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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외산면 마을유래-부여군 마을 유래(1개읍 15개면 중)[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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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수리(萬壽里)
서쪽으로는 만수산이 우뚝 서 있으며 그 준령마다 산과 들이 조화롭게 어울린 지역이다. 인류가 정착하기 시작한 것은 고려 초기로 추산하며 처음에는 불승과 함께 무량사(無量寺)가 건립되어 대중과 호흡이 잘 맞았다는 곳이 또한 만수리 지역이다. 조선시대 초기에 접어들어서는 고려말기부터 침투해 오는 왜구의 침입으로 차츰 번화스럽던 마을이 황폐해 갔으며 더구나,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불교에 대한 소외로 무량사마저 쓸쓸한 절간으로 변해갔다 한다. 그러나 조선시대 초기 세종 때에 이르러 연주현씨의 정착과 이어 남평문씨, 창원황씨가 정착하면서 더욱 번창하기 시작하였다고 전한다. 행정리로 임수대(臨水臺), 동구(洞口) 마을이 있다.
■ 임수대 마을
임수대라 함은 수신리 성태산(星台山)과 가덕리(佳德里) 월명산(月明山), 만수리 만수산에서 수원이 발원하여 이 마을을 경유하여 웅천면(熊川面) 만장포(萬長浦)로 흐르고 있어 물이 쉬었다 가는 곳이라 하여 임수대 마을이라 칭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1918년경 전장리에서 면사무소청사가 이전해 와 면소재지로 성장해오고 있다. 외산시장(外山市場) 역시 그 무렵에 수신리 무수(舞袖)마을에서 만수리로 이전하여 지금도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현재는 304호에 948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반으로는 북두머니, 개축이, 시장입구, 윗장터, 아랫장터가 있다.
■ 동구마을
신라말기에 범일국사(梵日國師)가 무량사를 창건하였는데, 이 사찰이 만수리 임수대 마을에서 동구마을까지 건립되어 있었으나 1598년경에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무량사에 침입하여 사찰을 전소시켰다 한다. 그후 1620년경 창원황씨가 입촌하여 촌락을 이루었으며 무량사명(無量寺名)을 따라 무량마을이라 칭하였으나 1914년 군폐합으로 부여군 외산면 만수리 동구마을로 편입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현재 가구수는 75호에 206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반으로 부둣골, 무량이 있다.
70년대 초부터 대보탄광이 성황을 이루어 150세대 460명의 인구가 거주할 정도로 지역경제의 성황을 이루기도 하였으나 95년에 폐광되어 인구가 줄고 지역경제도 침체되었다.
복덕리(福德里)
본래 복이 많은 사람들이 정착해서 기름진 땅을 일구어 넉넉한 생활을 다졌다는 의미에서 복덕동(福德洞)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유래를 가지고 있으며 파평윤씨가 입촌하여 촌락을 이루었고 현재는 청주한씨의 집성촌으로 되어 있다. 본래 홍산군(鴻山郡) 외산내면(外山內面)의 지역으로서 복덕골 또는 복덕동이라 칭하다가 1914년 군폐합에 따라 복동리(福東里)와 복서리(福西里)를 병합하여 복덕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면적은 2.35㎢이고 가구수는 46호에 139명이 거주하고, 98년에는 복덕리 앞 하천이 청정하천으로 지정(충남도)받기도 하였으며 한 마을에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이 5명이 배출되기도 한 선생님 마을이기도 한다. 반으로 윗말 아랫말이 있다.
장항리(獐項里)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했으며, 조선시대 홍산현 외산면(鴻山縣 外山面)의 지역으로서 노루목고개 아래에 마을이 있으므로 노루모기 또는 장항(獐項)이라 부르던 곳으로 마을의 형성은 경주김씨의 정착부터라 한다. 조선시대 말기를 전후하여 나주최씨, 남평문씨, 경주이씨가 정착하여 현재는 주 구성원으로 되어 있다.
