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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희의 야구인] ‘풍운아’ 최향남 “아이티행 고려 중”
여전히 야구공을 놓지 않고 있는 '풍운아' 최향남(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좋은 음식을 찾아 먹는 것보다 나쁜 음식을 피하는 게 좋아요.”
며칠 전이다. ‘풍운아’ 최향남(44)과 만났다. 오스트리아에서 돌아온 지 얼마 안 된 그였다. 그를 안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는 여전히 군살 없는 몸매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기자가 물은 말이 “어떻게 몸매 관리를 합니까”였고, 그가 답한 말이 “좋은 음식을 찾아 먹는 것보다 나쁜 음식을 피하는 게 좋아요”였다.
틀린 말도 아니었다. 최향남이 술 한잔을 입에 넣는 걸 기자는 본 적이 없다. 탄산음료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그의 야구인생은 반대였다.
그는 편하고, 좋은 길을 스스로 마다하며 살아왔다. 여기까진 그의 야구관(觀)과 건강관이 일치했다. 문제는 그렇다고 그가 불편하고, 어려운 길을 피해 돌아간 적도 없다는 것이다. 되레 그는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믿는 불편한 길을 택했다. 굳이 가지 않아도 될 길을 애써 찾아 걸었다. 그 통에 그는 수십억 원을 손에 쥘 기회를 놓쳤고, 개인적으로도 큰 풍파를 겪었다. 돌아돌아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최향남은 담담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박 기자, 이제 내가 날 놔줄 시간이 된 거 같아.”
그는 ‘차라리…’하는 마음으로 군에 입대했다. 현역병으로 입대한 통에 야구와 멀어졌지만, 변화가 필요했던 최향남에겐 아무래도 좋을 일이었다. 제대하고 돌아왔지만 해태나 그나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그때 마침 해태와 LG가 트레이드 협상을 벌였고, 최향남은 해태를 떠나 LG 유니폼을 입게 됐다.
최향남이 말하는 ‘야구를 가장 행복하게 했던 시절’이 시작된 것이다. LG에서 최향남은 완전 다른 투수가 됐다. 1997년 이적 첫해 최향남은 시속 150km에 육박하는 빠른 공을 던지며 그해 평균자책 2점대(2.99) 투수로 우뚝 섰다. 1998년엔 12승을 거두며 LG 에이스로 자리매김했다. LG에서 최향남은 그야말로 자유를 만끽했다.
“자유란 게 별거 아니었어요. 내 운동을 내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 남에게 폐 끼치지 않으면서 내가 날 표현할 수 있는 자유. 누구 눈치 보지 않고, 내 야구에 전념할 수 있는 자유. 매와 얼차려가 아니어도 스스로 야구를 찾아서 하는 자유. 그런 자유를 LG에서 만끽했으니 얼마나 신났겠어요. 지금 생각해도 LG 시절이 제 야구인생에선 최고의 시절이 아니었나 싶어요.”
‘찬란했던 LG 시절’은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다. 1999년부터 각종 부상에 시달리며 최향남은 빠르게 하향세를 탔다. 그러다 결국 2003년을 끝으로 최향남은 LG에서 방출됐다.
최향남을 다시 받아준 건 ‘친정’ KIA였다. 이제는 중고참이 된 최향남을 매질할 선참은 없었다. 엄격한 위계질서를 자랑하던 해태 문화도 KIA로 주인이 바뀌며 상당 부분 색깔이 바뀐 터였다. 최향남은 KIA와 입단 계약서를 쓰면서 ‘선수가 국외 진출을 선택할 경우 구단은 조건 없이 선수를 놔준다’는 조항을 삽입했다. KIA는 바로 ‘OK'했다.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2년 뒤.
최향남은 미국행을 선언했고, 2년 동안 짭짤하게 그를 활용했던 KIA는 커다란 나무망치에 뒷목을 맞은 것처럼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그건 야구계도 같았다. ‘35살의 노장 투수가 미국을 간다니 이게 말이 되느냐’는 반응 일색이었다. 그러나 최향남에겐 최향남의 길이 있었다. 그는 주변의 고갯짓에 아랑곳하지 않고 2006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트리플A 팀 버팔로 바이슨스에서 뛰었다.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34경기에 등판해 8승 5패 평균자책 2.37을 기록했다.
