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빨래와 빨래집게에 대한 시모음 ]
※ 빨랫줄 / 서정춘
그것은, 하늘 아래
처음 본 문장의 첫 줄 같다
그것은,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길게 당겨 주는
힘줄 같은 것
이 한 줄에 걸린 것은
빨래만이 아니다
봄바람이 걸리면
연분홍 치마가 휘날려도 좋고
비가 와서 걸리면
떨어질까 말까
물방울은 즐겁다
그러나, 하늘 아래
이쪽과 저쪽에서
당겨 주는 힘
그 첫 줄에 걸린 것은
바람이 옷 벗는 소리
한 줄 뿐이다.
※ 빨랫줄 / 이제향
늙은 어머니 가슴처럼
마당 한 가운데 축 처진 빨랫줄 하나
지나가는데 목이 턱 걸린다
저승의 문턱이 이렇게 가까울 줄이야
선 하나에 몸뚱이가 금세 둘로 나뉜다
지상을 분할하는 수평의 겨냥
목젖까지 토해내듯 켁켁거리는데
집게 끝에서 마주친 육십 어머니의 미소
순간, 바지랑대를 살풋 넘어
빨랫줄에 대롱 걸리는 맑은 껍데기 하나
※ 파란만장 / 황지우
율도국에 가고 싶다
내 흉곽의 江岸을 깎는
波瀾萬丈
물결 하나가
수만 겹의 물결을 데리고 와서
나의 애간장 다 녹이는
조이고 쪼이는
내 몸뚱어리 빨래가 되고
오 빨래처럼
屍身으로 떠내려가도
저 율도국으로 흘러가고 싶다
※ 오후 1시의 빨랫줄 / 최영랑
허공의 말을 담는다
바지랑대가 팽팽해진다
구름은 빌딩 숲 너머에 있고 나비의 날개가 가벼워지는 시간
나는 빨랫줄에 햇살을 넌다
옥탑방 지붕과 그물망 속 수세미꽃과 옆집 창문에서
반사되는 바람과 함께 나는 건들거린다
조였던 날개가 헐거워졌다 선 위에 나열된 어제의 시간들이 흔들린다 사라진다 나는 햇빛을 삼키며 바람의 날개를 단다 풍경이 넓어지고 초인종 없는 허공이 자유롭다 나는 농담처럼 가벼워진다
나는 나의 그늘을 넌다
이탈을 꿈꾸는 내 언어들이
우기에서 건기로 건너가는 길목에서처럼
경계 허물어져 한 줄 문장으로 흔들린다
수세미꽃이 피었다 지는 사이
평상 그늘과 비올라 보라의 간격이 좁혀지는 사이
나의 몸통과 다리와 발들이 새로운 우주로 채워져 간다
젖은 말과 얼룩진 무늬들이 제 속도를 찾아간다
※ 빨랫줄 / 유은정
하늘에 고민 하나 널어놨더니
바짝 말라 사라져 버렸다
아쉬움도 하나 널어놨더니
슬며시 바람이 가져갔다
내 마음도 널어보았더니
사랑비가 쏟아지더라
※ 빨래 / 윤동주
빨래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이야기하는 오후,
쨍쨍한 7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달린다.
※ 빨래집게 / 한상순
난
입이 있어도
누굴 흉보지 않아
누가 뭐래도
아무 때나 입을 열지 않지
꼭 다문 입
빨랫줄에
빨래가 널리면
그 때,
내 입은 번쩍 열리게 돼
그리고 덥석 문 빨래
함부로 뱉지 않지
※ 빨래를 하십시오 / 이해인
우울한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맑은 날이
소리내며 튕겨울리는
노래를 들으면
마음이 밝아진답니다
애인이 그리운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물 속에 흔들리는
그의 얼굴이
자꾸만 웃을 거예요
기도하기 힘든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몇 차례 빨래를 헹구어내는
기다림의 순간을 사랑하다 보면
저절로 기도가 된답니다
누구를 용서하기 힘든 날은
빨래를 하십시오
비누가 부서지며 풍기는
향기를 맡으며
마음은 문득 넓어지고
그래서 행복할 거예요
※ 빨래 / 이해인
오늘도 빨래를 한다.
옷에 묻은 나의 체온을
쩔었던 시간들을 흔들어 빤다.
비누 거품 속으로
말없이 사라지는 나의 어
물이 되어 일어서는 희디흰 설레임이여
다시 세례 받고
햇빛 속에 널리고 싶은
나의 혼을 꼭 짜서
헹구어 넌다.
