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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년산(産) 아버지의 옷
강병철
아버지는 일제 강점기 공주고보 출신이니.
그 시대 면소재지에서 가장 굵은 가방끈을 걸친 셈이었다. 가난한 훈장이신 할아버지께서 일찍 돌아가셔서 빈털터리 집안이었는데 과자 공장을 차린 나의 백부께서 성세를 펴면서 학비를 도와주신 것 같다. 그 신산의 식민지 시대에 교복을 입었다는 자체만으로도 고향 벗들과 엄청나게 차별화된 짐을 진 것이다. 아버지의 학창 시절 흑백 사진을 보면 유도와 검도 그리고 테니스와 스케이트 풍경까지 박혀있을 정도였다. 그 동기생 중에 김종필 국무총리도 있었는데 그는 상위권 성적에 웅변과 영어를 잘했고 만돌린을 잘 쳤다고 취할 때마다 회고하셨다. 그가 내 생애 최초로 뇌에 입력된 정치인이었고……그들 엘리트 학도 역시 지옥 같은 식민지 시국을 거치는 중이었으니.
식민지 전투병 신체검사 장소는 서산 소학교였다. 전날 읍사무소 병사계 인솔 하에 부석면에서 버스를 타고 단체로 소도시 뒷골목 여관에 합숙했단다. 특히 징병 학도들은 넘치는 항일사상을 부글부글 끓이며.
“총독부가 단추만 누르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가?”
그러면서 비밀스런 정보를 봇물처럼 터뜨렸다. 군수물자 싣고 가던 수송선이 격렬비열도 어디쯤에서 미군 잠수함의 공격으로 침몰되었다는 소식도 신선했다. 총독부에서 ‘좌초’라고 못을 박은 이유는 ‘경계의 중요성’ 때문이다. ‘전투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있어도 경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할 수 없다’는 도스께끼 군기 기강 문제라며, 킬킬 대는 장정들, 딱 그 순간까지만 통쾌했었다.
바로 옆 방 안전(安田)보초가 쥐새끼처럼 엿들었으니.
그는 창씨개명에 가장 먼저 앞장 선 일제의 앞잡이다. 그 악질 완장이 숙소 옆방에서 몰래 탐지하면서 밀고용 도표를 짜고 있는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튿날 신체검사를 마치고 귀가준비를 하고 있는데, 게다짝 사내가 앞을 가로막으며 찝차를 가리킨다. 칼 찬 헌병 둘이 옆에 버티고 있으니 반항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시멘트 냄새 쏟아지는 취조실, 참나무 탁자와 철제 의자 두 개 그리고 빗자루 몽둥이뿐인데 옆방의 비명소리가 섬찟 옆구리 찌른다. 외투를 벗고 훈도시 차림으로,
“무슨 작당을 했느냐? 어젯밤 여관에서.”
“한 말이 없오.”
아닌 게 아니라 어젯밤 형님네 과자공장에 들러오는 길이어서 마지막 대목만 가물거릴 뿐 뚜렷하게 떠오르는 게 실제로 없었다.
“빠가야로.”
정수리로 각목이 날아왔고 쓰러진 어깨 위로 구둣발이 짓이겨졌다. 처음에는 찢어지게 아프더니 나중에는 감각이 무디어질 만큼 작신 맞았다.
“이 새끼야. 조선이 독립될 것 같으냐? 대동아제국 건설을 훼방놓는 놈들 모조리 갈기갈기 찢어버리겠다.”
그 모진 고문을 영원히 잊지 않기로 어금니 깨물었다. (나중 얘기지만 안전 보초는 해방 후에도 군청 관료로 다시 채용되었단다. 친일청산 실패의 실증적 사례다.)
학도병으로 끌려간 아버지는 블라디보스토크 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오다노리아끼(小田) 대중기관총대’로 배속되어 전투에 나가기 전날 꿈자리에 홀연 부친께서 나타나시어.
