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산 구름정원 길에 남긴 발자욱~
6월의 화사한 태양이 머리위에 쏟아지는 주말 아침 배낭을 꾸려 집을 나셨네~
지하철 3호선을 갈아타니 배낭족이 제법 많이 보이고,불광역 2번출구 만남의 장소엔
서로서로 인사를 나누느라 시끌벅쩍 한데,
진한 커피향이 코끝에 머물다 사라지네~
1.일시;2016년 6월 25일 10:00~
2.함께하신분;이재호님,임승대님,황규순님,그리고 송춘섭(4명)
■오늘의 소사■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해방의 기쁨도 잠시, 약소국이었던 우리나라는 국제적인 냉전 체제 속에서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남북으로 갈리고 말았다. 그리고 두 지역에는 한민족 대대수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각각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받는 정부가 들어섰으며, 이후 남북 정부가 서로를 부정하는 가운데 38선 일대에서는 무력충돌이 빈번히 일어났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의 총공세가 시작된 한국전쟁은 북한 인민군이 개전 4일 만에 서울을 점령하는 파죽지세의 형국이었다. 여세를 몰아 계속 남진한 북한 인민군은 8월 중순에 들어 낙동강 이남의 대구·부산 일대를 제외한 한반도의 전지역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전세의 급작스런 악화에 놀란 미국이 참전하고 곧이어 소련이 빠진 유엔안보이사회의 결정에 의해 16개국 군대로 구성된 유엔군이 참전함으로써 점차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 미군이 주력인 유엔군은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고 이를 계기로 대반격에 나섰다. 또한 전열을 정비한 국군 역시 북진을 계속해서 10월 하순에는 중국과의 국경인 압록강까지 이르렀다.
그러자 자국의 안전에 위협을 느낀 중국이 개입(1950. 10. 25)함으로써 전쟁의 양상은 다시 바뀌어 국군과 유엔군은 1951년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고 후퇴해야만 했다. 그후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과 유엔군은 2월 18일에 다시 서울을 탈환하였으나 전쟁은 점차 교착상태에 빠졌다. 이에 소련이 휴전을 제기(1951. 6. 23)함으로써 휴전교섭이 본격화되었다.
당시 미국군 일부에서는 전쟁확대론이 제기되었으나 소련의 개입에 의한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를 염려한 미국정부가 휴전제의를 받아들임으로써 회담에 들어갔다. 회담은 서로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여 2년여를 끌다가 마침내 타협점을 찾아, 3년 1개월에 걸친 한국전쟁은 휴전(1953. 7. 27)에 들어갔다.
단기전으로는 사상 가장 파괴적 전쟁이었다는 한국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남북한을 합쳐 250여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었고, 부상자의 수까지 합치면 500여만 명이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엄청난 수의 이재민과 전쟁고아, 천만 명에 달하는 이산가족을 낳았다. 또한 각종 산업 시설과 가옥의 파괴로 수많은 사람들이 휴전 이후 한 동안은 기아와 추위에 떨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보다도 더 큰 피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남북한간의 적대감과 이념대립의 골이다. 전쟁 이후 북한사회에서는 '남조선해방'이, 남한사회에서는 '안보'와 '반공'이 다른 모든 것을 초월하는 압도적 이데올로기로 군림함으로써 분단체제가 더욱 고착되었고 완전히 이질적인 두 사회로 변모해버린 것이다.
북한산 생태공원에서(좌로부터 황규순님,임승대님,이재호님)
오랫만에 임승대님이 함께하셨네~
(관악산에서 청계산을거쳐 여기까지 오시는데 근 3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북한산 생태공원은 불광동 구기터널 방향에 위치~
도심 속 자연에서 편안한 쉼터를 제공하고 있으며,
다양한 식물,연못 등 볼거리가 많아서
어린이들을 위한 생태학습장으로도 많이 이용되고 있는 아름다운 공원임.
자리바꿔 이몸(송춘섭)도 한컷~
오늘 가야할 북한산 8코스 둘레길 안내도~(이곳에서 부터 구파발역까지~)
깔끔하게 조성된 구름정원 길 초입 나무계단위에서~
가뿐숨 몰아쉬며,나무계단을 한동안 오르내리다 보니,
서울의 도심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전망대가 있구나~
누가 구름정원 아니랄까~ 뭉게구름 두둥실 파아란 하늘바다를 떠가네~
하얀 구름과 고목나무 그리고 까치집 한채~
한 시간반쯤은 걸었을까?