“메이저리그 승격을 내심 기대했죠. 하지만, 못 올라가리란 걸 눈치채고 있었어요. 구단 내부에서 트리플A에선 호투하지만, 메이저리그에서도 지금처럼 던질 수 있겠느냐는 우려가 있었던 거 같아요. 저도 큰 실망은 하지 않았어요. 미국야구를 경험했다는 것 정도로 만족하기로 했죠.”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롯데에 입단했다. 그의 진가가 발휘된 건 롯데 입단 2년 차였던 2008년이었다. 최향남은 팀 사정상 임시 마무리를 맡았고, 마무리 임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롯데는 조만간 FA가 되는 최향남에게 거액의 계약안을 제시했다. 4년 16억 원의 나쁘지 않은 조건이었다. 그러나 최향남은 그 제안을 받아들이는 대신 “미국야구에 도전할 수 있게끔 날 조건 없이 풀어달라”고 요청했다.
“KIA 입단 때처럼 롯데 입단 때도 ‘국외리그 진출 시 조건 없이 풀어달라’는 조항을 달았어요. 롯데에서 흔쾌히 동의했죠. 그런데 막상 2년 뒤 떠나려고 하니까 구단에서 난색을 표했어요. 그때 우여곡절이 좀 있었죠. 지금 생각하면 롯데 입장에서 제가 그만큼 필요한 선수로 보였던 거 같아요. 하지만, 그땐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어요. ‘지금 미국에 다시 가지 않으면 영원히 후회할지 모른다’는 생각밖엔 없었으니까요.”
그의 말마따나 우여곡절 끝에 그는 2009년 포스팅액 101달러를 받고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떠났다. 그리고 세인트루이스에 방출된 후, LA다저스 산하 트리플A팀인 앨버커키 아이소톱스로 소속을 바꿔 그해 트리플A에서 9승 2패 평균자책 2.34로 맹활약했다.
“그때 공이 정말 좋았어요. 속구 구속은 시속 140km 초·중반대였지만, 타자들이 그 공을 치지 못했어요. 그때 우리 팀 포수가 A.J 엘리스였어요.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초이, 네 공은 라이징패스트볼이라, 내가 타자라도 정말 치기 어려울 거 같다’고요. 구단에서도 메이저리그 승격을 고민하는 거 같았어요. ‘이번 주 투구를 보고 결정하겠다’는 말을 여러 번 했으니까요. 성적만 보면 빅리그로 승격될 법도 했는데…나이도 나이지만, 속구 구속이 만족스럽지 못했던 게 구단 입장에선 부담이었던 거 같아요. 결국 그때도 빅리그 승격에 실패했습니다.”
2010년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온 최향남은 원소속팀 롯데와 입단 협상을 벌였다. 최향남은 다시 한번 ‘조건없는 국외리그 진출 보장’을 요구했다. 하지만, 롯데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최향남은 롯데에서 1년을 뛰고서 2012년부터 2013년까지 KIA 유니폼을 입었다. 그것으로 그의 프로야구 인생은 사실상 끝을 맺었다.
고양 원더스 시절의 최향남(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2014년 독립구단 고양 원더스에서 현역 연장을 이어간 최향남은 이때까지 미국 진출 꿈을 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43살의 노장 투수를 받겠다는 미국 구단은 나오지 않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원더스가 해체하며 최향남은 은퇴 위기에 몰렸다. 하지만, ‘풍운아’ 최향남은 자신의 야구인생을 여기서 끝내고 싶지 않다. 그가 택한 길은 오스트리아행이었다.