‘빨리 피하라.’
그 눈빛 표정이 엄중하여 화들짝 깨어나서도 한참 동안 꿈과 생시의 구분이 가질 않는 것이다. 그리고 눈을 뜨자마자 창자가 끊어질 듯 배가 아픈 것이다. 데굴데굴 구르는 부하의 아랫배에 일본도를 뺴어든 부대장 나까무라는.
“거짓말이면 죽인다.”
부대장은 부하들이건 민간인이건 총과 칼을 닥치는 대로 휘두르는 야만의 권력 소유자이다. 그가 쫄병의 복부를 걷어차다가 땀을 뻘뻘 흘리는 모습을 보며.
“환자부대에 배속시켯!”
다음날 루스키섬 전투에 나간 군인들은 모두 섬멸 당했다는 소식을 접하며 재빨리 판단했다. 이제 탈영이다. 학도병들은 남아 있는 환자부대들과 탈영을 감행하다가 함경북도 온성에서 해방을 맞이했단다.
해방 후.
교편을 잡으면서 소박한 실용주의자로 변신했다.
교원자격증을 획득한 아버지는 스무 살에 훈장이 되셨고 스물아홉에 교감으로 승진했고 마흔셋에 교장님이 되었다. (교사 정년이 만65세 시대였으므로) 수십 년 동안 교육 관료로만 임했으니 관운도 조금은 따른 것이다. 아버지 친구들 중 몇몇은 두세 해 임용이 늦었는데 대부분 평교사로 정년퇴임을 했다. 그 당시는 교장 임기가 무제한 종신제였으므로 앞자리가 비워지지 않는 한 후속타 승진의 길이 막혔던 것이다. 아버지는 가끔 풍금을 치거나 무용을 하는 스승들을 가리키며.
“저니도 내 동창생이다.”
당신의 입지에 대해 쬐끔은 뿌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그때까지는 당신의 아들이 만년 평교사로 남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을 즈음이다.
6남매 모두 학사모를 쓸 수 있었던 것은 당신의 교육열과 어머니의 무자비한 희생 그리고 ‘빚의 힘’, 이 삼위일체의 합종 세트였던 것 같다. 좌우지간 동네 아무개네 집에서 소를 팔거나 현금이 있다는 소리만 들리면 부부의 밤마실로 돈을 꾸었다. 공직자라는 보증수표 배경으로 이웃들이 출자를 서슴지 않았고 아버지는 그 돈을 아들, 딸들의 등록금으로 묶어두었다. 나중 얘기지만.
“엄청 이익이 되었어.”
빚의 이자보다 물가 상승률이 훨씬 높았다는 후일담이다. 그러니까 유년 시절, 시내버스비가 5원이었는데 2018년 현재 1400원이니 280배의 물가 상승률인데 빚의 이자는 50배 정도밖에 뛰지 못했다나, 그러나 아침마다 빚 독촉하는 이웃들의 마른 발바닥 소리가 유년의 짐으로 떠올랐던 기억들도 밝힌다.
아버지의 묵시적 가훈은 ‘학벌’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자식들은 시골 우등생이었을 뿐 삐까번쩍 광채를 내지는 못했다. 바로 밑의 동생 강병준이 서울대에 입(入)했을 뿐 나머지 형제들은 성실 자세로 체면 유지 정도였다고 할까? 그러거나 말거나 아버지의 열공 다그침이 특히 나에게는 무거운 가위눌림이었다.