한때는 사기소가 있었으며 서낭제를 크게 지내기도 한 장항리는 사람들이 오래 전부터 전통을 이으고 살았다는 표시로 팽나무 등을 심어 수령을 자랑하는 곳이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노루목장과 목항을 따서 장항리라 하고, 부여군 외산면에 편입되었다. 외산초등학교가 있으며 면적은 5.12㎢이고 72가구에 인구는 245명이다. 뜸으로는 지형이 노루목같이 생겼다는 노루목고개 그 아래에 있는 마을이라 노루모기, 장항(獐項), 옛날 독을 만드는 도요지가 있었다 해서 독비짓골, 동쪽으로 새로 생긴 마을이라 새전밭 등의 뜸이 있다.
화성리(花城里)
백제때 대산현에 속했고 조선시대는 홍산현 외산면 지역으로서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조치리(鳥峙里), 마동(馬洞), 신성리(新城里), 화암리(花岩里), 전장리(前庄里) 일부를 병합하여 화암과 신성의 이름을 따서 화성리라 하였고, 부여군 외산면에 편입하였다.
화성리에 처음 정착한 씨족으로는 김해김씨(金海金氏)로 추정되며 절골에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89호로 지정된 고려 때의 탑으로 오층석탑(五層石塔)을 개인이 절터에 복원하였고 화엄사(花嚴寺)라는 개인 불당을 세웠다.
자연마을로는 화암, 마동, 조치 마을이 있으며 면적은 9.52㎢이고 115가구로 인구는 311명이다. 뜸별로는 항상 일곱 가구가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해서 거칠이라 부르다가 변하여 것칠, 월하산 아래 마을이 있으므로 달래산, 달하산, 월하산이라 부르고, 마동 마을은 마을중심으로 구들골, 질마재, 오양골, 통매 등으로 부르는데 옛날 지관이 이르기를 구들골의 말이 먹이를 먹는 구두이고, 오양골은 말이 잠자는 장소이고, 통배는 먹이를 나르는 통과 같은 형태이며 질마재는 말이 먹이를 먹고 달려가는 형국이다. 즉 말과 인연이 있는 마을이라 마동, 꽃 같은 바위가 장엄하게 서있는 마을이라 화암이라 부른다.
전장리(前場里)
북쪽에서 내려오는 계곡의 들이 이곳에 이르러 넓은 들을 조성하고 있다 하여 전장, 전장말, 전재(前在)라 하였다는 설과 산아래 넓은 들 위쪽으로 마을이 있다 해서 전장 전재라 하였다는 설이 있다. 고려 때부터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하며 한양조씨, 김해김씨가 정착하였다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옥산리(玉山里), 이정리(梨亭里)를 병합하여 부여군 외산면에 편입하였다.
경주김씨가 설촌하였다는 전장마을은 1918년 만수리로 이전하기까지 면사무소가 있었으며, 백옥산밑이라 하여 옥산(玉山)마을, 옛날 큰아그 배나무(신배나무)가 정자를 이루었다 해서 이(梨)와 정(亭)을 딴 이정(梨亭)마을이 있다.
뜸별로는 벌판에 자리한 뜸을 벌뜸, 옛날에 신배나무가 있다고 해서 신배렁이, 이정이 변하여 씀부쟁이, 백옥산(白玉山) 아래에 마을이 있다 해서 옥단, 산소가 많이 있다 해서 산소말, 산직이가 살았다 해서 산직말, 산정말, 사기점이 있었다 해서 사기점, 뒷골짜기에 우물이 있는데 수원이 좋고 물이 차서 약샘으로 통하여 뒷골샴이라 부른다.
옻오르는데 특효가 있다는 샘물이 나오는 옻샘들의 뜸이 있으며, 리의 면적은 3.01㎢이고 100가구에 인구는 309명이다.
삼산리(三山里)
서쪽으로는 보령시(保寧市) 성주면(聖住面)과 경계를 이루고 외산면의 북단에 위치한 삼산리는 일찍부터 도공(陶工)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던 곳이다. 삼산리(三山里) 피쟁이 부근에는 그릇을 굽는데 필요한 진흙이 많이 출토되는 곳으로 토기를 제외한 고려청자(高麗靑瓷), 분청백자를 굽는 데에는 아주 질 좋은 흙이 출토되는 곳이라 한다. 경주김씨가 입촌하여 촌락을 이루었고 조선말기는 홍산군 외산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하수리, 회동을 병합하여 삼산리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면적은 4.51㎢이고 39호에 119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반으로는 회정골, 안회정골이 있다.