“지금은 롯데 코치로 있는 후배 이용훈이 제 오스트리아행을 알아봐 줬어요. ‘오스트리아 야구팀 감독이 롯데에서 통역했던 친구’라고 하더군요. 호주도 알아봤지만, 제가 알아볼 땐 이미 시즌 중이라, 참가하기 힘들었어요. 잠시 고민하다가 ‘돈 주고도 못하는 유럽 여행, 이때 하지 언제 하냐’는 마음으로 오스트리아로 떠났습니다(웃음).”
올 4월에 개막한 오스트리아 세미프로리그에서 최향남은 ‘다이빙 덕스’ 유니폼을 입고 뛰었다. 말이 세미프로지, 오스트리아 리그는 한국으로 치면 사회인야구에 가까웠다. 6개 팀이 홈-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치르는 건 프로와 비슷했지만, 팀당 20경기를 치르고, 주말에만 경기가 열린다는 점에선 영락없는 사회인야구리그였다. 실력이 떨어지는 건 두말할 나위 없었다.
“오스트리아 리그는 더블헤더가 기본이에요. 첫 경기는 저 같은 외국인 선수는 타자로만 뛸 수 있어요. 두 번째 경기에만 투수로 뛸 수 있죠. 그 통에 타자 경험을 많이 쌓을 수 있었어요. 문제는 리그 수준인데 아무래도 정식 프로선수들이 아니고, 다 자기 직업이 있는 사람들이 선수로 뛰어선지 실력이 좀 떨어지는 편이에요. 물론 힘이 좋아 강속구는 잘 받아쳐요. 그런데 변화구를 던지거나 제구가 잘 된 공을 던지면 제대로 받아치질 못해요. 덕분에 한국에서 거의 맛보지 못했던 완투, 완봉을 밥 먹듯이 했습니다(웃음). 특히나 한국에선 20, 30개만 던져도 팔이 아팠는데 오스트리아에선 기본 100구, 많게는 150구 이상 던져도 끄떡 없었어요.”
최향남의 맹활약으로 다이빙 덕스는 ‘2015 오스트리아 챔피언 시리즈’에서 대망의 우승컵을 안았다. 최향남은 팀 우승과 함께 MVP에 오르는 겹경사를 누렸다.
“리그 수준이나 선수들 실력은 떨어져도 오스트리아 선수들의 승리 욕망은 그 누구보다 강해요. 관중도 적을 땐 10명 남짓하지만, 관전 집중력은 10만 관중 못지않았습니다. 원체 초집중하면서 관전하시니까 저도 모르게 허슬 플레이가 나오더라고요(웃음). 하루는 타자로 나와 베이스를 도는데 슬라이딩을 잘못해서 십자후방인대가 찢어졌어요. 만약 오스트리아 야구팬들이 건성으로 관전했다면 슬라이딩은 고사하고, 완투, 완봉도 하기 힘들었을 겁니다.”
최향남의 열정에 감탄한 오스트리아 선수들은 어떻게든 그에게 야구를 배우려 노력했다. 최향남도 아낌없이 자신의 경험과 노하우를 전수해줬다.
“처음엔 가벼운 마음으로 갔던 오스트리아였어요. 대우도 원룸 하나 제공받고, 월급 50만 원을 받는 조건이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정말 가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오스트리아에 간 덕분에 좋아하는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고, 새로운 사회와 문화도 경험했어요. 야구 실력이 좀 떨어지는 선수들에게 제가 아는 걸 전달할 수 있던 것도 행운이었다고 봐요. 무엇보다 거기서 꾸준히 투구해선지 더 몸이 건강해지고, 투구감도 향상된 거 같아요. 지금 프로야구에서 현역으로 다시 뛰라면 당장 뛸 수 있는 몸을 갖췄다고 자부합니다(웃음)”
오스트리아리그에서 던질 때의 최향남. 속구 구속은 시속 130km 초중반대지만, 제구와 타자를 상대하는 마운드 운용능력은 더 좋아졌다는 게 그와 그를 잘 아는 야구인들의 한결같은 평이다(사진=다이빙 덕스)
# 내년이면 45살인 최향남은 인생의 많은 기회를 놓쳤다. 부자 될 기회 역시 몇 번이고 제 발로 걷어찼다. 그를 잘 아는 이들이 “세계 야구사에서 저렇게 사서 고생한 야구인도 없을 것”이라고 입을 모아 말하는 것도 과장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그는 “난 인생의 기회를 놓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주변에서 ‘인생의 기회를 놓쳤다’는 말씀을 자주 하시는데. 글쎄요. 전 오히려 인생의 기회를 자주 잡았다고 생각해요. 남들은 한 번도 경험하기 힘든 미국야구를 전 두 번이나 경험했어요. 빅리그 승격 기회를 두 번이나 잡았던 겁니다. 그 기회가 성공으로 이어지지 못한 건 아쉽지만, 어쨌거나 전 다른 야구인보다 제 꿈에 한발 더 다가설 기회를 잡았던 거예요. 만약 그런 기회조차 잡으려 노력하지 않았다면 전 지금쯤 꽤 후회하며 살고 있을 겁니다. 꿈을 이루진 못했지만…최소한 전 후회는 없어요.”