나 역시 초등 교실에서 1,2등을 유지했으나,
그 1등 강박증 속에서 심약한 유년을 보내야 했다. 아버지는 고학년이 된 나를 위해 ‘표준 전과’와 ‘동아수련장’을 구입했는데 교실에서 그걸 펼치기가 민망했다. 내가 과외를 받던 그 시간에 벗들은 콩밭을 매거나 키에 맞는 지게 지고 나무하러 나갔다. 벗들이 선배들의 헌 책을 물려받아 공부하다가 졸업과 동시에 공장이나 일터로 나갈 때 나 혼자 서울 유학을 시도했다. 6학년 때는 교과서를 두 권씩 사주셨으니 그게 ‘서울 우등생 비법’이란다. 한 권은 학교에서 배우는 보통 교과서이고 또 한 권은 제목과 토씨를 빼놓고는 먹물로 새까맣게 지운 교과서이다. 내용을 완죠니 좔좔 외우고 불에 태워 갈아 마셔버리는 완벽 마스터 타법, 그런 중압감으로 밤마다 어금니 갈아마셨다.
그러나 전학생의 서울은 달랐다. 결국 나는 시골뜨기 서산 갯마을 자취생일 뿐이었다. 교실마다 올백(All 100)이 서넛씩 포진한 그룹 아래 10등 바깥으로 내동댕이쳐지는 성적표에 일단 기가 죽었다. 그 대신 1등 강박증에서 해방된 편안함도 있었다. 1등 고수를 위해 밤샘 공부할 필요가 없어졌다. 추락한 석차를 감추기 위해 침 발라 지우다가 통지표를 빵꾸 내던 해프닝도 영원히 사라졌다.
아버지는 월급봉투 쪼개는 절약정신으로 살았지만 백부께서는 통이 큰 사업가답게 소사에 무심한 낙천가였다. ‘돈 좀 빌려주라’ 한 마디 쓰뭉하게 던지면 아버지는 형님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동분서주 분주했다. 추수한 쌀을 소 구루마 80리길 야간 운행한 이야기는 수십 번 리펫된 사연이라 내가 겪은 듯 생생하다. 하지만 백부께서는 사업 확장에 바빠 가끔 까마귀 고기를 드셨으니, 빚 갚음 날짜가 지나치면 아버지의 전전긍긍 표정에 온가족이 뒤숭숭했다.
6학년 졸업반 겨울.
백부네 사무실로 돈을 받으러 가신 아버지가 며칠째 돌아오지 않던 겨울방학, 사흘째 되는 날 어머니가.
“아버지 모시고 와라.”
열세 살 소년은 동생의 손을 잡고 버스를 두 번 갈아탔다. 눈 녹은 비포장도로가 질퍽거렸고 완행버스 커브길 낭떠러지를 비켜나면 다시 나타나는 벼랑 끝이 아찔했다. 아버지는 양조장 뒷방에 홀로 누워계셨는데 긴 머리카락에 식은땀 범벅이었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 것은 심약한 성품 탓이었고.
그날 저녁 아버지는 호롱불 옆에서 나를 잡고 영어 발음기호 테스트를 하셨다. 스무 개 중에서 세 개를 틀렸는데 그 중 하나는 소풍의 뜻인 ‘피크닉’을 ‘프큼억’이라고 쓴 거였다. 신문지 뭉치를 돌돌 말아 틀린 개수대로 아들의 어깨를 내려쳤고 나는 마지막 매까지 피하지 않았다. 아프지는 않았다, 신문지 매질의 파워만큼 아버지의 속앓이가 풀리기를 바라면서 이불 속에서 훌쩍훌쩍 울었던 것 같다.
1969년 서울 중동중학교 야간부에 입학했다. 문교부는 중학교 입시 과열 해소를 이유로 그해 서울 지역만 중학교 평준화를 시도했다. 그 대신 시골 전학생들은 무조건 야간 중학교에 배속을 시켰으니 그게 올빼미 중학생의 시작이었다. 그때 문교부장관 성함은 권오병……잊혀지지 않는다.
그런 ‘아랫돌 빼서 윗돌에 괴는’ 뗌빵 정책으로 야간중학교 배정을 받고 꺼이꺼이 더 많이 울었다. 북아현동 날맹이 자취방에서 어깨 들먹이는 둘째 아들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경기고등학교에 합격해서 복수하라.”
