나 연습 중에 느낀 점 등을 쓰면서 자신을 되돌아본다. 또한, 먼 훗날 야구 일기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추억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신체적 정신적 성장 이상으로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추억 만들기’다. “이번 겨울에 아이들과 함께 부산에 갔다. 부산이라고 하면 돼지국밥이잖아. 그래서 사줬더니 애들이 진짜 맛있다고 하더라. (웃으면서) 2박 하면서 4끼나 먹었다. 그리고 광안대교도 보고, 해운대도 갔다. 해운대라는 영화가 나왔는데, 어떤 곳인지 보여주고 싶었다. 사진도 찍고, 파도 치는 바닷가에도 들어가 보고. 그런 것 같다. 나는 아이들에게 단순히 야구를 가르치기보다는 추억을 만들어주고 싶다. 나랑 같이 간 부산을 그 애들이 커서 그 기억을 더듬어 갈 수 있고, 나 역시 그 기억을 더듬어 가고. 그런 게 중요하다고 본다.” 작년 11월에 있었던 OB 대 YB 전에 생각도 하지 못한 한 이가 찾아온다. 중학교 2학년 때 유급을 하면서 10개월을 함께 한 소년이 건장한 청년이 되어서 나타난 것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야구를 그만둔 그이와 소주를 곁들이면서 대화를 나누던 조상진은 깜짝 놀란다.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 “한양대 2학년에 다녀요. 그리고.” “그리고?” “얼마 전에 사시 1차에 합격했어요.” “제대하고 나서 회사에 취직했는데, 상사가 매일 ‘저 XX는 운동밖에 안 한 놈이라서 머리가 나쁘다.’라고 말한 모양이다. 모멸감을 느끼다가, 하루는 노량진을 지나가는데, 거기 학원이 많잖아. 바로 내려서 등록을 했다는 거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그날부터 공부해서 2년 만에 대학에 들어가고, 사시 1차에 합격했다는 거다. 올해 6월에 2차를 보는데, 합격하면 스포츠 관련 변호사가 되고 싶다고 하더라. 자기가 늦게 야구를 시작하면서 힘든 일도 많았지만, 좋아해서 한 거라서 후회는 안 한다는 거다. 운동을 했다고 해서 머리가 나쁘지는 않다는 걸, 그게 편견이라는 걸 꼭 보여주고 싶다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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