운동장 만큼 넓은 평지에 벤치도 있고, 산객들이 운동도 하고 있네~
나무그늘아래 자리펴고 둘러앉아
시원한 얼음막걸리에 푸짐한 안주를 곁들여 우정을 담아 먀시며, 정담을 나누었네~
어디서 왔는지? 야생고양이 한마리가 다가와 자기도 좀 달라고 애원을 하기에
문어조각 몇개 던져주니, 고맙다고 인사하네~
이름모를 꽃나무엔 아름다움이 활짝~
지난달에 올랐던 향노봉,족두리봉을 배경삼아 한컷~
6월의 푸르른 녹음을 배경으로 ~
저멀리 향노봉 능선위로 비를 머금은 구름이 소리없이 자나가길래~
얼마쯤 걸었을까? 시원한 바람 불어오는 능선위에서 모자벗고 잠시 쉼표를~
진관사 가는길에 지나간 역사의 흔적이 있기에 카메라에 담와 왔네~
조선시대 내시부 상약인 신공의 묘역~
까마득한 후손(이길을 걷는 산객들~)에게 인사를 하시네~
이곳이 구름정원 길의 마지막 종점~
은평 한옥마을 어린이 집 뜨락에 능소화가 곱게 피어 발길을 붙잡길래~
능소화에 얽힌 사연
능소화의 꽃말은 "명예"이며,"구중궁궐화"라고도 부릅니다
옛날 중국의 어느 임금님이 "소화"라는 예쁜 궁녀와 하룻밤 잠자리를 같이
하게되어 궁녀 "소화"는 갑자기 빈이 되어 궁궐 후원에 처소를 마련하게 되었는데,
다른 많은 후궁들의 시샘으로 임금님은 그날 이후로 단한번도 소화의 침소를
찾지 않았답니다,이런 사실을 모르는 순진한 소화는 이제나,저제나 임금님이
자기를 찾아오지나 않을까 담장 밖을 살피면서 귀를 쫑긋이 세우며,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그러던 소화는 결국 상사병으로 죽게 되었는데 시녀들에게 자기 시신을 궁궐
후원의 후미진 담장밑에 묻어 달라고 하여 시녀들은 그녀의 유언대로
조용히 장례를 치루고 궁궐 담장밑에 그녀를 묻어 주었답니다. 이듬해 여름 그녀가
묻힌 자리에 마치 귀를 활짝 열고있는 모습의 꽃이 피어 이를 본 궁녀들은 소화의
혼이 꽃이되어 피었다하여 능소화라 불렀다고 합니다.
후에 사람들은 이꽃을 구중궁궐화라 하여 부자집에서만 이 꽃을 심었다고 하며,
한이 맺힌 소화는 이꽃을 쳐다보면 눈이 멀게 하였답니다.
능소화 꽃가루가 눈에 들어가면 눈이 멀게 되는데,이는 꽃가루에 독이 있어서
그렇다는 설이 있으나 사실은 꽃가루를 현미경으로 확대해보면 끝이 낚시바늘
처럼 생겨서 망막에 박히면 빠지지 않아서 그렇다고 합니다........
담벼락 뒤에 숨어피던 빨간 장미도 반갑다고 인사하네~
보호수 고유번호;서12-1,220년된 느티나무~
폭넓게 조성되고 있는 은평 한옥마을~
느티나무 아래서~
이곳엔 곤충호텔도 있네~
이호텔은 하루 숙박비가 얼마일까?
1950년 6월 25일의 가슴아픈 역사가 기억속에 남아 있는 날~
역사의 뒤안길에 STORY가 있는 서울둘레길 8코스 구름정원길을 걸어
불광역(오전 10시~)에서 구파발역(오후3시~)까지 쉬고 걸으며,
무려 5 시간만에 지하철에 몸을 맡겼네~
첫댓글 간만에 둘레길 트레킹에 참석하여 화창한 날씨에 즐거운 하루였습니다. 송춘섭님의 매번 이어지는 스토리는 오늘도 재미있는 글이었내요, 특히 "오늘의 소사" 호국의 날 6월을 접으면서 생각에 잠기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에는 더 많은 멤버를 뵙게 되길 바랍니다. (임승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