진정성과 판박이의 혼재된 문장으로 아들을 위로했고 그렇게 올빼미 중학 생활이 시작되었다. 형과 누나가 새벽 등굣길 빠져나가면 혼자만 덩그라니 남게 되는 열네 살 소년, 오후 네 시까지 좁은 자취방을 지키는 것은 지겨운 고역이었다. 우리 자취생 3남매 모두 구두쇠 핏줄이었으니, 만화방은 돈이 아까워서 엄두를 낼 수 없었다. 반찬을 사본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연탄불이 꺼지면 그냥 쫄쫄 굶는 공복으로 버티면서 ‘절약의 효심’을 유지했다.
탈출구는 남산도서관이었다. 어차피 저물녘에나 등교할 수 있었으므로 오르막 한 시간 소요가 전혀 아깝지는 않았다. 원효로 자취방에서 후암동 미군부대 골목 지나 남산도서관 계단으로 타박타박 오르면 속옷까지 후줄근했다. 맨밥 도시락으로 5원짜리 국물을 말아먹으며 무료 도서대출을 활용하여 염상섭, 김동인, 나도향, 채만식, 현진건을 만났다. 4층 옥상에서 종이비행기를 날리다 보면 서울 복판이 눈 아래에 손바닥처럼 바싹 붙어있었고.
중3 때, 결핵성관절염 진단으로.
성모병원에 20일 가량 입원했다가 기브스 상태로 두 달 더 휴학한 사건은 오랜 아킬레스근이 되었다. 휴학 기간 내내 귀향생활을 했는데 품앗이 나온 동네 아줌마들이 혀를 차며 석고에 묶인 나를 구경하는 게 고역이었다. 그들은 바싹 다가와.
“월매나 심 드냐?”
고개 들이밀면 콧김 냄새가 힘들어도 생끗 웃어주어야 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나, 뜰 안의 절름발이 중병아리도 거슬렸다. 병아리 시절 실수로 철사가 발목에 묶였는데 몸집이 커가면서 조인 쇠붙이 위로 살이 뚱뚱하게 팽창하면서 절룩거리게 된 것이다. 내 몸도 아픈데 절름발이 가축과 동거하는 게 싫어서.
“저 닭 좀 처리해 주세요.”
아, 그때 아버지의 진지한 표정을 새롭게 만났다. 중환자실 의사처럼 중병아리 발목의 철사를 조심조심 해체했고 옥시풀을 발랐고 소독했던 붕대까지 지성으로 동여매는 인자함을 보여주셨다. 그 진지한 표정은 또 있었다. 제비집에서 떨어진 제비 다리도 흥부의 표정으로 구원하실 때 나는 존경과 감탄으로 설레었다. 제비는 아버지의 정성으로 보름 후 부러진 다리를 펴고 푸른 항공으로 훨훨 날개쳤다.
하지만 천장에서 뚝 떨어진 쥐새끼는 인정사정없이 밟아 죽였고 안마당에 침입한 구렁이도 조선낫 한 방으로 반 토막 내었다. 나는 틈입자 야생동물을 처리할 능력이 없으면서도 아버지의 행위를 잔인성으로 규정했다.
성적이 15등으로 더 떨어졌지만 ‘휴학 면죄부’를 방패로 야단맞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그런데 서울이 싫었다. 이상하다. 밤 10시 하굣길, 수은등 없는 골목길 자취방 유리창으로 내 고향 천수만 푸른 바다가 넘실거리는 것이다. 밀짚방석, 뭉게구름, 아카시아와 삘기 무덤, 장마철 수로에서 팔딱팔딱 뛰는 참붕어 비늘 파편, 그 배경으로 잠깐씩 펼쳐지는 무지개, 뒤로 갈수록 하늘색으로 맞닿는 수평선을 떠올릴 때마다 스크린의 황홀함으로 멍하니 굳어 있기도 했다. 병상 생활을 끝낸 어느 날 아버지에게.