1997년부터 산촌종합개발사업이 추진되어 소득증대 기반사업(종합회관신축, 기계화경작로포장)을 추진하여 살기 좋은 산골 마을로 변화하고 있다.
비암리(飛岩里)
남동쪽으로 해발 465m의 감봉산을 중심으로 높은 산의 준령이 남북쪽으로 웅장한 모습을 드러낸 그 서쪽으로 낮은 지대에 마을은 위치한다. 옛날부터 명당자리가 많다 하여 배미실, 용수말, 하비마을 주변에는 지관들이 수없이 드나들었으며 앞으로 명인이 탄생할 곳이라고 풍수인(風水人)들이 넘나보는 지역이라 한다. 1730년경 창원황씨, 신천강씨, 배천조씨가 들어오면서 마을이 형성되었고, 그 전 조선시대 세조 때 전주이씨가 정착하였다고 하니 마을 형성의 처음이 아닌가 추측된다. 조선시대 초기에는 홍산현 외산면 지역이고 말기에는 홍산군 외산내면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때 주암리(舟岩里), 하비리(下飛里), 용수리(龍水里), 저동(苧洞), 일부를 병합하여 하비와 주암의 이름을 따서 비암리라 부르고 외산면에 편입되었다.
뜸별로는 옛날에 마을 앞에 큰 냇물이 있었고 냇가에 바위가 있어 배를 매었다 한다. 배매석 바위가 있던 마을이라 주암, 주암리(舟岩里), 배미실, 마을에 용이 승천한 우물이 있다 해서 용수말, 용수동, 용수리 등의 마을이 있다.
리의 면적은 2.25㎢이고 100가구에 인구는 295명이 거주하고 있다.
지선리(芝仙里)
조선시대 참나무가 많은 지역이라 숯이 유명하였고 백자(白磁)가 생산되었다 한다. 교하노씨와 여산송씨 그리고 전주이씨가 입촌하여 촌락을 이루었고, 본래 홍산군 외산내면의 지역인데 1914년 군폐합에 따라 상비리, 장선리(長仙里), 지단리(芝丹里), 저동 일부를 병합하여 지단(芝丹)과 장선(長仙)의 이름을 따서 지선리(芝仙里)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70년대 초반부터 우량광산이 성황을 이루어 95년까지 지역경제를 활성화하는데 일익을 담당하였다.
면적은 3.05㎢이고 가구수는 48호에 132명이 거주하고 있고 저동, 지다네 상비가 있다. 장수하는 사람이 많아 장선(長仙)마을, 모시를 많이 재배하여 모시울, 모새골, 저동, 마을 주변에 지초가 많은 안쪽 마을이라 하여 지단내(芝丹內) 마을이 있다.
문신리(文臣里)
조공산과 감봉산 아래 첩첩산중에 아늑한 지역에 위치한다. 구전에 따르면 백제시대 때에 아홉 신하가 피난하여 살았다 해서 구신이라 부르는 마을이 생겼다는 전설이 있다. 조선시대 홍산현 내산면 지역으로 해주오씨가 정착을 하고 전주추씨가 촌락을 이루고 마을을 형성하여 나갔다.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구신리(九新里), 문상리(文祥里), 상수리(上水里), 일부를 병합하여 문상, 구신의 이름을 따서 문신리라 하여 부여군 외산면(外山面)에 편입하였다.
마을의 면적은 3.03㎢이고 90가구에 인구는 258명이 거주하고 있다. 문상 마을은 선비들이 내일을 위해 은거한다는 문봉산 아래에 있는 마을로 글을 읽고 농사일을 하며 백성을 깨우치는 선비가 심신을 닦는 지역이라 해서 문상마을이라 불리는 마을이다.
