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보시ㆍ지계의 대승적 전개
팔정도(八正道)를 통해 아집을 멸한 경계를 열반涅槃(nirvāṇa)이라 부른다. 그러나 그러한 열반에 안주한다면 그것을 진정한 아집의 소멸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렇게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아직도 집착함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대승(mahāyāna)불교는 이러한 의식에서 전개된 불교라고 할 수 있다.
그 최초기에 성립한(B.C. 1세기 경) 《금강경(金剛經)》은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일체중생을 열반에 들게 하지만 실로 한 중생도 열반에 든 자가 없다. 왜 그러냐면 보살에게 만일 아상(我相)ㆍ인상(人相)ㆍ중생상(衆生相)ㆍ 수자상(壽者相. 我執의 종류)이 있으면 보살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견지에서 대승불교는 선(善)ㆍ악(惡), 정(正)ㆍ사(邪), 득(得)ㆍ무득(無得) 등의 일체 분별망집을 타파할 철저한 공(空. 無我) 관(觀)의 실천을 제시한다. 이러한 공관의 실천은 궁극적으로 이 세계(此岸, 俗)를 초월하고 말 것이다. 그러기에 그것을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 prajñā-pāramitā)라고 부른다. 지혜[空觀]가 모든 분별을 넘어 피안(彼岸. 眞)에 도달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길을 행하는 사람이 대승보살(大乘菩薩. bodhisattva)이다.
그러나 보살은 반야바라밀다만을 닦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바탕으로 해서 다시 보시ㆍ지계ㆍ인욕ㆍ정진ㆍ선정의 다섯 바라밀도 함께 닦아야 한다. 이것을 육바라밀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육바라밀에서 우리는 다시금 강력한 사회윤리적 성격을 발견하게 된다. 육바라밀의 처음에 위치한 보시와 지계는 어디서 온 것일까? 업설에서 가장 적극성을 띤 선행은 보시와 지계임은 전술한 바가 있다. 이곳의 보시와 지계는 바로 그것을 계승한 것이 아닐까? 그러나 반야바라밀다를 바탕으로 하기에 그것은 무한한 윤리적인 깊이를 갖게 된다.
1)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보시는 업설에서 사무량심[慈悲喜捨]에 입각한 사랑[慈]의 발로였다. 그렇지만 상대방[福田]에서 무엇인가를 기대하는 바가 있다. 천상에 태어나는 업인이라는 것부터가 그런 뜻을 시사한다.
그러나 육바라밀 중의 보시는 어떤가. 철저한 공관(空觀)에 입각해 그런 자취를 전혀 찾을 수가 없다.
"보살은 법에 마땅히 머묾이 없이 보시를 행해야 하며", "시자(施者)ㆍ시물(施物)ㆍ수자(受者)의 셋이 공적(空寂)한" 지극히 순수한 보시여야 한다. 그래야만 무한한 복덕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금강경》
뿐만 아니라, 재시(財施)보다도 대승적 법시(法施)의 중요성이 크게 강조되고 있다.
"삼천대천세계를 칠보로 가득 채워 보시해도, 대승경전을 수지하고 남에게 설해 주는 것만 못할 것이다." 《금강경》
두려움[怖畏]으로부터 사람들을 구호하여 안심을 얻게 하는 무외시(無畏施)도 강조되고 《해심밀경 권4 지바라밀다품》 보시와 함께 애어(愛語)ㆍ이행(利行)ㆍ동사(同事)가 수반되는 업설의 사섭법(四攝法) 또한 대승보살의 적극적인 이타행으로 크게 선양되고 있음은 물론이다. 《마하반야바라밀경 권24, 四諦品》
2) 십선계(十善戒)
다음, 지계바라밀은 십선업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소품반야경(小品般若經)》에 "불퇴전의 보살은 스스로 십선을 행하며 남에게도 십선을 행하게 한다."고 설해져 있다. 보살의 길을 십지(十地)로 조직한 《십지경(十地經)》에서도 제2 이구지(離垢地)는 십선도를 행한다고 하는 것이다. 대승반야설이 철저한 공관으로 피안적인 진리를 추구하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사회윤리적인 십선업을 강조하고 있음은 무엇 때문인가? 사제 팔정도가 비사회적인 열반을 추구하면서도 강력한 윤리적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과 궤를 함께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_(())_ 출처 : <고익진 교수의 불교의 체계적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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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_()_
감사합니다. _()_ _(())_