“고향 중학교로 돌려 보내주세요. 제발.”
그러나 소싯적에 한양으로 유학시킨 자식들을 다시 원위치 시킨다는 게 체면상으로도 불가능했다. 그 후 고등학교와 재수 생활까지 몇 년 더 서울에 머무르다 지방대학생으로 뺑뺑 돌아 소도시 총각 선생으로 컴백하면서 비로소 활력을 찾았다.
아버지는 머슴 아저씨와 둘이서 외양간도 치우고 사과나무 가지치기도 하면서 경제적 안정세를 이루셨던 것 같다. 하지만 둘째 아들 강병철의 무너지는 성적표 때문에 ‘부글부글’을 간신히 견디시는 게 역력했다. 밥상머리에서 면소재지 수재 후배를 올려놓기도 했고 가끔 형제끼리의 성적표를 비교하는 게 고통스러웠다. 그런데 칭찬에 인색하던 부친께서 내가 연습장에 써놓은 낙서들을 꼼꼼하게 살피시더니 딱 한번.
“병철이가 글을 잘 쓰는구나.”
얼굴이 환하게 펴지는 것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진리를 놀랍게 체득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글을 쓰면서 집안에서의 열등감을 쬐끔씩 회복하며 감성의 리얼함을 구체화시키기도 했다.
교사 첫 발령은 논산 쌘뽈여고.
그 학교가 그리도 좋았다. 대학 시절 여대생들의 스포트와 무관했던 나는 여고의 총각 선생이 되어 발바닥이 허공 10센티쯤 둥둥 떠다닐 뻔했다. 소도시 여고생들이 수줍음 많은 초짜 선생을 놀리기도 하면서 풋풋한 교단일기를 만들 뻔했다. 아니, 짧게나마 행복했다. 유도혁, 강승구, 김종도 같은 참스승을 만났고 습작 시인 이재무가 가끔 놀러오기도 했다. 루카치와 발자크를 만났고 전태일을 독파했고 유동우의 ‘어느 돌멩이의 외침’을 읽고 펑펑 울었다. 깨어있는 벗들의 스크럼에 끼어들었고 폭폭한 세상을 한탄하면서 ‘행동하지 않는 양심’을 벗어나려 했다. 칠판도 글도 노동의 일상도 그렇게 마른 벌판 사르는 들불이 되어야 했던 변혁의 시국, 나도 그 세파를 피할 수 없었다.
『삶의 문학』 동인으로 활동하던 중 『민중교육』 필화사건에 연루되어 학교를 쫓겨났다. 어느 날 TV에 내 이름자(字)가 등장한 것이다. 특집 제목은.
‘『민중교육』 당신의 자녀를 노리고 있다’
내가 쓴 단편소설 「비늘눈」의 내용은 ‘사립 교사가 되려던 대학졸업생이 재단측의 금품 요구에 회의를 품고 임용을 포기함’이었다. (85년 8월 12일 ㅈ신문) 이게 없는 사실을 조작한 ‘허위사실 유포’가 되고 그 허위사실이 나라를 혼란스럽게 하는 ‘국기 혼란’이요, 적을 이롭게 하는 ‘이적행위’로 변신하는 악마적 편집이다. 그때 문교부장관은 손재석, 그는 그렇게 17명의 교사를 단칼에 잘라내면서 순수 청년교사의 심장에 ‘시국의 분노’를 심어주었다.
아버지 역시 절망에 빠지셨다. 교장 임용 18년차였던 아버지는 나름대로 도교육청에 끈을 대어 아들의 상태를 회복시키려 했으나 이미 한계를 넘었음을 깨달으면서 무력감에 빠졌다. 아들의 손을 붙잡고,
“내 손을 넘었다. 큰일 났다.”
그렇게 시한폭탄 심장을 흔드는 것이다. 바깥에서 최교진, 이은봉, 황재학, 이은식, 송대헌 등의 벗들과 결의를 다질 때는 목숨이라도 바칠 듯 노여워하다가 다시 귀갓길 현관 앞에서 아버지를 떠올리면 어깨가 무너지는 것이다. 사건 일주일 되던 날.