※ 빨래 / 김혜숙
빨래로 널려야지
부끄럼 한 점 없는
나는 빨래로 널려야지
피 얼룩
기름때
숨어살던 눈물
또 서툰 사랑도
이젠 다 떨어버려야지
다시 살아나야지
밝은 햇볕 아래
종횡무진 바람 속에
젖은 몸 다 말리고
하얀 나래 퍼득여야지
한 점 부끄러움 없는
하얀 나래 퍼득여야지
※ 바람 부는 날 / 이정우
빨랫줄을 보면
또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어릴 적 기저귀가
거기 널려 있습니다.
내 맘속에도 바람이 불고
어머니의 머리칼이 날립니다.
이렇게 바람 부는 날엔
빨랫줄의 빨래집게가 젤입니다.
빨래집게를 보면서
또다시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 빨래 / 윤한영
걸려있어야 할 최후의 정당한
까닭으로
여기 선상에 놓인 옷감들처럼
이토록 청명한 빛에
나도 펴고 털어 말려야할까
마지막 남은 허위와 위선의 물기까지
다 빠져나가기를 바라
나를 널어야할까
새하얀 속살같은 그 무지한 영혼만
집게에 남겨지도록
그리고 나부끼도록
온종일 어느 창조의 줄에든 걸려있고 싶다
※ 이분법에 대한 일상의 소견
/조하해
햇볕에 빨래를 내다 건다
햇살에 걸린 빨래들,
너무 오만하게 지쳐 섰던 영혼이
햇살에 오징어처럼
타 없어질 때까지
일광욕중이다
몸과는 사이가 나쁜 영혼에게
영혼이라는 말에 갇혀 영영 우울한 영혼에게
가을 하늘, 햇살에 걸린 빨래들에 섞이어
제 순수를 잃어버릴까,
잔뜩 겁먹은 영혼에게
개살궂은 사내처럼
간지럼 태우다
깔깔,
영혼도 웃다가 배를 움켜쥐고 자지러진다
웃다가 오줌도 새는 줄 모르고
눈물이 쏙 빠지고
혼이 달아난다
영혼에 영혼의 얼룩이 빠지고
영혼은 비로소 다른 것들과 구별되지 않고
평범해졌다, 깨끗해졌다
햇살 참 좋다
※ 빨래집게 / 다서 신형식
이를 악무는 것이
가장 멋진 일인 줄 알던 그가
젖은 그녀를 잡고 울먹인다
사랑은 저리 눈물로 시작되더라고
엉키고 설킨 시간들을 펄럭이며
휘청거리는 바지랑대에 그림자 짙게 걸리는 오후
그랬던가 보다
얼굴 마주하면 글썽이고 마는 그에게
고백이란 아픔이었던 거야
입벌리고 나면 이별이었을 거야
사랑도 봉오리 맺고 나면
벙어리로 지내야 하는 것인데
그러다 보면 꽃 피고
뽀송한 햇볕 영그는 것인데
오늘은 꽃무늬 팬티를 물고
그가, 웃고 있다
나도 불끈 봄을 물고
그 옆에 선다
꽃 피어 잎 질 때까지
이번에는, 입 다물고 있을 테야
※ 아내의 빨래공식 / 이기헌
아내의 빨래공식은 늘 일정하다
물높이 중간에 놓고
세탁 십 분 헹굼 세 번
탈수 삼 분 후에 다시 헹굼 한 번
그러나 간혹 공식이 파기될 때가 있다
남편 잘 둔 친구를 만났다던가
나의 시선이 그녀를 빗나갔다 싶은 날이면
아내의 빨래 법칙엔 밟아빨기가 하나 추가된다
그런 날이면 나는 거실에 앉아
아내가 세탁실에서 나오기만을 기다린다
잔소리가 어디서부터 터질 것인지
마음 졸이며 지켜보다가
거실을 정리하다가 하지도 않던 걸레질을 한다
가벼운 마음으로 퇴근하고 온 날에도
아내가 빨래하는 시간만 되면 늘 긴장한다
예정된 공식대로 세탁기가 돌아가면
그제서 오늘의 스포츠 뉴스를 본다
※ 빨래집게 / 박규리
빨래줄의 빨래를 빨래집게가 물고 있다
무슨 간절한 운명처럼 물고 있다
이리저리 흔들리다가
어느 더러운 바닥에 다시 떨어져 나뒹굴지도 모를
지상의 젖은 뭉뚱어리를 잡아 말리고 있다
차라리 이빨이 부러질지언정 놓지 않는
그 독한 마음 없었다면
얼마나 두려우랴 위태로우랴
디딜 곳 없는 허공
흔들리는 외줄에 빨래 홀로 매달려
꾸득꾸득 마르기까지
※ 세탁기 / 이동호
아내가 나를 세탁기에 넣고 돌리려 한다