맞는 말이다. 최향남은 이미 12년 전이던 2003년, 모든 걸 잃은 사내였다. 그해 어깨수술을 받았을 때 최향남의 야구인생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야구계 역시 그의 재기를 믿지 않았다.
“2003년 이후 제 야구인생은 덤으로 사는 인생이었어요. 다른 분들은 절 보고 ‘쟤는 왜 저렇게 튀어’ ‘그냥 현실에 만족하고 살지, 지가 뭐가 잘났다고’ ‘네 나이에 메이저리그는 뭔 메이저리그’ 하셨을 테지만, 전 그때마다 ‘덤으로 사는 인생, 꿈이라도 이뤄보자’는 심정으로 도전했어요. 저라고 왜 돈이 싫고, 안정이 싫었겠습니까. 다만, 전 돈이나 명예보단 꿈에 더 우선 가치를 뒀을 뿐이었어요. 네, 다른 분들과 추구하는 가치가 달랐을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최향남은 전남 영암에서 다음 인생 항로를 고민 중이다. 그는 지금 양 갈래길에 서 있다.
“존경하는 목회자 한 분이 계세요. 그분이 하루는 ‘형님, 혹시 여건이 되신다면 재능 기부 좀 부탁드립니다’하는 거예요. ‘무슨 재능기부요?’했더니 중남미 아이티에 고아들이 그렇게 많다는 거예요. 그 아이들 대부분이 야구를 좋아한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제가 아이티에 가서 아이들에게 야구를 가르치면서 그 아이들의 꿈을 키워달라는 거였어요. 생각해 보니까 무척 보람되고 값진 경험이 될 거 같더군요. 그래 일단 ‘알았다’고 했습니다. 지금 같아선 내년엔 아이티에 있지 않을까 싶어요(웃음).”
나머지 한 길은 ‘마지막 현역 복귀 노크’다. 최향남은 이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현역생활의 마지막을 정리할 수만 있다면 조건이나 연봉도 필요 없습니다. 정말 마지막으로 야구 유니폼 한번 입고서 한 시즌을 뛰고 싶어요. 실력이 안 돼 중간에서 방출되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 솔직한 심정으론 제 마지막은 제 손으로 정리하고 싶어요. 물론 그럴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겠지만….”
그와 헤어질 즈음, 최향남은 담담한 표정으로 기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박 기자, 이제 내가 날 놔줄 시간이 된 거 같아….”
그 말을 듣자니 그는 후자보단 전자의 길을 선택한 듯싶었다. 그게 더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모르겠다. 그가 어떤 결정을 할지. 중요한 건 그는 야구를 놔줄지 몰라도 야구가 그를 놔줄 일은 없을 거 같다는 것이다. 최향남이 어떤 길을 택하든 그의 결정에 박수와 응원을 보낼 생각이다.
기사제공 박동희 칼럼
기사입력 2015.12.28
출처: http://sports.news.naver.com/kbaseball/news/read.nhn?oid=295&aid=00000014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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