따르르르르릉.
신새벽 초인종이 울렸고 덩치 큰 구둣발들이 쳐들어오면서 가족들 얼굴이 납덩이처럼 굳어버렸다.
“강병철 선생님 댁이시죠?”
아버지는 침착함을 잃지 않으며 되물었다.
“『민중교육』 책 읽어 보셨지요?”
“……예.”
당연히 거짓말이었다. 그들은 시키는 대로 연행하는 행동대원일 뿐이었는데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보셨다니 아시겠지만 내 아들은 그냥 소설 한 편 쓴 것입니다.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코다리처럼 세모진 턱의 형사 하나가.
“이제 소용없는 소리니까 화끈하게 동행합시다.”
그대로 영장 없이 화끈하게 연행했다. 그때부터 지난날이 과거이고 지금 상황이 현재이고 다가올 시점이 미래임을 새롭게 인지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이제 와서 회한스럽게 떠올린다. 벽두 새벽에 연행된 아들을 보내고 아파트에 남으신 아비의 심정은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
또 있다. 집안에서 아버지의 무게중심이 허망하게 약화된 것이다. 아무도 흔들리는 가장의.
‘일제 강점기 → 6.25전쟁 → 5.16쿠데타 → 유신시대 → 전두환 정권’
그 지난한 시국을 견뎌낸 살얼음판 정서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멍든 가슴 여미며 벙어리장갑 끼우려는 부친의 마음을 헤아려주지 못함이 참으로 아프다. 지나간 일이다.
그래서일까, 아버지는 나의 결혼을 특별히 기뻐하셨다. 두 명의 동생이 먼저 둥지를 튼 다음 늦깎이 신랑이 된 것도 이유겠지만 내가 해직교사였던 음울함을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다. 당신의 손주들을 무르팍에 앉히면서.
“이게 행복이란다.”
나를 향하여 더 이상 시국 사건에 연루되지 않길 바라는 눈빛을 보내시곤 했다. 그 후 전교조와 풍파를 함께 하면서 징계의 수위가 오르락내리락할 때마다 아버지는 좌불안석을 표시내지 않기 위해 혼신으로 애를 쓰셨다. 그렇게 자식들이 모순 시국을 혁파를 위해 주먹을 불끈 쥘 때마다 아버지는 식솔들을 지키기 위해 끊임없이 소심해지셔야 했다.
아버지는 내 아들 딸들을 지성으로 키워주셨고 그 손주 돌봄의 기억을 행복하게 되새김질하셨다. 손주들도 봄 햇살 토방에서 호박 씨 까먹다가 잠들기도 했고 어항 속 금붕어와 눈이 마주치는 해맑은 유년기를 보내면서 조부모를 기쁘게 했다. 어느 날 어항 청소하느라 금붕어들을 임시로 바가지에 옮겨놓았는데 아들놈이 그걸 엎질렀다. 리모컨을 찾아 기어가다가 바가지가 엎어지자 방바닥에 물이 깔리고 그 위로 금붕어 비늘이 팔딱팔딱 뛰었단다. 느이 어머니가 딱 한 대를 때렸는데 울지도 못하더라, 고 미안한 표정으로 고백했었다. 그렇게 강산이 서너 번 바뀌었다.
세월이 빛의 속도로 흘렀고.
아버지의 팔순을 즈음하여 책을 출간했다. 문장력이 뛰어나진 않았으나 바느질하듯 꼼꼼하게 글을 쓰는 노력파였다. 당신의 초고는 그냥 편지지에 쓴 세련된 흘림체 글씨였는데 그걸 타이핑해서 옮기는 작업이 여간 만만치가 않았다. 마치 암호 해독하듯 머리를 쥐어짰지만 나는 불효자 타이틀의 만회 기회로 생각하며 열심히 교정을 보았고 만화가 동생 강병호가 편집을 맡아 밤을 새우기도 했다.