아내의 완력에 빨래처럼 접히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무소불위한 잔소리의 권능에 못 이겨
끝내 구겨져 세탁기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세탁기 속에도 사계가 있다는 사실을
누가 알았을까
세탁기가 지구처럼 자전한다
몸이 바닥의 회전 날을 축으로 공전하는 동안
내 몸통 속에서 아름답게 꽃이 피고 지고
졸졸 시냇물이 흐르고
물거품이 해조처럼 밀려들 적마다
내 속으로 신호가 밀려와서 자라고
머리에서는 갈매기의 울음소리가 울리곤 했다
내 몸의 각질이 낙엽처럼 내 주변을 떠돌았다
시베리아 벌판을 고사목처럼 걸어다니기도 했다
아내가 원하는 내 부활은 어떤 모습일까
나는 젖은 아내의 명상 속을
섬처럼 둥둥 떠다니다가 곧 탈수될 것이다
햇볕 소용돌이치는 어느 베란다에서
말 잘 듣는 강아지풀처럼 뽀송뽀송
잘 건조될지도 모를 일이다
(이동호·시인, 경북 김천 출생)
※ 세탁기 / 김용삼
엄마는
기분이 울적할 때면
퍽퍽
빨래를 한다
오늘도 엄마는
아빠와 말다툼을 하고
쌩쌩
세탁기를 돌렸다
아빠 옷과 엄마 옷은
돌돌
껴안은 채
세탁기에서 나왔다
(김용삼·아동문학가)
※ 바람 부는 날 / 이정우
빨랫줄을 보면
또 어머니 생각이 납니다.
어릴 적 기저귀가
거기 널려 있습니다.
내 맘속에도 바람이 불고
어머니의 머리칼이 날립니다.
이렇게 바람 부는 날엔
빨랫줄의 빨래집게가 젤입니다.
빨래집게를 보면서
또다시 어머니가 그립습니다
※ 빨랫대 / 박소명
빨래야,
젖은 마음
내게 기대렴.
빛나는 햇살
푸르른 바람에
무거운 마음
천천히 날려 보내고
하이얀 마음만
보송보송 가지렴.
※ 다림질 / 김병욱
이른 아침
도로 공사가 한창입니다
울퉁불퉁한 길
반듯하게 펴 주고
잘 안 보이는 선
잘 보이게 만드는 공사
출근 시간 전
끝내야 하는 공사지만
일하는 사람은
엄마뿐
금방 공사를 마친
아스팔트처럼
모락모락 김이 나는 와이셔츠 입고
아빠가 출근합니다.
※ 빨랫줄에 행복을 널다 /허진년
일요일 오후
외출한 아내가 전화기로 지령을 내린다
세탁기 멈추었으면 빨래 좀 널어라
마누라 말 잘 듣는 것이 세상 공덕 중에 으뜸이라고 하니
달콤한 잠결에 들리던 규칙적인 회전음이 빨래 소리였구나
빗소리로 들리던 휘파람소리가 헹굼 물 빠짐 소리였구나
둔탁하게 베란다 창을 두드리던 소리가 탈수 소리였구나
뚜껑을 열자
손에 손잡고 씨름하듯이 허리춤을 부여잡은
식구들이 가장자리로 가지런히 잠을 자고 있다
그래, 서로의 등을 두드려서 하얗게 빛을 내었구나
따뜻한 가슴을 풀어서 세제를 녹였구나
가는 목덜미를 씻겨주며 말끔하게 헹구어 내었구나
아내의 좁은 어깨를 펴서 빨래줄 중앙에 편안하게 앉히고
주름진 내 다리통을 반듯하게 펼쳐서 가장자리에 세우고
매일 식구들 체면을 닦아주던 수건의 네 귀를 꼭 맞추어
가을 국화꽃 향기를 묻혀서 널어놓고
소파 깊숙이 몸을 낮추고 올려다보니
내가 아끼고 사랑하여 왔던 모든 것이 빨랫줄에 있다
※ 아버지의 런닝구 / 안도현
황달 걸린 것처럼 누런 런닝구
대야에 양잿물 넣고 연탄불로 푹푹 삶던 런닝구
빨랫줄에 널려서는 펄럭이는 소리도 나지 않던 런링구
백기 들고 항복하는 자세로 걸려 있던 런닝구
어린 막내아들이 입으면 그 끝이 무릎에 닿던 런닝구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개를 많이 져서 등판부터 구멍이 숭숭 나 있던 런닝구
너덜너덜 살이 해지면 쓸쓸해져서 걸레로 질컥거리던 런닝구
얼굴이 거무스름하게 변해서 방바닥에 축 늘어져 눕던 런닝구
마흔일곱 살까지 입은 뒤에 다시는 입지 않은 런닝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