수신리(水新里)
외산면의 최북단에 위치해서 북쪽으로 해발 620m의 성태산을 경계로 보령시 청라면과 청양군 남양면과 접하고 있는 수신리는 산과 들과 계곡이 잘 조화를 이룬다 해서 유인(儒人)들이 신성지로 손꼽기도 하고 풍류객이라기보다 조용한 지역에서 안주를 바라는 사람들이 한번 정착하고는 떠나지 않았던 특이한 조건이 있는 지역이다. 조선시대 홍산현 외산면이었으나 후에 외산내면에 속했다. 전주이씨들의 정착과 함께 마을이 형성되었다 하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상신리와 상수리 일부를 병합하여 상수와 상신의 이름을 따서 수신리라 하고 부여군 외산면에 편입하였다.
면적은 2.97㎢이고 69가구에 인구는 189명이다.
사람들이 정착하여 뿌리를 내린다는 뜻에서 신근(新根)마을이 있고 파평윤씨가 많이 사는 마을로 뒷산의 형국이 마치 신선이 춤추는 형상이라 무수(舞袖) 또는 무술이라는 마을이 있다. 70년대부터 95년까지 탄을 캐는 동명탄광이 성황을 이루었고 1944년 설립된 무술초등학교가 1999년 폐교되는 아쉬움도 남아 있다. 또한 옥가실에는 수령 4~5백년된 희귀한 소나무가 있다.
반교리(盤橋里)
백제 때는 대산현에 속하였으나 그 후 홍산권에 속하는 지역이고 조선시대는 홍산현 내산면이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손대리(遜臺里) 일부를 병합하고는 이곳에 널판으로 놓은 다리가 있다 하여 판교(板橋)라 부르다가 반교라고도 불렀는데 그 이름을 따서 반교리라 하고 부여군 외산면에 편입하였다.
마을의 면적은 4.02㎢이고 86가구에 인구는 229명이다. 마을에 금반형(金盤形) 명당이 있다 해서 금반형마을, 마을에 돌이 많아 도팍골, 옛날에 배나무가 많아 배나무골 등이 있으며, 1934년에 개교하여 1999년에 폐교된 반교초등학교가 세월의 무상함을 일깨운다.
가덕리(佳德里)
백제 때부터 홍산의 문화권에 속했으나 고려시대 말기부터 정치적 변화로 은둔하는 씨족이 자리를 정했다 하나 정착하지 못하였고 마을형성은 1400년대 조선 태종 때로 추측한다. 1700년대 파평윤씨들이 정착하면서 마을형성이 이루어졌다. 조선시대 홍산현 내산면 지역으로 나무가 많아서 나무를 이용하여 나무바가지(가리박)를 가공하여 파는 집이 있었으므로 가리점골 또는 가리정골에 이어 가덕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손대리(遜垈里), 손사리(遜沙里) 일부를 병합하여 가덕리라 하여 현재에 이른다. 면적은 4.07㎢이고 가구수는 42호에 123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조선시대 사화에 몰린 한 선비가 정착하여 땅을 일구고 살았다 하여 손대(遜臺), 아무리 어려워도 겸손을 잃지 않는 선비가 처음 낙향한 마을이라 하여 손사(遜沙)라고 불리는 마을이 있다.
갈산리(葛山里)
백제 때는 대산현 지역이었으나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고려시대 중기로 추측된다. 조선시대는 홍산현 내산면 지역이었다. 마을에 꾀깔봉이라는 산이 있고 그 아래 마을이 형성되었으므로 그 지명을 꾀까리 또는 고갈(高葛), 갈산(葛山)이라고 불렀다. 정착한 씨족으로는 고령박씨, 경주김씨, 해주오씨가 전해져 오며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에 내대리(內垈里)를 병합하여 갈산리라 해서 부여군 외산면에 편입되었다. 현재 갈산리의 면적은 3.15㎢이고 98가구에 인구는 313명이고 고갈 마을과 내대 마을이 있다.
참고문헌
최문휘. 1992. 『여기가 부여다』
출처:부여군지 제1권-부여의 지리<부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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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부여군 마을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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