『뿌리를 알아야 미래가 보인다(온누리刊)』는 충남 서산시 부석면 중에서 주로 대두리 일대를 조사한 그야말로 몸으로 작업한 글이다. 꽃소금 만드는 방법’을 기록한 것 등은 태안반도만의 특별한 자료가 되리라. 일제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블라디보스톡에서 목숨을 건 탈영을 시도한 사연도 부록처럼 붙어있다. 생전 처음 책을 출간하신 그 80세가 마지막 활력이었던 것 같다. 동창생들과 고향 사람들을 불러 책도 풀고 술도 쏘셨다.
91세 어느 날, 아버지는 아침 체조를 하시던 중 쓰러지셨다. 그리고 스스로 119를 불러 병원에 입원하시면서 마지막 홀로서기를 보여주셨다. 하지만 그게 마지막 바깥 생활이 될 줄은 까맣게 몰랐다.
노인 병동 2년 7개월.
그 기간이 아버지로선 돌이킬 수 없는 힘든 세월이 되었다. 노인병동 사내들은 TV와 컴퓨터 없이 각자의 투병을 보내고 있었다. 침대 건너편을 서로 외면하면서 주사와 간병인과 링게르에 매달려 비무장 상태의 마지막을 보내는 중이었다. 어머니도 거의 날마다 병원 방문을 하셨고 나도 일주일마다 면회를 갔다. 특히 나는 운전을 못해서 서산터미널에서 요양병원까지 눈 내리고 꽃 피는 계절을 몇 차례 보내면서 어깨를 들먹이곤 했다. 아버지는 시나브로 쇠해지면서 오래된 기억에만 선명해지셨다. 특히 여동생 강병선과 조우할 때마다 흘러간 기억들을 하나씩 꺼내셨다.
열여섯 초여름, 소금 구루마에 치여 발목이 부러졌는데 갈마리 서의상(마을 침술사)의 침을 맞고 감쪽같이 회복한 사연도 여러 차례 되풀이하셨다.
“첫 번째 침은 아픈 줄 몰랐는데 두 번째 침부터 아프기 시작했으니 신경이 되살아난 거야. 세 번째 침에서 굽은 발목이 쭈욱 펴지는 거야. 이튿날 달걀 한 줄로 보은을 했더니 고맙다며 입술이 찢어지더라.”
김종필 정치인 이야기는 색깔과 무관한 친분 스토리다.
“박정희와 김대중 대통령 때 두 번 총리를 먹었어. 홍수사태로 도비산이 무너져서 대두리 밭까지 자갈로 덮였는데 총리가 시찰을 온 거여. 내가 구경꾼들 틈에서 ‘강동원이두 왔어’ 하니까, 뒤를 돌아서며 ‘어이 칭구’ 하면서 껴안는 거야. 그가 참나무보 제방을 시멘트로 고쳐줘서 대두리는 이제 어떤 홍수에도 끄떡없을 거여.”
그리고 내 아들 강등현에 대한 칭찬이다.
“부처님 같은 애야. 어항갈이 할 때 옮겨놓은 금붕어 바가지를 발로 건드려 방바닥 홍수가 난 거여. 할머니가 꿀밤 한 대 아프게 쥐어박았는데 울지도 않더라.”
이번에는 학도병 시절 탈영한 이야기다.
“일본군 대장 그놈은 사람 목을 자르고도 눈빛 하나 움직이지 않는 독사 같은 놈이지. 전투 직전 꿈속에 나타난 아버님이 ‘빨리 도망치지 않으면 죽는다며 불호령이야거야. 배가 아프다고 하니까 칼로 찌를 듯 노려보는데 진짜 죽는 줄 알았어. 나를 빼놓고 루스키섬 전투에 간 군인들은 몰사를 당했어.”
영국 여행 이야기는 사열대에서의 천상 교장님 훈시 스타일이다.
“런던의 가로수가 사과나무인데 글쎄 박 교장 사모님이 그걸 따려고 나뭇가지를 잡는 거야. 내가 ‘안 돼요. 지금까지 사과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 건 이 나라 사람 아무도 건드리지 않았다는 거요. 대한민국 국격에 대한 문제지요.’ 했더니, 얼굴이 발개지면서 잘못했다는 거여. 흘흘흘.”
그러다가 문득 목소리를 낮추신다. 내가 귀에 손바닥을 대어도 가물가물 들리지 않는데 초로의 누이 강병선이 아버지의 눈곱을 떼면서.
“오빠가 효자라네. 효자 아들.”
엄지척을 보낸다. 아, 초로를 보낸다는 건 기쁨과 슬픔을 한꺼번에 견딘다는 의미이다.
도대체 무슨 효도를 했을까.
나는 입시에 세 번밖에 떨어지지 않았고 병상 3개월의 사춘기를 보냈을 뿐이며 해직교사도 3년 8개월로 마감했으니 지긋지긋 불효막심은 아니다. 동생 둘을 결혼 시킨 다음 늦깎이 둥지를 틀은 것도 효도이며, 징계위원회도 세 번밖에 출두하지 않았고, 한 달에 음주를 절반 정도만 했으며, 운전면허증은 없지만 면허증 있는 아내와 결혼을 했고 과속방지턱을 휙휙 점프하는 아들놈도 키웠다. 머리카락도 일 년에 두 번은 깎았고……아들, 딸을 방치했는데도 무럭무럭 잘 커줬다, 며 갸우뚱했다.
아버지는 병상에서도 '당뇨와의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딸기와 과자를 차단했고 방울토마토와 마른 건빵만 고수하셨다. 2017년 9월28일 저녁, 석식으로 쌀밥이 나오자,
"나는 당뇨환자라서 흰쌀은 안 돼."
바꿔 나온 잡곡밥 반 그릇 정도 간신히 떠 넘기시고 여덟 시간 후 운명하셨다. 그랬다. 아버지 혼자 초저녁 일곱 시를 보냈고 여덟 시 소등 이후 어둠 속에서 밤 열한 시와 자정을 보냈고 또 몇 시간 가쁜 숨 내뿜다가 운명하신 것이다. 피붙이 모두 까맣게 단잠에 빠진 초가을 밤 세 시였다. 그 실루엣을 떠올릴 때마다 나는 밀려오는 고독을 견딜 수 없다.
어머니는 지금 혼자 사신다.
초로의 아들이 주 이틀 방문하고 나머지 형제들이 주말마다 번갈아 찾아오는 일정도 만만치 않다. 나머지는 당연히 어머니 혼자의 몫이다. 주로 재래시장 광천 새우젓 가게에서 입담을 나누시다 숙소로 돌아오실 때는 미원이나 새우젓 하나씩만 들고 오신다. 택시를 잡으니 기사님이 낯익은 얼굴이다. 예전의 기사님은 당연히 의료원 쪽으로 방향을 틀었는데 어머니께서.
“그쪽 아뉴? 시장통으로,”
택시기사가 갸우뚱하며,
“오늘은 왜 의료원 안 가시쥬? 할아버지 안 만나실뀨?”
“돌아가셨어.”
“…….”
슬픈 표정을 체크한 그가 더 이상 묻지 않아서 다행이다. 대보름 까맣게 쥐불 놓은 자리마다 온통 초록빛 벌판이다. 하늘나라 어디쯤에서 누군가 초록빛 뼁끼통을 쏟아 부었거나 초록불을 지핀 사단이 틀림없다. 측백나무 성성한 이파리로 나타난 그가 너는 지금 살아있다고 우느냐며 킬킬킬 흔드는 중이다. 나는 그렇게 지금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윗도리를 걸치고 다닌다. 따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